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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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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12 19:27 조회3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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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김정일동지께서 길떠날 차비를 하시였다. 보위색잠바를 입고 모자도 옷장에서 꺼내시였다. 오래전부터 생각은 있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길을 떠나게 되신것이다.

오진우가 튕겨놓은것으로 해서 《일당백》에 대한것이 항상 관심사로 되였던것인데 대덕산에 표식비를 세우고 이런저런 대책 몇가지를 세우는 정도로써는 마음을 놓을수 없으시였다. 하여 기회를 마련해가지고 분계선에 린접한 동해안의 어느 구분대에 들어가 실정을 료해하실 예정이시였다.

그이께서 나들문쪽으로 나서시는데 문기척소리가 나더니 오진우가 문득 나타났다.

《지금 막 떠나서 거기에 들리려던 참인데 이렇게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야 응당 제가 와서 안내를 해야 옳지요. 다른것도 아니고 우리 일인데…》

《오늘은 <일당백>도 문제지만 산에서 싸우던 이야기를 좀 들어볼작정입니다.》

《산에서 싸운 이야기요?》 그것은 참말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산에서 싸우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이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계시지 않는가. 놀랍다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오진우는 자못 즐거운 기분에 잠기였다. 그렇게도 간고했던 과거이지만 그것을 돌이켜보고 추억에 잠긴다는것은 언제나 가슴이 부풀어오를만치 긍지로운것이였다.

《기왕 이렇게 된바에는 한대 피우고 떠납시다. 지금 10시니까 아호비령을 넘자면 오후 3시나 4시쯤 될것 같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 담배를 권하시였다.

《그렇게까지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 몸이 불편한거나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진우는 손을 흔들며 거북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 김정일동지께서 수화기를 드시였다. 명쾌하고 활기에 넘친 허담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허담이 그동안 쏘련을 비롯한 동유럽주재 외교대표들에게 부탁했던 신간도서들이 몇권 들어왔다는것을 알리는것이였다.

《수고하였습니다. 인차 나한테 보내주십시오… 참, 차후에 알려주자고 하던건데 마침 잘되였습니다. 전번에 부상동무랑 오백룡동지랑 제기하던 기념탑조각상문제 있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요?》

《김일동지랑 만나서 그 일을 바로잡아놓았습니다. 명칭도 인민영웅탑이 아니라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으로 하고 대오의 진두에 수령님의 영상을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감격에 겨운 허담의 목소리는 어느덧 물기에 젖어있었다.

비록 그새 말씀은 없었지만 기념탑이 력사적진실을 구현하게 된데는 그이의 숨은 로고가 이만저만 깃들지 않았음을 짐작하고도 남는 허담이였다.

《의례 저희들이 처리하여야 할것을 처리 못하고 김정일동지께 부담만 끼치니 면목이 없습니다.》

《아, 그러지 마십시오. 조각단동무들과 만나 한번 토론해보았지요…

지금 기념탑의 주인공형상과 관련해서 론의가 구구하다는데 동무들의 결심이 어떤가고 물으니 그들은 외부에서뿐아니라 창작단내부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골치를 앓고있다고 하면서 똑똑한 결론을 주는 사람이 없어 야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해주었습니다.

기념탑을 세우는데서 결론을 줄 사람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여기서 누가 주인이겠는가 하는것인데 주인이란 바로 우리 인민이다,

탑을 세우는것도 우리 인민이 세우고 우리 인민이 대를 두고 혁명전통을 빛내가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그 결론을 얻자면 기념탑의 주인인 인민에게 물어보아야 했을것이다, 인민이라고 하면 범위가 너무 넓으니까 우선 다른데 가지 말고 오늘의 보천보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물어보면 그자리에서 명철한 대답이 나올것이 아닌가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1주일후에 회답이 왔는데 인민에게 물어보니 와와 소리를 지르면서 보천보전투를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신 김일성장군님을 모셔야 한다고 했답니다. 이제 오백룡동지를 만나면 그렇게 말해주면 되겠습니다.》

허담은 탄성을 질렀다.

《참말 명철합니다. 인민이 주인인데 인민에게 물어보라. 정말 명안입니다. 전 기껏 생각했다는것이 어느 누군가를 불러다가 혼쌀을 내서 제대로 바로잡으려니 생각했었습니다. 인민이 주인인데 인민에게 물어본다… 참말…》

《아! 이러지 맙시다. 인민이 주인이라는것은 너무나 응당한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가 번져가자 의자에 앉았던 오진우가 벌컥 일어났다. 아닌게 아니라 오백룡에게서 바로 어제인가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은 직접 그이께 말씀드릴 생각까지 했던것이다.

