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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의 나래 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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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5-06 21:43 조회3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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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3

불타던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서켠하늘의 한귀에 불그스름한 흔적만이 남았다. 어디에나 땅거미가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려관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무수한 창문들에서 형광등의 휘황한 불빛이 쏟아져내렸다. 은은히 흐르는 둥그스름한 야외등빛은 주차장의 승용차들을 부드러운 색조로 선명히 비쳐주었다.

양명심은 한호실의 녀동무와 함께 현관문을 나섰다. 그 녀동무는 처녀연구사인 송옥희였다. 양명심은 리과대학 전자자동화학부출신인 그를 대학시절부터 알고있었다. 대학에서 조직하는 학생과학토론회에 함께 출연하군 했었다. 려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난 두 처녀는 언제까지나 호실에 그냥 붙박혀있을수가 없어 산보길에 나섰다. 려관에서 멀지 않은 보통강유보도를 거닐기로 약속을 했다. 일찌기 과학의 길에 들어선 그들에게는 처녀시절에 누구나 향유하는 산보길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청춘의 랑만과 사랑을 속삭이며 수많은 처녀들이 애인과 함께 록음속을 거니는 저녁마다 그들은 복잡한 력학계산과 콤퓨터설계에 몰두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저녁에는 휴식의 한때를 마음껏 즐길수 있었다.

《려관주변부터 한바퀴 돌아보고 유보도로 나가자요.》

옥희가 말했다. 오목한 그의 눈에 다감한 미소가 새물거렸다. 맑은 샘줄기를 련상시키는 미소였다. 모래알을 뿜어올리며 퐁퐁 솟는 샘처럼 그의 미소에는 행복과 희망이 피여올랐다. 철이르게 전자공학계에 나타난 처녀의 가슴에는 이 저녁 남다른 포부와 랑만이 깃들고있을것이다. 명심은 말없이 웃어보이며 그의 청을 따랐다.

옥희는 명상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때때로 녀성과 과학의 호상관계를 두고 자기딴의 생각에 잠기군 해요.》

《어떻게?》

명심은 흥미를 가지고 눈웃음을 그리며 옥희를 바라보았다. 옥희는 몽롱한 눈길로 아득한 공간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인류과학사를 돌아보면 후세에 이름을 남긴 녀성과학자는 너무도 적어요. 큐리부인이나 쏘피 저맨과 같은 유명한 녀성과학자는 세계적으로도 몇명밖에 안될거예요. 과학은 녀성과 인연이 먼 분야로 인정되여왔지요. 외국의 어떤 책에서는 성별에 따르는 창조활동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썼더군요. 과학이 남성에 가까운 창조령역이라면 예술은 녀성에 가까운 창조령역이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리성적사유능력이 높지만 녀성들은 감성적사유능력이 높다, 그렇기때문에 녀성들은 예술에서 성공률이 높은 반면에 과학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과연 그럴가요?》

《아니.》 명심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남자와 녀자의 기질차이는 있어도 사유능력의 차이는 있을수가 없어요. 녀자들은 감성적사유가 남자들보다 예민할뿐아니라 지적능력에서도 못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동무의 실례가 그걸 말해주지 않나요.》

《나를 거들면서 그렇게 나오니 말할 재미가 없군요.》

옥희는 눈을 할기였다. 명심은 웃음진 얼굴로 자기의 견해를 말했다.

