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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남의 열풍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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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8-07 18:29 조회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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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18

《동지들!》

오성오는 연탁 량모서리를 두손으로 짚고 장내를 둘러보았다. 하얗고 갱핏한 그의 얼굴이 이날은 더욱 창백해보였으나 오목할사한 두눈은 정기있게 번쩍이였다.

《저는 당위원회로부터 분공을 받고 우리 공장의 30여년 력사를 감회깊이 돌이켜보았습니다. 그 30여년세월에 깃든 만가지 사연을 1시간동안에는 다 이야기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험소소장 강충현동무네 일가가 받은 사랑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여 몇대목 추려서 말하려고 합니다.》

오성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제가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것은 우리 나라에 천리마의 새 시대를 열어놓은 그 유명한 1956년 12월전원회의를 한달 앞두고있는 그해 11월초였습니다.

저는 열여덟살에 흥남기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라남기계공장에 배치되여왔습니다. 당시 라남기계공장에 기술자격증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김책공대졸업생 2명과 전문학교졸업생 3명이 있었으므로 제가 기술자입직순서에서 다섯번째였습니다. 기술력량이 부족하던 때여서 공장에서는 전문학교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같은 저를 지배인 직속부서인 생산기술부 지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때 지배인이 하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공장은 원래 청진에 있었는데 수상님께서 라남에 옮기도록 해주고 여기에 친히 터를 잡아주시였소. 동무가 서있는 그 자리가 바로 옛날 일본군 라남19사단의 양마사가 있던 자리야. 수상님께선 공장터전을 잡아주시면서 공장로동계급의 살림집도 거리 한복판에 크게 잘 지어주라고 하셨소. 이제 수상님께서 우리 공장을 보러 오신다니 모실 준비를 잘하기요.》

저는 그날부터 언제면 수령님께서 오실가 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목을 빼들고 정문밖을 내다보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해가 다 지난 다음 이듬해 1957년 5월 10일 아침 8시 30분에 수령님께서 소문도 없이 문득 오셨습니다.

공장종업원들이 모두 떨쳐나와 발을 동동 구르며 만세를 웨쳤습니다.

저는 그날 생산기술부 지도원으로서 여러가지 통계자료들을 가지고 련락병처럼 지배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수령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뵈올수 있는 행운이 차례졌지요.

그날 수령님께서는 주물직장부터 들어가보셨습니다. 천정기중기의 쇠바가지가 왔다갔다하는 작업장은 소란스럽고 어수선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쇠먼지가 날리는 작업장을 돌아보시면서 여기에 기계공장을 전망성있게 크게 꾸리자, 일본군 라남19사단이 틀고앉아있던 자리에 평화적인 로동계급의 공장을 꾸리는것이 얼마나 좋고 의의가 있는가고 하며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광복직후 내가 여기에 와보니 무기가 수두룩하게 있었습니다. 조선인민을 학살하던 무기입니다. 동무들은 라남의 력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노예살이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계기지를 튼튼히 꾸려 우리 나라를 그 어떤 제국주의자들도 얼씬 못하는 불패의 강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말씀을 마치고 전기로건설직장쪽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로건설을 하느라 억대우같은 사나이들이 철판을 메고 뛰여다니고 또 한쪽에서는 까만 작업복을 입은 녀성로동자들이 주런이 서서 중좌에 흑연가루를 바르고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주물에서는 전기로가 심장과 같다고 하시며 사람도 심장이 든든해야 건강해서 오래 살수 있는것처럼 전기로가 기운차게 숨을 쉬며 열을 뿜어야 주물에서 꽝광 쇠를 부어낼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철판을 메여나르는 남자들속에 끼여있는 한 녀인을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그 녀자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여 내려온 교원출신의 안성녀라는 녀인이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함북도 인민병원 부원장이였는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월남도주하였습니다.

조직적인 후퇴대렬에 섞여 산으로 들어가던중 잠간 집에 들려 앓는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간 사람이 그길로 월남도주하였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안성녀는 남편이 집에 들렸다가 산으로 가는것을 분명 보았다며 월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안성녀의 남편은 일제시기 고용로동자를 두고 어물공장을 운영하던 소기업가의 아들로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였습니다.

후퇴대렬에서 리탈한 부원장의 행동을 서울로 도주하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으로 생각할수 있은것은 그의 동생과 맏아들이 서울에 있었기때문이였습니다.

