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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예술

비약의 나래 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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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4-26 19:56 조회3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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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1

황석태는 결코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가혹하게 징벌하고싶은 충동에 내처 사로잡혀있었다. 비판이나 추궁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심각히 돌이켜보면서 그 무엇을 감추거나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생애에서 이번처럼 뼈저린 자책에 몸부림쳐본 때는 일찌기 없었다. 과거에도 관료주의적사업작풍때문에 비판을 받았던 일이 없지 않았으나 크게 과오를 범했던 일은 없었다. 당이 맡겨준 과업을 수행 못한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설계하고 계획했던 사업을 성공에로 이끌어가지 못한 때도 없었다. 하지만 고도기술을 개발하는 이번 일에서는 참담한 실패와 무서운 후과를 가져왔다.

황석태는 금속공업부 강서원부부장이 내려와서 류용하여 랑비한 로력과 자재를 따질 때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직무에서 해임되여 이틀동안 사업인계를 하고 오늘 오전에는 당위원회와 행정의 부서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일해오던 일군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수치감때문에 긴말을 나누지 못했다. 그저 일을 잘못하고 떠나가니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한마디씩 건늬고 헤여졌다. 많은 사람들이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박치영이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울분을 토했다.

《결코 그런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잘 이끌어주지 못했기때문에 그 동무도 잘못을 저지르게 되였습니다.》

황석태는 진심을 말했다.

작별인사를 다 하고난 그는 집으로 가려다가 종합식당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책임자녀성을 만나고싶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공식적인 립장에서 본다면 굳이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대상이 아니였다. 종합식당과 같이 작은 단위의 책임자들까지 다 만나자면 끝이 없었다. 그를 꼭 만나고싶은것은 까닭이 있었다. 전날에 손님들을 데리고 가면 언제나 친절히 성의를 다해주던 녀자였다. 그도 그렇지만 압착가공설비공사가 벌어지자 그는 누구보다도 열성껏 지원사업을 하였다. 거의 매일 음식을 마련해가지고 현장으로 달려왔으며 녀성의 몸으로 목고를 메고 아낌없이 지대정리에 땀을 흘리였다.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연구집단성원들에게 보내주기도 하였다. 그처럼 지원을 한 그의 성의와 노력이 자기의 잘못으로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은연중 머리에 떠올랐던것이다. 그에게 미안스러운 심정을 헤쳐보이며 작별인사를 나누고싶었다.

점심시간전이여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창 끝내가는 식당주변은 음식냄새가 구수하게 풍기였다. 뒤문을 통해 조용한 방으로 들어간 황석태는 접대원처녀를 시켜서 책임자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어지간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책임자가 나타났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서는 녀인의 얼굴에는 종잡을수 없는 착잡한 표정이 엇갈렸다. 반가움도 아니고 련민도 아닌 그 무엇인가 난감해하는듯 한 낯빛이였다.

《늦어져서 미안해요. 시행정위원회 상업과장동지가 오셨기에…》

황석태는 갑자기 달라진 자기의 처지를 무의식중에 의식했다. 전날이였다면 설사 상업과장과 담화중이라도 량해를 구하고 급히 달려왔을것이다.

《동무와 작별인사도 나누고 마지막으로 이 식당에서 점심도 먹고싶어서 왔소.》

《해임되였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정말 안되였어요.》

녀인은 선채로 한순간 동정의 시선을 보내주더니 표정을 바꾸며 처음의 난감해하는듯 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가?》

녀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요?》

《이제 곧 상업과장동지를 이 방에 모셔야겠는데…》

황석태는 책임자녀인에게 한숨섞인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렇다면 돌아가야겠구만.》

그는 성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녀인은 만류하지 않았다. 전날의 친절하던 태도는 어데로 갔는가? 그것이 아첨이였다는것을 깨닫는 동시에 그가 가공설비공사에 지원을 했던 숨은 목적도 짐작이 갔다. 가공설비가 성공하면 거기에 지원을 했던 자기에게도 무엇인가 차례지는것이 있으리라고 타산했음이 분명했다.

