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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여름 26 - 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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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7-08 08:58 조회7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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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회)

11 장

밤이 오자 시가의 소동은 한결 가라앉았다. 지옥의 불처럼 공포를 주던 인민군포격설은 《데마》로 돌려졌고 리승만의 유선방송이 《서울사수》를 읊조렸으며 (대전으로 쫓겨간 리승만의 록음테프가 돌아가는 소리였지만) 골목과 둔덕, 고층건물마다에 진을 친 《국군》의 보루와 그 무리들이 일정한 안정제로 된것이였다. 하여 권좌에 눈이 어두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국회의원》들과 몇몇 장관들이 모인 중앙청과 덕수궁의 《국회의사당》에서는 《서울사수》와 새《정부》조작의 꿈을 꾸며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태반의 《나리님》들은 승용차와 트럭들에 가족과 재산을 박아싣고는 짐승처럼 끌려 서울로 밀려드는 군인들의 장사진을 뚫고 남으로 남으로 줄행랑을 쳤다.

륙군본부의 넓다란 방에 틀고앉은 채병덕은 이 모든 사태에 매우 둔감한듯 군무에만 집념하고있었다. 세개의 전화기를 앞에 놓고 그는 줄기차게 정황을 묻고 따지고 호령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는 오후의 상황청취시간에 춘천을 휩쓴 인민군52사가 6사를 추적소멸한다는 보고와 동시에 인민군52사와 53사의 린접으로 들이밀었던 혼합대대들로부터 (사단파병을 장담한 신성모는 한개 련대도 못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보내주었다.) 그곳에도 52사가 공격해오며 측면이나 배후타격위협에 주저앉았어야 될 인민군53사는 뒤주춤하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높여 10여km 더 전진해온다는 비명같은 보고를 받고 케가 글러감을 깨달았다. 초저녁에(그때만도 《미군참전설》의 취기가 남아있을 때였다.) 또 한번 용기를 내여 창동미아리전선을 돌아본 그는 아침과 또 다르게 변한 엉망의 《전선》을 보았다. 월리쪽에서 인민군포탄에 하마트면 고기가루로 흩어질번 한 그는 호위차도 떨궈버리고 뺑소니를 쳤다.

그리고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 벽마다 푸른 담쟁이로 얼룩진 고풍의 2층 양옥에 차를 세웠다. 부관도 대동하지 않고 늘 채워있는 바깥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 응접실에서 한 묘령의 녀인이 나타났다. 가슴과 팔을 훌 드러낸 까만 도레스차림의 녀인은 채병덕이를 보자 두팔을 뻗치고 채 가닿기전에 쓰러졌다. 채병덕이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솜씨로 안자 녀인은 쟈스민향기가 풍기는 흰팔로 채병덕의 목을 얼싸안았다.

《한시간만 더 기다린다면 저는 죽었을거예요.》

녀인은 가쁘게 숨을 쉬며 눈물과 입술연지로 채병덕의 가슴팍을 얼룩덜룩하게 하였다. 채병덕은 녀인의 따뜻한 입김과 체취, 은근한 향수내와 부드러운 살결에서 풍기는 감미로움에 취한채 한순간 모든것을 망각한 사람처럼 서있었다.

《그만-》

그는 녀인을 인형처럼 들어 마루에 세웠다. 그러자 녀인은 이제껏 운것 같지 않는 요염한 미소가 아롱진 눈길로 채병덕을 보다가 《커피?》 《위스키?》하고 재롱부리는 소녀처럼 말했다. 채병덕은 얼빠진 사람처럼 씨익- 큰숨을 쉬고는 퍼그나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 잘됐겠지.》

《네, 이모부한테 전화도 했어요. 아휴, 국제전화소는 외국대사관 마담들로 벌레 끓듯 해요.》

《수골 했어.》

그 말에 녀인은 애교있게 고개를 약간 수그리며 이번에는 매우 서글픔이 어린 안개낀듯 한 눈으로 채병덕이를 바라보았다. 채병덕은 음울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보면 안되지.》

《알겠어요.》

녀인이 얕게 웃을 때 채병덕은 곰처럼 와락 그러안아 입술이며 터진 깃사이의 가슴에 마구 입을 맞추다가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씨근덕거리며 녀인을 삼킬듯 보다가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이젠 떠나라.》

《그럼?》

《수원에서 만나자… 여차하면… 비행기로 하꼬다데로 가라. 네 차는 특별통과증이 있으니까 단속하지 않을것이니 걱정이 없고.

