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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예술

2009년 제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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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3-09 18:41 조회2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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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렬차는 구배심한 산협길을 달리고있었다.

짙은 어둠만이 사위를 에워싸고있었다. 밖에서는 우중충한 산발들을 휘쓸어내리는 눈보라가 아우성쳤지만 방음이 잘된 렬차안에서는 고요만이 흘렀다.

겉으로 봐서는 요새 김종태전기기관차련합기업소에서 만드는 려객차방통들이 많이 나다니기때문에 새 방통들로 편성된 이 려객렬차가 다른 려객렬차와 별로 차이나는 점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려객차들은 모두 출발역이 규정되여있는데 이 렬차의 출발점은 나라의 각이한 곳이라는것이다.

이 렬차가 바로 이 나라 인민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부르는 인민행렬차이다. 흔히 다니는 렬차여서 철길에서 눈여겨보는 사람들도 많지 못했다. 지금도 평안북도의 어느 역을 떠나 평양에 왔다가 다시 자강도의 깊은 협곡을 달리는 이 렬차를 철길에 지켜서있지 않는 이상 누가 보겠는가.

김정일동지께서는 뒤짐을 지고 차창에 마주서계시였다.

군동작을 싫어하시는 그이께서는 뒤짐을 지는 법이 별로 없으시였다.

책상에 오랜 시간 마주앉아계셨든가 아니면 몹시 피곤할 때마다 그런 자세를 지으시였다. 출발지를 떠나서 무려 7시간이상 앉아계신것이다. 책상우에는 비준하신 문건들과 보아넘기신 참고서, 근간 국내외의 통신자료들이 더미를 이루고있었다. 방금전까지 보시던 편지 한통은 아직까지 손에 들고계시였다.

지금은 새벽 2시이다.

그이께서는 밤일을 이 시간에 맞추어 끝내군 하시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그전에 잠자리에 드시는 일이란 거의 없으시였다.

이 시간에 어버이수령님앞에서 하루일을 총화하시고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끓이시였다. 물론 밤을 새시는 경우가 드문했지만 이런 경우도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수령님앞에 서시였는데 이렇게 하신것이 어느때부터였던지

새벽 2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집무실에서 심장의 고동을 멈추신 시간이다.

수령님께서 계시였더라면! 시계의 종소리처럼 이 시간이면 하루도 번짐이 없는 마음속의 종소리였다.

그이께서 늘 새벽까지 일을 보신다는것을 알고있는 서기나 부관을 비롯한 보좌성원들조차 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새벽 2시.

지어 오래동안 수령님을 가까이 모셔왔고 오늘은 김정일동지를 모시고 현지지도길을 걷고있는 차철군 국방위원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그이의 심중이시였다.

북두칠성 저 멀리 별은 밝은데

우리 인민이 많이 부르는 그 노래가 지금 김정일동지의 마음속에서도 울리고있었다.

차창으로 북두칠성별빛이 흘러들었다. 어느덧 그 별빛우에 수령님의 모습이 어려오시였다. 이밤따라 더더욱 그리워지시는 수령님의 모습이시였다.

가까운 몇해어간에 기어이 강성국가건설의 돌파구를 여실 비상한 각오를 안고나선 력사적시각에 그이께서는 수령님과 나누실 마음속 이야기가 많으셨다. 사실 그 대화는 1960년대 초엽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었다. 동란많고 곡절많던 세월이였다.

당시 세계정세는 첨예하게 번져지고있었다.

1959년 1월 1일 미국의 코앞에 있는 자그마한 섬나라인 꾸바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였다. 수백년동안 미제의 《고요한 뒤동산》으로, 《잠자는 대륙》으로 불리우던 라틴아메리카대륙을 세기적인 궂잠에서 흔들어깨우며 울려퍼진 꾸바혁명의 포성은 사회주의10월혁명의 개시를 알린 《아브로라》호의 포성 못지 않게 세계를 진감시켰다.

자기들의 《고요한 뒤동산》이며 《세습령지》로 알려졌던 《평화의 동산》에서 일어난 사변은 미제로 하여금 커다란 공포와 불안에 떨게 했다. 마치 세계의 면전에서 호되게 면상을 후려맞은 격이여서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고 쩔쩔맸다.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했다.