《참, 잘됐습니다. 이젠 마음이 놓입니다. 큰 문제가 풀렸습니다.》

《이러지 맙시다. 그거야 응당한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 본인앞에서 듣기 좋게 말하자는것이 아니라 옛날 산에서 싸울 때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렸습니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곤난이 있으면 인민에게 의거하라, 모를것이 있으면 인민에게 물어보라, 인민들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이것이 그때 우리의 구호였습니다.

인민들속으로! 이 구호를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우리는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싸워이길수 있었던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수령님 생각과 꼭같으시다는 그것입니다.》

오진우는 본시 말을 류창하게 하는 축이 아니였는데 이때만은 자기 의사를 거침없이 단숨에 내리외우는것이였다.

《아마 오백룡동무가 이 소식을 들으면 만세 3창을 불렀을것입니다. 먼저번 조각현장에 나가보고 너무나 기가 막혀 펄펄 뛰면서 어느놈이 이따위 작간을 하는지 당장 나서라고 소리까지 쳤다고 나한테 말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 웃음을 터치시자 오진우도 따라 웃었다.

잠시후에 그이께서는 현관으로 나서시였다.

두대의 승용차는 잠간사이에 평양거리를 빠져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내달았다. 양덕고개를 넘어서자 험준한 산발들이 나졌다. 마치 자연이 신묘한 자기 재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것처럼 깎아지른 절벽을 내놓는가 하면 또 어떤데는 바가지를 엎어놓은것 같은 둥글둥글한 바위를 강바닥 한복판에 엎어놓기도 하였다.

굽이굽이 한나절이나 돌아오르니 아호비령마루가 나섰다. 여기는 동서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그런데다가 험준하면서도 기세좋게 남쪽으로 느물느물 물결쳐나간 산줄기들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그 한끝이 남조선의 태백산이나 지리산까지 가닿게 되리라는 생각때문에 인차 시선을 뗄수 없게 되였다. 겸해서 여기에 오르게 되면 대체로 륙로를 택한 길손들이 로천식사로 즐기고싶어지는 좋은 지점으로도 되였다.

《그럼 속도 출출한데 어느 바위등에서 한끼 때볼가요?》

오진우는 자못 즐거운 마음으로 저쯤 바라보이는 펑퍼짐한 바위등을 가리키였다.

《그렇게 합시다.》

김정일동지께서 먼저 자리를 잡으시였다. 바위등은 꽤 넓어서 칠팔명정도 넉넉히 둘러앉을만하였다. 일행이라야 두명의 운전수와 오진우의 부관까지 합쳐 다섯명이였다. 부관은 차에서 점심보따리를 날라왔다. 오진우의 부인이 도중식사준비를 깐깐히 했다는것이 알리였다. 밥사발과 공기가 여러개이고 나박김치통 그리고 배추국도 있었다. 말그대로 집에서 큰 두리반에 차려놓을만한것을 그냥 모두 꾸려보낸셈이였다. 흰보자기를 펴놓고 다섯명분을 차려놓으니 웬만한 오찬회 못지 않은 차림이 되였다.

어리둥절해진 운전수에게 김정일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최동무, 우리것도 가져오시오.》

운전수는 고개를 기웃해보이고나서 자리를 떴다. 이미 차려진것만 해도 넉넉하지 않는가 하는 눈치였다.

운전수가 들고온것은 자그마한 꽃보자기에 달랑하니 꾸린것인데 하나는 줴기밥이 들어있는 늄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파랗게 보이는 시금치무침이였다.

《자! 각자 식성대로 듭시다.》

오진우는 보온병을 기울여 잔에 물을 따르며 손짓을 하였다.

이렇게 되여 이른바 《아호비령식사》가 시작되였다. 별로 진귀한것은 없었지만 대단히 유쾌한 자리였다.

식사를 한참 하시던 김정일동지께서 고개를 드시였다. 어머님 생각이 문득 나시였던것이다. 어머님께서는 해마다 봄이 오면 껍질까지 막 간 수수타개죽을 쑤어가지고 대성산이나 룡악산에 가서 나무밑이나 바위등에 앉아 야외식사를 하군하시였다. 그럴 때면 항일유격대에 참가한 녀투사들 네댓명을 꼭 데리고 함께 가시였다. 그자리에서는 산에서 싸우던 이야기를 하게 되였고 끝내는 처창즈이야기가 펼쳐지게 되군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부관과 운전수들에게 우리에 대해서는 상관말고 어서 식사를 하라고 이르신 다음 오진우의 무릎을 잡아흔드시였다.

