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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예술

별의 세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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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10-15 19:16 조회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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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4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리현상은 달궁골에서 떠나 각 부대별로 지리산의 곳곳에 분산되여 활동하게 하였다. 달궁골과 릉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던 뱀사골에서 철수한 사령부는 학당골로 또 거기서 청학동골, 거림골로 계속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것을 알리없는 김진서는 자기가 아라를 데리고갔던 달궁과 뱀사골을 목표로 대오를 이끌었다.

50여명의 군정대학 제3기생들과 백운산, 장안산사이의 협곡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북유격대의 15명 그리고 《투쟁인민들》이라고 부르는 입산하여 유격대를 돕던 사람들 10여명이 리현상의 남부군을 찾아가는데 지휘관은 정대천이였고 김진서는 정치책임자격이였다.

높은 산봉우리들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있었다. 땅거미가 질무렵에야 달궁골어귀에 이르렀다. 별안간 대오가 멎었다. 앞서가던 정대천이 멈춰세운것이였다.

《뒤로 전달! 책임강사동지 나오셔라오.》

진서가 달려가보니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골어귀의 비탈면에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져있는것이였다. 대부분이 늙은이, 부녀자들이였다. 총창에 찔린것도 있었다. 무데기로 혹은 따로따로 쓰러져있는데 어떤 늙은이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웨치는듯 입을 쩍 벌리고 두눈을 흡뜬채 얼어붙어있었다. 턱수염은 서리에 덮여 새하얗게 비틀렸고 굵은 아마천으로 짠 등거리에는 시꺼먼 피가 내배여있었다.

이미 무수한 주검을 보아온 진서였지만 또 하나의 시체앞에서는 눈을 감지 않을수 없었다. 한 녀인이 팔을 벌리고 반듯이 누워있는데 헤쳐진 가슴앞섶에는 대여섯살 난 처녀애가 머리를 틀어박은채 숨져있었다. 조그만 주먹이 녀인의 턱에 닿았고 눈더미우에 뻗어내린 한쪽발엔 짚신이 벗겨져있었다.

퍼릿퍼릿해진 그 발끝은 아직도 추위를 견딜수 없는듯 잔뜩 꼬부라져있고 파리한 정갱이에서는 흘러내린 피가 얼어붙었다. 진서의 뒤에 있던 한 늙은이가 입귀를 비틀며 무어라고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벗겨진 짚신을 처녀애의 발에 신겨주었다.

정대천이 먼저 걸음을 떼였다. 구령이라도 있은것처럼 모두가 서둘러 그를 따랐다. 그러나 진서는 선뜻 걸음을 옮길수 없어 다시금 얼어붙은 그 처녀애를 더듬어보았다. 쓰러진 엄마의 품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그애를 총으로 쏘았다. 잔인한 적들이 그 어린것의 등가슴에도 총알을 박았다. 고향에 두고온 화순이또래의 처녀애를… 이런것을 본다면, 여기에 하정례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가?… 다음순간 몸을 홱 돌리며 그는 눈 먼 사람처럼 걷기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고있던 정대천이 석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유격대가족들을 끌어왔을거요. 유격대를 찾지 못하니 분풀이로 죄다 죽여버렸지.》

진서는 아무말없이 입을 꽉 다문채 걷기만 했다. 시꺼먼 어둠이 골안을 덮기 시작했다. 칼바람에 땀이 돋던 등허리가 오싹오싹해졌다. 먼 산봉우리에서 우- 우-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커지는가운데 따꿍거리는 총소리가 간간이 울려왔다. 험준한 령봉에서는 눈보라가 터지고 깊은 골, 릉선들에서는 결사전의 함성이 터진것이였다. 그래도 그들은 총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부대를 찾지 않고서는 어느 순간에 몰살당할지 알수 없었다. 방금 지나온 달궁골바닥에 널려져있던 시체들처럼… 무장을 갖춘 전투부대가 아닌 그들이여서 부대를 찾는것만이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희망이였다. 그러나 그 희망도 산산이 깨여져버렸다. 수백명의 적들이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한것이였다.

어데선가 슛- 슛- 하는 소리가 대기를 썰더니 미처 정신을 차릴새도 없이 컁!- 컁-! 하는 폭음이 터지며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박격포요!》 정대천이 소리쳤다. 《빨리 릉선으로!》

그러나 릉선우에서도 련발사격의 총성이 자지러지게 울리고있었다. 뒤에도 적, 앞에도 적이였다.

《날 따랏!-》

정대천의 웨침소리만이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였다. 쓰러진 사람들조차 피범벅이 된채 모지름쓰며 일어섰다. 그들중 한사람이 진서에게 매달렸다.