한때 청진고급중학교 문학교원이였던 안성녀 역시 일제시기 중산계층의 딸로서 리화전문학교까지 나온,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녀성인테리였습니다.

그는 남편으로 하여 가정주위환경이 어지러워진데다 소녀시절 리광수, 박계주와 같은 소설가들을 찾아다니며 문학지도를 받은것을 비롯하여 몇가지 문제가 제기되여 경향성이 나쁜 교원으로 딱지가 붙어가지고 라남기계공장 전기로작업반에 내려오게 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연약한 어깨에 철판을 메고 비칠거리며 다니는 안성녀를 가리키며 지배인에게 물으시였습니다.

《저 녀성에겐 왜 저렇게 힘든 일을 시킵니까. 40을 넘은 중년부인같은데…》

지배인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어물어물하였습니다.

이윽고 수령님께서는 수행일군들이 만류하는데도 먼지가 풀썩거리는 전기로작업장으로 걸어가시였습니다.

새까만 먼지들이 수령님의 모자와 어깨우에 사정없이 떨어져내렸습니다.

나는 가슴이 막 조여들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로동자들의 손을 하나하나 다 잡아주시다가 안성녀의 차례가 되자 《녀성의 몸으로 수고하십니다.》하고 측은한 눈길로 쇠검댕이가 묻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시였습니다.

《아주머닌 원래 그전부터 이런 힘든 일을 했습니까?》

《난생 처음 해봅니다.》

아주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올렸습니다.

《이 공장에 녀성들에게 맞춤한 직종들이 많은데 왜 이런 힘든 일을 합니까? 자진해서 전기로작업반에 왔습니까?》

안성녀아주머니가 그 물음에는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수그리였습니다. 녀인의 얼굴이 굳어지는것을 보고 수령님께서는 허리를 조금 굽히며 아이는 몇이나 되는가고 물으시였습니다.

《9살나는 남자애와 13살되는 딸애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웁시다. 지난해부터 우리는 초등의무교육제를 실시했습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이것은 안성녀아주머니에게 있어서 제일 대답하기 어려운 가장 무서운 질문이였습니다.

《수상님, 저의 남편은…》

녀인은 목메인 소리로 말꼭지를 떼고는 더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목이 터진것처럼 도저히 걷잡을수 없는 울음이였습니다.

지배인은 당황해서 어쩔바를 몰라했습니다.

《그만하오. 그만하시오.》

수령님께서는 물결치는 안성녀아주머니의 어깨를 다독여주시고는 더 캐여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시였습니다.

《내가 작년에 쏘련에 갔을 때 스베르들롭쓰크의 〈우랄마슈〉중기계공장에 들렸댔는데 거기서 〈구두쟁이는 만두를 굽고 만두장사는 구두를 기우랴.〉하는 로씨야속담을 하나 얻어들었습니다. 로력배치를 적재적소에 해야 합니다. 녀성들은 중로동을 시킬것이 아니라 섬세한 기술로동을 시켜야 합니다. 지배인동무, 토론해서 이 아주머니를 녀성들이 일할수 있는 맞춤한 자리에서 일하게 하시오.》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주물직장을 다 돌아보고 조기직장으로 걸음을 옮기시였습니다.

조기직장에는 희천공작기계공장에서 가져온 《1엠 670형》선반기가 10여대 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수행한 일군들에게 지금은 공작기계가 10대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으로 새끼를 쳐서 100대, 1,000대가 되게 하여야 한다, 지금 온 나라가 12월전원회의의 정신을 받들고 천리마의 기세로 달리고있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1차5개년계획기간에 우리는 사회주의공업화의 토대를 구축하고 인민들의 의식주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자고 한다, 그러자면 기계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중공업에서는 기계공업이 기본핵이다, 나쁜놈들이 기계에서 밥이 나오는가 하는데 밥도 나오고 다 나온다, 농촌을 기계화하자고 해도 기계가 필요하고 제철소에서 쇠를 많이 뽑자고 해도 기계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가실무렵 안성녀아주머니를 잊지 않고 그 녀성동무가 왜 그렇게 울었는가, 무슨 사연이 있지 않는가고 물으시였습니다.

지배인은 어찌하는수없이 안성녀아주머니의 남다른 가정주위환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올렸습니다. 도의 한 간부가 그 녀자를 《련옥》에 집어넣어 단근질을 시켜야 한다며 전기로작업반에 보내게 한 사실까지 다 아뢰였습니다.