《지난날의 과학사에서 녀성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건 사회력사적조건때문이였지요. 오래동안 사회생활에서 밀려났던 녀성들의 불행한 처지가 그들의 과학적재능을 꽃피울수 없게 하였지요. 쏘피 저맨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나요. 뛰여난 수학적재능을 가지고도 녀자인탓에 대학에 갈수가 없어서 남자로 변성명을 하고 공부를 하지 않았나요. 그의 연구성과에 의해 에펠탑건축의 수학적기초가 이루어졌지만 오래동안 세계수학계는 그가 녀성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지요. 후에는 물론 알게 되였지만… 자본주의가 빨리 발전한 프랑스에서 지난 세기 초까지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다른 나라야 말해서 뭘하겠나요. 그러한 사회적질곡속에서도 과학보다 예술에 성공한 녀성들이 많다면 그것은 과학자로 성장하기보다 예술가로 성장하는쪽이 쉽기때문이지요. 아무리 과학적소질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과학자로 될수 없지만 음악이나 무용같은 예술분야는 그렇게 높은 교육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만 꾸준히 노력하면 소질을 발휘할수 있지요. 우리의 과거력사에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녀성은 많았지만 녀성과학자가 거의나 없었던것은 그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성별에 따라 과학과 예술의 재능을 론하는것자체가 엉터리없는 주장이 아닐가요. 나는 오히려 섬세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력을 가진 녀성들이 남자들보다 과학적재능을 더 훌륭히 발휘할수 있다고 인정해요.》

《옳아요. 나도 그렇게 주장하고싶어요. 이제 보니 명심동무도 녀성과 과학의 호상관계를 두고 깊이 생각해왔군요.》

《나도 녀자니까.》

두 처녀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난 이제 〈녀성과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쓰겠어요.》

옥희는 앞을 바라보며 두눈을 반짝였다. 실은 자기가 준비하는 그 론문을 무르익히기 위해 명심에게 말을 걸어온것이 분명했다.

《엉터리주장을 한 외국의 필자를 론박하기 위해서?…》

《아니, 우리 녀성들을 위해서 쓰겠어요.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에 남녀간의 온갖 사회적차별이 가셔졌지만 과학을 지망하는 녀성은 많지 못해요.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녀성들은 과학사업을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앞세우기때문이지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정생활을 하는 녀성들의 경우에는 과학연구를 하기가 남달리 어려운것만은 사실이지요. 나는 모든 녀성들에게 호소하고싶어요. 과학전선에서 녀성들은 하루빨리 응당한 위치를 차지하자, 그러자면 사랑과 가정의 행복까지를 과학을 위해 희생할 용기와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것없이는 녀성과학자의 영예를 지닐수가 없다, 나라와 민족의 부흥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희생할 각오를 가진 재능있는 녀성들은 과학전선으로 달려오라!》

옥희는 시구절을 읊듯이 마지막에는 억양을 돋구었다.

《그 호소는 좋은데 녀성과학자가 되려면 사랑이나 가정의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는 론조는 납득되지 않는군요. 옥희동무는 혹시 과학을 위해서 결혼을 단념할 생각을 가지고있는게 아니예요?》

명심은 웃으며 물었다.

《굳이 결혼을 해야 한다면 난 남자가 아니라 과학과 결혼하겠어요.》

《거짓말, 과학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것을 바칠 각오가 되여있다는 뜻이겠지?》

옥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은 지나쳤지만 그 심정은 공감되였다. 명심은 그를 미더웁게 바라보았다. 그렇다. 남자들보다도 녀성과학자는 자기희생적인 각오가 더욱 높을 때에만 성공에 이를수 있다. 필요하다면 남들이 향유하는 생활의 모든것을 뒤로 미루고 과학탐구에서 인생의 가장 크나큰 행복과 보람을 찾을줄 알아야 할것이다. 바로 그러한 인생관을 지녔기에 사람들은 녀성과학자들을 특별히 존경하는것이다. 다른 기관에 가서 증명서를 내보이면 누구나 이쪽의 얼굴을 선망의 눈길로 다시한번 바라보군 한다.

