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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넋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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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8-09 15:34 조회3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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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계연선의 종착역에 도착한 양은순은 렬차에서 내렸다. 자그마한 우유빛가방을 어깨에 멘채 한동안 역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오도카니 서서 주위를 살폈다. 102련대에서 정치위원을 하고있는 오빠는 편지에서 당부하기를 떠나기 전에 꼭 418련대 정치위원네 집에 전보를 치라고 하였다. 주소가 지금 자기의 가방안에 있었다. 그는 애초에 전보를 칠 생각을 하지부터 않았다. 오빠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학생선발을 가는 자기가 그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 호의적인 편의부터 바라겠는가? 더구나 정치위원네 딸의 재능을 오빠의 장담으로만 가늠할수 없는 조건에서 더더욱 따분한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고 우려했던것이다.

은순은 생소하고도 자그마한 읍거리를 서름서름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특이하게 눈에 띄우는것은 오가는 사람들 거의모두가 군인들이라는것이다. 방금 역밖으로 쏟아져나온 렬차손님도 사민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았고 엷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모두 군용차들이였다.

은순은 비로소 자기가 분계선을 가까이 한 전선지구에 와있음을 느꼈다. 이젠 누구든 만나 어떻게 418련대로 가는가를 물어야 했다.…

한 녀인이 예닐곱살쯤 되여보이는 사내애의 손목을 잡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은순의 곁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땅에 놓인 커다란 가방이며 배낭을 봐선 그들도 방금 렬차에서 내린듯싶었다.

은순이가 막 길을 물어보려는 찰나 중좌령장을 단 군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사내애가 마주 달려가 군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오, 우리 혁이 왔구나!》

중좌는 아들을 번쩍 안아올리더니 안해에게도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느라 수고했소!》

녀인도 마주 반겼다.

《마중나오셨군요.》

《마침 후방물자를 실으러 나오는 차가 있었소.》

중좌는 길옆에 서있는 화물차를 가리켰다. 마대같은것을 골삭하게 실은 적재함우에는 이미 여러명의 군인들이 타고있었다.

은순은 용기를 내여 중좌앞으로 다가갔다.

《군관동지…》

가방이며 배낭을 집어들던 중좌가 주춤 은순이를 바라보았다.

《저, 418련대로 가자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군관은 이 고장 처녀가 아닌듯싶은 은순의 류다른 차림을 의아히 더듬어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저 자동차는 사단지휘부까지 가는데…》

《사단에서 련대까지는 멉니까?》

《멀지. 헌데 우린 임무받은 시간이 있어놔서…》

중좌는 잠시 역앞을 두리번거리다가 은순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쪽방향으로 가는 차는 현재 우리 자동차밖에 없으니 결심대로 하오.》

은순은 앞뒤를 가릴 사이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여기 역앞에서 오도가도 못할것만 같았던것이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그곳까지라도 타고 가겠습니다.》

마침내 은순은 그들을 따라 자동차있는 곳까지 갔다.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적재함우에 오르자 자동차는 곧 출발했다.

녀인이 소곤소곤 묻기 시작하였다.

《418련대에 누가 있는가요?》

《학생선발을 갑니다.》

《학생선발이요?》

《금성제1고등중학교 성악반 학생모집입니다.》

《그러니 금성제1고등중학교 교원인가요?》

은순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녀인의 호기심이 더 커진듯싶었다.

《418련대라면 모집대상자가 누구의 자녀인데요?》

《정치위원동지의 딸입니다.》

《그런데 왜 마중나오지 않았어요?》

은순은 대답대신 또다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인은 저 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서둘러 차에 오른게 아닐가요? 지금쯤 마중나올수 있겠는데…》

은순은 녀인의 질문을 피할겸 부드럽게 물었다.

《친정집에 갔다오는가요?》

《예, 남새종자를 가지러…》

《남새종자요?》

은순이가 의아해하자 녀인은 약간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해에 있은 가물이나 큰물피해를 봐도 그렇고 올해에 들어와 더 긴장되는 국가사정을 두고봐도 그래, 이젠 군대가 부식물까지 농장에만 의거할수는 없게 되였어요. 그래서 우리 군인가족들이 부업반을 조직하고 남새는 물론 고기생산까지 맡아하자고 나섰어요.》

은순의 눈가에서 미타해하는 빛을 느낀 녀인은 가볍게 웃었다.

《못할건 없어요. 벌써 세대들에서도 집짐승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전연지대 군인가족들이 그런 일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라의 짐을 덜어주어야 할게 아니나요.》

전연지대 군인가족, 남새생산, 고기생산… 은순에게는 그의 말들이 모두 생소하게만 여겨졌다.

차가 거의 한시간쯤 달려 갈림길이 있는 곳에서 천천히 멈춰섰다.

중좌가 운전칸에서 나오더니 적재함우의 은순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차는 이제 사단지휘부로 들어가는데 련대까지 꽤 걸어가내겠소? 여기서 25리요!》

25리?… 은순은 출퇴근차를 간혹 놓쳐 걸어보던 평양에서의 거리들과 시간을 피끗 가늠해보았다. 자기의 걸음으로 세시간, 극상 많이 잡아 네시간이면 넉근히 가고도 남을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중좌에게 인사를 했다.