《책임강사동지!-》

그의 보조강사이던 박신규였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진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총알이 외약편(왼쪽)발을 잘라놨지라오. 이걸 어찌하능겨?!…》

그 처참한 울부짖음이 진서를 멈춰세우고 허리를 굽히게 했다.

총알이 발목을 잘라버린것이 아니라 참대그루터기에 발을 찔린것임을 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포탄파편에 잘린 참대밑둥을 밟아 창끝같은 참대가 발잔등까지 꿸 정도로 깊이 박혔던것이다. 피범벅이 된 발의 상처에 손에 잡히는대로 가랑잎을 틀어막는데 정대천이 달려와 소리쳤다.

《수류탄이 있소? 빨리 몇사람을 데리고 왼쪽으로 올라붙소. 현춘임! 책임강사를 도와주오!》

질풍사격이 날아왔다. 좌우에서 헤덤비던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정대천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빨리, 빨리! 이러단 다 몰살이요. 난 오른쪽으로 공격하겠으니 빨리!》

엠원총을 멘 제주출신처녀 현춘임이 또 그를 잡아끌었다. 지구사 15련대에서 싸우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니 총을 멘채로 왔던 처녀였다.

진서는 허리춤의 수류탄을 뽑아들며 보조강사 박신규에게 소리쳤다.

《떨어지면 죽는다. 나를 따르라!-》

그것이 곧 공격구령으로 되였다. 릉선우의 적들을 향하여 막무가내로 맞받아 올라갔다. 어떻게 수류탄을 뿌리고 뭐라고 웨쳤던지, 또 누가 어떻게 총을 쏘며 뒤따랐던지 알수 없었다. 어쨌든 정규군의 중대장이였던 정대천의 결심이 옳았다. 사람들이 무리로 쓰러졌지만 마침내 릉선우의 적들을 쫓아버릴수 있었다. 아마도 적들은 무서운 웨침소리와 함께 어둠속에서 달려드는 유령같은 사람들의 그악스러운 돌격에 얼혼이 나갔을것이다.

어둠속 저편에서 정대천의 고함소리가 울려왔다.

《몰키지 말라. 저마끔 뛰라!-》

추격해온 적들이 몰사격을 퍼부으며 달려들고있었던것이다. 진서의 뒤에서 현춘임이 엠원총구를 돌리다가 퍽- 쓰러졌다. 진서가 달려들며 안아일으켰을 때 이미 처녀는 입을 항 벌린채 축 늘어지고있었다. 그 처녀가 마지막으로 웨치려한것이 무엇이였을가 하고 후날 진서는 자주 생각하군 하였다.

무엇을 웨치려 했을가, 아니면 간절한 부탁을 남기려 했을가?… 치명상이여서 처녀는 말한마디 못하고 숨지고말았다.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났을 때 진서의 뒤를 끝까지 따라온것은 박신규뿐이였다. 발바닥에 구멍이 펑 뚫리고 갈가리 찢겨진 그가 어떻게 그 끔찍한 발로 끝까지 따라왔는지… 가랑잎을 마구 쑤셔막은 발바닥의 상처는 시꺼먼 피덩이와 흙과 돌부스레기 따위들이 달라붙은채로 엉켜서 굳어졌고 정갱이까지 퉁퉁 부어올라 보기에도 처참할 지경이였다. 웬일인지 진서는 눈굽이 저려드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끝까지 따라온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신규동무!-》

《책임강사동지!》

그의 헐썩거리는 속삭임에 진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책임강사가 다 뭔가. 나는 더이상 도민청부위원장도 지구사 정치교무과장도 참모책도 아니며 책임강사도 아니다. 소속도 알길없는 지리산빨찌산의 한 무명전사일 따름이다.

나머지사람들의 운명은 알길이 없었다. 몇달후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정대천과 또 낯익은 두세사람의 얼굴을 얼핏 보았을뿐이였다.

그날밤 진서는 박신규를 업다싶이 부축하며 더 깊은 산속으로 죽기내기로 걸어갔다. 다음날 악양지서습격후 감춰두었던 량곡을 가지러나왔던 김흥복의 81사단 대원들을 만났을 때 그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들이 만난 남부군의 81사단 대원들은 더 험악한 모습이였다.

하루에도 몇십차례 전투를 벌리며 산발을 오르내렸던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였던 식량도 이미 적들이 찾아내여 다 불태워버렸었다.

새까맣게 그슬린 벼알들을 골라내는 그들의 손은 온통 긁히고 찢겨져있었다.

×

괴뢰군 수도사단, 5사단, 8사단과 경찰대 도합 4만여명의 합동으로 진행된 적들의 제1차 대공세가 절정에 오르던 그날, 12월의 그날 지리산의 강추위도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고있었다.