그리고 노세이상한테 금을 100폰트가량만 딸라로 바꾸고 그다음은 은익하게 해라.》

《알겠어요.》

녀인은 화려한 문양비로도가림을 드리운 응접실 벽에 다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실내화를 끌며 늙수레한 로인이 나타났다. 녀인은 이제까지와는 판다른 도담하고도 날카로운 태도로 말했다.

《내 말한것.》

로인은 절을 굽석하고 사라지더니 푸른 나이론보자기로 싼 지함을 가져왔다. 녀인은 지함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제가 오늘 섬길수 있는건 이뿐이예요. 시장하실 때 잡수세요.》

채병덕은 이마살을 찡그렸으나 이제라도 자기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면 죽을듯 한 녀인의 교태어린 진정에 넋을 빼앗긴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20분내로 차를 보내겠다.》

녀인은 당금이라도 잦아들듯 한 어조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이 잘못되면 이 세상에 없다는것을 아세요.》

녀인은 채병덕이 문밖에 나갈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을사오적과 일본황실의 먼 친척과의 사이에 생겨진 이 녀자는 채병덕이의 애첩이였다. 이 가냘프고 연약한듯 한 녀자는 오늘낮 채병덕이 은행에서 빼여낸 금괴를 수원비행장에 싣고가 일본 하꼬다데의 은행주인 이모부에게 부치고 돌아오는 놀라운 기적을 발휘하였다. 일본의 재벌계 탐정의 첩자로서 녀자숭배주의자의 무쵸의 심장을 사로잡아 채병덕의 출세에 보탬을 준 이 녀자는 끊임없는 포소리속에서도 자기 애인의 최종철수명령을 인내성있게 기다렸던것이다.

잠시후 이 녀자는 무장호위병의 옹위하에 당시 서울에 몇대밖에 없던 《크레뇽 30》차를 타고 어둠덮인 골목을 빠져나가 도피행 차들의 무리속에 섞여 유유히 한강을 건넜다. 이로 하여 채병덕의 마음 한구석엔 든든한 배심이 자리잡았다. 초조해 돌아치는 하우즈만을 보면 마치 백만장자가 파산당한 기업가를 보는듯 한 흥취까지 살아올랐다. 그 기분은 만나기만 하면 사등뼈를 문질러놓으리라 벼르던 백정식이가 나타났을 때 자비로운 용서를 낳게 하였다. 그는 성련화의 건은 전혀 모르는듯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어떻게 왔나? 자네 리대통령과 함께 대전에 가있는걸로 아는데-》

《허허, 매부, 무슨 소릴 그렇게 하시우. 방송을 들어보시우. 지금 바깥 스피커에선 리대통령께서 서울시민들에게 방송연설을 하고계시는데-》

《미친것.》

채병덕은 자기를 보면 언제나 조롱기로 나서는 백정식에게 꽥 소리지르면서도 배포유한 자세는 잃지 않았다. 자기의 말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데 손을 든듯 백정식은 사실을 터놓았다.

《대통령께서 대구에 이르셨을 때 갑자기 무릎을 치고 창탁을 두드리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어인>인지 뭔지 하는걸 가져오는걸 잊었지요. 그걸 가지러 저를 보냈습니다. 못가져오면 되돌아서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임무를 수행해야지. 찾았느냐?》

《원 매부도… 우선 인척들의 안부가 기본이 아닙니까. 와보니 서울은 이제나저제나군요.》

《그따위 소리 말어.》

《매부, 대단허십니다.》

《너 한잔했구나.》

이때 하우즈만이 들어섰다. 그러자 술에 취했다고 생각한 백정식은 매우 례절겹게 일어나 하우즈만에게 경례를 했다. 채병덕이가 가족파티에서 소개된바 있는 백정식이를 흥미있게 뜯어보던 하우즈만은 불쑥 노기어린 소리로 말했다.