《부상동지! 저는 이렇게 야외식사를 하는 때면 문득문득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처창즈이야기가 떠오르군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젖어든 눈급을 훔치시며 이제라도 처창즈골안의 임의의 땅바닥을 파보라, 그러면 굶어죽은 사람의 유골이 나올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람도 투항하지 않았고 굴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상기하면 저는 유격대와 오늘의 우리 군대, 혁명적신념과 혁명적절개 이런것을 두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상동지! 저의 물음에 하나 대답해주십시오. 몰라서가 아니라 그때의 체험담을 직접 들어보고싶어 그럽니다. 말그대로 전고미문의 그 형용키 어려운 고난속에서도, 그것도 10여년세월 대오는 오히려 강철같이 다져지기만 했습니다. 물론 림수산이나 리종락이와 같은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것도 문제로도 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분파하나 생기지 않았고 야심가도 나오지 않았으며 적진으로 도주한자도 없었는가말입니다. 이런 일은 공산주의운동력사에서 여태 있어본적이 없습니다. 그래 어떻게 되였습니까?》

《하아!…》

오진우는 손을 흔들며 한옆으로 물러나 앉는다.

《저야 뭐 그저 따라다녔을뿐이지 그런걸 압니까. 그건 군사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며 더구나 예술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진우는 한껏 긍지에 어려있었다. 물을 몇모금 마시면서 잠간 생각하는것 같더니 나직이 말을 떼였다.

《저야 그저 어려서부터 오늘 이때까지 혁명군대를 따라다녔을뿐이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혁명이요 신념이요 하는걸 복잡하게 생각해본적도 없구요. 그저 내 마음이 내키는대로 했을뿐입니다. 그 마음이란 우리 부모형제를 살륙한 일제에게 앙갚음을 하자, 그리고 놈들을 다 내쫓고 조국을 해방해서 압박도 착취도 없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 그것이였지요. 저도 그렇고 우리 빨찌산들 거의가 <공산당선언>이나 <자본론>을 연구해서 공산주의자가 된것이 아닙니다. 우리 처지와 우리 생활이 그렇게 하도록 추동한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계급적처지로만 10여년을 싸울수 있었을가요?》

그의 목소리는 갈리여있었다. 말을 중단하고 한참동안이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있다가 그이께로 몸을 기울이였다.

《소설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겠습니까. 그러면 그때 이야기를 어느 정도 리해할수 있을겁니다. 그때 우리 부대에 나보다 나이 여섯살이나 우인 리봉준이라는 대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경상도에서 나서자라 부모와 함께 북간도에서 살다가 왜놈들 토벌에 집식구 전부를 잃고 유격대에 들어왔습니다. 령리하고 날파람있는 사람이다보니 싸움을 잘했지요. 그런데 곤난이 닥쳐왔습니다.

1940년을 넘기고나서 2차대전이 한창 벌어졌는데 수십만 관동군이 산을 샅샅이 뒤졌으니까요. 그래 우리는 주동적으로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갔습니다. 리봉준이는 장백지구에 나가 공작을 하다가 꼬박 사흘동안 굶게 되였다고 합니다. 다리까지 부상을 당했구요. 그런데 하루는 같이 나갔던 동무가 신문 한장을 얻어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외상 마쯔오까와 쏘련의 쓰딸린이 같이 찍은 사진이 나있었다고 합니다. 신문을 읽어보니 <쏘일중립조약>이 체결되였더랍니다. 이걸 놓고 땅굴속에서 며칠동안 토론하다가 리봉준이 먼저 여보, 나는 이길로 마을에 내려가고말겠소, 우리가 암만 산에서 고생해야 전혀 승산이 없소, 정세가 이런판인데 땅굴속에서 굶어죽을바에는 내려가서 우선 살고봐야 할게 아닌가, 이랬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같이 있던 동무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이튿날 땅굴에서 나와 둘이 마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헤여질때에는 헤여져도 당장 걷지 못하는 부상자를 혼자 가라고 할수 없었다는거지요. 리봉준이 말하기를 총을 메고 한 10년 해봤으면 됐지 더이상 참고견딜 기운이 없다, 그러나 난 죽어도 적들의 개짓은 안한다, 하고는 부축을 받아 다리를 질질 끌며 인가있는데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두사람은 해질녘에 어느 한 농가에 들어가 길가던 사람인데 하루밤 재워주시오 하니 방문을 열어잡고 한참동안이나 이쪽의 차림새를 살피고난 주인령감이 웃방으로 들어오소 하더랍니다. 산골짜기 외딴집인데 매우 가난해서 부엌에는 몇개의 사발과 물독이 있을뿐이였답니다. 아들은 다리 병신이고 며느리는 순수 촌아낙네더랍니다. 날이 어두어 강낭밥을 한그릇 먹고나서 식곤이 와서 누웠는데 주인령감이 올라와 리봉준의 손을 잡으며 보아하니 자네들은 산에서 내려온것같은데 솔직히 말하라, 나도 왜놈 보기 싫어 산중에 와서 사는 사람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 그렇다고 하니 구레나릇이 시꺼먼 로인은 무릎을 치면서 그렇다면 자네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소식을 알겠구만, 그래 장군님께서 건재하시오?… 그래 건재하다고하니 됐소, 그렇다니 숨이 나가오, 우리는 살았소 하며 팔소매로 눈물로 닦더라는겁니다. 로인의 말에서 충격을 받은 리봉준은 밤새 자지 못하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캄캄한 웃방에서 두 대원은 유격대에 들어와 10년 가까운데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것을 다 털어놓게 되였답니다.