지리산은 봉우리마다 1 500m이상은 모두 거대한 바위로 로출되여있어 광풍이 몰아치면 바위가 울부짖는듯 굉음이 소용돌이치군 한다. 온 세상을 삼켜버릴듯 무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속을 뚫고 대오는 지리산의 주봉 1 915m의 해발고를 가진 천왕봉으로 오르고있었다. 리현상사령관이 직접 인솔한 주력부대는 중산리 릉선을 따라 기동하며 적들의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수백배에 달하는 적들의 억센 포위환에 압박되여 천왕봉으로 올랐고 진서가 속한 소부대(비장했던 식량을 찾으려 거림골로 내려갔던 사람들)는 전투의 총포성을 쫓아간것이 천왕봉으로 이어진것이였다.

세찬 바람에 련 4일째 잠을 못자고 허기진 사람들이 사정없이 굴러내리군 했다. 사람들은 눈도 뜨지 못하고 앞사람의 배낭끈 혹은 총부혁이나 혁띠에 매놓은 바줄을 잡고 집채같은 바위를 기여올랐다. 꽁꽁 언 두손으로 서로 얼굴을 비벼주며 부둥켜안은채 무릎걸음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올라야 한다. 적들은 거대한 바위들만 드러나있는 상봉에는 감히 오를념을 못한다. 도처에 은페물이 많아 방어측엔 유리하나 공격자들은 로출된 상태에서 광풍과 집중사격을 맞받아올라야 하기때문이다.

대오가 멎어섰을 때에야 진서는 수백명의 남부군주력과 만났다는것을 알았다. 그들이 언제 여기에 나타났는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500리 둘레의 산기슭에 남원, 구례, 함양, 산청, 하동군들을 끼고있는 지리산, 해발 1 915m의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반야봉, 로고단, 세석봉, 만복대, 세걸산 등 1 500m이상 되는 봉우리들이 연 70리에 걸쳐 키돋움하듯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데 골들도 깊어 함양쪽의 마천동, 추성동, 하동쪽의 화계동, 악양동을 비롯하여 70~80리씩 길게 패운 험한 계곡들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준령과 계곡들을 넘어 수백명의 대오가 하루밤새 천왕봉에 올랐으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새벽이였다. 사처에서 불을 피웠다. 어데서 어떻게 나무가지들을 주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까지 날려버리는 광풍속에서 불을 달수 있었는지 알수 없었다. 우묵하니 패운 바위틈새들에서 화토불들이 너울거렸다.

《문화선전대원 나오시오!》

남녀를 구별할수 있는것은 오직 목소리뿐이였다. 진서는 별안간 가슴이 후두둑 뛰는것을 느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속에서 어쩐지 뼈를 에이는 추위나 굶주림보다도 외토리같은 허전함과 고독감에 괴로왔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느 홈타기에서 울려왔던것이다.

《그럼 내 꿈얘기부터 할가요, 좋지요?》

하정례의 목소리 같았다. 어느새 진서는 그쪽으로 다가가고있었다.

《꿈에서말이죠, 소방울이 절렁절렁… 우리 류주목정치위원동지가 이랴! 하면서 밭을 갈구요 나는 그뒤를 따라가며 발로 씨를 묻었죠.》

사람들이 왁작하니 떠들었다.

《정치위원동지하구 말잉기여?》

《그럼 그 집 모시메(사내)는 버렸는갑구만!》

《주인량반 들었다간 큰일 날 소리!》

《가만, 가만, 마저 들어보자니.》

하정례는 아니였다. 웃고있는 문화선전대원.

《저의 주인도 밭을 갈았어요. 저앞에서 정치위원동지, 내 말이 맞지요?》

허허… 웃어대던 류주목이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걸 워찌 안단말이여, 남의 꿈속에 들어가 볼수야 없지 않능기!》

사람들이, 전투와 행군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이 모두 따라 웃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주인만 있었다구 하죠. 어쨌든 꿈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기막힌 꿈이였죠. 밭갈고 씨뿌리는 짱짱한 봄날, 장군님께서 주신 새 땅에 밭갈고 씨뿌리고… 땅김이 문문 피여올랐어요. 동무들도 그럴 때가 있었지요? 토지개혁으로 땅을 분여받고… 정말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그 다음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정 그보다 더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적이 있었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백두산말기에 백학이 너울너울

해방된 강산에 뻐꾸기 뻐꾹 뻐꾹

불길이 너울거리며 자글자글한 봄볕을 불러왔다. 군용밥통에서는 풀뿌리나 송기가 끓고있으련만 사람들은 행복에 취해버렸다.