《당신 대통령을 둬두고 왜 여기에 와있소.》

《각하, 저는 국부께서 주신 특수임무를 받고왔습니다.》

《무슨 용건이요.》

《용서하십시오. 그건 기밀입니다.》

백정식이 차렸을 하며 싱긋이 웃었다. 하우즈만은 불쾌함을 간신히 참으며 알겠노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병덕은 하우즈만의 패롭게 찌프린 눈을 불안스럽게 살피고나서 백정식에게 엄하게 말했다.

《빨리 떠나게, 내 걱정은 말고-》

《누이와 가솔은 피신시켰습니까?》

《무슨 소린가?》

《집사람들을 피신시켰는가 하는겁니다.》

백정식이 재차 하는 말에 채병덕은 차겁게 웃었다.

《나나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겐 피신이란것이 없다. 서울이 살면 나도 살고 내가 살면 가족도 사는것이다. 네 누이와 조카들은 집에 있다. 래일도 모레도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체로 되여도 거기 있을것이다.》

백정식은 낯빛이 하얘서 채병덕을 보다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날의 사가들이 입모아 칭송하겠군요. 훌륭합니다.》

채병덕은 벌떡 일어섰다.

《닥쳐라!》

하우즈만은 놀란듯 채병덕을 보다가 다급히 말했다.

《대위, 나가시오. 참모총장의 가족은 내가 책임적으로 피신시키겠소.》

허나 백정식은 이발을 깨문채 까딱않고있었다. 이때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채병덕이 무슨 연극을 했을지 모른다. 전화기를 잡아든 채병덕은 몇마디안짝에 《뭘 꾸물거리는가.》 하고 호통을 치고 하우즈만에게 피발선 눈길을 돌렸다.

《형무소폭파준비가 잘 안되고있소. 서대문형무소는 폭약은 있는데 뢰관이 도중분실되였다는군.》

《나한테 말하면 뭣합니까. 토론된대로 해야지요. 그 헌병사령관이란 작자는 어깨에 메주를 달고 다니는것이 아닙니까?》

채병덕은 하우즈만의 노염이 헌병사령관이 아니라 자기에게 향한것임을 알고 얼굴이 벌개지며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은 어쩌자는거요? 그들을 살려두는것은 공산군 한개 사단을 살려주는것과 같다고 당신도 말했지… 길게 말할것 없소. 총이건 포건 휘발유건… 옳소. 모든걸 동원해 그놈의 서대문형무소것들을 싹 없애치우시오. 누구의 명령인가구… 거 무슨 식어빠진 소리요?》

《뭣입니까?》

하우즈만이 차겁게 물었다.

《형무소청소에 대해서 떨떨한 자식들이 겁나 물러서려는군요.》

채병덕은 이마에 줄져내리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우즈만의 독살스러운 눈길이 묻는듯 찌르는듯 자기를 견줘 번쩍이고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채병덕은 열이 나 전화기에 대고 웨쳤다.

《건… 대통령도 그리고 이 나 채병덕이도 다 토론된것이요. 즉시 집행하오. 책임은 내가 져.》

채병덕은 전화기를 놓았다.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앞에는 퍼렇고 뻘건 옷을 입은 수천명 수인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육박해오는 환영을 보았던것이다. 하우즈만은 창문을 열고 포소리를 가늠하는듯 한동안 서있다가 창문을 도로 닫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내가 이 방에 들어와 10분이 지나도록 정황보고가 한건도 없습니다.》

채병덕은 대답할수 없었다. 그는 오직 퇴각할 기회와 방안만을 연구하고있을 1선의 장교들을 그려보았다. 그보다 무시무시하게는 공산군들이 이미 잠적하여 모든 전화선을 절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슴을 싸늘케 했다.

《채총장, 당신은 진실로 안해와 가족을 여기에 남겨두려 합니까?》

하우즈만이 채병덕을 굽어보았다.