콜룸부스에 의하여 처음으로 신대륙이 발견된 후 수세기동안이나 에스빠냐와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철쇄에 묶이워 신음하던 까리브해의 자그마한 섬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은 료원의 불길마냥 아메리카땅에 번져지고있었다.

미제는 서반구혁명의 거점인 꾸바를 요람기에 교살하려고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바로 이러한 때 미제는 제놈들의 간첩위성을 통하여 한장의 사진을 입수하게 되였다. 그 사진은 꾸바에 설치하고있는 쏘련의 미싸일기지였다. 미국에 있어서는 꾸바혁명을 교살할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즉시 텔레비죤방송탁앞에 나타난 미국대통령 케네디는 꾸바의 자위적인 무력건설을 걸고들면서 꾸바에 설치하고있는 쏘련의 미싸일기지는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되기때문에 일체 공격용군사장비들이 꾸바로 수송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꾸바로 가는 모든 선박들을 엄격히 검색할것이라고 공언했다.

케네디의 이 폭언은 까리브해위기의 서막이였다. 미제는 유엔의 거수기를 리용하여 꾸바에 있는 일체 《공격용무기》들을 즉시 해체하고 철수하는것과 함께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유엔 《조사단》을 파견할데 대한 강도적결정을 통과시켰으며 이 《현지시찰》에 응하지 않는 경우 무력을 사용할것이라고 을러멨다.

미제의 이러한 도발책동은 주권국가의 독립과 자주권을 마구 짓밟는 파렴치한 행위이며 국제법에 대한 란폭한 유린이고 세계평화에 대한 횡포한 도전이였다.

세상은 까리브해의 위기로 하여 소란해졌다. 추측과 억측, 가설과 허위로 가득찬 전파들이 대기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방향없이 날아예는 전파들속에서도 하나의 초점만은 있었으니 그것은 쏘련과 미국, 사회주의진영과 제국주의진영간의 싸움에서 누가 승자가 될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까리브해지역은 점점 동서랭전의 열점으로 가열되여갔다.

그런데 까리브해의 위기가 터진 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1962년 10월 28일 뜻밖의 일이 벌어져 세상사람들을 아연케 했다.

흐루쑈브가 미제의 군사적압력에 굴복하여 너무도 맥없이 꾸바에서 미싸일기지를 철수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고 그것을 세상에 공포하였던것이다. 쏘련당의 지도부를 차지하고있던 흐루쑈브도당의 비겁하고도 배신적인 행위는 꾸바인민을 비롯한 세계 혁명적인민들의 끝없는 격분을 자아냈다. 오죽했으면 피델이 흐루쑈브의 비렬한 추태에 격분하여 힘들게 미싸일을 가져갈 필요가 있는가, 미싸일을 발사하여 모스크바상공에 날려보내주겠다고 야유했겠는가.

《사회주의성새》라고 으시대던 흐루쑈브가 《대국》의 체면도, 계급적원칙도 다 줴버리고 비굴하게 나오는 바람에 사회주의진영은 세계면전에서 치욕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다.

까리브해의 위기는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자주권도 령토안정도 지켜낼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더우기 미제와 직접 총부리를 맞대고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교훈이 아닐수 없었다.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당, 정권기관 일군들의 회의가 있었다. 당시 민족보위성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한 오진우는 그날 회의에서 받은 충격에 대하여 오래도록 옛말처럼 외우군 했다.

회의에서는 까리브해위기의 발생발전에 대한 간단한 개괄보고가 있은 다음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하시였다.

…얼마전 꾸바정부는 외교적경로를 통하여 사회주의나라들에 군사적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우리 대사관에서 통보해온데 의하면 많은 나라들이 꾸바의 요청에 선뜻 응해나서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제날까지만 해도 형제요 동지요 하면서 제 살까지도 베여줄것처럼 놀던 사람들이 《고향방문》이요 《병치료》요 하면서 슬금슬금 보따리를 싸며 꼬리를 사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대사관동무들에게 죽든 살든 함께 싸우라고 지시를 주었다.

수령님께서는 자주 손수건을 꺼내드시여 안광부위를 누르시며 말씀하시였다.

《까리브해위기로 하여 꾸바정세가 긴장해진 다음부터 난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미제의 침략책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미제가 너무 증오스러워 격분을 참을수 없었기때문입니다. 꾸바인민은 지금 어려운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있습니다.