《정말 여기까지 태워주어 고맙습니다. 전 걸어갈수 있습니다.》

은순은 오를 때처럼 중좌부부의 부축을 받으며 적재함에서 내렸다.

중좌가 곧바로 뻗은 도로앞쪽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농장마을을 가리켜보였다.

《저기서 다시 남쪽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가느라면 련대지휘부가 바라보이오. 더러 군인들을 만날수 있는데 길을 꼭 다시 묻소.》

녀인이 미타해하는 어조로 은순을 걱정해주었다.

《예서 좀 기다리는게 어떨가? 혹 정치위원동지가 마중나올지 알겠어요? 만일 여기서 기다리다가 가지 못하면 우리 집에 오세요.…》

녀인은 골짜기의 굽이진 길 저쪽을 가리켰다.

《저기 산굽이를 돌면 군인사택마을인데 혁이네 집을 찾으면 돼요. 하루밤 우리 집에서 지내느라면 련대로 가는 차도 만날수 있을거예요.》

은순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형편을 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좌도 옆에서 안해의 편을 들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꼭 그렇게 하오.》

마음씨 후더운 군인부부의 당부를 남기고 자동차는 서서히 산굽이쪽으로 향하였다.

은순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부부한테 불편을 주고싶지 않았고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그때까지 련대에 도착 못하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농장마을까지 도착한 그는 중좌가 대준대로 남쪽으로 향한 길로 꺾어들었다. 길 좌우로는 두엄무지들이 군데군데 쌓여있는 강냉이밭이 펼쳐져있었다. 그때까지 힘이 아직 빠지지 않아 걷기도 수월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강냉이밭도 끝나고 인가 하나 없는 무인지경이 시작되자 점차 맥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태여나 여직껏 혼자서 이런 먼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일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친 그 순간부터는 왜서인지 긴장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부지대의 무연한 고원을 막연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갈대가 무성한 진펄이며 바위와 새초로 혼잡을 이룬 크고작은 언덕들이 연줄연줄 그의 눈앞에 다가왔다.

은순의 가슴속으로는 비로소 도시에서의 호젓한 저녁길과는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엷은 두려움과 걱정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곳의 어디엔가 성악에 푸른 꿈을 둔 소박한 처녀애가 살고있다고 생각하니 떠나오던 때의 호기심이 더해짐을 어쩔수 없었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머리속에는 이번 려행길을 두고 편지에 써보낸 오빠의 부탁이 돌이켜졌다. 단순한 학생모집이 아니라 조국이 겪는 준엄한 현실을 최전연과 이어보는 중요한 계기로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지 않아 최전연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않던 그로서는 그 권고를 받고 더욱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서둘러 이번 려행길을 결심했던것이다.

은순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 생각에는 몇십리길을 걸은듯싶었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련대지휘부 같은것은 보이지조차 않았다. 이제 또 얼마나 가야 할가?…

그는 노근해오는 다리의 아픔을 느끼며 길옆으로 걸어가 힘겹게 주저앉았다. 바람 한점 없는 초봄날의 따스한 해빛이 내리비치고있었다. 발치의 묵은 풀잎을 헤치고 새파란 냉이싹이 돋아나고있었다. 그 싹을 바라보느라니 이제 자기가 만나게 될 소녀의 표상이 여러모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저 합격기준에 도달할 처녀애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이처럼 먼 려행길을 걸은 보람도 있을게 아닌가.…

은순은 별안간 털썩털썩 울려오는 발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동보총을 멘 여러명의 군인들이 렬을 지어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있었다. 그들한테 418련대지휘부를 묻고싶었으나 왜 그런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저 멀리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은순은 대충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해는 퍼그나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하늘가를 초조하게 둘러보던 은순은 걸음을 다그치기 시작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갈대와 새초만이 무성한 이 들에 갇힐것만 같았다. 점점 무릎이 아파나고 갈증까지 겹쳐들었지만 걸음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덧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고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은순의 눈앞에 불쑥 갈림길이 나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으로 향한 길을 그냥 가느라면 련대지휘부가 보인다던 중좌의 말이 언뜻 떠올라 다시금 갈림길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야산까지 길이 뻗어있었다. 점점 내려앉는 어둠때문인지 무성한 나무숲만 우거진 그쪽으로는 건물같은것이 보이지 않았다. 련대지휘부라면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있을텐데…

마침내 갈림길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기진맥진하여 가느라니 또 한갈래의 좁은 갈림길이 나졌다. 반가움과 기대를 안고 갈림길 량쪽을 바라보았으나 높고낮은 구릉지대를 타고 뻗은 길들 끝쪽에는 무성한 갈대숲만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펼쳐져있을뿐이였다.

은순은 더럭 겁이 났다. 정말 련대지휘부를 찾지 못하고 갈대숲만 바라보이는 여기서 오도가도 못하고 밤을 새울것 같은 그 촉박감을 안고 역시 갈림길을 지나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상싶은 길우에 이제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속에서 무슨 괴물같은것이 뛰쳐나올것 같은 짜릿한 공포심으로 가슴은 점차 조여들었다.