《그렇습니다.》

채병덕은 자기의 복잡한 심회를 보이기 싫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굵직한 려송연을 뽑아 하우즈만에게 내밀었으나 받지 않았다. 채병덕이 그것을 붙여물었을 때 하우즈만은 매우 은근한 어조로 계속했다.

《아무리 전쟁이더라도 그러면 안됩니다. 나는 채총장이 자기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 무관심한데 대하여 충고를 줍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인간은 죽음의 잔도 태연히 마시는 쏘끄라테스적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를 끝까지 소멸할 사명을 띠고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처자의 생명은 귀중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미국군대의 전통적인 인도주의입니다.》

채병덕은 담배불을 비벼껐다. 속으로는 코웃음이 나왔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이야말로 후날 자기의 영웅성에 대한 보증을 암시하는 말과 같은것이기때문에 더욱 귀중한것이고 그만치 지금 이 사람의 기분에 거슬리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하우즈만은 구슬리듯 말했다.

《군기에는 지장이 없을테니 이제라도 처자를 피신시키는것이 좋겠습니다.》

채병덕은 침중한 눈길로 하우즈만을 보다가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일구이언은 못하겠습니다.》

하우즈만은 빙긋이 웃고 문밖으로 나갔다.

채병덕은 이 순간 저으기 감동되였다. 그는 사실 말대로 가족의 피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후에 패전을 가지고 구구한 론의들이 있을 때 참모총장은 가족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싸웠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그것으로 한점 더 따려는 야심에서였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정떨어진 그 녀편네는 차라리 공기처럼 사라져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각 하우즈만이 자기 처자를 걱정해주는것은 어쨌든 나삐 보이지는 않는것이였다.

하우즈만이 나간지 1분도 못되여 전화기가 울었다. 창황중에 전화를 받은 채병덕은 깜짝 놀랐다. 2사, 5사, 7사 구역에서 인민군기습대가 들어오고 땅크가 7사 1련대의 진지로 쳐들어온다는것이였다.

《계속… 전화결속을 하라.》

채병덕은 얼른 전화기를 놓고 부관을 불러 장갑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하였다.

《륙본을 지킬것이요.》

부관에게 이렇게 주를 달아 내보낸뒤 30분후에 두명의 사단장이 채병덕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인민군포위망에 드는것 같으니 철수하게끔 해달라는것이였다. 사단고문관들도 승낙했다는 말에 채병덕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퇴각은 없소. 결사로 저지시키시오.》

그리고 뒤가 켕겨 하우즈만에게 들어가 사태를 보고하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인 미군고문이 뛰여들었다. 그는 하우즈만에게 경례를 하다가 문녘에 서있는 채병덕을 보자 큰소리로 웨쳤다.

《당신네 군대는 똥자루들이요. 한개 소대 기습대에 련대지휘부가 몽땅 녹았소.》

채병덕은 파랗게 질려 눈알을 희번뜩거리는 그자를 보며 터져오르는 분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손을 권총에 가져갔다. 그러자 피투성이 미군고문은 더 잽싸게 권총을 뽑아들었다.

《노!》

하우즈만이 다급히 뛰여와 미군중위의 팔목을 호되게 내리쳤다. 권총을 떨군 중위는 짐승같은 눈초리로 채병덕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피젖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는 채병덕의 면상에 던졌다.

방안의 화장실에 들어간 채병덕은 피젖은 손수건이 닿았던 얼굴자리를 오래도록 씻고 오데꼴론향수를 치고난 후 잠시 거울앞에 마주서있었다. 이지러진 얼굴을 본 그는 허허 웃고말았다.

(그래, 저 미군중위의 행동에 분격할 리유는 없다. 오직 이제는 사는것뿐이다.)

그는 입연지자리가 남아있는 가슴자락을 내려다보며 지난 기간 그 녀자의 나긋나긋한 살뜰한 애무까지 기억해낼 여유를 가졌다. 그 회상의 단편으로 이 염열의 지옥같은 환경속에서 도피해버리는것이였다.

(그래 살아야 한다. 향락을 누리기에 충분한 돈이 있다. 퇴역이 되면 기업을 일쿤 옛날의 일본인 친구들도 결코 자기에게는 무심하지 않을것이다. 그쪽에 간다 하여 못살건 무엇인가, 삶의 존재방식은 같다. 온천주변에 별장 하나를 얻어 전쟁도 소음도 없고 피젖은 손수건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보자.)