《상업과장동진 저희들이 소홀히 할수 없는 손님입니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됐소.》

황석태는 심한 모욕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안을 나섰다.

《저를 리해해주십시오.》

안타까운 목소리에 애절한 한숨이 뒤따르는듯 하여서 피끗 뒤를 돌아보았다. 녀인은 사방을 살피며 그 누가 황석태를 바래주는 자기를 볼가봐 두려워하는듯싶었다. 그것이 남의 눈에 띄우면 전날의 아첨이 과장되여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면서 듣기 거북한 비난을 살수 있다고 여기는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처세에 밝은 녀자였다. 그런 녀자를 성실한 봉사일군이라고만 여기고 찾아온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돌이켜보면 나의 관료주의적인 사업작풍때문에 아첨에 밝은 저런 녀자가 생겨난것이 아닐가?…

황석태는 울적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하늘은 찌뿌둥하니 흐리였다. 재빛구름이 낮게 드리운것으로 보아 금시 비가 내릴상싶었다. 투벅투벅 걸어서 집에 이르니 안해가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있었다.

《왜 이리 늦었어요?》

흰 보자기를 덮어놓은 밥상머리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던 안해가 얼른 일어서며 묻는 말이였다. 황석태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오늘 오전에는 작별인사나 하고 점심시간에 들어올수 있으니 집을 비우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사실을 상기했다. 그런 당부를 남겼댔으니 왜 늦어졌느냐고 묻는것이다. 안해는 전에없이 동정어린 표정으로 모자를 받아서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차려놓은 밥상머리에 앉아서 안해는 언제까지나 남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남편의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특별히 애를 쓰는 안해였다. 웬만한 녀자라면 과오를 범하고 해임된 남편에게 원망을 터뜨리며 상심한 기색을 가시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안해는 그러한 기색이 없이 전보다 오히려 더 남편을 따뜻이 대해주려고 애쓰는상싶다. 해임장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날 저녁이였다. 식구들의 태도는 각이했다. 기술준비실의 딸애는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두번다시 쳐다보기가 딱한듯이 내처 외면을 하고 한숨을 삼키였다. 아들애는 세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원망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지금껏 전횡을 부려왔어요!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의 강요가 아니였다면 나는 희망대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핵물리학을 전공했을거예요. 나는 우리 학급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기어이 나를 전기로앞에 세우면서 로동계급의 혁명성을 배우라고 설교했지요. 나 대신에 티탄직장 공훈용해공의 아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애썼다는걸 나도 후에 알게 되였어요!》

《이 자식이 어따대고 함부로 수작질이냐?》

황석태는 화가 치밀어서 불끈 틀어쥔 주먹을 떨었다. 아들녀석이 훌 자기 방으로 달아나지 않고 한마디만 더 하였다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을것이다. 그녀석이 사라진 옆방문을 쏘아보는데 안해의 속삭이는듯 한 조용한 목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여보, 진정하세요. 그리고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사람이 일을 하다가 과오를 범할수도 있고 그것이 엄중하면 응당 책임적인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거예요.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자요. 나는 당신이 어데를 가든 따라가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드리겠어요. 지금까지는 잘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나도 귀가 있어서 당신이 행정을 대행한다는 뒤소리를 들었고 양영복박사의 견해를 직권으로 내리눌렀다는것도 진작 알고있었어요. 그랬지만 내 말을 귀등으로 듣는 당신에게 그런 충고를 하였다가 오히려 가정불화만 살것 같아서 입을 봉해왔어요.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내 잘못이 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차분히 울리는 그 목소리에 진정이 넘치였다.