은순은 별안간 자기가 밟고 가는 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른 풀대같은것이 발목을 휘여잡는걸 보면 사람의 래왕이 영 있은것 같지 않았다. 마침내 더 걸어갈 용기를 잃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기가 두번이나 지나쳤던 갈림길이 생각났다.

그 두 갈림길중 어느 한끝에 련대지휘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리쳐 울며 구원을 바라고싶었지만 온몸을 바늘끝으로 찌르는듯 한 공포심에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은순의 눈앞에 두명의 검은 형체가 불쑥 나타나더니 눈부신 전지불이 자기쪽으로 쫙― 비쳐졌다.

은순은 그만 악! ―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어푸러졌다.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날카로운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섯!…》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던 은순은 자기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느라 얼핏 전지불에 드러난 형체를 가려보고 그들이 군대임을 알아보았다. 안도감으로 하여 다시 주저앉으려는데 가까이로 다가온 군인이 나직하나 선뜩하게 소리쳤다.

《일어섯!》

은순은 아무런 항변도 할수 없는 자기의 처지를 원망하며 비칠비칠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걸엇!》

은순은 그들이 재촉하는대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무엇때문에 《체포》되였는지 그 리유를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다. 가는 도중 기운이 빠져 몇번이고 주저앉을번 하였으나 자그마한 병영까지 겨우 자신을 지탱해냈다.

드디여 눈앞에 드러난 건물, 창문가에서 고요히 흘러나오는 불빛, 그 불빛에 실리여 어둠짙은 대기속에서 뜻밖에도 황홀히 녹아드는듯한 서정짙은 노래소리…

병사가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총메고 떠나온 산천에 물어보라

록음기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였다. 그 노래소리는 의혹과 당황함으로 제정신이 아니였던 은순의 가슴속에 안정을 가져다주기 시작하였다. 노래소리에 혹하여 계단을 오르던 은순은 한쪽신발뒤축이 삐뚤하는 바람에 하마트면 뒤로 벌렁 넘어질번 하였다. 옆에서 호송하던 병사가 날래게 부축하여 위기를 면했으나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발뒤축이 떨어져나갔던것이다. 그것을 주을념도 못하고 그런대로 한발을 절며 계단을 올랐다.

출입문앞에 그를 세우고 그중 사관인듯 한 군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노래소리는 바로 그 방에서 울려나오고있었다. 수상한 녀자를 데리고왔다고 보고하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여나왔다. 순간 노래소리도 뚝 멎었다. 문이 열리며 군인이 나오더니 은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들어가시오!》

희미한 등잔불이 내비치는 방안에는 후리후리한 키에 매우 건장하게 생긴 상위령장을 단 군관이 책상을 한옆에 두고 서있었다. 그 책상우에 록음기가 놓여있었다. 피로에 해쓱하게 질려 한발을 절며 들어서는 처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그 군관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쪽으로 왜 나왔소?》

은순이가 질문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하자 상위는 여유를 두어가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인가도 없는 경계지대에 친척방문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분계선쪽으로 나오고있었소?》

은순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분계선이라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대답을 못하자 상위는 요구했다.

《신분을 확인할수 있는 증명서가 있으면 봅시다.》

은순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안에서 시민증을 찾아들었다.

옆에 서있던 사관이 그것을 받아 상위에게 가져다주었다.

상위는 의심스런 눈길로 은순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시민증에 시선을 박았다. 다음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신분은 확인되였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리유에 대해선 설명해야 합니다.》

《전… 길을 잃었습니다. 418련대지휘부를 찾아가다가…》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은순은 사정하듯 부탁했다.

《련대정치위원동지한테… 제가 왔다는것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학생선발을 나왔습니다.》

《학생선발이요?》

《그렇습니다. 전 금성제1고등중학교 교원입니다.》

은순은 상위의 놀란듯 한 눈길과 마주쳤다. 그 순간에 어쩐지 그가 별로 낯익은감이 들었다. 그러나 상위의 시선이 너무 오래 계속되여 얼굴을 붉히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별안간 상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왜 정치위원동지한테 알리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상위는 송수화기를 들더니 련대교환을 찾기 시작하였다.

은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교환수와 몇마디 말을 주고받던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치위원동지는 현재 중대지도를 나가고 없답니다. 며칠후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며칠후에요?》

은순은 삽시에 온몸이 노그라드는듯 한 허탈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비칠거렸다.

상위는 급기야 책상 한옆의 의자를 옮겨 은순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은순은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경황조차 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위가 두 군인에게 명령했다.

《동무들은 나가오.》

상위는 시민증을 돌려주며 여전히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동무의 몸상태로는 이밤중으로 련대지휘부까지 못 갑니다. 여기 군인사택에서 하루밤 쉬고 래일 아침 떠나도록 합시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위는 책상옆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모습을 쫓던 그는 다시한번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곧 시들한 웃음을 지었다. 이 외진데서 복무하고있는 그를 도대체 어디서 본 일이 있겠다고…

한동안 시간이 흘러 문이 열리며 상위와 함께 소박하면서도 복스럽게 생긴 웬 젊은 녀인이 들어섰다.

녀인은 은순의 곁으로 다가와 친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길을 잃었다지요. 얼마나 혼났겠어요. 우리 집으로 가자요.》

녀인의 손에는 뜻밖에도 한컬레의 편리화가 쥐여져있었다.