김진서는 너울거리는 불빛에 이끌리듯 사람들의 등뒤에까지 다가갔다. 저 불앞에서 노래하는 녀성이 하정례였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뻤으랴. 그처럼 달라진 하정례를 보았더라면!… 그러나 그 녀성은 한달전 아라를 데리고갔을 때 잠간 만나본 일이 있는 조복애였다. 일본에서 대학공부까지 했다는 인테리녀성, 그는 언제 어느때부터 저 따스한 봄볕을 마음속에 안게 되였을가?…

갑자기 누군가 그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책임강사동지, 살아있었군요.》

2기졸업생이였던가?… 이름도 미처 기억해낼새 없이 그를 사람들속에 끌어들였다. 처음엔 조복애가 다음은 류주목도 그를 알아보았다. 단번에 그는 남부군 92사단의 빈객으로 취급되였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멀겋게 쑨 죽물이였는데 무엇을 끓였는지는 알수 없었다.) 하고 또 출발하였다.

적들의 주의를 상봉에 집중시켜놓고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 제석봉방향을 돌파하기 위한 기동이였다.

그러나 진서도 다른 많은 대원들과 같이 그 시각엔 왜 그처럼 죽기내기로 올라온 산에서 또 내려야 하는지 알수 없었다. 지어 그는 가까운 불무지에 리현상사령관이 있다는것조차 알지 못했다. 리재명정치위원도 거기에 같이 있었다 한다.

불무지들을 남긴채 다시 바위등판에 나섰다. 강풍이 얼얼하게 뺨을 후려치고 찢겨진 옷깃을 날렸다. 중대단위 혹은 중대인원수나 다름없이 손실이 많은 련대들이 지동치는 강풍을 맞받아 산을 내렸다. 진서는 박신규를 부축하느라고 자꾸만 뒤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되돌아와서 그를 거들어주었다.

《빨리 따라갑시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그는 제석봉릉선에 이를 때까지 거의나 의식을 잃고있는 박신규를 진서와 같이 떠메고갔다. 허연 입김을 포연처럼 내쏘며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한쪽다리를 질질 끄는 박신규를 끌어가기에 죽을 힘을 다 짜냈다. 진서는 고맙다는 말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상대는 꿈쩍 놀랐을것이다. 항시 죽음을 그림자처럼 달고다니는 빨찌산들에게 있어서 동지들에 대한 헌신과 배려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4년세월이 지난 뒤에야 진서는 그날밤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김병택이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자기 중대로 갔다.

대오가 멎었다. 앞에 낭떠러지가 있으니 준비하라는 명령이 뒤로 전달되였다. 여전히 한마디말도 없이 진서는 자기의 이전 보조강사를 눕혀놓고 혁띠를 풀어 두손과 허리를 묶었다. 박신규가 버둥거리며 비명을 련발했지만 사정없이 눈우로 잡아끌었다. 낭떠러지우에서 내려다보니 골안을 가득 메운 눈구뎅이속에서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지리산 서북쪽의 제석봉을 사이에 둔 계곡이였다.

세찬 바람에 눈가루가 뽀얗게 흩날렸다. 사람들이 눈구뎅이를 몸으로 파헤치며 전진해가는데 선두가 통로를 내여도 무정한 눈더미는 계속 무너져내렸다. 날이 밝고있었다.

진서는 마지막으로 꽁꽁 묶은 박신규를 벼랑아래로 굴렸다. 그가 깊은 눈구뎅이에 빠져드는것을 보자 그자신도 눈을 딱 감고 몸을 던졌다.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람루와 같이 해여진 옷이 쫙- 찢어지는것을 알았으나 곧 천길땅속에 잦아든듯 의식을 잃었다. 그렇다, 무엇인가에 세게 부딪쳤었다. 잔등이 째지고 터진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것을 깨달은것은 얼마후의 일이였다. 그것도 격렬한 총성이 터지며 그를 두들겨 깨우지 않았더라면 우물속같은 눈구뎅이에 빠져 얼어죽었을런지도 모른다.

앞서나간 대오가 제석봉릉선의 적들을 족치기 시작한것 같았다. 여기서 파구를 내지 못하면 남부군의 주력은 골안에 갇혀 전멸을 면치 못한다. 아우성치는 눈보라속에서 미국제소총들이 벌떼처럼 떠들어댔다. 적아간에 사용하는 무기가 모두 미국제였으므로 어느편이 우세한가를 총포성으로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빨찌산들은 돌격전에서도 《만세!》를 웨치지 않는다. 정규군과 달리 은밀한 기동과 불의적인 기습만을 위주로 해온 그들이여서 목표를 향해 벼락같이 달려들고는 소리없이 사라지군 하는것이다.

총소리에 의식을 차린 진서는 눈더미속을 파헤치며 박신규를 찾기 시작했다.

