<font color=green>[인물]선우 학원박사 84년 고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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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2-03 00:00 조회2,83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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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보다 생각이 앞섰다. 남들이 하나를 생각할 때 둘, 셋을 생각하며 살아 온 인물, 선우 학원 박사(84세)가 살아 온 세월들은 민족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그 동안 22권의 저서들(한미관계 50년사,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등 한글판으로 6권,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일본어판으로 2권 펴냈고 그리고 <20th Centry Korea, 1995> 등 14권의 영문판 저서 등을 출간해 온 학자이며 동시에 <미주이민 백년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살아 온 뒤안길을 돌아보며 그는 인생철학을 들려준다. "온 인류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바라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각 곳에서 전쟁이 터지고 살육행위들이 자행되어 온 피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민족만이라도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여 살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기도해 온 것이 나의 염원이며 신념이기도 합니다."
그의 바램은 소박하였지만 그의 생애는 수난의 역사였다. 1918년 2월2일 평남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평양서 북쪽으로 30리 거리)에서 태어난 선우 박사는 평남 부산보통학교, 평양숭인상업학교를 나와 1937년 도꾜로 건너가 아오야마 가꾸잉 대학(청산대학)에서 2년 동안 수업한 뒤 193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파사디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후 4년이 지난 1941년 캘리포녀 버클리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강사로 일하다가 시애틀 소재 워싱턴 주립대학으로 옮겨 이 대학에 최초로 코리아학과(Department of Korea Studies)를 설치(1943년)하고 1949년까지 교수로 일해왔었다. 그러던 중 1949년 가을 체코의 프라하에 있는 국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이곳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이 대학에서 최초의 박사가 된 인물이다. 학위를 받던 시기에 그는 우리 나라 역사와 일본사를 강의하는 기회도 가졌다.
선우 박사는 1950년 6월초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인이 거주하는 샌후란시스코로 돌아 온지 며칠도 되지 않은 6월10일께 부인과 함께 이민국 관리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 당했다. 당시 미 당국은 이미 코리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회고하는 선우 박사는 "내가 이북과 연결된 인물이 아닌가에 대해 집중 조사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 풀려 나왔다. 그는 다행히 지난 1945년 6개월 가량 억지로 미군에 근무 한 적이 있어 미국시민권으로 귀하 할 수 있었다. "동양인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이나 그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 필요한 정보나 미군정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에 살던 교민이나 유학생들을 특채로 뽑아서 남한 정보와 일본군 동태를 파악하는 일들을 맡기려고 20여명의 동포들을 동원하여 중앙정보부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기관(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보조직원들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알게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 때 받았던 시민권 때문에 이민국 연행 뒤 석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51년 미국학위를 취득하려고 스탠포드대학에 잠시 재학하던 시절에 샌후란시스코 크로니컬지 기자로 취직되어 3년간 일한 적도 있었다. 신문기자 급료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언론인 직업도 그만두고 1955년 부인과 함께 식품점을 운영하게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 4.19가 터지고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귀국을 결심하고 남한에 들어가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언론기관들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2년에는 영자신문 <코리아 리퍼부릭-지금의 코리아 헤럴드)의 주필로 활약 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선우진 사장에서 이후락 사장으로 갈리면서 이 직장에서도 떠나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이런 일 때문에 196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63년 한 감리교의 지도자를 만나 그가 추천하는 바람에 미조리센트럴 칼리지의 정치학교수로 취직이 되어 이 대학에서 26년 동안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89년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간에도 70년 초 뉴욕시립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겸임하는 일도 있었고 요즘에는 은퇴한 나이인 데에도 캘리포니아 어바인 소재 주립대학에서 한국역사를 가리키고 있는 중이라고 근황을 알려준다.
