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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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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03 19:48 조회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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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봉은 남이 쓴 장편소설원고를 어지간히 즐거운 기분에 잠겨 한장한장 넘기고있었다.

몇해동안 현지에 나가 붙박혀 감감 소식이 없던 소설가 안세창이 며칠전에 문득 한짐이나 되는 원고보따리를 안고 나타났다.

창문으로 해빛이 비쳐들자 천세봉은 웃옷을 벗어놓고 샤쯔바람으로 앉아 원고를 번지였다. 여름에도 양말을 신어야 하는 허약한 체질인데 방안온도 22도에서 그는 웃옷을 벗은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면 잘 들이는 온돌처럼 약간한 열도 효과가 대단한 모양이다. 반백인 머리칼은 뻣뻣이 일어나고 틀이를 하기 위해 몇대 남지 않은것마저 다 뽑다보니 볼이 홀쭉해졌다. 그러나 눈에는 영채가 돌았다.

며칠전 저녁때였다. 상을 물리고 온돌방에 앉아있는데 70을 넘은 어머니가 《아애비, 우리 집일이 요새는 운이 좀 틔는것 같구나.》하였던것이다. 그래 천세봉이 《무슨 일이 있어요?》하였더니 《고랑이 있으면 두둑도 있다지 않나…》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가 한대도 없이 다 오무라든 볼을 움직이며 설명하는것이였다. 문을 척 열고 한발자국만 내 짚으면 흙냄새가 나고 풀벌레소리를 듣던 촌늙은이가 두터운 콩크리트벽체안에 갇히고 그나마 민충이가 쑥대에 올라간것처럼 높은 아빠트라는데서 살자니 당장 숨이 막히는것 같더니 이제는 그런데로 살아갈수 있을것 같다는것이다.

실로 이것은 큰 변화였다. 몇달동안은 하루에도 몇번씩 《날 금수리에 데려다다오. 난 이런 높은데선 못살아. 열흘, 보름가야 한번 땅을 짚어보나마나 한데서 어떻게 사람이 숨을 쉬니…》 하고 보채는 아이처럼 야단이였던것이다.

《그담은 또 뭐가 있나요.》 하고 아들이 물으니 《둘째는 잔치를 해서 내보냈겠다. 이제 셋째는 이달에 아퀴를 지면 되는거구… 또 책도 하나 나왔으니 한시름 놓은셈이구.》라고 거침없이 내리꼽았다.

《하긴 그렇군요.》

천세봉은 기다란 상아물부리를 거느적이 물고 히죽이 웃었다.

셈판이 없는 늙은이 같은데 계산은 정확한 축이였다. 젊어서는 자주 팔자타령이더니 해방이 돼서 토지분여를 받고 또 아들이 글을 자주 써내면서부터 신수가 펴이게 되자 이제는 늙은이의 인생관도 흠뻑 달라졌다. 아이때 지주집 꼴머슴을 살던 아들이 이제는 세상이 다 아는 작가가 되고 요새는 위원장이라면서 고급승용차에 앉아 다니는걸 보니 천지개벽인것은 물론이고 소태처럼 쓰기만 하던 인생이 어느덧 달고 구수하면서 무한정 오래 살고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어머니!》 하고 천세봉이 아래방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니 이제는 빨리 가야겠다는 말 안해도 되겠습니다.》

《그래그래.》 볼이 오무러드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맘은 아침저녁으로 달라진다는데 기실 그런거지 뭐.》

《명담중의 명담입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라 했겠다. 아! 그러니 세상에 세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군요.

늙은이 죽고싶다는것, 처녀들 시집 안가겠다는것, 장사군이 밑천도 뽑지 못했다고 한것… 그러니 어머니.》

담배물부리를 뽑아들고 넌지시 아래방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나.》 아직 귀가 여간만 밝지 않아 약간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전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군했지요. 우리 사람의 병은 다른게 없구 글쓰는게 병이지요. 글만 안쓰면 당장이라도 들에 나가 밭을 갈수 있수다. 아유, 저 병을 어쩌면 뗄고… 이러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제라도 내가 글쓰는 병을 떼야 할가요?》

《아니, 별말을 다 한다. 사람은 무슨 병이든 하나는 있어야 오래 산대.》 돋보기를 끼고 바느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웃방을 올려다본다.

《내 가만 보니까니 기왕 병을 앓을바 하구선 글쓰는 병두 과이찮아.》

《허어, 저것 보십시오. 사람이란 고정불변이 아니라더니 이렇게 엄청나게 달라지지 않나말입니다.》

천세봉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머리가 달아오를 때 이렇게 잡담을 얼마 하고나면 소나기 뒤끝처럼 말짱하게 개인다.

어머니와 몇마디 주고받은 생활담이 오래도록 여운을 끌면서 희망을 타고 멀리 앞질러나가보기도 하고 때로는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오르면서 추억을 더듬게도 되였다.

어쨌든 총체적인 기분은 70고령에 이른 어머니의 판단처럼 《운이 트이는것》에로 가닿는것이였다.…

원고를 번지던 천세봉은 갑자기 책상을 치면서 웃음을 터치였다. 정전직후 황해제철소 용광로복구장의 이야기인데 작업현장에서 눈이 맞게 된 홀아비와 과부가 남몰래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원형인물이 실지 그랬는지 아니면 작가의 허구인지 알수 없지만 이것은 숫처녀, 숫총각의 련애장면처럼 부끄러워 쩔쩔매는 심리를 묘사하였기때문에 웃음보가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바늘끝처럼 예리한 련애감정을 다루다보니 재미는 있는데 시대감각이 전혀 무시된 엉터리였던것이다. 한바탕 웃고나서 담배를 피우면서 방안을 거닐고있는데 전화종이 울리였다.