자기가 찾는 사람이 발밑에 묻혀있는줄도 모르고 성난 메돼지마냥 정신없이 굴을 뚫느라고 시간을 허비했다. 한순간 발밑이 무너져내려서야 그속에 묻히여 꽁꽁 얼어버린것 같은 그를 파낼수 있었다.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비벼대고 참대그루터기에 찔려 무섭게 퉁퉁 붓고 자주빛으로 얼어버린 발까지 주물러댔다. 극심한 아픔때문인지 마침내 그가 눈을 떴다. 천왕봉의 바위밑에서 속내의를 찢어 감아준 다리가 맨살이 드러나있었다. 가랑잎들을 쑤셔막았던 상처에서는 벌거우리한 진물이 흘러내렸다.

《신규, 살았지, 응?!》

《책임강사동… 지이…》

《자 또 가자구, 내가 업을게.》

하지만 빈몸으로도 헤여나오기 어려운 눈구뎅이였다. 동무들을 소리쳐 부르고싶었으나 어데로 사라졌는지 눈바람소리만 머리우에서 아우성칠뿐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포위를 돌파한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깊숙한 골바닥에 떨어지고말았다. 비로소 그는 자기가 여기서 속절없이 죽을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죽는것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헛된 죽음일뿐이다.

바로 그때였다.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꿈결에서처럼 아득한 상공에서 가늘고 새된 소리가 귀전에 마쳐왔다.

《진서동지!-》

《책임강사동지!-》

소속도 분명치 않는 그를 찾아 사람들이 눈구뎅이를 헤집고있는것이다. 포위를 뚫고나갔던 그들이 잃어진 두사람때문에 되돌아온것이였다.

진서는 별안간 목구멍이 불에 그슬린듯 아무 소리도 낼수 없어 신규를 잡아끌며 눈속을 마구 파헤쳤다. 그러자 바로 지척에서 눈이 무너져내리는것을 보았다. 몇사람이 일시에 그들쪽으로 허우적거리며 미끄러져내리고있었다.

진서가 한번도 본일이 없는 박병주(박종하참모장의 련락병을 하던 사람)와 미식소총이며 수류탄들로 그쯘히 무장을 갖추고있는 사람들 둘이 달려온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리현상사령관이 직접 그들(자기의 호위병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모두 달라붙어 눈구뎅이에서 기여나오자 다시 실신해버린 박신규를 마대짝처럼 맞들고갔다. 박신규를 살리기 위하여 앞서나간 부대를 따르지 못하고 환자트가 있는 마천동계곡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여 어깨와 팔굽으로 눈더미를 헤치며 죽음을 맞받아갔다.

×

도중에 눈속을 기여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어 미끌미끌한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오는것을 시꺼먼 손으로 움켜잡고있었다. 무슨 힘으로 릉선을 기여올랐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얼어붙은 돌바닥을 아득바득 허비며 기여온탓에 오른손가락들은 죄다 손톱이 찢겨져있었다. 그를 통하여 마천동계곡의 비밀아지트(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위한)가 적의 습격을 받고 수십명의 빨찌산들과 투쟁인민들(로약자들, 녀인들)이 몰살당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살아남은 세사람이 자기 뒤를 따르고 있다고했다. 그런데 그들을 따르고있는 한개 중대의 적들이 또 있었다.

박병주가 나서며 자기가 적들을 유인하겠으니 안전하게 피신시켜달라고 진서에게 부탁했다. 그와 또 한사람이 자기들을 로출시키며 릉선우로 뛰여오르자 적들의 몰사격이 시작되였다. 진서는 환자트에서 살아남은 세사람을 급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서 하정례와 아라를 또 만나게 되였다. 정례와 아라가 서로 부둥켜안은채 앞서간 사람의 피자국을 따라 기여오는데 그뒤에서는 피범벅이 된 또 한사람이 끌려오고있었다. 이미 숨진 사람을 죽기내기로 끌고있는것이였다.

진서는 박병주가 남겨두고간 전투원과 함께 정례와 아라를 각기 둘쳐업고 음달쪽의 눈무지속으로 뛰여들었다. 창자가 쓸어나온 사람도 박신규도 그속에 끌어들였다. 무질서한 총소리는 박병주네가 달려간 릉선너머로 멀어져가고있었다. (그후 박병주는 적의 제2차대공세때 대성골의 피의 격전에서 치명상을 입고도 결사대로 나가다가 전사하였다.)

《나를 쏴주-》

부상자가 간청했다. 단말마의 몸부림에 입귀로 피거품이 흘러내렸다.

《제발… 동지들!…》

하정례가 보다 못해 그에게 자기의 권총을 넘겨주려 했다. 진서가 처녀의 팔목을 비틀어잡으며 거칠게 부르짖었다.