《우선 신발부터 바꾸어신구요.》

은순은 자기 발치에 놓인 편리화를 당황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상위가 미리 말해주어 녀인이 가져온것이 분명했던것이다.

녀인은 다시금 부드럽게 권했다.

《어서요.…》

은순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과연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채 권하는대로 신발을 바꾸어신을수밖에 없었다.

《꼭맞는군요.》

녀인은 몹시 기뻐하며 한손엔 벗어놓은 신발을 쥐고 따스한 온기가 어린 다른 손엔 은순의 팔을 꼭 잡고 부축하였다.

《이젠 가자요.》

은순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뚝뚝하기는 해도 진심이 느껴지는 상위에게 감사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는 녀인을 따라 출입문을 나섰다.

그 찰나, 무엇때문인지 등뒤에서 상위가 녀인을 찾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녀인이 곧 나와 조용히 웃었다.

《평양처녀를 불편없이 돌봐주라는 당부군요!》

은순은 상위의 진심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끼였다.

녀인의 집은 병영가까이에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래목에서는 두어살난 애기가 쌔근쌔근 잠자고있었다. 수수한 앉은뱅이경대, 그리 크지 않은 장우에 놓인 두채의 이불을 보아 첫눈에 신혼살림이라는것이 알렸다.

《우리 살림이란 그저 이래요!》

녀인은 은순을 향해 어줍은 미소를 짓고나서 봄가을외투를 벗겨 옷걸이에 걸어준다, 자그마한 세면장에 더운 물이 가득 담긴 버치를 가져다놓는다 하며 부지런히 집안을 오갔다.

은순은 그 성의에 송구스럽기만 했다. 길을 잃어 생판 처음인 녀인의 집에서 하루밤 신세를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 마음을 안고 세면장에 가서 얼굴을 씻고 오니 어느새 녀인은 저녁상을 다 차려놓은 뒤였다. 은순의 손을 잡아 상앞에 이끌며 오히려 자기가 미안해했다.

《집안끼리 먹자고 지은 저녁이니 탓하진 마세요.》

은순은 고마운 눈길로 녀인을 마주보았다.

《저… 애아버지는…》

《애아버지는 늘 중대에 나가살다싶이 하는걸요. 정치지도원이니까요. 아까 그 상위동지는 중대장이구요.…》

녀인은 은순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국이 식어요.》

시래기토장국, 절인 더덕으로 만든 무침, 총각김치, 오곡밥에 가까운 잡곡밥… 소박한 음식상이였다.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들었다. 렬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던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온몸이 노근해오기 시작하였다. 그 기미를 느꼈는지 녀인은 서둘러 상을 치우고 이불을 폈다. 나란히 잠자리를 했으나 피로에 지친 길손을 념려해서인지 아무 말도 시키지 않았다.

한편 누우면 인차 잠이 올것 같던 은순은 웬일인지 점차 정신이 맑아옴을 느꼈다. 방금전에 들었던 감명깊은 노래소리가 귀전에 쟁쟁 들려오고 중대장이라는 상위의 모습이 눈앞에 환영처럼 얼른거렸다.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

18층 고층살림집, 돌덩어리처럼 떨어져내리는 두세살난 아이, 경악한 사람들의 놀란 웨침소리, 녀인들의 새된 비명소리…

아니,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은순은 자기 생각을 부정해버렸다.

오늘 겪은 일들이 꿈속에 흘러간 일인듯싶었다. 나서자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낯설은 환경, 그것도 초면인 집에 이렇게 누워있자니 더욱 그랬다.

은순은 조심히 몸을 뒤척이였다.

녀인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어디 편치 않아요?》

은순은 어둠속에서 살레살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잠동무하여 일찍 누운탓에 녀인도 잠이 오지 않는지 조용조용 말을 건네여오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떠났다지요?》

《예.…》

《그러니 이런 고장은 처음이겠군요.》

《예.…》

녀인의 어조에 부러움이 실렸다.

《평양!… 한번 가보고싶군요. 실컷 구경도 하고…》

은순은 조심히 그 말을 받았다.

《여기선 인가도 없으니 더 적적하겠군요.…》

《그럼요.…》

웬일인지 녀인은 조용히 웃었다.

《중대에서 살림을 하는건 우리뿐이거던요. 앞으로 여러 세대가 생기면 나아질거예요. 그리고…》

창문으로 흘러드는 푸릿한 달빛이 잠든 애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녀인의 모습을 아름답게 채색해주었다.

《애가 크면 대대부업반에도 나갈 작정이예요. 가족소대훈련에도 참가하구요. 그땐 아마 적적한줄 모를거예요.》

은순은 저으기 놀라 물었다.

《가족소대라니요?》

녀인은 평양처녀의 호기심에 이끌린듯 은순이쪽으로 돌아누웠다.