채병덕은 허탈비슷한 상태에 잠겼다. 그러나 전화기와 큰별이 번쩍거리는 철갑모를, 그리고 나폴레옹의 기마상을 그린 유화를 보느라면 심장이 금시라도 뒤틀려 터질듯 한 동통에 사로잡힌다.

반공의 보루로, 력전의 영웅으로, 나가서 이 나라의 절대군주로 받들리우리라던 야심을 깨끗이 저버려야 한다는 기막힌 사실만은 쉽게 접수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씨저도 한때는 다몰리워 포로까지 되잖았는가. 맥아더도 그렇지. 바탄도에서 도망친 그였으나 지금은 세기의 영웅으로 받들리지 않는가.)

그는 이런 궁리도 해봤으나 그 생각에는 힘이 없었다.

(무엇때문에 패전하게 되는가. 전술인가. 그래 작전전술에서도 실패한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장교건 사병이건 싸움만 붙으면 도망부터 치려드는가? 문제는 용기와 신념이다. 더구나 리승만이 같은 고루한 령감들탓이기도 하다.

아직 패망을 말하기는 이르다. 내가 충실하고 용감한 장군인이상 미국인들은 나를 저버리지 않을것이다. 천금의 꿈을 안은채 도박장에 나타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을 털고 사라지는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결코 빈손으로 물러설 범인이 아니다. 인생이 도박일진대 나는 꼭 갑오를 쥘것이다.)

《그래 살아야 한다.》

채병덕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요란한 구두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얼굴이 까맣게 된 작전국장이 뛰여들었다.

《각하, 공산군땅크가 혜화동로타리를 거쳐 돈암동으로 침습해오고있습니다.》

《뭐야?》

《강문봉대령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땅크는 바리케트를 막 깔고 거침없이 들어온답니다.》

거만한 자세로 서있던 채병덕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우즈만대위에게 알리시오.》

채병덕이 도주로정을 그리며 무슨 문건을 가져갈가 생각하는데 문짝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하우즈만이 날아들었다.

《당신 지금 뭘하고있습니까?》

《공산군땅크를 제압할 방법을 생각하는중이요.》

《한강다리폭파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 됐소. 부득불 아군이 패퇴할 경우 주력이 다 철수한 후에 폭파시키려고 하오.》

《뭐요. 당신은 주력의 퇴각을 생각하오? 당신은 일선장교로 갈걸 그랬습니다.》

채병덕은 자기의 《침착성》과 《용기》가 이런 모욕으로 치뤄지는데 놀랐다. 하우즈만은 독살스럽게 노려보다가 웨쳤다.

《한강교는 30분내에 폭파시켜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륙본은 떠나야겠소. 지휘관만 있으면 병사는 생기는 법입니다.》

《주력을 그대로 두고말이요?》

《그들은 싸우게 해야 합니다. 동양의 옛 싸움에 배수진이 있지요. 퇴로가 없으면 더 잘 싸울것이요.》

채병덕은 한동안 번히 서있었다.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들어 공병감을 찾았으나 선뜻 말을 뗄수 없었다. 공병감은 연신 《각하》를 불러대고있었다. 채병덕은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러나 하우즈만의 독한 눈초리에 부딪치자 그는 무거운 망짝을 끌던 늙은 당나귀가 지쳐 쓰러질 때의 울부짖음같은 소리로 웨쳤다.

《이제 30분내로 다리를 폭파시키시오. 한강다리입구에서 나를 대기하시오. 뭣이?… 고문단의 명령이요. 군말할것 없소. 지시를 집행하오.》

채병덕은 낯이 하얗게 질려 전화기를 놓았다. 하우즈만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 한결 풀린 소리로 말했다.

《자, 우린 떠나봅시다.》

채병덕은 바깔에 나왔을 때 컴컴한 어둠과 공포의 대기를 떠실은 소음이 온몸을 옥죄이는것을 느끼며 부관을 시켜 대기시켰던 장갑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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