선우 박사는 진보적인 학자로 그리고 22권의 도서들을 펴낸 저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반 동포들은 그를 민주운동 또는 통일운동 원로로 알고 있다. 그는 따지고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민족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 한 인물이다. 아버지 선우 성호는 20살 되던 해 평안도에서 3.1만세 사건에 영향을 받고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성장해 왔다. 그의 어머니 황재호 또한 미군과 함께 진주한 소련군 점령시기(1945.12) 소련군에 붙잡혀 가서 55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는 슬픈 이야기도 들려준다.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70년대 초 김대중 납치사건 때라고 대답한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 고 임창영(전 유엔대사, 구출위원회 위원장), 이승만 (목사, 미국장로교회 총회회장, 미국교회협의회 회장역임, 구출위원회 총무)과 함께 김대중 구출운동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부위원장 직을 맡으면서 지금은 고인들이 된 미주서부지역의 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김정순 등과 함께 남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고 동시에 통일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선우 박사가 통일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에만 몰두할 때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9년 도꾜에서 열린 민족통일 심포쥼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가 80년에 다시 도꾜에서 열렸고 3회째 워싱턴 디씨에서 개최된 것도 선우 박사의 개척자적인 정신의 발로였다. 당시 고 송석중 박사, 김동수 박사가 동조하였고 남한 외무부 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내던 고 최덕신의 참여 등 60여명의 인사들이 함께 하였다. 반공세력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그후 로스엔젤레스에서 3차례, 그리고 다시 워싱턴 디씨에서 한차례 더 열려 미주 땅에서 진보적인 인사들이 주최하는 민족통일 심포쥼이 5번이나 지속될 수 있었고 유럽과 아시아지역에서 열린 행사들을 합치면 모두 15차례의 심포쥼 행사들이 성황리에 개최되어 왔다. 이 행사 주체들이 발행하는 논문집, <민족통일>은 매년 출판되어 해 내외 동포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다.
선우 박사는 또 심포쥼 자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1년 12월 <북과 해외 기독자들과의 대화>라는 행사를 조직하여 그 첫 행사를 비엔나에서 성사시켰다. 다음해에 헬싱키, 또 다시 비엔나 등으로 지속하다가 <북과 해외동포들과의 대화>로 발전시키는 한편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을 동원하여 이북의 인사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사업으로 확대하여 나갔다. 그는 특히 1994년 3월 미국의 호전정책으로 한반도에 긴장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칠 때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여 조미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활약한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카터 전 미대통령이 김일석 주석을 만나 조미문제를 토론하면서 평양에서 직접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일화를 들려주면서 지금도 잊지 못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돌이켜 본다.
그는 또 이북이 1995년 대홍수 사태로 곤경에 빠졌을 때 미국교계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승만 목사와 함께 미국교회협의회, 연합장로교회, 그리고 감리교 재단을 통해 각각 50만달러씩 총1백50만달러를 모금하여 지원해 주는 역할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여파가 국제연합을 비롯하여 남한, 일본 등지로 퍼져나가 어려운 동족을 돕는 일에 도움이 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선우박사는 잊지 못할 일들 중 하나라고 설명해 준다.
민족민주운동과 관련하여 운동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던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함께 하는 동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믿고 할 수 있는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과거 운동을 해 오면서 빨갱이라고 탄압 받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참다운 동지들은 나를 대신하여 방패가 되어 주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우 박사는 이어 "운동하는 사람들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신념과 목표가 있어야 꿋꿋이 투쟁하여 나아 갈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대담 마지막을 맺어준다.(끝)
*선우학원 박사는 지금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어바인에 거주하고 계신다. 문의 연락처: (949)726-9451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002.11.29]

산전수전 겪으면서 살아 온 뒤안길을 돌아보며 그는 인생철학을 들려준다. "온 인류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바라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각 곳에서 전쟁이 터지고 살육행위들이 자행되어 온 피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민족만이라도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여 살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기도해 온 것이 나의 염원이며 신념이기도 합니다."
그의 바램은 소박하였지만 그의 생애는 수난의 역사였다. 1918년 2월2일 평남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평양서 북쪽으로 30리 거리)에서 태어난 선우 박사는 평남 부산보통학교, 평양숭인상업학교를 나와 1937년 도꾜로 건너가 아오야마 가꾸잉 대학(청산대학)에서 2년 동안 수업한 뒤 193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파사디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후 4년이 지난 1941년 캘리포녀 버클리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강사로 일하다가 시애틀 소재 워싱턴 주립대학으로 옮겨 이 대학에 최초로 코리아학과(Department of Korea Studies)를 설치(1943년)하고 1949년까지 교수로 일해왔었다. 그러던 중 1949년 가을 체코의 프라하에 있는 국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이곳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이 대학에서 최초의 박사가 된 인물이다. 학위를 받던 시기에 그는 우리 나라 역사와 일본사를 강의하는 기회도 가졌다.
