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때문에 평화운동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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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4-26 00:00 조회1,5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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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하씨 어머니 김덕희 씨…딸 걱정 넘어 평화운동 참여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던 유은하 씨의 어머니 김덕희(54) 씨가 4월 17일 모처럼 말문을 열었다. 김 씨는 "딸은 이라크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내가 무엇을 잘했다고 나서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은하가 하는 일을 나도 돕고 싶습니다. 언론과 사람들은 전쟁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죽어 가는 사람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은하의 말처럼 이라크 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합니다"라며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혔다.
바그다드에서 평화·구호활동을 하고있는 유은하(29) 씨도 역시 다른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원들처럼 가족들과 이라크 행을 놓고 힘 겨루기를 했다. 세상의 부모는 다 같은 마음일까. 김 씨도 "아무리 뜻이 좋아도 왜 하필 내 자식이어야 하는가"라며 절규했다.
담석에 걸려 누워있는 아버지, 청소부 일로 매일 고단한 어머니에게 첫째 딸 유은하 씨의 대학원 졸업식은 모처럼 오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들은 첫째 딸로부터 이라크에 보내달라는 간청을 들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우리 기분을 띄워놓고 이라크에 가겠다고 말한 은하가 야속했어요. 왜 하필이면 네가 가야 하느냐며 따졌지만 은하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어요. 평소 워낙 신중하고 실수가 없었던 은하니까 믿음이 갔어요. 그래서 3일만에 허락했어요."
김 씨는 그 때 일을 떠올리며 다시 눈 주위가 붉혔다. 허락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었던 심정을 눈물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였다. 속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왜 딸을 사지에 보냈냐"며 책망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눈물로 지새운 날들이 늘어갔다. "밥상 앞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울었다"는 김 씨는 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잘 있다"는 유은하 씨의 연락을 받고서야 한 시름 놓았다.
김 씨는 이후 딸의 생사에 대한 걱정에만 머물지 않고 딸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은하가 TV에 나와 너무나 애절하게 이라크 인들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나 정작 도와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뜻이 있는 분들은 내 자식이 그곳에 갔다고,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모든 관심이 자신의 딸에게만 쏠렸던 김 씨였다. 그러나 차츰 차츰 딸이 증언하는 전쟁의 피해자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이라크 인들의 고난과 슬픔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자신도 이라크 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딸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딸을 멀리 보내고도 이렇게 아픈데,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낸 이들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은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약자를 돌보고 평화를 갈망하는 유은하 씨의 신념은 신앙이 다른 어머니에게도 전달되었다. 기독교인인 유은하 씨와는 달리 어머니 김 씨는 독실한 불교신자다. 그러나 김 씨는 딸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라크에 떠나는 것을 허락했고, 지금은 든든한 평화운동의 동역자가 된 셈이다.
김 씨는 시종일관 유은하 씨와 가족의 자랑이 되겠다 싶으면 말을 멈추었다. 대신 이라크 인들을 도와달라는 얘기와 젊은이들이 나섰으면 좋겠다는 제안, 베푼 은혜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슬림 가운데 참다운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이라크로 향한 딸을 위해 어머니는 부처님께 기도한다. "은하는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저는 부처님밖에 모르니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제 일이지요." 딸과 어머니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된 가르침인 "평화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벗"이었다.
취재 후기
한국에 오자마자 유은하 씨 집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한번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에 찾아갔을 때 이재영 간사로부터 소개를 받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평화활동과 구호활동에 도움이 되는 질문만 받겠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김덕희 씨는 언론에 대한 반감이 많아 보였다.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와 심정을 묻는 질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문을 지키고 있는 기자들이 한편으로 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자식들로 어떤 직업을 가질지 모르는데, 이러면 안 된다 싶어 취재에 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평화활동의 내용과 의미는 뒤로한 채 딸의 "무용담"이나 가족들의 무너진 심경만 좇기 바빴다며 김 씨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씨는 독실한 불교인이다. 그래서 딸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라크로 떠나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 씨는 "내가 할 일은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딸과 다퉈본 적이 없다고 했다. 딸이 어릴 때부터 서로의 신앙을 존중했다. 그는 부모라는 권위를 이용해 딸들에게 불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늘 기도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딸들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모습을 본 받았다. 가족들은 신앙이 달라도 늘 화목했다. 서로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 보다 나은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주재일 (2003-04-22 오전 10:15:41)
[출처;뉴스앤조이 03/04/22]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던 유은하 씨의 어머니 김덕희(54) 씨가 4월 17일 모처럼 말문을 열었다. 김 씨는 "딸은 이라크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내가 무엇을 잘했다고 나서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은하가 하는 일을 나도 돕고 싶습니다. 언론과 사람들은 전쟁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죽어 가는 사람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은하의 말처럼 이라크 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합니다"라며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혔다.