리봉준은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던 글장님이였는데 장군님께서 친히 글을 배워주었고 발싸개감는 법, 총다루는 법에 이르기까지 다 가르쳐주었다, 령을 넘어갈 때면 몸이 약하다면서 배낭을 자주 메다주시였다, 한자리에서 식사를 할 때면 언제나 몇숟가락씩 밥을 덜어주시였다, 그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보천보전투를 하고 난 다음해 겨울 장질부사에 걸려 앓고있는 병실에까지 찾아오시여 이마를 짚어주고 손수 죽을 떠서 입에 넣어주시였던것이다, 리봉준은 백사천사 다 잊어도 죽을 떠서 입에 넣어주던 그 일, 이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 아니고는 그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것을 장군님께서 해주셨다, 이 사랑, 이 은정을 저버리다니… 이런것을 생각하며 리봉준은 밤새 울었다고 합니다. 아침밥을 들여왔는데 밥상에는 강낭밥에 닭이 한마리 놓여있더랍니다. 이 집으로서는 최대의 성의였습니다. 로인님이 하는 말이 나라찾느라고 고생을 하는분들인데 대접이 소홀하다면서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김일성장군님만 믿고 살지요,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 나라는 꼭 독립이 됩니다, 그러더랍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령마루에 올라 리봉준은 땅에 털석 주저앉아 혼자 넉두리를 했답니다. 내가 항일유격대에 들어갈 때 누구를 믿고 들어갔나, 나는 공산주의를 믿기전에 김일성장군님을 믿었지, 내가 누구때문에 눈을 떴나, 장군님때문이지, 아! 장군님! 장군님곁을 떠나서 나는 못산다, 설사 산다 한들 그것은 개짐승만도 못한 삶이다, 한참동안이나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며 울다가 그길로 땅굴에 들어가 총을 파가지고 부대로 돌아왔답니다. 그길로 장군님을 찾아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장군님께서는 나에게 한 말을 그냥 그대로 부대전원이 모인데서 말하라고 하는것을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정 힘들어 혁명투쟁을 하지 못할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라,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변절도주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보탠것도 없고 던것도 없습니다.》

오진우는 말을 끝내고나서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것 같은 기분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도 처절한 감정에 잠기여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리치는 명백하지 않습니까?》 오진우는 빛나는 시선으로 좌우를 둘러보고나서 계속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수령님은 우리 마음의 기둥입니다. 이 기둥에 의지하면 꿋꿋이 나갈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자빠지거나 딴길로 가게 되는거지요. 굶어쓰러지면서도 투항하지 않은 처창즈사람들도 모두 이 마음의 기둥에 의지해있었던겁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손을 들어올렸다가 오진우의 팔을 덥석 그러잡으시였다. 그리고 크게 웨치시였다. 《어쩌면 저의 생각과 그렇게도 꼭같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리봉준대원은 그후 어떻게 됐습니까?》

《아쉽게 됐지요. 해방되는해 7월 소부대공작을 나왔다가 적들의 추격을 받아 두만강물에 가라앉아 시신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리봉준에 대해서는 누구나 오늘도 생생히 기억하고있습니다.》

《아호비령식사》는 끝나고 차는 내리막길을 달리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시였다.