황석태는 서서히 머리를 돌리며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는듯 한 의아한 시선으로 안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올줄은 몰랐다. 남들은 나이가 지숙해지면서 부부사이의 금술이 더욱 좋아진다지만 황석태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복잡한 사업들을 붙안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온 황석태에게는 가족들과 아기자기하게 정을 나누어볼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동갑인 안해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편보다 퍽 늙어보이였다. 남편은 아직 기가 펄펄한 장정이였지만 안해는 얼굴에 주름이 지고 귀밑머리가 희여져버렸다. 황석태는 가정사에 무관심했고 안해에게 살틀하지 못했다. 안해가 남편의 처사를 두고 조심히 의견을 말하려고 하면 두마디 안팎에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막아버렸다. 그러는 과정에 안해는 점차 침묵을 지키면서 남편의 일에 간참을 하지 않고 공손히 가정일을 돌보는 녀인으로 되여버렸다. 그에게도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을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불만이 최근년간에 와서가 아니라 결혼한 첫시기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결혼은 서로의 열렬한 사랑끝에 이루어진것이 아니였다. 황석태의 요구에 안해가 어쩔수없이 응하였다고 할수 있었다.

전후에 도당학교를 다니던 황석태는 졸업을 한해앞둔 그해 여름에 방학으로 고향인 성천군의 산간마을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24살의 청년이였다. 그의 체내에는 청춘의 정열이 끓고있었다. 세상에 두려운것도 없고 뜻을 이루지 못할것도 없는것 같았다. 이제 도당학교를 졸업하면 나이를 앞당겨 간부로 제발된다는 생각이 만만한 자부심과 용기를 주었다. 고향마을에 돌아온 그는 노상 기분이 들떠있었다. 어른들은 축복의 눈으로, 동년배의 청년들은 부러움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날 그는 마을앞을 흐르는 강물에서 탄력에 넘친 몸을 시원스레 씻었다. 미역을 감고나서 휘파람을 불며 강가를 거닐었다. 그러다가 방금 빨래를 끝내고 돌아가는 처녀를 만났다. 일시적인 전략적후퇴시기 소년빨찌산으로 함께 싸운 처녀였다. 서로 손을 맞잡고 놓을줄 모르는 그들의 입에서는 반가움에 넘친 말마디들이 튀여나왔다.

《언제 왔어요?》

《며칠전에…》

《그사이 내가 군민청에 갔댔기때문에 이제야 동무를 만나게 되는군요.》

《몰라보게 됐군.》

《동무도 역시…》

그들은 빨찌산투쟁을 하던 소년시절이 멀리 지나가고 서로가 청춘으로 성장했다는것을 깊은 감회속에 되새겼다. 황석태는 처녀의 얼굴에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머리를 감고 세면을 한듯 한 처녀의 얼굴에는 상상도 못했던 성숙미가 풍기였다.

《우리 저쪽에 가서 얘기를 나눕시다.》

황석태가 물황철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안침진 곳을 가리켰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손에는 빨래감이 든 대야를 들고 다른 손은 황석태의 줌안에 든채로 걸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기쁨이 그를 방심하게 하였다. 황석태는 처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말큰한 감각과 따뜻한 체온에 취하였다. 가슴설레이는 그 느낌에서 영원히 벗어나고싶지 않았다. 만일 이 처녀와 장차 결혼을 한다면… 불시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합리화하는 유력한 근거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우선 소년빨찌산투쟁을 하던 그 시절에 처녀의 성품도 충분히 리해하였다. 결혼전에 신뢰와 리해를 위한 교제가 반드시 필요한것이라면 우리는 일찌기 어린시절에 투쟁의 불길속에서 그것을 거치였다. 그러니 지금 이 가슴에 불타오르는 애정은 돌발적인것이 결코 아니다. 자기의 감정을 이렇게 풀이한 황석태는 주저없이 결판을 보리라는 용기를 가지였다. 그들은 물황철나무들이 서느러운 그늘을 던지며 진을 치고 서있는 정갈한 풀밭에 마주앉았다. 처녀는 도당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학교생활이 재미있는가, 함께 싸우던 아무개의 소식을 아는가… 끝없이 묻고있었지만 황석태는 벌써 그의 말이 귀가에 잘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내 물음에 대답한 다음 나눕시다. 나는 동무를 사랑하겠소. 동무 마음은 어떻소?》

화제를 휙 돌려버린 돌발적인 물음에 처녀는 얼른 반쯤 열린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두눈을 크게 떴다.