《옥희동무, 동무의 론문에 이런걸 보충했으면 좋겠어요.》

《어떤걸?》

《남자들에게도 호소하란 말이예요. 진정으로 사랑을 조국의 부강발전과 결합시킬줄 안다면 녀성과학자들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안해의 연구사업을 위해 자신이 도울수 있는것을 다하라고, 그러면 남들이 누릴수 없는 가정의 긍지와 행복을 찾으리라고. 어때요?》

《좋아요!》

옥희는 손벽을 마주쳤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려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홀로 서있는 한 청년을 보았다. 흰 샤쯔에 회색바지를 입은 그 청년은 머리카락이 더부룩했다. 흔히 보아오던 청년들의 단정하고 세련된 차림과는 달리 어덴가 모르게 초췌한 인상을 주었다. 약간 고개를 젖히고 려관을 줄곧 바라보는것으로 보아 손님들중에서 그 누구인가를 기다리는것 같았다.

무심히 그의 곁을 지나던 명심은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옥희는 갑자기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과 커다랗게 뜬 눈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명심은 얼굴을 붉힐뿐 대답하지 못했다. 두번다시 입에서 놀란 소리가 터질가 겁나하듯 얼른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그제서야 청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 상념에 깊이 빠졌던 나머지 곁을 지나던 두 처녀의 심상치 않은 행동에 얼른 주의가 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음순간에는 그 역시 세찬 타격을 받은듯이 몸을 흠칫했다. 하더니만 인차 고개를 짓숙이고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명심이와 청년을 번갈아보던 옥희는 두번다시 그 까닭을 묻지 못했다. 함부로 묻기조차 두려울만치 명심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엇갈렸다. 청년은 당황한 낯빛으로 눈길을 허둥거렸다.

《난 저 동무와 아는 사이예요. 그와 좀 조용히 할말이 있어요.… 미안하지만 혼자 먼저…》

명심이가 녀동무에게 하는 말이였다.

옥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두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서로가 흥분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오래간만이요, 명심동무.》

얼마후에 청년이 머리를 들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박치영이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명심은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박치영을 알아보는 첫 순간에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은 그가 어찌하여 여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의혹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것은 아니였다. 이렇게 만나고보니 서로가 격렬한 다툼끝에 헤여지던 한해전의 쓰라린 추억이 되살아났다.

가슴속에서는 참을길 없는 의분이 끓어올랐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박치영이 먼저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명심동무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할말이… 없소.》

한숨이 엇섞인 갈린 목소리였다. 쓰라린 회오와 수치감으로 그의 얼굴은 한껏 붉어졌다. 그동안 심각한 곡절속에서 많은것을 느끼고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를 지켜보던 명심은 아픈 말을 하고싶던 용기를 잃었다.

《동무도 이 려관에 들었어요?》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이 려관에 들겠소? 회의때문에 과학자, 기술자들만 드는 려관에 말이요.》

《그럼 여기에 어떻게?…》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소. 우리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소?》

박치영은 명심의 달라진 낯색을 살피며 간청하듯 말했다.

명심은 망설였다. 하고싶은 말도 많고 그가 지난 한해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고싶었지만 어쩐지 주저되였다.

《명심동무, 나는 진정으로 리해를 바라고싶소. 동무앞에서 터놓지 않으면 안될 량심의 가책을 받기때문이요.》

명심은 저도 모르게 측은한 감정에 이끌렸다.

《그럼… 이야기를 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려관옆에서는 이야기를 나눌수 없었다.

그들은 보통강변으로 향했다. 교예극장을 지나서 유보도에 이르렀다. 유보도의 량옆에 펼쳐진 버드나무숲은 조용히 설레였다. 군데군데 가꾸어진 꽃밭들에서 풍기는 향기가 강바람에 실려왔다.

그들은 의자에 사이를 두고 앉았다.

담배를 붙여물던 박치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동무가 어떻게 듣던지간에 지난날을 숨김없이 터놓고싶소. 거기에 대한 동무의 판단은 상관하지 않겠소.》

《어서… 말하세요.》

《동무는 믿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선망속에서 사진과 이름이 제련소신문과 속보판에 나붙던 시기에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였소. 극도에 달한 허영심과 공명심에 분별을 잃었댔소.》

박치영은 차마 마주볼수 없는듯 외면을 하더니 나직이 뒤를 이었다.