리봉준의 이야기는 혁명투쟁에서 리념문제 그리고 신념과 의리 그것은 자신께서 항상 중시하시고 기회가 있을적마다 제기한 수령에 대한 관점, 혁명은 수령에 의해 시작되고 수령에 의해 령도되며 수령에 의하여 승리하게 된다는 수령중심론을 더욱더 확고한것으로 되게 하였다.

승용차는 어느덧 원산을 지나 안변벌을 달리고있었다.

×

한쪽은 망망한 바다, 다른 한쪽은 푸른 산발, 참으로 선명한 대조가 이루어졌다.

《어?》

바로 그때 자동차가 달려나가고있는 그앞에 인민군병사 하나가 나타났다. 총을 메고 한쪽 길가에 붙어서 달리고있었는데 무거운 배낭이 털썩거리였다. 다리를 저는것으로 보아 강행군훈련에서 락오된 병사 같았다. 앞서 가던 차도 그것을 띠여보고 속도를 흠뻑 늦추는것으로 보아 어떻게 할것인가 주저하는것 같았다.

오진우가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할것인가 하는것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가 차가 멎어서더니 문이 열리고 누런 령장이 저녁해빛을 받아 번쩍 빛을 뿌리였다. 쩔뚝쩔뚝하며 달려가던 병사가 발을 모으고 빳빳이 섰다.

다음 순간 이쪽차도 그뒤에 가 멈춰섰다.

오진우가 어느 부대인가 물었던 모양인지 병사는 《…3중대 1소대 2분대 전사 양기동!》 하고 대답하고있다.

《왜 떨어졌나?》

《장령동지, 전사 양기동은 발에 물집이 생겨서 걷지 못해 떨어졌습니다.》

《물집은 왜 생겼는가?》

《발싸개를 잘 감지 못해서 생겼습니다.》

《왜 잘 감지 못했는가?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가.》

《넷!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이제 가야 할 목표는 어덴가?》

《넷! 10키로쯤 가면 중대부가 있습니다.》

《다 먼저 가고 혼자 떨어졌는가?》

《그렇습니다!》

오진우는 한눈에 모든것이 다 설명되고도 남음이 있는것을 끈덕지게 묻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전사의 각오와 의지를 타진해보고싶었던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오진우는 항일혁명투쟁시기 겨울에 도로기를 신을줄 몰라 김일성장군님께서 손수 신을 신겨주시였을 때를 상기하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창유리를 내리우고 보고계시다가 문을 열고 전사에게로 다가가시였다. 그렇게 되자 전사는 앞서 한것처럼 발뒤축을 모아붙이고 차렷자세를 하였다.

《전사 양기동, 행군중에 있습니다.》

《수고하오. 몇살이요?》

《18살입니다.》

《고향은?》

《평양입니다.》

《평양 어데?》

《모란봉구역입니다.》

《배낭에는 뭐가 있어 그리 무겁소?》

《화식도구가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바엔 태워다주겠소.》

《안됩니다.》

《어째서?》

《전사 양기동은 걸어서 목적지까지 도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소. 옳소, 옳아! 명령이니까.》

명령에 대한 무조건성, 그에 대한 태도는 탄복할만하였다. 비록 대오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정신은 새파랗게 살아있어 믿음이 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흥미를 느끼며 또 물으시였다.

《그런데 왜 도와주는 전우가 없이 혼자 남았소.》

《제가 필요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건 왜? 곤난할 때 도움을 받을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하면 두사람의 락오자가 생깁니다.》

《두사람이라… 하하하.》

그이께서는 고개를 들어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설사 락오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 정신에서는 흐리멍텅한데가 전혀 없고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요행수를 바라는것도 아예 없었다.

그이께서는 전사에게 끝까지 명령을 지켜 중대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남기고 다시 차에 오르시였다.

잠시동안에 두대의 승용차는 중대부에 이르렀다. 행군대렬은 아직 8키로 지점에 있었다.

직일관이 나와 보고를 하였다. 중대 병실과 식당을 돌아보는 사이에 련대의 지휘관들이 나타났다. 불의에 닥친것으로 해서 이곳 지휘관들은 몹시 당황해하였으나 오진우는 군대에서 하나의 세포, 중대를 있는 그대로 그이께 보고드리게 된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였다.

언제나 그러한것처럼 오진우는 교양실을 매우 중시하였다. 교양실은 직관물은 물론 거기에 구비되여있어야 할 교양자료들이 다 갖추어져있었다. 그것이 잘 활용되고있다는것도 알수 있었다.