《왜, 내가 싫소?》

《뜻밖이군요.》

처녀는 잠시후에 눈시울을 내려깔며 한마디 속삭이듯 입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마음을 다잡고 명백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석태동무, 우린 서로 사랑할수 없어요. 나는 동무와 나이가 같지 않나요. 녀잔 저보다 네댓살이상 되는 대상을 맞아야 사랑도 받고 의지가 된대요.》

《체, 그게 무슨 상관이요.서로 마음만 합치면 그만이지.》

《아무튼 우린 서로 융합할수 없어요.》

처녀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마주보았다. 결연한 눈빛에 부딪친 황석태는 처녀를 굴복시키려는 반발적인 욕망이 더욱 세차게 솟구쳤다. 한껏 몸이 달아올랐다. 앞뒤를 가릴새없이 처녀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무엇때문에 안된다는건지 말하오. 대답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소.》

황석태의 폭발적인 열정에 질겁한 처녀는 몸부림치며 그의 줌안에서 손을 뽑았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달아나버렸다.

황석태는 얼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처녀의 손목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체온의 황홀한 느낌은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가슴이 무너지는듯 한 실망감에 눈앞이 아뜩했다. 잠시후에야 처녀가 빨래대야를 그냥 내버린채 달아났다는것을 알았다. 그 대야를 찾으려고 처녀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황석태는 풀밭에서 어느때든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저녁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실은 두번이나 그 장소에 찾아왔던 처녀는 곰처럼 웅크리고앉아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황석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물러가군 했다. 먼 후날에 안해는 그때의 일을 즐겁게 회고했다. 그날 저녁 황석태는 빨래대야를 들고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처녀는 집에 혼자 있었다. 처녀는 부모들이 나타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황석태는 기어이 언약을 받아내려고 서둘렀다. 뜻을 이루지 못하면 무슨 결판이라도 낼상싶은 기세였다. 처녀는 문초를 당하듯이 땀을 빼고있었다. 그러는데 처녀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황석태는 그에게 넙적 엎드려 절을 하고나서 자기를 사위로 삼아달라고 주저없이 간청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딸의 말도 들어보더니 황석태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하는 꼴을 보니 네녀석이 사내는 사내다. 헌데 소뿔은 단김에 뽑지만 청혼문제는 주근주근 다루어야 하느니라. 너희들이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이지만 그렇게 성급히 다그어대니 우리 애가 당황할수밖에 있느냐. 우리 애가 너와 동갑이지만 그건 상관없다. 우리 로친도 나와 같은 나이이지만 별일없이 지금껏 살아오고있다.》

황석태는 그로부터 사흘후 달밝은 밤에 처녀의 고백을 끝내 받아내고야말았다.

황석태의 불타는 열정과 완강한 의지에 처녀는 굴복하고말았던것이다. 지나치게 표현을 한다면 안해측에서 볼 때 강요된 결혼이였다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후날에 그는 후회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온갖 성의를 다하여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제 혼자 가정살림을 꾸려오다싶이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의 정이 식어간다는것을 의식하면서도 말 한마디 없었다. 반면에 황석태는 자기의 의지에 순종하는 존재로 안해를 치부하여왔다. 그러면서도 왼땅을 보지 않는 자기를 자랑으로 여겨왔었다.

《뭘 그리 생각하고있어요. 어서 식사를 하자요.》

안해의 다정한 권고에 황석태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그는 한숨을 앞세우며 밥상머리에 앉았다. 안해가 밥상우에 덮었던 보자기를 젖히였다. 빛다른 반찬도 올랐고 맥주병도 두개나 있었다. 황석태는 안해가 따라주는 맥주를 마시였다. 그리고는 고뿌에 제 손으로 병을 기울여서 안해에게 권하였다.