바그다드에서 평화·구호활동을 하고있는 유은하(29) 씨도 역시 다른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원들처럼 가족들과 이라크 행을 놓고 힘 겨루기를 했다. 세상의 부모는 다 같은 마음일까. 김 씨도 "아무리 뜻이 좋아도 왜 하필 내 자식이어야 하는가"라며 절규했다.
담석에 걸려 누워있는 아버지, 청소부 일로 매일 고단한 어머니에게 첫째 딸 유은하 씨의 대학원 졸업식은 모처럼 오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들은 첫째 딸로부터 이라크에 보내달라는 간청을 들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우리 기분을 띄워놓고 이라크에 가겠다고 말한 은하가 야속했어요. 왜 하필이면 네가 가야 하느냐며 따졌지만 은하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어요. 평소 워낙 신중하고 실수가 없었던 은하니까 믿음이 갔어요. 그래서 3일만에 허락했어요."

김 씨는 이후 딸의 생사에 대한 걱정에만 머물지 않고 딸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은하가 TV에 나와 너무나 애절하게 이라크 인들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나 정작 도와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뜻이 있는 분들은 내 자식이 그곳에 갔다고,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모든 관심이 자신의 딸에게만 쏠렸던 김 씨였다. 그러나 차츰 차츰 딸이 증언하는 전쟁의 피해자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이라크 인들의 고난과 슬픔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자신도 이라크 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딸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딸을 멀리 보내고도 이렇게 아픈데,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낸 이들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은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약자를 돌보고 평화를 갈망하는 유은하 씨의 신념은 신앙이 다른 어머니에게도 전달되었다. 기독교인인 유은하 씨와는 달리 어머니 김 씨는 독실한 불교신자다. 그러나 김 씨는 딸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라크에 떠나는 것을 허락했고, 지금은 든든한 평화운동의 동역자가 된 셈이다.
김 씨는 시종일관 유은하 씨와 가족의 자랑이 되겠다 싶으면 말을 멈추었다. 대신 이라크 인들을 도와달라는 얘기와 젊은이들이 나섰으면 좋겠다는 제안, 베푼 은혜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슬림 가운데 참다운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이라크로 향한 딸을 위해 어머니는 부처님께 기도한다. "은하는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저는 부처님밖에 모르니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제 일이지요." 딸과 어머니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된 가르침인 "평화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벗"이었다.
취재 후기
한국에 오자마자 유은하 씨 집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한번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에 찾아갔을 때 이재영 간사로부터 소개를 받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평화활동과 구호활동에 도움이 되는 질문만 받겠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김덕희 씨는 언론에 대한 반감이 많아 보였다.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와 심정을 묻는 질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문을 지키고 있는 기자들이 한편으로 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자식들로 어떤 직업을 가질지 모르는데, 이러면 안 된다 싶어 취재에 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평화활동의 내용과 의미는 뒤로한 채 딸의 "무용담"이나 가족들의 무너진 심경만 좇기 바빴다며 김 씨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씨는 독실한 불교인이다. 그래서 딸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라크로 떠나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 씨는 "내가 할 일은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딸과 다퉈본 적이 없다고 했다. 딸이 어릴 때부터 서로의 신앙을 존중했다. 그는 부모라는 권위를 이용해 딸들에게 불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늘 기도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딸들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모습을 본 받았다. 가족들은 신앙이 달라도 늘 화목했다. 서로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 보다 나은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주재일 (2003-04-22 오전 10:15:41)
[출처;뉴스앤조이 0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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