《사격훈련도 하고 야전간호훈련도 하는 말그대로 가족들끼리 무어진 소대랍니다. 전쟁이 일면 남편들과 한전호에서 싸우겠다고 결심했거던요. 애를 낳기 전엔 나두 참가해서 늘 훈련했더랬는데…

힘들기는 하지만 웃을 일도 많고 또 재미도 있었지요.》

녀인의 자랑삼아 하는 말에 은순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이 삼엄하고 적막한 곳에서도 자기 생활에 대한 만족, 긍지가 꾸밈없이 흘러나오고있었던것이다. 녀인은 어떻게 되여 군인가족이 되는 길을 택했을가. 거듭거듭 느끼게 되는 소박함과 진실함이 군관의 안해가 되는 길로 떠밀었고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준것이 아닐가?…

은순의 속마음을 알리없는 녀인은 다시금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중대장동지의 말이 정치위원동지의 딸을 선발한다던데…》

《예.…》

은순은 조심히 녀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노래를 들어본적이 있어요?》

녀인은 가볍게 웃었다.

《아니요. 우리 련대군인가족자녀들속에도 그런 인재가 있다니 너무 기뻐서 그래요. 가끔 텔레비죤에서 유치원이나 학교아이들이 재롱스럽게 노래를 부르는것을 볼 때면 나도 우리 아이를 저렇게 키워보았으면 하는데 여기서야…》

은순에게는 불쑥 이런 생각이 갈마들었다. 여기선 정말 군관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어떻게 하는것일가?…

은순의 그 의혹을 넘겨짚기라도 한듯 녀인은 말을 이었다.

《유치원은 대대에 있고 학교는 련대지휘부에서 10리밖에 있어요. 사실 음악에 대한 소질을 키워주자면 어릴 때부터 해야 하는데 여기서 그런 교양원이나 교원을 어떻게 바랄수 있겠어요.》

은순은 그만 침묵을 지켰다. 무심히 하는 녀인의 말이였지만 어쩐지 자기에 대한 그 무슨 힐난처럼 들려왔던것이다.…

아침에 녀인의 소박한 진정이 담긴 음식을 들고난 은순은 혼자서라도 련대지휘부를 찾아갈 차비를 서둘렀다.

바로 그때 밖에 나갔던 녀인이 저 혼자 호호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한컬레의 구두가 쥐여져있었다.

《어떻게나 정성껏 수리했는지 꼭 새 신발 같네!》

은순은 자기의 밤색구두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길떠날 차비를 하면서 신발생각을 까마득히 잊고있었다는것도 기막힐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것은 뒤축이 떨어져나갔던 신발이 본래대로 수리된것이였다.

녀인은 자기 일이기나 한듯 무척 기뻐했다.

《사실 엊저녁에 중대장동지가 굽떨어진 구두를 두고 가라더군요. 계단에서 신발뒤축을 찾았는데 자기가 좀 수리해보겠다나요. 그런데 중대장동지한테 이런 재간이 있는줄은 정말 몰랐어요, 호호!…》

은순은 다시금 놀랐다. 그래서 엊저녁 방을 나설 때 중대장이 녀인을 다시 찾았던것인가?

어둠속인지라 녀인의 손에 들려있던 구두가 없어진걸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그였다.…

《마침 정기휴가를 떠나는 분대장이 련대지휘부에 들려야 하겠기에 지금 밖에서 기다려요. 같이 가면 될거예요.》

은순은 서둘러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서다말고 주춤거렸다. 어제밤 중대지휘부까지 자기를 데려온 사관이 배낭을 메고 마당에서 서성거리고있었던것이다.

체구는 듬직하나 입귀에 옴폭한 볼우물이 잡힌것이 어딘가 모르게 애티가 남아있어보였다. 나이에 비해 빨리 분대장이 된듯싶은 사관은 제꺽 거수경례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실은 중대장동지가 선생님을 안내하려 했었는데 오늘 군단부참모장동지가 중대에 내려온답니다. 그래서 제가…》

은순은 죄송스레 그 말을 받았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때문에 …》

은순은 바래주러 나온 녀인과 마주섰다. 평양의 집주소를 적은 쪽지를 녀인의 손에 쥐여주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신세진걸 잊지 않겠어요. 평양에 오면 꼭 우리 집에 들려주세요.》

녀인은 감사히 주소를 받아쥐였다.

《음식이랑 변변치 못했어요. 간다니 그저 섭섭한 생각뿐이군요.》

은순은 녀인과 헤여져 분대장과 함께 걸었다.

분대장이 싱긋 웃었다.

《오늘 아침에 말입니다, 모포정돈을 하는데 간밤에 분계선을 넘던 녀간첩을 잡았다고 중대병사들이 수군수군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되게 혼내주었습니다. 하하!…》

은순은 어이없어 따라웃고말았다.

분대장은 자기 말을 계속했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요. 저기 넓은 띠마냥 동서로 뻗어간 나무숲을 보십시오. 거기에 분계선이 있고 그 너머 어렴풋하게 보이는 둔덕우에 적〈헌병〉초소가 있으니까요.》

은순은 흠칫 멈춰서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제밤 그들이 아니였다면 자기가 분계선을 넘을번 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났던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에 경계구역이 있고 각종 차단물계선이 있다는것을 전혀 알수 없는 은순이였다.

《갑시다.…》

분대장은 걸음을 재촉하며 은순의 구두를 살폈다.