《당신도 한고뿌 마시오. 나는 결혼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인격을 존중할줄 몰랐소. 당신앞에 용서를 빌고싶은것이 많소.》

《여보, 갑자기 어찌된 일이예요?》

안해는 의혹의 눈길로 남편을 주시할뿐 맥주고뿌를 받지 못했다. 선뜻 생각할수 없는 일이여서 남편의 신상에 또다시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겁질린 기색이였다. 황석태는 받쳐든 고뿌를 안해의 턱밑에 멈춘채 생각했다. 어찌된 일인가라는 안해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가? 그전이였다면 어떤 경우든지 안해앞에서 용서를 빌고싶은 마음이 없었을것이다. 사업상의 과오뿐아니라 자기의 인간됨됨까지를 전면적으로 랭혹히 돌이켜보는 지금에야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어서 받소. 팔 떨어지겠소.》

황석태는 회오가 짙게 어린 얼굴에 한가닥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다시 권했다. 안해는 드디여 이쪽의 감정을 읽었는지 감심한 표정으로 고뿌를 받아 입술로 가져갔다. 그가 남편이 부어주는 맥주를 마셔보기는 지금이 처음일것이다. 충격이 커서인지 고뿌를 비우고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슴벅였다. 안해의 눈물을 본 황석태는 저릿한 충동을 느끼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이제부터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하겠소!》

가슴속에 넘치는 복잡한 심정을 그 한마디에 담았다. 안해는 모든것을 리해한듯 입술을 벙싯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고난 황석태는 자기 방으로 건너가 침대에 누웠다. 안해와 마주앉은 뒤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한시간쯤 달게 오침까지 할수 있었다. 제련소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박치영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그에게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그도 해당 조직에서 비판을 받았을것이다. 그렇지만 자기만이 깨우쳐줄 말이 따로 있는것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동안 생각을 굴리던 황석태는 움쭉 일어나 탁자우에 놓인 송수화기를 들었다. 교환수의 챙챙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어델 찾습니까?》

《공업시험소 분초급당을 찾소.》

황석태는 분초급당비서에게 박치영을 곧 집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끝낸 그는 박치영을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가족들은 후에 데려가기로 하고 자기는 오늘 당장 밤차로 떠날 결심이였다. 그는 평남도당에 가서 배치를 받기로 되여있었다. 며칠간 쉬고 가도 무방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배치지로 달려가 새로운 생활에 몸을 잠그고싶었다. 안해와 함께 큼직한 려행가방에 넣을것을 다 갖추어넣었다. 그리고나서 이제나저제나 하며 문밖을 연신 바라보았지만 저녁시간까지 박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져보니 그를 만난지도 두주일이 넘었다. 상급당에 불리워다니며 비판을 받고 해임의 곡절을 겪다보니 그동안 그를 만나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겨를도 없었다. 그 기간에 치영이도 심각한 정신적번민을 하였을것이다.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찾은 교훈은 무엇일가? 그에게도 작별을 앞두고 나에게 터놓고싶은 심정, 하고싶은 말이 많을것이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지 알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난 황석태는 안해와 함께 영림역으로 향했다. 짧은 가을해는 져버린지 오랬다. 시내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래일 낮에 떠나도 좋겠지만 남들의 눈을 피하여 밤차를 타기로 하였다. 집에 그냥 있으라고 타일렀으나 안해는 말없이 려행용가방을 들고 역까지 따라나섰다. 잘못을 저지르고 떠나가는 걸음이여서 그 누구의 눈에 띄울가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었다. 안해는 조금이라도 떨어질세라 곁에 바투 붙어섰다. 걸음을 맞추어 그와 나란히 얼마쯤 걸었을 때 아득히 세월을 거슬러오르며 하나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빨찌산투쟁을 할 때 둘은 지금처럼 밤길을 걸어서 면소재지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곳에 주둔한 적들의 형편을 알아오라는 정찰임무를 받았던 걸음이였다. 만일의 경우를 예상하여 전란에 부모를 잃고 삼촌을 찾아가는 오누이로 약속을 했었다. 면소재지에 안해의 삼촌이 살고있어서 놈들에게 잡힌다 하여도 그럴듯하게 속여넘길수 있었다. 녀자의 나이가 성장의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소년소녀시절이였다. 동갑이였지만 그때의 안해는 손우의 누나처럼 무모하게 덤비는 황석태를 꾸짖기도 하고 자기의 목도리를 풀어 사정없이 얼어드는 그의 귀바퀴를 싸주기도 하였다.

《여보, 당신도 기억나오? 우리가 소년빨찌산시절에 함께 정찰을 나갔던 일 말이요.》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다.