저는 그때 안성녀아주머니의 운명을 놓고 몹시 긴장해있었는데 수령님께서는 그게 무슨 큰 문제라고 《련옥》에 집어넣어 단근질을 시킨단말입니까, 남편의 월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을 속인다고 한다는데 왜 자꾸 나쁘게만 해석해서 사람을 구렁텅이에 집어넣으려고 합니까, 그것이 계급투쟁입니까, 사상투쟁입니까, 그것이 바로 낡은 사회 권력자들이 하던 못된 버릇입니다라고 하시며 안성녀아주머니에게 교편을 잡게 하라고 하시였습니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나 1959년 3월 10일 수령님께서 우리 공장을 또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날은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이날도 아무런 기별도 없이 오후 6시께 문득 우리 공장에 찾아오시였습니다. 그때 마침 공장확장건설을 도와주러 나왔던 라남고급중학교 학생들이 수령님을 뵈옵고 만세의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수령님께서 한 녀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고계시는데 나이지숙한 녀교원이 달려와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가 바로 안성녀였습니다.

《수상님, 그새 옥체건강하셨습니까?》

《아, 교원입니까. 학생들을 데리고 수고하십니다. 학생들을 글뒤주로 만들지 말고 이렇게 로동에 단련시키는것이 좋습니다. 학생교양을 잘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안성녀교원을 치하해주시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시지 못했습니다. 전기로작업반에서 보신 쇠검댕이에 얼룩진 안성녀의 얼굴과 그날의 얼굴은 너무도 달라서 알아보실수 없었던것입니다.

《선생은 나이도 퍽 들어보이는데 언제부터 교원을 했습니까?》

《수상님, 제가 바로 재작년 5월 전기로작업반에서 수상님을 뵈온 안성녀…》

안성녀아주머니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느껴울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그제야 안성녀를 알아보고 더 한층 반색을 지으시였습니다. 그러나 안성녀는 북받치는 감격에 아이들처럼 그냥 소리내여 울었습니다.

《선생, 그만하시오. 아이들이 봅니다. 학생들이 있는데 뭘 이럽니까.》

수령님께서는 안성녀가 진정한것을 보시고야 학생들을 잘 키우라는 말씀을 남기고 현장을 돌아보러 가시였습니다.

그날도 수령님께서는 모든 작업장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돌아보셨습니다.

수령님께서 첫 현지지도를 하신 때로부터 2년사이에 우리 공장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주물, 주강, 조기, 단조, 제관, 제형을 비롯하여 여러 소재직장과 가공직장들이 새로 건설되거나 확장되였으며 공작기계는 새끼를 쳐서 200여대나 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그날에 무엇보다 기뻐하신것은 10대의 선반기를 가지고 200여대의 새 기계를 만들어낸것입니다.

《토끼처럼 기계의 번식률이 좋구만. 대단해, 대단하오. 라남이 제일이야.》

수령님께서는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크게 웃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공장을 현지지도하고 근처에 있는 경성아마공장으로 가셨습니다. 그이께서는 경성아마공장에서도 작은 단능공작기계 한대를 가지고 여러대의 공작기계를 만들어낸것을 보시고 《라남과 경성, 두 공장에서 공작기계 새끼치기하는것을 보니 신심이 생깁니다. 이것을 전국에 보급하여야 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여 자그마한 경성아마공장에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전국에 호소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당 력사에 찬란히 아로새겨진 제1차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은 이렇게 우리 공장과 깊이 련결되여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력사적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때로부터 20여년세월이 흘러 1985년 6월 21일 우리 라남기계공장에서 제2차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날이 바로 수령님께서 우리 공장을 여섯번째로 현지지도하신 날이였습니다.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전 8시45분 공장을 찾아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가 유압식종합채탄기를 계렬생산하는것을 비롯해서 300, 500, 2,000마력권양기를 해마다 수십대씩, 대형마광기는 10여대씩 생산하고있고 은률벨트콘베아보다도 연장길이가 더 길고 구조가 복잡한 장거리벨트콘베아를 만들어 검덕광산에 보내주었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장하오. 참 대단해. 내가 바라고 구상했던 그런 공장이 됐소.》하고 기뻐하시여 우리는 모두 눈물을 흘렸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때 다같이 수령님께 말씀올렸지요.