《구두가 어떻습니까. 불편하지 않습니까?》

은순은 당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중대장동지한테 미안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떠나오면서 인사도 못 드리고…》

분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은 선생님이 찾아갔어야 하는건데 중대장동진 그런 인사치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더러 선생님을 모시고 곧장 련대지휘부로 가라고 지시했으니까요.》

사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은순은 엊저녁부터 중대장을 두고 품은 생각을 다시 더듬어보았다. 정말 그 사람이 아닐가?

지난해 가을, 뭇사람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잠간 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날 있은 일은 매우 충격적이였다.

고층살림집에서 한 아이가 돌덩어리처럼 떨어져내리고있던 그 시각, 공중에서 떨어져내리는 축구공이라도 잡듯 문지기마냥 그밑으로 비호같이 뛰여드는 한 군관이 있었다.

은순은 다음광경을 보지 못했다. 아찔한 놀라움에 얼굴을 가리웠던 두손을 가까스로 내리웠을 때는 이미 군관의 품에 안긴 아이가 두손을 휘저으며 울고있었다.

인도로를 메우며 오가던 사람들이 두겹세겹 군관을 에워쌌다. 안도의 탄성, 기적적인 소행에 대한 찬사의 목소리…

집을 잠간 비운 사이 아이를 잃을번 했던 젊은 녀인이 달려와 울음을 터뜨리며 군관에게 매달렸다.

은순은 굳어진채 꿈을 꾸듯 그 광경을 보았다.

아이를 구원한 군관이 마치도 전설속의 초인간처럼 보였다. 후리후리한 키, 무쇠처럼 단단해보이던 어깨…

그래서 아이를 무사히 받아안았는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합니까?》

분대장의 질문에 은순은 자신없는 어조로 조심히 물었다.

《저, 중대장동지가 작년 가을 평양에 오셨던적은 없었습니까?》

분대장이 놀라와했다.

《있었습니다. 종합병원에 입원한 우리 중대의 한 병사가 걱정되여 간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순은 자기의 예감이 실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 저으기 긴장해지기까지 하였다.

《평양에서 한 어린애를 구원해주었다는 이야긴 없었습니까?》

《우리 중대장동진 제 자랑할줄 모릅니다. 그러다나니 썩 후날 사회안전부(당시)에서 부대에 통보해주어서야 알게 되였지요.…》

분대장은 갑자기 은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헌데… 혹시 애어머니와 무슨 친척간이라도 되는게 아닙니까?》

은순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현장에 있었을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대장동지를 기억하고있었단 말입니까?》

《너무도 놀랐던 일이기에…》

분대장은 쾌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럴수 있을겁니다. 누구나 그렇게 할수 있는건 아니니까요.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각오와 의무감, 즉각적인 반응, 육체적준비…

우리 중대장동진 어떤 정황에 맞다들어도 좌절과 동요란 절대 모릅니다. 물속에서도 불속에서도 뚫고나갈 길을 찾아낼 지휘관입니다!》

은순은 봄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메마른 잡풀과 떨기나무들만이 가없이 펼쳐진 고원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이처럼 적막한 곳에서 온 평양시를 떠들썩하게 한 군관이 소문없이 복무하고있다는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제 오던 길과 달리 떨기나무와 잡풀사이로 뻗은 지름길을 타다보니 은순은 한시간도 못 걸려 련대군인사택마을에 도착할수 있었다.

분대장은 마을변두리에 있는 아담한 독집으로 은순을 안내하였다.

때마침 부엌문을 열고 나오던 녀인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알아보고 주춤 멈춰섰다.

분대장이 거수경례를 하였다.

《정기휴가를 떠나는 3중대 2소대 2분대장입니다. 학생선발을 나온 금성제1고등중학교 선생님을 데리고왔습니다.》

순간 녀인은 깜짝 놀라와했다. 인정미있어보이는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담으며 은순의 손을 따뜻이 모두어잡았다.

《기다렸어요! 오늘 래일 하면서도 이렇게 소식없이 문뜩 나타날줄은 정말 몰랐어요!》

분대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찾아오다나니 어제밤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 눈에 띄였으니망정이지 하마트면 분계선을 넘을번 했지요.》

녀인은 그만 호호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상에 일도 참! 그런걸 난 분대장동무가 어떻게 되여 선생을 데려왔을가 하고 의심하던중이랍니다.》

《아주머니, 난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서 그러세요. 정말 수고했어요. 고향에 잘 다녀오길 바래요.》

녀인은 분대장을 바래우고나서 친절히 은순을 방안으로 안내하였다.

은순은 소박한 가구들이 놓여있는 방안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오빠네 살림을 보는듯싶었다. 특이하게 눈에 띄우는것은 책상우에 놓여있는 책장에 책이 빼곡이 차있는것이였다. 새 노래집 같은것도 여러권 보였다.

녀인은 은순이와 자리를 함께 하자 은근히 물었다.

《처음 와보는 전연지대니 모든것이 생소하고 서먹서먹하겠지요?》

은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람들은 다 친절하고 좋았습니다. 저를 하루밤 재워준 정치지도원동지네 아주머니도 그렇고 중대장동지도 그렇고 참말 인정이 깊고 고마운분들이였습니다.》

녀인은 얼핏 은순에게 웃음을 건늬였다.