안해는 느닷없는 물음에 인츰 대답을 못하더니 말했다.

《생각나요.》

《왜 갑자기 그때의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구만.…》

《그 시절로 되돌아가서 처음부터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각오가 그 추억을 불러냈겠지요.》

황석태는 휙 머리를 돌려 안해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풀이를 하여주는 안해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길가의 아빠트창가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전등빛이 안해의 얼굴에 아롱졌다. 눈귀의 잔주름과 수건밑으로 흘러내린 몇오리의 흰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이제 내가 새 배치지에서 생활을 하느라면 뜻하지 않은 일에 부닥칠수도 있고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되는 일도 있을수 있을거요. 그럴 때마다 자기를 과신하는 덜된 성미가 드러나면 소년빨찌산시절처럼 당신이 나를 잘 깨우쳐주오.》

황석태는 이러나저러나 지금의 자기에게 안해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허심히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의 그러한 허심성에 스스로 놀랐다. 남다른 의지와 담력을 지녔다고 자부하여온 자기가 감상적인 기분에 젖으며 안해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할수 있다는것을 전에는 상상할수 없었다. 그것이 평생에 있어보지 못한 전면적이고도 심각한 자기 반성에서 오는것이였지만 그자신은 방금 안해에게 한 말을 쑥스러워하면서 가볍게 얼굴을 붉히였다. 운명의 락차곡선을 긋다보니 사람이 갑자기 인격과 긍지마저 상실한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의 감정을 오해했던것이다.

그들이 영림역에 이르렀을 때는 한창 차표를 파는중이였다. 안해가 차표를 사서 남편에게 주었다.

《참, 그속에 양영복선생을 면회하는데 들고갈것을 좀 마련해넣었소?》

황석태는 안해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래일 아침 적십자병원을 찾아갈 생각이여서 저녁밥을 짓는 안해한테 귀띔을 했던것이다.

《가방속에 들어있는 비닐구럭이 그 선생한테 들고갈거예요. 성의껏 하느라고 했는데 변변치 못해요.》

황석태의 눈앞에는 양영복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굽힐줄 모르고 도도하게 맞서며 안타까이 터뜨리던 울분의 밑바닥에 숭고한 지향과 과학자의 량심이 그렇게도 순결하게 불타고있는줄 왜 몰랐던가?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죄스러운 일이였던가. 래일 그를 찾아가면 엎드려 용서를 빌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과연 너그럽게 대해주겠는가? 나로 하여 그가 당한 곡절이 컸던것만큼 쌓였던 분노를 여지없이 터칠것이다. 워낙 대바르고 고집스러운 성미를 가진 로인이다. 설사 그가 아무리 아픈 말을 하여도 나는 할말이 없다. 다만 그의 건강과 과학적성과를 진심으로 빌뿐이다.

안내원처녀가 이제부터 표를 찍어드린다고 알리였다.

황석태는 안해와 함께 기다림칸을 나섰다.

이때 급히 달려온 승용차 한대가 역사앞마당에 멎었다. 차에서는 제련소 지배인이 내리였다. 등이 약간 굽을사 한 그를 알아본 황석태는 무등 반가왔다. 오전에 작별인사를 할 때에는 그와 한두마디의 말을 나누었을뿐이다. 지난 기간 사업과정에 견해의 대립과 감정의 마찰이 제일 많았던 사람이 다름아닌 지배인이였다. 작별을 하면서 그에게 심심히 사죄하고싶은것이 많았다. 그랬으나 그를 찾아갔을 때에는 행정일군들의 모임중이여서 긴말을 나눌수가 없었다. 헌데 지금 그가 역사앞에 나타난걸 보면 어데론가 출장을 떠난 걸음인것 같았다. 함께 렬차를 타고가면서 허심히 얘기를 나누게 되였으니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배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누구인가를 초조히 찾고있었다.

《지배인동무.》

황석태는 소리쳐부르며 다가갔다. 이쪽을 알아본 류명식은 말없이 마주보더니 원망을 터치였다.