《안돼, 그래선 안되오!… 동문 살아야 해. 그러자고 여태 죽을 고생을 다하며 싸워왔소?》

창자를 움켜쥐고 가릉가릉하던 그가 두눈을 흡뜨며 진서를 쳐다보더니 까맣게 타든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것은 진정 더는 견딜수 없는 고통과 피로에 지쳐 고요히 잠들고싶어하는 사람의 마지막간청이였다.

《난 웃으며 죽을기라, 울지 않아. 혁명이 아님사 워찌 그럴수가 있간디. 입산할 때 모지락스럽게 나를 붙들고 울던 그, 그녀에게 내가 웃으며 가더락꼬 말해주씨오. 동지들, 그럼… 잘 싸워주- 김장군님 모시고 오래오래 살락꼬요.》

참을길없는 고통에 피거품을 내불며 그는 몸부림쳤다. 최후의 모대김, 더는 견딜수 없는 육체의 경련, 그는 벌써 죽은 사람이였다. 까칠한 입술은 달달 말려들고 눈물에 젖은 턱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그를 도와야 했다. 이제 그를 수술대우에 올려놓는다 해도 살려낼 가망은 없을것이다. 고통만 더해줄뿐… 진서는 자기의 팔뚝시에서 우드득소리가 나는듯이 느껴졌다. 죽음의 문지방에서 괴로움에 비틀리고있는 사람을 빤히 보면서도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주로왔다.

《도-동지들.》 중상자가 이를 갈며 신음하였다. 《제발, 제발… 도와 주-》

하정례가 다가서며 진서에게 권총을 내주었다.

《빨리요, 진서동지.》

가는 속삭임이였지만 베천을 찢는듯 날카롭게 들렸다.

그러나 진서는 와뜰 놀라며 뒤걸음쳤다. 진정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뼈를 깎는듯 한 동지의 아픔을, 단말마의 고통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하정례의 칼끝같은 눈길에서 한순간 경멸의 차디찬 빛이 번쩍이는듯 했다. 부들부들 떨고있는 진서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쥐며 처녀는 또 속삭이였다.

《됐어요, 책임강사동지.》

하여 처녀는 중상자의 몸우에 소리없이 엎드리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러대였다. 진서는 처녀가 중상자의 손에 권총을 쥐여주고 그것을 옆구리쪽, 심장이 있는 그쪽에 끌어주는것을 보았다.

《동지, 잊지 않겠어요.》

비로소 중상자의 희번득이던 눈동자가 한곳에 초점을 모았다. 한순간 으르듯이 커지는 동자, 그속에서 흔들리는 불빛, 그는 마침내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고- 고맙소, 동- 지들…》

《잘 가세요.》

뜨거운 속삭임… 이윽고 물기에 젖은듯 한 총성과 함께 모든것이 끝났다. 참을길없는 고통은 드디여 끝났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간 그 빨찌산대원의 약간 벌려진 입가에 한점 미소가 얼어붙어있었던듯… 진서의 뇌리속에 새겨진 그 미소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계속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말한마디없이 떨고만 있던 아라가 울기 시작한것이였다. 그러자 하정례가 몸을 일으켰다.

《울지 말아.》

이렇게 말하는 그 녀자의 눈에도 초물같이 진한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처녀는 진서에게로 싸늘한 눈빛을 옮겼다.

《나를 욕하시겠죠? 무서운 녀자, 그렇게 소리치고 싶으시겠죠?》

진서는 떡- 하고 이발을 맞쪼으며 수밤송이같이 까칠하게 자란 처녀의 머리에 얼어든 손을 올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한단말인가. 눈물의 아픔을 동정하거나 모진 용기를 찬양한단말인가?!…

보통사람들은 우리가 왜 죽음을 겁내지 않으며 웃으며 갈수 있는지 다는 알지 못하리라. 무엇때문에 끔찍한 시련을 맞받아가며 《김일성장군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를 웨치는지, 그때 그들이 무엇을 믿었고 또 그들의 삶이 어째서 참되고 훌륭한것으로 일러지는지 다는 알지 못하리라. 그것을 말로써 설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그것을 굳이 설명해야만 한단말인가. 그들의 굴함없는 투쟁이, 최후의 미소가 다 말해주지 않았는가!…

인제는 다섯사람이 제석봉을 향하여 기여가기 시작했다. 무릎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사방에서 적들이 수림과 등판, 골바닥까지 참빗처럼 훑으며 쏘다니고 머리우를 도는 직승기에서는 변절자 차일평이 자기자신과 말 못 하는 최동환의 이름으로 《리현상선생에게 말합니다.》, 《남부군용사들에게 묻고싶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동지들!》하고 끝없이 짖어대였다. 한번은 그자가 알고있는 녀성들인 양봉순, 하수복(의무요원), 리정례(박영발의 서기), 조복애, 하정례의 이름까지 꺼들며 안락한 생활과 결혼, 가정에 대하여 지껄였는데 공중에서 자기의 이름까지 불리워지자 하정례는 순간 총알에 맞은듯이 흠칫했다. 처녀의 확대된 커다란 눈이 머리우를 날아가는 직승기에 불꽃을 날렸다. 마치 선무방송을 하는 차일평이 눈앞에 있는듯 처녀는 새파랗게 질리여 부르짖었다.