꾸바혁명을 보위하는것은 사회주의진영나라들과 라틴아메리카인민들의 신성한 국제주의적임무입니다. …》

회의에서는 싸우는 꾸바인민의 투쟁을 지원할데 대한 문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이어 회의는 우리의 자위적국방력을 강화할데 대한 의제로 넘어갔다.

많은 일군들이 열변을 토했다. 까리브해위기의 력사적교훈은 자체의 무장력이 약하면 대국들의 롱락물로밖에는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 자위적인 국방력을 강화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국방건설에 대한 투자를 결정적으로 늘여야 한다.

이것이 회의참가자들의 주장이였다. 누구인가 경제건설에 미칠 후과를 우려했다가 항일투사인 최현으로부터 단통에 퉁을 맞았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릴 하는거요?! 당신은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개만도 못하다는걸 모르는가?》

최현이 고리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함께 마음이 격해난 오진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령님, 이것저것 재볼게 없다고 봅니다. 냅다 밉시다. 나라가 있고야 인민도 있고 경제도 있을게 아닙니까?》

그러던 오진우는 그만 주춤 굳어지고말았다. 수령님께서 엄한 눈길로 지켜보고계셨던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한 말이 그토록 수령님을 노여우시게 해드릴줄은 몰랐습니다.》

오진우는 당시를 회고하며 가슴저리게 말했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격하게 말씀하시였다.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가. 나라가 있고야 인민이 있다구?! 아니, 인민은 하늘이요. 땅은 하늘밑에 있어. 그 하늘같은 인민이 이제 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단 말이요. 이걸 생각해봤는가? 난 요새 그때문에 머리가 다 희였소.》

또다시 손수건을 꺼내드시는 수령님안광은 겹쌓인 피로와 고뇌로 하여 짙게 충혈되여있었다.

《그날 나는 수령님의 엄한 책망을 들으면서 울었습니다. 수령님의 하늘같은 인민관이 가슴뜨거워 울었고 수령님을 따라 백두산의 눈길까지 걸었다는 사람이 너무 소견머리 없이 논것이 죄스러워서 울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국방공업이라는게 참 신통히도 사람이 먹고 입고 쓰고 사는것을 골라골라 다 먹자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국방공업에 거액의 자금을 돌려야 할 수령님의 심중이 얼마나 무거우시였겠습니까.》

당시 수령님의 그 심중을 제일 잘 알고계신분은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그 나날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의 무거우신 그 심정을 한생을 다 바쳐 풀어드려야 할 필생의 위업으로 받아들이시였다. 그무렵 어느날 아침 산책길에서 하시던 수령님의 말씀이 오늘도 들려오는것 같으시였다.

요새는 왜 그런지 내가 토기점골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소사하집을 찾아갔을 때 병석에 계시던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더 자주 생각난다. 그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불쌍한 우리 민족이다.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때문에 기를 못 펴고 살아온 우리 민족이 이제는 왜놈들에게 나라마저 잃고 산설고 물설은 이역땅에까지 흘러왔구나. 난 우리 겨레, 우리 민족이 해방된 제 나라, 제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날을 본다면 죽어도 원이 없을것 같다. …

어머님의 그 말씀이 한으로 맺혀 해방후 애써 노력해 우리 인민이 좀 살아볼만 하니까 전쟁이 일어났다. 전후 전쟁의 재티를 털고 일어설만 하니까 이번엔 또…

수령님께서는 말끝을 맺지 않으신채 생각깊은 걸음만 옮기시였다. 수령님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기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문득 멈춰서시였다. 수령님께서 늘 걸으시던 산책길을 벗어나 풀대들이 뒤엉킨 곳으로 들어서시였던것이다.

수령님의 바지섶은 하얀 서리발에 휘감겨있었다.

얼마쯤 떨어진 비슬나무앞에 이르러서야 수령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빙그레 웃으시였다.

《허허, 길에서 벗어났군.》

수령님께서는 헌헌하게 웃으시였지만 김정일동지께서는 저려드는 마음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과중해질 국방비지출로 하여 인민경제계획을 일부 조절하지 않으면 안될 정황을 놓고 마음의 안정을 못 가지시는 수령님이시였다.