오진우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파고들었다. 몇명의 병사들을 불러다가 정치학습노트도 뒤져보고 무기에 대한 숙련과 보관상태도 료해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우선 먼저 지휘관들과 담화를 하시였다. 사단, 련대, 대대 지휘관들 50여명을 상대로 정치담화가 시작되였다.

첫째로 제기한 문제가 전후에 폭로된 반당종파분자들의 해독행위와 그 후과에 대하여 아는껏 말해보라고 하시였다.

이미 이것은 학습반들에서 취급되였기때문에 그닥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위급, 좌급 지휘관들이 섞여있었는데 맨먼저 젊은 중대장이 일어났다.

《제1중대장 김기덕 토론하겠습니다. 반당종파분자들은 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인 미제에 대하여 적대시하지 말고 그들과 타협하여 우리 나라를 중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를 사상적으로 무장해제하려고 책동한것입니다. 그러기전에는 쩍하면 기계에서 밥이 나오는가 하면서 우리 당 경제정책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자립적민족경제를 건설하려는 우리 인민을 시비하였습니다.

다음은 미제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기때문에 군비에 투자를 하지 말고 인민생활에 다 써야 한다고 하면서 전후 생활이 곤난해하는 인민들에게 환심을 사보려고 책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민군대는 조선로동당의 군대가 아니라 국가의 군대, 통일전선의 군대로 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반당종파분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우리 당 정책에 도전해나서면서 끼리끼리 파를 형성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책동하였습니다.…》

중대장에 뒤이어 몇명의 지휘관들의 토론을 들어보아도 대체로 어슷비슷하였다.

다음은 당이 제시한 구호 《일당백》에 대하여 토론할것을 제기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이곳 련대장을 지명하시였다.

《련대장동무가 한번 <일당백>에 대해서 실지 자기 부대를 교양하고있는 그대로 말해보시오.》

이렇게 되자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해 앉아있는것은 오진우였다.

그는 지휘관들의 모임때마다 강조하였고 특히 최근에는 그것을 줄기차게 재학습을 시키고있는중인데 실태가 어떤지는 알수 없었다.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구리빛인 30대의 련대장이 자리를 차고 패기있게 일어났다.

《<일당백>, 이것은 우리 당이 인민군대앞에 제기한 가장 견결한 전투적구호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덕산초소를 친히 현지지도하시면서 옛날에는 싸움을 잘하는 장수를 <일당백>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인민군대모두를 <일당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교시하시였습니다. <일당백>의 무적의 군대가 되자면 첫째로 모든 군인의 정치사상적준비가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로동자, 농민으로 이루어진 조국의 아들딸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무장되여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본은 위대한 수령님께 충성하겠다는 사상적각오입니다.》

《좋소. 그만.》

김정일동지께서는 토론이 잘되였기때문에 더 오래 끌 필요가 없다고 보시였다.

그때였다. 멀리 내다보이는 중대정문쪽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그이께서는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였다. 행군대오가 씩씩하게 들어서는것이였다.

       내 조국 온 나라가 철벽의 요새다

       우리들은 일당백의 용감한 초병이다

       영광 영광의 길에 원쑤치던 승리의 총검

       오늘은 수백만 어깨에 빛난다 어깨에 빛난다

       내 조국 남녘땅에 원쑤가 있는 한

       우리들은 총창을 더 굳게 잡으리라

       …

한참동안이나 창밖을 내다보고계시던 그이께서 손짓을 하며 말씀하시였다.

《부상동지! 저기를 내다보시오. 바로 저기지요. 저기에 <일당백>이 있고 저기에 우리 당의 요구가 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창문에 다가서서 계속 행군대오를 내다보시였다. 200리 거리를 하루동안에 극복하는 강행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피곤해하는 기색이란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땅을 구르는 발걸음소리, 기운차게 내젓는 팔, 어깨우에 번뜩이는 총창! 실로 장쾌한 장면이였다. 비록 군무생활에서 작은 세부이고 흔히 있는 훈련과정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의 승리라고 할수 있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저 노래 <우리는 총창을 더욱 굳게 잡으리>는 당에서 만들라고 해서 얼마전에 새로 만든 노래입니다. 저 노래를 지금 전체 인민군대가 다 저렇게 부르고있습니까?》

《네, 다 부르고있습니다.》

오진우는 확신에 넘쳐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노래가 나온지 얼마 안되는데 다 부르고있다니 그 속도가 대단히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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