우리 공장이 비약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것은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지도를 받은 때부터라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우리 공장을 처음으로 현지지도하신것은 아까 고정순동무가 말한것처럼 1968년 6월 10일이였습니다.

이날은 우리 공장이 수령님과 지도자동지, 두분의 현지지도를 함께 받은것으로 하여 더욱 잊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몹시 궂혔습니다. 매지구름이 떠도는 하늘에서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면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내리는것이 아니라 마치 바께쯔로 물을 퍼붓는것 같았습니다.

이런 궂은 날씨도 마다하지 않고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 우리 공장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공장마당은 물바다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공장책임일군들과 함께 주물직장으로 갔을 때는 그이께서 벌써 수행일군들과 함께 작업장을 돌아보고계실 때였습니다.

저는 눈앞이 아뜩했습니다. 천정 여러군데에서 비가 내려 로동자들이 풍막을 치고 일하고있었습니다.

시뻘건 쇠물남비를 나르는 천정기중기 꼭대기에도 풍막을 씌웠는데 추녀의 락수물처럼 풍자락으로 쭈루룩쭈루룩 비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천정에서 새여내리는 비물은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우에도 사정없이 떨어졌습니다.

어느 한 일군이 수령님께 우산을 받쳐들었으나 그이께서는 《우산을 치우시오. 로동자들이 비를 맞으며 일하고있는데 내가 무슨 렴치에 우산을 쓰고있겠소.》하고 우산을 밀어내시였습니다.

공장책임일군들이 인사를 드리자 수령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각하〉들!… 〈각하〉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각하〉들의 방에도 이렇게 비가 샙니까?》하고 물으시였습니다. 가라앉은 조용한 음성이였지만 우뢰와 같은 꾸중이 담겨있어 저는 가슴이 얼어드는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네번째로 뵈옵는 수령님, 오실 때마다 해빛같이 따뜻하고 밝은 웃음만을 지으시던 수령님께서 그날은 노하신 표정이였습니다.

《동무들, 보라. 저 어린 처녀를…》

수령님께서는 풍을 치고 서서 중좌에 흑연가루를 바르고있는 어린 처녀를 가리키시였습니다. 방수포로 대충 풍을 쳐놓기는 했으나 처녀의 작업복은 화락하니 젖어있었습니다.

《로동자들은 이렇게 비를 맞으며 일하게 하고 간부들은 좋은 방에 편안히 앉아있으니 왜정때 공장하구 뭐가 다른가. 아주 엄중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작업장 비새는 문제로 하여 도당, 시당의 책임일군들, 공장책임일군들을 참가시켜 회의를 하시였습니다.

그때 초급일군들은 가공직장에 가라고 해서 가보니 두눈에 정기가 도는 젊은분이 와계셨습니다. 그날 수행원들중 누구보다 제일 바쁘게 뛰여다니며 수령님을 보좌해드리시던분이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이시였으나 당시는 모두 그분을 수령님의 부관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분께서는 6메터 치절반에 쇠물을 녹여서 써붙인 《자력갱생》이라는 글을 가리키며 누가 저렇게 좋은 글을 써붙였는가고 물으시였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한게 아니라 7년전 1961년 5월 13일 수상님께서 우리 공장을 현지지도하실 때 저렇게 쇠물로 글자를 써붙이라고 교시하시였습니다.》

어느 직장장이 이렇게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끓는 쇠물로 글자를 써붙이니 더 뜻이 깊어보입니다.

〈자력갱생〉, 얼마나 힘있는 구호입니까.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로동계급을 무장시키는것은 그들에게 자기의 힘을 믿게 하는 중요한 정치사업입니다.

자력갱생하여야 혁명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다는것은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을 하는 과정에 발견한 혁명의 진리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시여 진리는 누가 창조하거나 만들어내는것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것이다, 뉴톤도 만유인력법칙을 만들어낸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해있는 자연의 진리와 법칙을 발견했다, 엥겔스도 변증법이라는 리론이 나오기전에 변증법은 존재해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였다고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존재하는 그 첫날부터 자력갱생하였다, 그때문에 인간은 사멸하지 않고 생존해왔다, 이 생의 원리를 역행하여 남의 힘을 믿고 남에게 의탁하여 살아가게 되면 망하게 된다고 하시였습니다.