《수령님,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국력이 약했던탓으로 하여 일제에게 식민지노예살이를 강요당했던 우리 인민입니다. 두번다시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을것입니다.》

《옳은 말이요. 예속을 강요당하면서도 주먹을 부르쥐지 않으면 자주적인민이 아니지.》

이것은 경제국방병진로선을 내외에 엄숙히 선포한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전원회의를 며칠 앞둔 새벽에 두분께서 나누신 대화의 한 대목이다.

그날에 나누시던 이야기는 수령님서거이후에도 이어지셨다.

피눈물의 해 1994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첫아침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의 령전을 찾아 마음속으로 말씀드리시였다.

(수령님! 수령님께서 생애의 마지막나날에 하신 협의회도 경제부문일군협의회였습니다. 경제를 부흥시켜 우리 인민을 잘살게 하시려는것은 수령님의 한생의 념원이였습니다. 그 념원을 받들어 나는 수령님의 뒤를 이어 걷는 첫 현지지도길을 병사들이 있는 초소길과 이으려고 합니다. 우리 인민은 지금 어려운 고난의 행군길에 들어섰습니다. 이 길이 인민생활을 추켜세우기 위해 공장과 농촌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적들은 지금 우리의 국난을 리용하여 고립압살의 도수를 높이고있습니다. 그전에는 사회주의진영이라는 익측전선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적들은 사면팔방에서 우리를 향하여 접어들고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놓으십시오. 이 김정일이 있는 한 내 나라, 내 조국은 기어이 불패의 보루로,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될것입니다. 내가 다 못하면 대를 이어서라도 기어이 이 땅우에 김일성강성국가를 일떠세우겠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을 찾아 초소로 떠나려 합니다. 선군의 위력으로 경제도 국방도 다 추켜세우려 합니다.…)

그날의 맹세를 지켜 그이께서는 민족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그 어려운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나날에도 강성부흥의 수많은 씨앗들을 심어놓으셨다. 도처에 일떠선 발전소들과 현대적공장들, 멀끔하게 때벗이를 하고 첨단을 향해 자욱을 뗀 기계공업, 화학공업

어려웠던 나날에 심어놓으신 씨앗들이 이제는 태아단계를 벗어났다. 농사로 말하면 한참 땀흘려야 할 농번기라고 할수 있다. 농사도 절기를 놓치면 수확이 떨어진다. 지금이야말로 적기라고 해야 할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얼핏 집무탁을 바라보시였다.

조선문제를 6자회담테내에서 다루며 9. 19공동성명의 정신을 존중하겠다는 미국대통령당선자의 대조선정책동향이 방금 보신 통신에 실려있었다. 외무성의 보고에는 취임후 빠른 시일안에 조선의 최고수뇌와 접촉할 의향이라고도 하였다.

처음부터 《악의 축》으로 단정하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선임자와는 대조되는 동향으로 강경을 시종 국시로 하고있는 미국에서 새 집권자가 대조선정책변화를 시사하고있다는것은?…

김정일동지께서는 동향, 그자체는 대수롭지 않게 보시였다.

동향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오게 된 동기가 중요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미국이 평화수호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인정한것이라고 판단하시였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믿으시였다.

힘을 갖추는것도 필요하지만 교전상대가 그것을 인정하는것도 그와 못지 않게 중요하였다.

오판은 전쟁을 몰아올수도 있었다. 1950년의 조선전쟁이 인민대중이 주인이 된 우리 나라의 힘을 오판한데서 오지 않았던가.

사실상 그이처럼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조선은 력대적으로 전란에 부대껴왔다. 고대에는 한나라가 침입했고 그이후에는 수, 당이 침략의 말발굽을 몰아왔으며 고려때에는 거란이 또 그다음에는 칭기스한의 후예가 이 땅에 침노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전쟁의 참화는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근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나라는 식민지리권을 다투어 벌어진 청일, 로일렬강들의 전쟁터로 되였다. 어느 한 나라의 정치학자는 이러한 조선반도를 가리켜 《동북아시아의 화약고》라고 평했다.

수령님을 잃은 후 진행한 조미사이의 대결은 포성은 없었지만 가장 치렬하고 가장 장기적인 전쟁이였다. 이 전쟁은 우리가 핵참화의 폭우를 생사를 걸고 막아낸것과 같은 중과부적인 싸움이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이 전쟁을 통하여 적들의 예기를 꺾어놓음으로써 세계의 력학관계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더는 전란에 부대끼지 않아도 되게 되였다.