《압착가공설비가 실패한 후에 나는 조직적인 비판도 받으리만큼 받았고 귀먹은 욕도 들을대로 들었소. 나는 뼈저린 뉘우침과 절망감에 시달렸소. 누구도 몰래 사람들의 면전에서 사라져버리고싶더란 말이요.》

박치영은 목이 메여 말을 끊었다.

명심은 서느러운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활은 얼마나 공정한 심판관인가. 그는 응당 받아야 할 생활의 심판을 받았다.

박치영은 입술에 주먹을 대고 마른 기침을 톺더니 말을 이었다.

《그 시기에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난과 조소를 묵묵히 새기도록 나를 지탱해준것은 포기할수 없는 과학적지향이였소. 이것은 오늘 내가 동무앞에서 처음 하는 말이요. 새롭게 찾은 옳바른 궤도를 따라 연구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느때든지 성실한 노력으로 잃어버린 모든것을 되찾게 되리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공업시험소에는 그냥 눌러있을 면목도 없고 누구도 다시 나의 연구사업을 믿어줄것 같지도 않았소. 여러가지로 생각던 끝에 부업농장으로 나가겠다고 제기했소. 부업농장 책임자가 나에게서 학습방조를 받던 동무였소. 농장으로 나가면 일을 하면서 연구사업을 할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을수도 있고 또 사람들의 눈을 피할수도 있었소. 그런 속심은 숨기고 제련소에는 로동현장에서 자신을 수습하고싶다고만 하였소. 그 말을 곧대로 들은 로동과장은 간부들과 토론을 하고 배치장을 떼주었소.…》

다음날 농장책임자 한석규가 화물차를 끌고 제련소에 왔던김에 박치영을 찾아왔다.

《농장기계화작업반에 적을 두고 연구사업을 계속하오. 전적으로 보장해주겠소.》

한석규는 이미 그런 약속을 했었다.

박치영은 그동안 자작 만들어쓰던 간단한 실험설비들과 책들을 화물차에 걷어싣고 농장으로 나갔다.

한석규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왔다. 그럴수록 농장에서 고장난 농기계들을 책임적으로 수리했다. 기계공학전문가는 아니였지만 압착가공설비를 연구하는 과정에 익힌 그 분야의 지식으로 농기계쯤은 쉽게 수리할수 있었다. 수리할것이 없을 때면 연구사업에 몰두했다. 피를 물고 새롭게 접어든 연구사업이여서 며칠밤을 꼬바기 지새우는 때가 많았다. 때로는 자기의 처지에서 그 무엇을 연구하는것이 부질없는 일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의 여부는 둘째치고 탐구의 사색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생활을 이어갈수가 없었다. 그마저 포기한다면 자기의 생활에 아무런 뜻이 없을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명민한 두뇌와 불타는 탐구욕을 가진 박치영은 과학과 뗄수 없는 인연을 가진 청년이였다. 한해동안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티탄합금가공의 새로운 기술적특성을 발견했다.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던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 기회가 온것 같았다. 그는 금속공학연구소를 찾아갔다. 손관식소장에게 다시 연구소에 받아줄것을 간청했다. 자기의 노력이 연구소가 지향하는 초소성가공방법에도 커다란 기여가 되리라고 믿었던것이다. 그러나 손관식은 비웃음을 보냈다.

《우리 연구소에서 떠나가던 때를 잊지야 않았겠지?…》

말끝을 길게 끌며 이쪽의 내심을 꿰뚫어보듯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제가 지난날을 두고 얼마나 심각한 후회와 수치를 느꼈는지 아마 소장선생은 모를겁니다. 지금에 와서 저는 새롭게 연구하고싶습니다.… 일정하게 연구성과도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연구소의 문전에 코를 들이미는게 참으로 놀랍소.》

그제야 박치영은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여기에 찾아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원망이 손관식소장의 머리속에 깊이 박혀있으리라는것을 미처 타산하지 못했던것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것을 보면 양영복박사는 두번다시 자기의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할것이다. 달아오른 얼굴을 싸쥐는데 손관식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다시 머리우에 떨어졌다.