《모두다 자력갱생의 불을 지펴 기계혁명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그이께서 주먹을 높이 쳐드시자 우리는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그날 윤현덕, 최강철을 비롯하여 창의고안과 기술혁신에서 모범을 보인 로동자, 기술자들을 만나주셨는데 그중에는 갓 스무살의 나어린 선반공도 있었습니다. 그 나어린 창의고안명수가 바로 안성녀의 아들인 오늘의 공업시험소 소장 강충현동무였습니다.

제가 그를 소개해드리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안성녀어머니의 아들이란 말이요? 그 어머니에 대해선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지금도 교원생활을 하시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물으셨으나 강충현동무는 대답을 못올리고 고개를 수그리였습니다.

안성녀는 그무렵 또 하나의 좋지 못한 일이 제기되여 다시 교단에서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그가 한사코 부인해오던 남편의 월남이 확인되였던것입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방나라의 어느 연구소에서 지구물리학을 연구하고있던 맏아들이 인편으로 아버지가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평양에는 갈수 없지만 동부도이췰란드에는 갈수 있으니 거기서 어머니를 만나자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하여 안성녀는 당을 속인 나쁜 녀자로 되여 교원대렬에서 쫓겨났습니다.

안성녀는 그 고민으로 하여 뇌혈전이 생겨 몸져눕게되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이 사실을 료해하시고 안성녀를 교단에서 추방한것은 아주 옳지 못한 처사였다고 나무라시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실지 남편이 산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월남을 부인한것인데 수령님을 속였다고 죄를 씌우면 됩니까? 옳지 못합니다. 내가 이제 좋은 약을 구해서 내려보내주겠으니 그것을 쓰고 어머니의 병이 나아지면 동부도이췰란드에 가서 아들을 만나보게 합시다.

강충현동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도와주겠소.》

인정이 넘치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이 뜨거운 말씀을 듣고 강충현은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후, 안성녀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보내주신 약의 덕으로 몸이 완쾌되여 아들을 만나려 동부도이췰란드에 가게 되였습니다.

어머니는 20년동안 깊이 간수해두었던 은수저 한틀을 려장속에 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 은수저로 말하면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것으로서 강충현소장의 아버지가 전쟁전까지 가정생활을 하던 전기간 사용한 수저입니다.

밥상우에서, 부엌가시물에서 수십년세월 연마된 하얀 은수저, 그 수저를 맏아들편에 서울에 있는 남편에게 전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1971년 6월 8일 어머니는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박아무개라는 대외일군이 역에 마중나와 어머니를 려관으로 안내하면서 《어머니의 생일이 6월 12일이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생일을 왜 묻는가 싶어 어정쩡해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문건을 보니 어머니의 출생일이 1911년 6월 12일이다, 자칫하면 길가에서 환갑을 쉴번 하였다, 그러니 아예 평양에서 생일상을 받고 떠나게 하자, 늘 마음고생을 하며 남편도 없이 서럽게 살아온 어머니인데 환갑상을 잘 차려주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외일군의 말을 듣고 어머니는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목석인들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여 6월 12일 평양려관에서 어머니는 환갑상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온밤 잠들지 못하고 베개잇을 적시였습니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대외일군과 함께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며칠동안 도시참관을 한 다음 렬차로 뽈스까를 거쳐 동부도이췰란드의 오스르반호프역에 내렸습니다. 오스르반호프역이란 동역이란 뜻인데 베를린시에서 제일 큰 역입니다.

역에서는 벌써 대사관 승용차가 어머니를 대기하고있었습니다.

대사관일군은 어머니를 베를린시 판코브구역에 있는 고급호텔 1등실에 숙소를 정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후 드디여 아들이 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어머니는 호텔홀에서 창문을 내다보며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플라타나스나무며 페칸나무, 목란, 주목나무들이 운치를 돋구고있는 호텔정원으로 동양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는 저게 내 아들이 아닌가 하고 가슴을 울렁이군 하였습니다.

오후 5시께 대외일군이 안경을 낀 웬 중년사나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전혀 낯선 사람이여서 어머니는 처음 그가 대사관일군인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사관일군이 《어머니, 왜 그러구 서있습니까. 아들입니다.… 강충일씨, 어머닙니다.》하고 어머니와 아들에게 번갈아 소개하였습니다.