이것은 두말할것없이 민족사적승리였다.

이 승리를 두고 온 나라가 기쁨으로 들끓었고 수천만인민들이 후대들은 자기들처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믿으면서 안식의 깊은 잠에 든 이 시각 김정일동지께서는 차창에 마주서서 오늘의 승리를 두고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르었다.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전대미문의 시련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던가.

그것이야말로 한차례의 전란을 겪은 참화와 같은것이였다. 그 참화의 여파는 아직도 생활의 처처에 미치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 타신 렬차가 지나온 구간은 나라의 중요한 공업지대였다.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는 공장들이 많았으며 돌아가는 공장들조차 생산의 동음이 높지 못했다. 도시와 마을의 창문들은 어둠에 잠겼으며 이따금 충전등과 방등불을 켠 창문들이 보일뿐이였다.

이것은 력사에 없는 미국의 고립압살책동의 후과였다.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은 우리 인민이 선택한 존엄높은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를 압살하기 위한 국가테로정책이였다. 미국은 조선을 둘로 갈라놓은 때로부터 우리 공화국을 군사적으로 압살하는데 초점을 두고 각종 형태의 전쟁도발행위를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미제의 증대되는 전쟁위협은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새 사회수립과 사회주의건설에 커다란 난관을 조성하였으며 인민경제의 계획적이며 균형적인 발전을 저애하는 자금지출을 산생케 하였다.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미국의 새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불가피하게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로선을 제시하고 민간방위훈련에 항시적인 큰 힘을 넣으면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키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이로써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애로를 겪지 않을수 없었다.

놈들은 장장 반세기이상에 걸쳐 무역, 금융, 투자, 부동산, 보험, 수송, 우편통신, 주민래왕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경제제재와 봉쇄책동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특히 사회주의운동의 일시적좌절로 준엄했던 1990년대부터 사회주의보루인 우리 나라를 완전히 고립압살하려고 제국주의련합세력을 형성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 미국의 책동은 상상할수 없이 악착하였다.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국제적압박공세는 새 세기에 들어와 더욱 무모하게 강행되였다.

우리 공화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소동을 광란적으로 일으킨 미국은 있지도 않은 사건들을 날조하여 우리를 《테로지원국》으로 몰아붙이다못해 《위조화페》와 《인권》, 《마약》 등 황당무계한 갖가지 모략을 꾸미고 추종국들까지 동원하여 해상봉쇄를 겨냥한 《전파안보발기》, 《지역해상안전발기》를 조작적용하는 등 집단적인 경제봉쇄깜빠니야를 벌리며 우리에 대한 압력과 공갈의 도수를 극도로 높여왔다.

미국의 검질긴 제재봉쇄책동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평화적경제건설은 그 어느 부문이나 할것없이 막대한 피해를 받아왔으며 그 피해액은 날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런 속에서 사회주의를 지켜온 우리 인민이였다.

그 천신만고를 무슨 말로 표현할수 있을것인가. 그 인민과 함께 또 한차례의 전역을 치르셔야 할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제부터 펼치셔야 할 경제전선을 하나의 전역으로 보시였다. 다시말하여 미국과의 《경제전쟁》이라고 판단하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경제전역을 결심하시면서 비상한 각오를 지니시고 수령님과 마음속 대화를 이어가시였다.

《수령님, 미국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소. 전쟁은 계속되고있소. 우리야 그것을 미리 예견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력사는 수령님의 예견이 옳았다는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오늘을 내다보시고 미리 경제국방병진로선을 내놓으셨기에 우리는 미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이제 남은것은 경제전선입니다.》

《옳소. 이제 더는 미룰수 없지.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중하를 혼자서 다 맡아야겠구만.》

《아닙니다. 저에게야 수령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언제나 수령님과 나라의 대소사를 의논하시는 그이이시였다.

지금 차창에 마주서신 그이의 귀전에는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경제문제를 두고 마음쓰시던 수령님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려오고있었다. 그 메아리를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면싶으시였다. 적어도 내각에 앉아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내각에서 제출한 2009년도 인민경제계획초안이 눈앞에 떠오르시였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시면서 번열이 나시였다.