《네가 날 모욕했으니… 넌 죽어야 한다. 꼭 내 손에 죽게 될게다!…》

앙당그려문 이새로 내뱉은 그 부르짖음이 하정례의 한생의 다짐으로 되리라는것을 그때 진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제석봉에 이르기전에 두차례나 적과 조우하였다. 사령관의 호위병으로 있던 젊은이가 몸에 30발이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뒤 퉁퉁 부어오른 발때문에 진서의 어깨에 실려있던 박신규가 수류탄을 안고 적들속에 굴러내려가 자폭하였다.

재빨리 덮쳐든 동지달의 시꺼먼 어둠이 나머지 사람들을 가까스로 숨어있게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덫은 걸음마다에 놓여있었다.

밤이 되자 거대한 지리산전체가 모닥불로 타오르는듯 싶었다.

4만여명에 달하는 적들이 발을 딛고서있는 모든 곳에서 일제히 불을 지폈던것이다. 앞에도 뒤에도 릉선우에도 골짜기에도 온통 불, 불이였다. 참으로 그것은 류혈을 구가하고 꿈과 념원을 짓태워버리는 불의 대축제인듯 했다.

두자루의 권총에 다섯발의 총탄… 진서와 정례는 아라를 껴안고 제석봉계곡의 벼랑끝에까지 이르렀다. 그날 새벽 보조강사를 혁띠로 묶어 굴려던지던 그 자리였다. 이렇게 진서는 해종일 죽음의 고비고비를 넘기며 또 원점에로 돌아온것이였다.

그때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죽은듯 기척없이 끌려오던 아라가 갑자기 《앙-》하고 울면서 미친것처럼 소리쳤던것이다.

《난 싫어. 안갈래- 아버지가 무서워요!-》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한순간 굳어져있던 진서가 그애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멀지 않은 불무지쪽에서 왁작 떠들며 적들이 총을 란사하기 시작했다.

《남부군이다!》

사방 퍼부어대는 총탄이 그들이 서있는 벼랑에도 날아왔다. 진서는 잠시 생각해볼새도 없이 아라를 번쩍들어 벼랑아래로 내던졌다. 째지는듯 한 비명이 순시에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순간을 놓치면 다 죽고만다. 그는 뜻밖의 일에 멍청해진 하정례도 움켜잡았다. 거친 속삭임이 쏟아져나왔다.

《정례, 내려뛰오. 알겠소?》

그러나 정례가 사납게 뿌리쳤다. 어둠속에서 새파란 불빛이 파르르 떨리는것이 알렸다.

《싫어요.》

《정례!》

《다치지 말아요. 아무래도 죽을걸… 내가 놈들을 막겠어요.》

《뭐라구, 아무래도 죽을걸?!…》

피가 뿜는듯 분노의 발작이 폭발하였다. 정례가 미처 손을 들어막을새도 없이 그는 꽛꽛하게 언 손으로 처녀의 따귀를 벼락같이 후려쳤다. 앙상하게 여위고 피기 한점없이 연약한 처녀가 눈더미우에 나동그라졌다. 신음소리도 없이 마른 삭정이처럼 부러져나간듯 했다.

하지만 진서는 사정이 없었다. 어느새 또 처녀에게 달려들어 힘껏 잡아일으켰다.

《살아야 해, 이 미친것아, 끝까지 살아서 싸워야 해!》

하정례가 신음소리처럼 울부짖었다.

《그럼 진서동진 어떻게 해요?》

《살아야 해. 알겠어?》하고 진서는 똑같은 소리를 거칠게 뿜으며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불같은 충동을 못이겨 처녀를 꽉 끌어안았다. 《살아야 해. 기어이!…》

다음순간 그는 처녀를 질질 끌다싶이 하고는 아라가 던져진 그 벼랑밑 눈구뎅이로 죽어라 하고 차던졌다.

진짜 미친것은 바로 김진서 그자신이였다. 그네들을 살리기 위해 미쳐야 했다. 누구든 살아서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할것이 아닌가. 하정례, 우린 살기 위해서 싸우는거요. 살고 사랑하기 위해서 때론 미치기도 하는거란말이요!…

적들이 벼랑턱으로 달려들고있었다. 발치에서 눈가루들이 날리고 바위에 부딪쳐 도탄되는 탄알들이 뱀꼬리처럼 퍼런 불로 꿈틀거렸다.