그 순간 두 모자는 한자리에 굳어진듯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이윽고 아들은 천천히 안경을 벗고 어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

아, 왼쪽 눈시울밑에 먹으로 찍은듯이 새겨있는 검은 김, 어머니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네가 정말 충일이냐?》

아들은 그제야 엎어질듯 다가서며 어머니를 그러안았습니다. 그리고 미친듯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하고 연방 부르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젖을 만지더랍니다.

동지들! 이 광경을 상상해보시오. 민족분렬의 비극이 가슴을 터지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목에 건 약주머니를 보여주면서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전설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은수저를 내놓았습니다.

아들은 내내 울었습니다. 허나 아들을 찾아 만리길을 달려간 어머니는 그날밤으로 맏아들과 슬픈 작별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반나절밖에 말미를 얻지 못하고 동으로 넘어왔던것입니다.

어머니는 동부도이췰란드에서 돌아와서 아들딸을 앉혀놓고 말하였습니다.

《죽어서도 이 에미의 혼은 오직 수령님과 지도자동지만을 따라갈게다.》

동지들! 《수령결사옹위》의 정신은 추상적인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상감정입니다.

안성녀아주머니가 동부도이췰란드에 가서 아들을 만났던 1970년대로 말하면 우리 공장이 성황기에 오르고있던 때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참으로 라남기계공장에서는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권양기를 만들라면 권양기, 채탄기를 만들라면 채탄기, 벨트콘베아를 만들라면 벨트콘베아, 당이 맡겨주는 모든 과업을 다 해제꼈습니다.

하기에 당은 언제나 우리 공장의 로동계급을 굳게 믿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985년 6월 여기 라남땅에서 제2차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의 봉화가 타오르게 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섯달후 우리 5월10일공장에서 우리 나라 어느 기계 공장에서도 만들어보지 못한 최신설비인 110미리메터보링반을 처음으로 자체로 제작하여 온 나라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85년 11월 9일 우리 기업소에서 110미리메터보링반을 생산한데 대하여 크게 치하해주시고 가정환경이 복잡하거나 본인의 과오가 있었던것으로 하여 당대오에 들어서지 못하고있던 18명의 동무들을 친히 료해하시고 한날한시에 화선입당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습니다.

동지들! 오늘이 바로 11월 9일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특히 여기 앉아있는 윤현덕동무에 대해서는 《이런 동무가 있어 우리 당이 강합니다. 입당을 보증합니다.》라고 친필로 보증해주셨습니다.

그날 온 라남시가 떠들었지요.

우리는 화선입당한 18명의 동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거리를 순회하면서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이 라북천동뚝에 올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고맙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만세!》, 《우리는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흐느껴 웨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공업시험소 소장 강충현동무도 그날에 화선입당한 18명 성원들중의 한사람입니다.

수천명의 종업원들을 가지고있는 큰 공장에서 18명이란 물론 많은 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18명의 화선입당자를 통하여 당의 품이 얼마나 넓고 따사로운가를 페부로 느끼게 되였고 그 품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라남의 로동계급이 기계혁명의 봉화를 높이 추켜들고 나아간다고 높이 평가해주시고 우리가 만든 110미리메터보링반에 《봉화호》라는 이름을 달아주시였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뜻깊은 자호입니까.

《봉화호!》

110미리메터보링반에 새겨있는 그 글자를 무심히 보지 마시오.

우리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친히 달아주신 110미리메터보링반 《봉화호》를 당중앙과 숨결을 같이 하며 조국의 안녕을 지키는 사회주의조선의 봉화대, 봉수대로 생각하고있습니다.

하기에 우리는 지난기간 언제나 당이 걱정하는 가장 어려운 일들을 맡아나섰고 일단 맡은 다음에는 몸이 열쪼각이 나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때문에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무슨 어려운 일이 제기되면 라남의 로동계급이 생각난다고 하시였습니다.

지난해에 2,700여메터의 백두산 향도봉에 대형권양기를 석달안에 설치하여야 할 어려운 과업이 제기되였을 때에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그것을 우리 공장에 맡겨주셨고 올해 여름 《HM기》개발사업을 어느 기계공장에 맡길것인가 하는 론의가 있을 때에도 모든 간부들이 다 《제개비네 집안》으로 된 5월10일공장엔 맡길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우리 지도자동지께서만은 그 공장의 재간둥이들을 믿는다고 하시며 맡겨주자고 하시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최근에 제기된 B광물심부탐사용암석절삭공구 80여개를 생산할데 대한 과업도 우리 공장에 맡겨주시였습니다.