《중대장동지두요?…》

은순은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며 가볍게 웃었다.

《시민증을 요구하며 신분을 확인하였습니다.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은순은 주저주저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호기심을 담고 그냥 지켜보는 녀인의 눈길에 못이겨 뒤말을 이었다.

《그 중대장동지한테 제 구두수리까지 맡기게 될줄은 정말…》

《구두수리까지요?》

은순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제가 만난 여기 전연사람들은 모두 가식이 없고 진실하였습니다.

그들을 평양에 가서도 쉽게 잊을것 같지 못합니다.》

녀인은 몹시 기뻐하는 기색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싶은 심정이군요.》

은순은 먼길을 걸어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한 마음속 안정감을 느끼며 녀인을 바라보았다.

《딸애는 학교에 갔겠지요? 이름은 어떻게 부르는지…》

녀인은 웃음을 지었다.

《순정이라고 해요. 점심에는 집으로 돌아온답니다.》

녀인은 언뜻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입고있는 작업복차림을 내려다보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두루 망설이는 태도였다.

《혹시 어디 일보러 나갈 차비는 아니였는지…》

녀인은 그제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봄철을 맞으며 오늘 부대적인 나무심기를 한답니다.…》

은순은 도리여 미안함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럼 어서 가보십시오. 전 그동안 책이나 보겠습니다.》

《그럼 내 나갔다가 제꺽 돌아오겠어요.…》

녀인은 그러고도 안심치 않은지 웃방문을 열고 침대를 보여주었다.

《피곤하면 눈을 붙이세요. 그저 친오빠네 집에 온걸로 생각해줘요.》

홀로 남자 은순은 책상앞의 의자에 옮겨 앉았다. 무심히 책장속의 새 노래집 한권을 꺼내 책상우에 펼치려다말고 주춤 굳어졌다. 책상 한옆에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는데 받을 사람의 주소에 누구의 방하고 자기의 이름이 적혀져있는것이 아닌가!

은순은 서둘러 편지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의 주소란에 적혀있는 오빠의 이름을 알아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모름지기 순정의 문제가 안심치 않아 보낸 편지일거야.…

은순은 평상시의 오빠답지 않은 꼼꼼한 처사에 속으로 웃으며 편지봉투를 뜯었다.

오빠의 눈익은 필체가 펼쳐졌다.

《…그곳에 도착하여 이 편지를 보게 될 네가 부디 오빠에 대한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일이 최전연의 현실을 네가 직접 느끼고 결심하기를 바라는 오빠의 마음에서 빚어진것이라고 리해하면 정말 고맙겠구나.…》

은순은 점점 긴장해지기 시작하였다. 편지는 자기의 려행목적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있었던것이다.

《…나는 최전연의 군관들과 일생을 같이할것을 결심하고 우리 부대로 찾아온 평양처녀들을 보면서 너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너라고 그 처녀들의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따르지 못할 리유란 굳이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혹시 넌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 처녀들이 그렇다고 하여 부디 내가 그리로 꼭 가야 할 리유란 어디에 있겠는가고…

은순아, 리유가 있다. 너로 말하면 최전연을 선택한 평양처녀들의 훌륭한 소행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련대정치위원인 이 오빠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고 친동생이기때문이다. 나로서는 너를 그 처녀들과 나란히 한자리에 세워보게 됨을 어쩔수 없었다. 더우기 그 처녀들중에는 418련대 정치위원의 녀동생도 있었으니 나 역시 자랑할만 한 녀동생을 둔 정치위원으로서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니?

올해초 집에 갔을 때 너도 나에게 말한적 있었지. 진정 훌륭한 총각이 있다면 자기도 우리 사단에 온 처녀들처럼 최전연으로 가겠다고 말이다.

은순아, 내 보건대 우리 시대의 가장 진실하고 소박하며 훌륭한 총각들은 다 최전연에 있는것 같구나. 그들은 인생의 가장 귀중한 청춘시절을 적들과 직접 총부리를 마주하고있는 최전연초소에 다 바쳐가고있다.

그들이 있어 네가 서있는 교단도 있고 아이들의 밝은 웃음과 맑은 노래소리도 있는게 아니겠니.

이번에 우리가 맞이한 평양처녀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나서자란 정든 수도 평양을 떠나 최전연을 찾아온것이다.

418련대에서는 이미 선보일 대상자까지 선정해놓고서 너를 기다리고있다는구나.

나는 네가 그 총각의 마음에 꼭 들기를 바란다. 오빠로부터》

은순은 놀랐다. 놀라도 크게 놀랐다. 학생선발을 떠난 려행길이 혼사길로 이어져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던것이다. 강습차로 온 오빠한테 했던 말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오빠의 물음을 한번 해보는 롱담의 말로 들었을뿐이였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다 포기하고 사랑하는 평양을 떠나 낯선 고장으로 간다는것을 은순은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것이다.

은순은 한동안 자기를 감감 잊고 망연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렬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정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황량하고도 적막한 들, 그우에 무연히 설레이던 새초와 갈대숲… 여기서 무슨 일을 할수 있을가?