시원한 바람이 확 안겨왔으나 달아오른 몸은 좀처럼 식지 않으셨다. 가까스로 맞추어놓은듯 한 계획수자들에는 무수한 허점들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조건을 전제로 스칠수도 있었다. 언제나 내각의 의견을 존중하시는 그이이시였다. 하지만 당의 경제전략을 떠맡아안아야 할 오늘에 와서까지도 우리 경제지도일군들이 당의 사상과 의지를 그렇게도 따르지 못한단 말인가. 그들도 다같이 수령님의 전사, 수령님의 제자일텐데. 이 순간 그이의 불감은 방금전에 읽으신 한통의 편지로 해서 더 가증되시였다. 그 편지는 조국의 북단에 자리잡고있는 성진제강련합기업소의 오랜 로동자가 보내온것이였다.

《장군님, 이젠 좀 주무십시오.》

등뒤에서 부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좀처럼 상념에서 깨여나지 못하시였다.

부관의 목소리가 다시금 나직이 반복되여서야 그이께서 돌아서시였다.

《부관동무는 왜 자지 않소?》

《저만이 아니라 온 렬차가 잠들지 못하고있습니다.》

《그건 왜?》

《모두가 장군님께서 쉬시기를 기다리고있습니다.》

《허, 롱성인가?》

그이께서는 롱담으로 웃어넘기려 하시였으나 그 롱담을 받아들일수 없는 부관이였다. 그는 간청하듯 자기 말을 반복하였다.

그러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그 말을 못 들으신듯 한마디 분부만 하시였다.

《자지들 않을바엔 좀 모이라고 하시오.》

갑자기 부르심을 받고온 수행원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이를 우러르고있었다. 잠시 침묵이 깃들었다. 달카닥거리는 렬차의 동음이 그 침묵을 더해주는듯 하였다. 앞탁에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계시던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그것을 집어들고 겉봉을 들여다보시며 말씀을 떼시였다.

《함북도에서 온 편지인데 마음이 놓이지 않아 평양에 올라와서 부친 모양이요. 확실히 웃천정이 문제거던!》

평범한 어조로 말씀하시였으나 누구도 응답할 생각을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최근에만 하여도 일부 일군들이 인민들의 의사와 요구를 제때에 반영하지 않는데 대하여 한두번만 엄하게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런 일군들은 례외없이 부지런히 아래단위를 찾아내려가 제기되는 의견을 사업수첩에 《착실》하게 적어오기는 하지만 무엇 하나 해결해주지 못하고 우에 보고하지도 않은채 어물쩍해넘긴다.

결국은 자리지킴, 체면유지이다. 이런 일군들을 가리켜 인민들은 웃천정이라고 부르며 곱지 않은 눈길로 본다. 장식용이나 다름없는 이런 일군들이 백이면 뭘하고 천이면 뭘하겠는가.

편지는 이러한 일군들을 타매하는 고소장과 같아 장내를 저으기 긴장시켰다.

이윽고 봉투에서 속지를 꺼내 펼쳐들고 읽으시려던 그이께서는 혼자소리로 《서신의 비밀은 공화국법이지.…》 라고 하시며 수행원들을 둘러보시였다. 그리고 말씀하시였다.

《한대목만 말해주겠습니다.》

편지의 구절을 그대로 읽으시는듯 한 그이의 음성이 또박또박 울렸다.

《장군님, 이제 강성국가를 건설하여 우리 인민이 잘살게 된다는데 지금형편에서는… 혹시 장군님께서 다른 대책안이라도 가지고계시는것은 아닌지 해서…》

모두가 경악하였다. 저런 불손하기란… 허나 다음순간 그이의 말씀이 그들의 속생각을 뒤집어버렸다.

《편지는 민심을 그대로 쓰고있소!》

그이께서는 수원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편지에 주시며 여전히 평범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누가 대답해보시오. 내가 뭐라고 답장을 써야 하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속생각이 뒤집히자 모두가 당황하였고 자책의 파도에 휩싸여버렸던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경제지도일군들이였다. 솔직히 그들자신은 당의 높은 요구를 어떻게 대하고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과연 확신하고있단 말인가? 오늘의 현실앞에서 허둥대고있는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이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어디 누가 대답해보시오!》

《…》

강민혁은 옆에 앉아있는 차철군을 바라보았다.