《어서 물러가게. 나는 두번다시 동무가 과학연구에서 줄타기를 하도록 바줄을 잡아주는 어리석은짓을 하지 않겠네.》

박치영은 거멓게 기름때가 묻은 연구기록장을 집어들고 연구소를 나섰다. 여지없이 모멸을 당한 서글픔이 치밀면서 눈물이 나왔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손관식의 랭혹한 태도를 탓할것도 없다. 그가 말한대로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연구소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단 말인가? 모든것은 자신의 과거가 빚어낸 후과였다. 새로운 출발선우에서 연구성과를 이룩하면 어느때든지 자기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수 있다는 희망, 과연 그것이 도저히 실현될수 없는 허망한것이 아니였을가? 절망감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과학계로부터 영원히 버림받는듯 한 자신을 발견했다. 연구소의 울타리옆을 지나 언덕밑의 오물장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오물장에는 탄재와 쓰레기가 무드기 쌓여있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학습장을 찢기 시작했다. 학습장은 어지간히 두터웠다. 두손에 있는 힘을 다해 량쪽으로 잡아당겼지만 좀처럼 찢기지 않았다. 자신을 찢어발기는 심정으로 손가락이 저리도록 다시 힘을 주었다. 마침내 찢기기 시작하면서 아츠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음향이 사랑하는 생명체의 비명처럼 귀가로 흘러들며 모질게 심장을 비틀었다. 그 동통에 전률하듯 몸을 흠칫하며 손을 멈추었다. 절반쯤 쭉 갈라진 학습장을 움켜잡은 두손이 떨렸다. 비록 몹쓸놈의 두뇌에서 태여난것이라 하더라도 이 연구기록이야 가치있는것이 아닌가? 때늦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절망과 환멸의 화풀이를 애꿎은 연구기록장에 가했던것이다. 이것 역시 못난 짓이 아닌가. 용서를 빌듯이 학습장의 찢겨진 자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치영동무가 아닌가?》

길쪽에서 무척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였다. 웅크리고앉은채로 피끗 목을 돌려보니 양영복박사가 서있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연구소로 돌아오는 걸음인것 같았다.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돌리였다. 금시 원한에 사무친 로인의 욕설이 머리에 떨어지는듯 하여서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그의 정당한 학술적주장을 질투와 시기심의 표현이라고 만사람앞에서 부르짖던 자신이 되새겨졌다. 땅속으로 금시 잦아들고싶었다. 인차 사라지지 않고 연구소옆에서 어물거린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였다.

《거기서 뭘하고있어?》

엄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이쪽을 알아보고 다가온 모양이다. 박치영은 하는수없이 일어섰다.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떨리였다.

《못난 녀석같으니, 과학계를 도피해서 농장으로 몸을 사렸다지?》

박치영은 고개를 짓숙인채 오열을 삼켰다. 로인의 성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잔뜩 주접이 들어서 눈물을 쥐여짜며 다니다니! 나는 과학자로 한생을 살면서 너보다 더한 실책도 저질렀고 더한 곡절도 겪었다. 너는 나를 배신하고 떠나갔댔지만 인제는 개심을 하고 나의 조수로 되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태 면전에 나타나지도 않았지, 고현 놈!》

그의 목소리가 쿵쿵 흉벽을 두드렸다. 로학자의 그 너그러움, 육친의 정으로 꾸짖는 그 심정… 이런 선생님을 배신하고 억울히 비난했던 나는 진정 사람이 아니였구나! 《선생님!》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흐느끼던 박치영은 알수 없는 힘에 떠밀리우듯 휘청거리다가 휙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배척과 규탄을 받았다면 분별을 잃지 않고 용서를 빌었을것이다.