선우 박사는 1950년 6월초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인이 거주하는 샌후란시스코로 돌아 온지 며칠도 되지 않은 6월10일께 부인과 함께 이민국 관리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 당했다. 당시 미 당국은 이미 코리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회고하는 선우 박사는 "내가 이북과 연결된 인물이 아닌가에 대해 집중 조사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 풀려 나왔다. 그는 다행히 지난 1945년 6개월 가량 억지로 미군에 근무 한 적이 있어 미국시민권으로 귀하 할 수 있었다. "동양인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이나 그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 필요한 정보나 미군정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에 살던 교민이나 유학생들을 특채로 뽑아서 남한 정보와 일본군 동태를 파악하는 일들을 맡기려고 20여명의 동포들을 동원하여 중앙정보부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기관(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보조직원들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알게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 때 받았던 시민권 때문에 이민국 연행 뒤 석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51년 미국학위를 취득하려고 스탠포드대학에 잠시 재학하던 시절에 샌후란시스코 크로니컬지 기자로 취직되어 3년간 일한 적도 있었다. 신문기자 급료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언론인 직업도 그만두고 1955년 부인과 함께 식품점을 운영하게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 4.19가 터지고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귀국을 결심하고 남한에 들어가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언론기관들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2년에는 영자신문 <코리아 리퍼부릭-지금의 코리아 헤럴드)의 주필로 활약 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선우진 사장에서 이후락 사장으로 갈리면서 이 직장에서도 떠나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이런 일 때문에 196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63년 한 감리교의 지도자를 만나 그가 추천하는 바람에 미조리센트럴 칼리지의 정치학교수로 취직이 되어 이 대학에서 26년 동안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89년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간에도 70년 초 뉴욕시립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겸임하는 일도 있었고 요즘에는 은퇴한 나이인 데에도 캘리포니아 어바인 소재 주립대학에서 한국역사를 가리키고 있는 중이라고 근황을 알려준다.
선우 박사는 진보적인 학자로 그리고 22권의 도서들을 펴낸 저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반 동포들은 그를 민주운동 또는 통일운동 원로로 알고 있다. 그는 따지고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민족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 한 인물이다. 아버지 선우 성호는 20살 되던 해 평안도에서 3.1만세 사건에 영향을 받고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성장해 왔다. 그의 어머니 황재호 또한 미군과 함께 진주한 소련군 점령시기(1945.12) 소련군에 붙잡혀 가서 55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는 슬픈 이야기도 들려준다.

선우 박사가 통일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에만 몰두할 때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9년 도꾜에서 열린 민족통일 심포쥼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가 80년에 다시 도꾜에서 열렸고 3회째 워싱턴 디씨에서 개최된 것도 선우 박사의 개척자적인 정신의 발로였다. 당시 고 송석중 박사, 김동수 박사가 동조하였고 남한 외무부 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내던 고 최덕신의 참여 등 60여명의 인사들이 함께 하였다. 반공세력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그후 로스엔젤레스에서 3차례, 그리고 다시 워싱턴 디씨에서 한차례 더 열려 미주 땅에서 진보적인 인사들이 주최하는 민족통일 심포쥼이 5번이나 지속될 수 있었고 유럽과 아시아지역에서 열린 행사들을 합치면 모두 15차례의 심포쥼 행사들이 성황리에 개최되어 왔다. 이 행사 주체들이 발행하는 논문집, <민족통일>은 매년 출판되어 해 내외 동포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다.
선우 박사는 또 심포쥼 자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1년 12월 <북과 해외 기독자들과의 대화>라는 행사를 조직하여 그 첫 행사를 비엔나에서 성사시켰다. 다음해에 헬싱키, 또 다시 비엔나 등으로 지속하다가 <북과 해외동포들과의 대화>로 발전시키는 한편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을 동원하여 이북의 인사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사업으로 확대하여 나갔다. 그는 특히 1994년 3월 미국의 호전정책으로 한반도에 긴장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칠 때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여 조미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활약한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카터 전 미대통령이 김일석 주석을 만나 조미문제를 토론하면서 평양에서 직접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일화를 들려주면서 지금도 잊지 못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돌이켜 본다.
그는 또 이북이 1995년 대홍수 사태로 곤경에 빠졌을 때 미국교계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승만 목사와 함께 미국교회협의회, 연합장로교회, 그리고 감리교 재단을 통해 각각 50만달러씩 총1백50만달러를 모금하여 지원해 주는 역할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여파가 국제연합을 비롯하여 남한, 일본 등지로 퍼져나가 어려운 동족을 돕는 일에 도움이 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선우박사는 잊지 못할 일들 중 하나라고 설명해 준다.
민족민주운동과 관련하여 운동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던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함께 하는 동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믿고 할 수 있는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과거 운동을 해 오면서 빨갱이라고 탄압 받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참다운 동지들은 나를 대신하여 방패가 되어 주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우 박사는 이어 "운동하는 사람들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신념과 목표가 있어야 꿋꿋이 투쟁하여 나아 갈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대담 마지막을 맺어준다.(끝)
*선우학원 박사는 지금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어바인에 거주하고 계신다. 문의 연락처: (949)726-9451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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