강민혁은 이 며칠간 김정일동지를 모시고 나라의 주요군수공장들을 돌아보고있었다. 그는 나라의 경제지도일군인만큼 군수공업실태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지만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나서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실로 막강하였다.

우선 숨이 나갔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경제건설에 돌린다면… 2009년도 인민경제계획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강민혁은 자기가 잘 아는 차철군국방위원에게 속생각을 비쳐보았었다.

그랬더니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민혁은 자기가 안할 말을 했다는것을 느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가진 미련을 쉽게 버릴수 없었고 범람하는 홍수처럼 마음속의 제방을 터치고 부지불식간에 솟구쳐오르려 했다.

자기의 이런 마음을 넘보기라도 한듯 차철군은 두툼한 입술을 비주룩하니 내민채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강민혁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라의 경제지도일군이라는 사람이 인민의 절박한 물음앞에 대답 한마디 못하고 장군님의 존안만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을 짓누르는 자책감에 땀발만이 등골을 적시며 척척하게 내돋았다.

차칸에는 숨가쁜 침묵이 계속되고 그 침묵을 더해주는듯 한 렬차의 달카닥대는 동음이 매개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동을 일으키고있었다.

그러나 이때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으시였으니 그이께서는 편지의 다른 구절들을 귀전에 되살리시였고 심혼을 다 기울여 그것을 듣고계시였다.

《장군님, 지금 일부 사람들은 나라의 막강한 국방공업에서 무슨 예비라도 나올가 하고 기대하고있지만 그것은 죽어도 목침처럼 베고 죽어야 할 목숨과도 같은것이며 거기에 손을 댄다는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 생활이 어렵고 허리띠를 조여야 하는것은 사실이지만 죽을 먹어도 든든한 자기 집 아래방에서 올방자를 틀고앉아 먹어야 마음 편할것입니다. …》

김정일동지께서는 편지에서 받으신 충동을 가시지 못하신채 묵묵히 내심의 격정을 누르시며 생각을 이어가시였다.

(솔직히 나자신이 사면팔방으로 접어드는 적들의 기를 눌러놓았으니 이젠 숨을 돌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성된 나라의 형편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있다. 우리는 또 한차례의 전쟁을 치르어야 한다. 그것도 총창끝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이 아니라 가혹하고도 장기적인 경제전쟁을 치르어야 한다. 총포성이 울부짖는 전쟁 못지 않게 간고할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가까운 몇해어간에 도래할 행복을 그려보고있다. 우리는 결심을 내려야 한다. 지금까지 고생고생을 다 겪어온 우리 인민을 더이상 고생시킨다는것은… 결심해야 한다. 결심도 때가 있는 법이다.)

경제사업에서 제기되는 긴요한 몇가지 문제를 재삼 강조하고 수행원들을 돌려보낸 다음 김정일동지께서는 잠시 긴 쏘파에 몸을 기대셨으나 좀처럼 잠들수 없으시였다. 멈출수 없는 메아리처럼 귀전을 치는 편지의 구절들… 그것은 여러번 만나신적 있는 잊을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로 울리는것이였다.

《…장군님, 외람된줄 알면서도 다른 대책안소리를 여쭙게 되는것은 나라의 국방자금을 넘겨다보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속에는 그래서는 안될 로동당원들도 있고 일군들도 있습니다. 저의 아들녀석만 봐도 여기서 일할 때는 쇠물내가 몸에 배는가 했더니 평양에 가서 간부가 된 다음부터는 사람이 영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장군님께서 지펴주신 성강의 봉화가 계속 세차게 타오르게 하기 위해 주체철의 생산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에 너도나도 떨쳐나섰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보아주신 그 주체철이 전기와 석탄이 잘 보장되지 않아 애를 먹기 시작하자 우에 앉아서 시비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있습니다. 그 시비군들중의 하나가 바로 저의 아들녀석입니다.

시비질만 하는것이 아니라 돌아앉아 딴장까지 봅니다. 요새는 외국에 나가 콕스를 후불로 들여온다고 들썩거립니다. 우리 성강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달아오른 화독에 물 끼얹기지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전화기의 신호단자를 누르고 송수화기를 드시였다.