학교와 교단은 둘째치고 인가조차 없으니 사람마저 그리운 곳이다. 자기가 하루밤 묵은 중대정치지도원네 집이 떠올랐다. 앞으로 더 생기게 될 가족세대를 그리며 적막감을 잊어보려는 녀인의 소박한 꿈, 가족부업반, 가족소대를 통하여 생활을 찾으려는 그의 지향과 음악과 교육이라는 자기의 꿈, 리상이 융합될것 같지 않았다. 과연 그 생활을 따라갈수 있단 말인가!

은순은 내심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빠, 가정이란 이렇게 이루어지는것일가요? 왜 동생의 의향도 알아보지 않고…

이때였다. 마당에서 자박자박 녀인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순은 남몰래 무엇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허둥대며 편지를 쥔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부엌에서 나는 인기척소리에 이어 방문이 가볍게 열리며 순정이 어머니가 웃음어린 얼굴로 들어섰다.

《평양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니까 그냥 등을 떠밀더군요.》

녀인은 서둘러 작업복을 벗으려다말고 은순이의 얼굴을 살폈다. 놀라움과 고민의 흔적이 력력한 표정, 그다음 손에 쥐여진 편지를 알아보며 모든것을 짐작한듯 살풋이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어제 선생한테 오는 오빠의 편지를 받아놓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어요.…》

은순은 녀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으나 그냥 침묵을 지켰다.

《편지에서 어떻게 권했는지 모르겠지만 몹시 놀란것 같군요.》

은순은 대답대신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인은 구체적인 사연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군복입은 남정들이야 명령하고 집행하는것밖에 아나요. 처녀들의 속마음까지는 다 알수 없지요. 어찌보면 단순하거던요. 그래서 선볼 총각까지 준비해놓고 선생을 여기로 오게 했던거예요.

결국 나도 이런 난처한 처지에 놓이지 않으면 안되였구요.…》

녀인은 곧 은순을 안심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결혼을 군대식으로 명령하는건 아니지요. 여기서는 모두 선생의 립장을 존중한답니다.

애아버지도 중대지도를 떠나며 신신당부한것이 있어요. 처녀들마다 자기가 품은 리상과 포부에 따라 서야 할 위치가 있는데 군관의 안해로 되는 길만을 옳은 선택으로 볼수 없다고 말이지요.

거듭 부탁한 말이지만 선생이 여기 전연의 현실을 충분히 보고 느끼게 한 다음 본인의 동의에 따라 총각을 마주세우라고 했어요.》

은순은 비로소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군관동지도 제가 여기로 온다는걸 알고있습니까?…》

녀인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대상자를 선정하자니 그 중대장도 알게 되였어요. 그런데 일도 참… 기이한 인연이라 할지 그래서 선생한테 말해줄수밖에 없군요.

선생이 어제 저녁 만났다던 그 중대장이 선보일 총각이였답니다.》

은순은 깜짝 놀라 녀인을 쳐다보았다. 이 집에 도착하여 오빠의 편지를 펼쳤을 때보다 더 놀랐다고 해야 할것이다. 첫번째 놀라움과 두번째 놀라움이 그의 가슴속에서 엇갈려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때 시민증을 받아보고나서 유심히 지켜보던 중대장의 눈길이 불쑥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황황히 고개를 숙였다.

《순정이 어머니, 저… 전 좀 쉬고싶어요.》

녀인은 은순의 뜻밖의 요구에 다소 놀란듯싶었으나 곧 침대가 놓여있는 아늑한 웃방으로 그를 데려다주었다.

녀인이 나가자 은순은 방바닥에 두무릎을 옆으로 눕히고 앉아 침대머리턱에 슬며시 얼굴을 기대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이 사실을 알고있을가? 만약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가?…

은순에게는 불쑥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련민의 감정이 고여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청춘시절에 한대학의 같은 학급반생이였다고 한다. 그때는 전후시기라 대학생들은 전쟁의 재더미를 털고 일어서기 위한 복구건설에 떨쳐나섰다. 그 작업장에서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해제되지 못한 적들의 지뢰를 밟아 그만 한다리를 잃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불구가 된 그런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결혼후 어머니는 의족을 한 몸이였지만 지금까지 대학교단에 서있는 아버지뒤바라지를 충실히 해왔다. 허나 년세가 많아짐에 따라 요즘 의족을 한 다리에 관절염까지 겹쳐 점점 힘들어하는게 알렸다.

은순의 눈섭에는 가랑가랑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오빠는 이것을 생각했을가? 만약 나까지 집을 떠난다면…

점심에 순정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귀엽게 생긴 그를 보자 은순은 자기가 여기로 온 기본목적이 이 처녀애에게 있지 않을가 하고 자체위안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왜 그런지 그 목적이 의심되며 말조차 꺼내기 주저되였다.

아닐세라 순정이 어머니는 은순의 기분을 눈치챈듯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군단지휘부에서 살림을 할 때 순정이는 경연에도 참가했답니다. 그런데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는 취미가 달라졌지요. 성악을 가르칠만 한 교원이 없는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자연과목에 더 취미를 가지게 되였는걸요. 이제는 성악을 다 잊었답니다.》

은순은 이로써 여기에 더 머물러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정작 결심하고보니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는것이 있었다.

그렇듯 나무랄데 없어보이는 군관을 욕되게 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은 몹시 미여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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