《이렇게 훌 떠나는 법이 어데 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10여년간 함께 일해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자고 집사람에게 준비를 시켰댔습니다. 그래서 하루일을 마치고 그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들애가 하는 말이 방금전에 역으로 나갔다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나때문에 이렇게…》

황석태는 목이 메여와서 말끝을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배인이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다. 나때문에 그중 많이 속을 썩인 사람, 당회의들에서 나에게 주저없이 비판을 가해오던 지배인이 작별의 지금에 누구보다 뜨거운 정을 보내줄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고맙습니다.》

부지중 갈린 목소리가 입밖으로 튀여나갔다.

《내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미리 알렸어야 하는건데 여러가지 일에 다몰리다나니 깜박 잊었댔습니다. 하는수없이 차렸던것을 좀 꾸려가지고 왔습니다. 도중식사로 잡수시오.》

류명식은 처음의 노여운 기색을 가시고 이렇게 말하더니 돌아서서 운전사에게 눈짓을 하였다. 운전사가 차실에서 큼직한 구럭을 들고 나왔다. 황석태가 그것을 받아들며 감사의 정을 두번다시 보내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안해가 지배인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며 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배인동지,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해임된 뒤에야 황석태동무를 보다 깊이 리해했습니다. 전에는 전혀 자기를 되돌아볼줄 모르는 사람으로 알고있었는데 이번에 지내보니 역시 황동무답게 자기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라는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심각히 자기를 반성하기도 쉽지 않는 일이고 해임된 다음에 그렇게 신심과 용기를 잃지 않는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류명식이 두사람을 번갈아보며 헌헌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준절하신 비판의 말씀이 아니였다면 나는 그처럼 랭혹히 자신을 반성하지 못했을것입니다.》

황석태는 진심을 말했다. 그 누구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받았다면 어느 정도 자극을 받기는 하였겠지만 전면적으로 자기를 반성하지는 못했을것이다. 즉석에서는 형언할수 없이 가슴이 아프고 지어 전률까지 느꼈지만 후에는 심각한 내부투쟁에서 자신을 극복하도록 이끌어주신 그이에 대한 감사의 정이 가슴에 넘치였다. 장난이 세차고 엉뚱한짓을 곧잘 하였던황석태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의 속을 지지리 태워주었고 어머니로부터 종아리에 피가 지도록 매를 맞기도하였다. 그는 최근에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쁜 버릇을 떼여주려고 아픈 매를 들던 아득한 옛 시절의 어머니모습을 련상하군 했다.

다른 손님들은 모두 나들문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나갑시다.》

류명식이 깨우쳤다.

황석태는 그와 나란히 홈으로 나갔다. 안해가 가방과 구럭을 들고 뒤따랐다.

황석태는 류명식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았으나 시간이 없었다. 이미 홈에 들어와 서있던 렬차는 출발을 재촉하며 기적을 울리였다. 초조감에 휩싸인 황석태는 용서를 빌고싶은 심정은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가장 긴요한 부탁만을 남기리라고 생각했다.

《지배인동무, 나를 대신해서 앞으로 양영복박사를 잘 도와주십시오. 그가 새로운 티탄합금가공법을 연구하여 성공하면 나에게 꼭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안해에게서 가방과 구럭을 넘겨받은 황석태는 렬차의 승강대에 올랐다. 차실안으로 들어가다말고 돌아섰다. 그는 멀리 밤하늘을 불태우는 화광에 눈길을 주었다. 제련소의 여러 로들에서 솟구쳐오르는 화광이였다. 제련소는 잠들줄 모르고 창조의 불길을 거세차게 피워올리고있었다. 해놓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이 더 많은듯싶지만 아무튼 정들었던 제련소였다. 무엇보다 티탄직장에 정이 켕기였다. 제련소에 티탄합금생산설비가 갖추어진것은 최근의 일이였다. 그것은 9월제련소의 특별한 자랑이였다. 그 생산기지를 꾸리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티탄합금이 여러가지 형태로 가공되여 경제와 국방의 현대화에 긴요하게 쓰이는것을 보지 못하고 제련소를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발길이 선뜻 돌아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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