《차철군동무요? 지금 뭘하고있습니까? 글을 쓰고있다! 하긴 철군동무야 젊어서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지. 머리도 쉬일겸 좀 와주지 않겠습니까? … 아니, 내가 가지.… 일없습니다. 마침 바람도 쏘이고싶었습니다.》

×

차철군은 오늘도 일기를 쓰고있었다. 언제부터였던지… 벌써 열네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날은 대줄기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던 한여름의 늦은 저녁이였다. 사무실을 나선 차철군은 관하부대에 내려가기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비물에 뿌잇해진 차창가로는 가로수들이 산발한 녀인들처럼 태질하며 다가섰다가는 우우 곡성을 터뜨리며 물러갔다. 차체를 때리는 비방울소리조차 호곡하듯 들려왔다. 그 호곡소리는 차철군의 가슴속에서도 울리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너무도 뜻밖에 잃고 피눈물속에 경황없이 지내는 차철군이였다. 어느 한 굽인돌이에서 갑자기 차가 급정거를 했다. 웬 사나이가 손을 흔들며 차앞을 막아섰던것이다.

운전사가 나서려는것을 차철군이 제지하고 앞에 나섰다.

《동문 누구요?》

《××출판사 기잡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나타났소?》

차철군은 비물에 초췌해진 기자를 바라보며 의아한듯 머리를 기웃했다. 이곳으로 말하면 부대와 통하는 길과 잇닿아있어 일반행인들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였다.

《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누구든 꼭 만나야 했으니까요. 급한 사정입니다. 아니 한시도 지체할수 없는 사정입니다.》

기자는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누가 말을 가로채기라도 할가 저어하듯 재빠르게 말했다.

《무슨 사정이요?》

《지금 출판사로는 수령님의 영생과 관련하여 쓴 글이 하루에도 수천통씩이나 들어오고있습니다. 인민들은 수령님의 서거를 믿지 않습니다. 영원히 믿지 않을것입니다. 믿을수도 없지요. 그들은 수령님의 체취, 수령님의 숨결을 듣고싶어합니다. 수령님의 발자욱소리와 자애로운 음성을 생시그대로 듣고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자들은 아는것보다 모르는것이 더 많습니다. 수령님을 잃고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수령님의 위대성을 모르고 살았는가를 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지들이야,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살아온 동지들이야 생생하게 기억할게 아닙니까. 나에게 그 모든것을 들려주시오. 우리 수령님의 환하신 미소, 자애로우신 음성, 뜨거운 사랑의 손길… 그 모습을 인민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나는 문인으로서 씻을수 없는 죄를 짓습니다, 씻을수 없는 죄를…》

비물이 질펀한 앞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기자의 입술은 점점 더 파랗게 질려갔다.

《선생은 우선 병원부터 가봐야겠소.》

차철군은 서둘렀다.

《아니, 나에겐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건사했는지 비물 한점 스미지 않은 취재수첩을 꺼내들던 기자가 비칠했다.

이러한 그를 억지로 승용차에 태워가면서 차철군은 자신을 끝없이 타매했다.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면서도 그이의 위대성을 새겨 후세에 전할 력사적사명을 늦잡은 자책감으로 가슴을 쳤다. 그날의 회한이 너무도 커서 차철군은 장군님을 가까이 모시면서부터는 일기쓰기를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기라기보다 혁명과 건설의 벅찬 전투를 지휘해나가시는 그이의 불면불휴의 로고를 눈물속에 적어나가는 하나의 종군기였다.

이날의 종군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나의 담배곽에서 한대를 꺼내 불을 붙이시였다. 그러시고는 한대를 다 태우도록 말씀이 없으시였다. 요사이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으시던 그이께서 담배를 피우러 오신듯도 하시였다.

《가만, 우리가 성강을 찾아갔던것이 언제였더라?》

한참만에야 그이께서 말씀을 떼시였다.

《지난해 8월 4일이였습니다.》

땀에 젖은 야전복이 마를새 없어 후날 문필가들이 《삼복철강행군》으로 명명한 그 나날들을 장군님께서 기억하지 못할리 없으셨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이의 표정에서 마디마디 피방울과도 같은, 마디마디가 불길처럼 타오르는 마음속 대화를 읽을수 있었다.

펜을 고누어들고 그것을 옮기려 했으나 나에게는 그것이 하나로 응결되여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버렸다.

그이께선 돌아가시였으나 그 불덩이가 오래도록 내 가슴을 뜨겁게 지져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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