《저쪽이다!-》

전지불들이 휘딱거리며 어둠을 찢었다. 진서는 그쪽에 대고 아무렇게나 한방 쏴갈기고 릉선으로, 벼랑끝에서 좀 더 멀리 벗어나려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자기의 권총에 3발밖에 없다는것도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수류탄이 있었으면, 한방 꽝! 하고 터뜨렸으면!… 그러나 그가 허리춤에 매달고있던 수류탄은 보조강사 박신규가 뽑아들고 적들속에 굴러가 자폭했었다.

또 한방 대중없이 갈기고 다시 뛰여올랐다. 한순간 훌쩍 튕겨오르듯 하면서 멎어섰다. 어깨죽지를 때린 뜨끔한 충격과 함께 요동치던 근육이 뜨거운 물에 풀리는듯 하더니 다음엔 무수한 불꽃이 눈앞에서 사물거렸다. 그는 비청거리며 권총을 떨어뜨리고 두손을 벌려 허공을 그러쥐면서 무릎을 꺾고쓰러졌다. 차디찬 눈더미가 그의 화끈 달아올랐던 두볼을 묻어버렸다.

그는 손톱으로 땅바닥을 허비며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피에 젖은 손가락짬에서 눈가루만 삐여져나올뿐이였다.

군화발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힘껏 밟아대더니 옆으로 툭 차서 얼굴이 우로 향하게 했다.

《빨갱이새끼!》

사납게 씨벌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징박은 미국제군화가 가죽을 무두질하듯 그의 얼굴을 마구 문다져놓았다. 얼굴에 붙어있는 피에 젖은 눈을 밀어던지는것이였다. 피범벅이 된 눈과 흙이 입으로 쓸어들고 살가죽이 벗겨진듯 쓰라린 아픔에 홧홧 얼굴전체가 달아올랐다.

《전지를 켜봐!-》

사나운 웨침소리에 이어 두세개의 전지불이 그의 두눈을 때렸다. 눈과 흙에 가리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밝은 불빛에 눈시울을 떨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구나. 짜식!》

군화발이 또 그의 머리를 세게 찼다. 그러자 모든것이 짜릿한 아픔과 함께 천길나락속으로 떨어져내리는듯 했다.

《장호일등병 이리 나왓!》

그는 꿈결에서처럼 이렇게 씹어뱉는 소리를 들었다.

《총창으로 찔럿!》

그의 얼굴을 문다지던 군화발이 이번엔 숨통을 짓눌렀다.

《뭘해, 짜식! 총창을 들엇, 여길 찌르란말야!…》

쇠붙이소리가 났다.

전지불들이 껌벅거렸다.

눈앞에서 번뜩이는 시퍼런 총창.

명령받은 놈이 두서너발자국 물러서는듯 했다. 그를 둘러싸고있던 사병들모두가 자리를 내주며 급히 비켜서는것을 알수 있었다. 이렇게 죽음이 왔는가, 꼭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그래도 무섭진 않다. 어인일인가, 왜 죽음이 이다지도 태연히 오는가, 죽음을 맞는것이 이렇듯 평온하다니… 벼락을 치는것처럼 야단스럽지 않단말인가?…

《장호일등병!》

《옛!》

총창이 날아들고있다. 가쁜 숨소리, 언땅을 무겁게 밟는 군화발소리… 제발 정통을 찔러라. 이놈들아, 면바로 가슴을!…

금시 총창이 박히려는 찰나 《가만!》 하는 웨침소리가 났다. 총창이 그의 배허벅에서 미끄러졌다.

《2소대장, 무슨 일인가?》

《옛, 중위님, 빨갱이를 처단합니다.》

번쩍거리는 전지불, 옆구리의 땅에 박혀 푸들거리는 총창, 새로 온 놈이 역시 군화발로 그의 머리를 툭툭 차서 돌려놓았다.

《이놈은 지휘관이 분명해,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끌어갓!》

《옛. 중위님!》

시꺼먼 그림자들이 전지불을 막으며 그한테로 기울어졌다. 이윽고 너덜너덜해진 그의 옷깃을 거머쥐는것이 알렸다. 두놈인가 세놈인가 그를 잡고 끌어가기 시작했다. 옷은 벗겨져 목언저리에만 걸려있고… 드러난 등어리와 배가죽이 삐죽삐죽한 돌뿌다구에 사정없이 찢기고 나무등걸에 머리를 짓쪼았다.

차츰 고요가 그를 구름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씨벌거리는 소리도 발자국소리도 아득한 천공으로 사라지고 밑창없는 어둠과 시꺼먼 공허만이 그를 싸안고 깊고깊은 천길나락속으로 자꾸만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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