양영복선생의 태도는 너무도 예상밖이였다. 수치와 공포를 예감하며 한껏 위축되였던 몸이 감동의 격랑에 휘몰리웠다. 그래서 그의 면전에서 무작정 달아나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치밀었던것이다. 걷잡을수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선생님! 선생님!》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얼마를 달렸는지… 힘이 진해서 가로수줄기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양영복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의 행동을 어떻게 리해했을가? 비겁하게도 수치감을 이기지 못해 달아나버렸다고 단순히 생각하지 않을가?… 연구를 거듭해서 한점의 티도 없는 연구성과를 가지고 그를 찾아가리라!

그날부터 박치영은 전날처럼 곁에서 자기를 친절히 깨우쳐주는 양영복의 존재를 마음속에 의식하며 연구사업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다가 그저께 인민대학습당으로 올라왔다. 오늘 저녁에 봉화산려관에 나타난것은 선교려관에 함께 들어있던 해주에서 온 벼재배연구사가 과학자회의참가자로 이리로 옮겨오기때문에 가방 하나를 들어다주려고 따라왔던것이다. 그 연구사는 접수원처녀한테 같이 온 박치영이도 함께 지내도록 하여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려관접수원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려관에는 과학자, 기술자협의회 참가자들만이 류숙할수 있습니다.》

박치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같이 온 연구사에게 어서 호실에 가보라고 등을 떠밀고는 도망치듯이 려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는 선교려관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왜서인지 얼른 걸음을 뗄수 없어 그 자리에 서있었던것이다.

《…그때 뜻밖에도 동무가 나타났던거요.》

이야기를 마치며 박치영은 불빛이 어린 강물을 바라보고있었다. 양명심은 입을 열지 못했다. 안타까운 침묵이 길게 흘렀다. 동강난 화제를 이어보려고 애쓰던 박치영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이렇게 물었다.

《참, 과학지구건설에 황석태동지가 자원해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소? 9월제련소 당비서를 하던 사람 말이요.》

《모르겠어요.》

《하긴 수천명의 돌격대원들이 동원되였다니까 모를수 있겠지.》

박치영은 실망조로 중얼거렸다. 황석태가 제련소를 떠나간 다음부터 그의 소식을 딱히 알길이 없었다.

《치영동무의 지나온 얘길 들으니 나도 가슴이 아프군요.》

줄곧 추연한 눈길로 박치영을 지켜보던 명심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여나갔다. 이 순간에는 그가 받은 정신적타격이 애달프게 느껴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참말이지 동무나 양선생앞에 면목이 없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소.》

박치영의 얼굴에 짙은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자, 그럼 안녕히…》

서둘러 작별인사를 남긴 명심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냥 있으면 복잡하게 뒤번지는 자기 마음을 다잡기 어려울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동뚝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강쪽으로 돌아선 박치영은 외로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와 헤여지고보니 가슴 한귀가 허전했다. 과거의 잘못이 크다 하더라도 교훈을 찾고 새롭게 살아보려는 그를 지나치게 쌀쌀히 대한것은 아니였을가? 지난날의 원망이 아직 나의 가슴속에 사무쳐있다는것은 회복을 갈망하는 첫사랑의 아픔이 그대로 살아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닐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할아버지는 지금에 와서도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그를 대하고있다. 박치영자신이 눈물로 절규한것처럼 그런 할아버지를 숱한 사람들앞에서 모욕했던 그는 진정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오늘에는 그가 옳바른 생활의 길을 걸어가는 과학자로, 의리와 량심을 지킬줄 아는 참된 인간으로 될수 있지 않을가? 방금전에 만난 그는 전에없이 진지했다. 딴 사람을 보는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수는 없다. 이건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서로가 앞으로 성실하게 대한다면 첫사랑의 지난날을 되찾을수 있지 않을가?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의문에 스스로는 그 어떤 결론도 찾을수 없다. 그저 생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싶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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