동지들! 생각해보시오. 당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면 과연 이런 어려운 과업들을 맡겨주겠는가? 실로 과업은 믿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맡겨주신 이 과업들을 결사집행하여야 하며 또 할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HM기》를 우리 식으로 개조하는데 대해 고개를 저으면서 동무네 수준에서 그걸 어떻게 개조하겠다고 하느냐며 비웃고있지만 우리는 개조할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 수준이 어떻다는건가. 5월10일종합공장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우리는 당이 요구하고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 바라시는것이라면 모든것을 다 해낼것이요.

그렇지 않은가! 1985년 11월 9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랑과 믿음속에서 화선입당한 18명동무들! 우선 동무들에게 물어봅니다. 대답하시오.

오성오는 장내의 중심좌석을 향해 바른손을 힘있게 뻗치면서 노한듯이 소리쳤다.

일순 장내는 폭풍전야의 정적처럼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설태섭이 벌떡 일어나 주먹을 높이 쳐들며 구호를 웨쳤다.

《올해에 맡겨진 당의 방침과제를 무조건 넘쳐수행하고 〈HM기〉를 철저히 우리 식으로 개발하자!》

그 우렁찬 고함에 떠받들린듯 장내의 전체 성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주먹을 뻗치며 화답하였다.

《개발하자! 개발하자! 개발하자!》

우뢰같은 함성이 우르릉 우르릉 회관천정과 벽을 울리며 오래도록 여운을 끌다가 천천히 잦아들자 맨 뒤끝에 앉아있던 박준이 안경을 번뜩이며 일어섰다.

《동지들! 저는 나이 스물다섯이 되도록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던 무지렁이로서 돌멩이처럼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며 남조선과 일본땅을 굴러다닌 사람입니다.

저의 부모님과 형님, 누나들은 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에 희생되여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부모형제 하나없는 혈혈단신 외로운 몸이던 제가 조국의 품에 안겨 우리 글을 배우고 공훈기계제작공으로, 많은 발명권을 가진 발명가로, 조선로동당원으로 자라났습니다. 제가 왜 새삼스레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부터 강소장일가가 받아안은 사랑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와 다름없는 사랑을 받은 자신의 일이 돌이켜져서입니다. 친구간에도 은혜를 몰라보면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데 하물며 하해같은 수령님의 은덕을 저버린다면 그게 무슨 인간이겠소.

동지들! 저는 맹세합니다. 공장적으로 제일 걸리고있는 마광기 대치차 4대를 올해안으로 생산하도록 하는데 저의 지혜를 바쳐 수령님의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 합니다. 할수 있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거친깎기로부터 정결깎기, 세밀깎기, 최정밀깎기 등 네번치기로 깎던것을 단번치기로 깎으면 한달 내지 한달반동안에 넉대의 대치차를 다 깎아낼수 있습니다.

며칠전에 책임비서동지가 단번치기로 깎을수 없겠는가 걱정하길래 그때부터 제가 단번치기할수 있는 자동정밀치절공구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다 됐습니다. 동지들, 단번치기합시다.》

박준이 주먹을 흔들며 웨치자 장내에 요란한 박수갈채가 울리였다. 뒤이어 주물부직장장이 일어섰다.

《동지들, 저는 초급일군으로서 여태 불평만 하고 건달을 부렸습니다. 동지들, 용서하시오. 우리 주물직장에서 불을 달겠습니다. 대상설비생산계획을 12월 15일전으로 기어이 넘쳐수행하겠습니다. 모두다 년간계획수행을 위해 돌격합시다.》

또다시 요란한 박수소리가 장내를 진동하였다. 박수갈채의 여운이 가라앉기전에 주혁민책임비서가 주먹으로 집행부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종업원궐기대회를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돌아가도 되겠습니다. 이름부르는 다음의 동무들은 당위원회에 잠간 들렸다 가십시오.》

주혁민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뜬금으로 윤현덕, 강송무, 리택수, 최강철, 강충현 이렇게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가 부르는 이름들은 1985년 11월 9일 화선입당한 18명 당원들이였다.

보고도 없고 결속발언도 없는, 어쩌면 파격적이라 할수 있는 종업원궐기대회는 이렇게 끝났다.

종업원들은 누구라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회관출입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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