수화기를 들자 저쪽 말소리가 들리였다.

《천세봉위원장입니까?》

《네, 천세봉입니다.》

이미부터 잘 알고있던 중앙당문학담당 일군의 말소리이다.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부서에서 만날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곧 들어가지요.》

그는 옷차림을 하고 차에 앉아 중앙당청사로 향하였다.

천세봉이 방에 들어서자 그 일군은 자리를 권하고나서 담배를 내놓았다. 그런후에 건강이 어떤가고 물었다. 항간에서는 천세봉이 하면 병다리로 알려져있기때문에 그것이 별스러울것은 없었지만 본인자신은 인사치레라는것을 잘 알면서도 웬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천세봉은 이제 있을 기본용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부부장동지가 만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출장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 제가 위임받았습니다.》 하고 그는 책상우에 놓인 서류봉투를 집어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간 동안을 두었다가 그는 계속하였다.

《지난 1월 10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편소설 <안개흐르는 새 언덕>을 각색한 예술영화를 보시고 다음과 같은 교시를 주시였습니다. 이제 그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천세봉은 귀를 강구고 만년필을 노트에 가져다대였다.

일군은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이 영화는 연출도 잘하였고 배우들 연기도 좋습니다. 영화의 흐름도 잘 째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내용에서나 예술적형상에서나 반드시 고쳐야 할 결함이 많습니다. 이 영화는 장편소설<안개흐르는 새 언덕>을 각색하여 만든것인데 원작에 결함이 있다보니 영화가 잘되지 못하였습니다…》

교시내용을 요약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여있었다.

첫째로는 로동계급이 잘 형상되지 못하였다. 철공로동자인 주인공이 전형적으로 그려지지 못하고 우락부락하고 쌈깨나 하는 왈패로 그려졌다.

둘째는 민족주의자를 옳게 보여주지 못하고있다. 그러다보니 반일감정을 가지고있는 가문의 딸인 순영이라는 중산층녀성의 운명처리를 잘하지 못하였다.

셋째는 조선에 공산주의사상이 일본에서 들어온것으로 보여주었기때문에 사실과 어긋나며 력사를 외곡한것으로 되였다. 이외에도 몇가지 결함들이 지적되였다.

결국 소설은 당의 문예정책을 심히 외곡한것으로 되였다.

교시전달은 한 10분정도 걸리였다.

그런후에 담당일군은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노트에서 구절구절 짚어가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는 침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 이것은 위원장선생의 과오인 동시에 문학부문사업을 담당한 저희들의 과오이기도 합니다. 혁명적작품이라면 부서에서 응당 창작과정을 대체로는 료해하고있어야 하는건데 이렇다 할 방조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대신 저는 책이 나오자 일부 사람들의 과찬에 은근히 위안을 느끼고있었습니다.

소설에서 범한 엄중한 정책적과오를 어떻게 시정해낼수 있겠는지… 여하튼 함께 방도를 찾아봅시다.》

동맹청사에 돌아온 천세봉은 책상에 마주앉아 다시금 수령님의 교시내용을 하나하나 더듬어보았다. 그럴수록 과오는 엄중하였다. 개별적인 어떤 장면이나 인물형상을 바로잡는 문제가 아니라 당정책과 관련된 신중한 문제들이였다. 작품의 과오를 시정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고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자기가 그것을 고쳐낼수 있을것인가?… 천세봉은 자기자신이 앞으로 새로운 혁명적인 작품을 쓸수 있겠는가 하는 위구까지 생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래웃층들에서 약속이나 한듯이 문 채우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청사는 가뭇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담배를 피우며 사색에 잠겨있었다.

매사에 주도세밀한 양부위원장이 나타나 퇴근해야 하지 않는가고 하였다.

《위원장동무, 창작상과오때문에 고민하는것은 피치 못할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치면 건강에 해롭고 사업에서도 지장이 있습니다. 자, 시간이 퍼그나 갔는데 같이 퇴근합시다.》

《먼저 가시오.》

《아! 이러지 맙시다.》

양부위원장은 팔을 잡아일구기까지 하였다.

《고민을 해서 일이 된다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래일부터 왁왁 내밀어봅시다. 그러면 됩니다.》

언제보나 소탈한 그였다. 더구나 난관이 제기되면 항상 웃으며 달려드는 좋은 품성을 가지고있었다. 보통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유보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차에서 내렸다.

천세봉은 아빠트마당을 천천히 걸었다. 밤이 들자 외투를 입었는데도 찬기운이 겨드랑이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 물음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또 누구인가. 사람이란 곤난하고 당황한 때이면 그리고 또 번민이 깊어질 때면 흔히 두개의 자아를 가지게 될수가 있다. 묻고있는 천세봉은 농촌에서 나서자라 순수 작가의 생활을 통하여 오늘에 이른 비교적 순결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태 괜찮게 살아왔고 작가로서도 그만하면 우등생이였는데 이제 땅바닥에 떨어질 체면을 구차스럽게 수습해보려고 하는 렴치없는 천세봉인것이다. 무대공연이 괜찮게 진행되였다면 적절한 계기에 퇴장하고 막을 내릴줄도 알아야 할것이 아닌가.

층계를 올라 방안에 들어서니 화끈하게 더운 공기가 얼굴에 들씌워지고 부엌에서는 무엇을 지지는 냄새가 났다. 신장안에는 낯선 신발들이 몇컬레 보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것 같다. 겉옷을 벗고 서재에 들어서니 뒤따라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어데 갔다 들어서면 의례히 이렇게 나타나 아래우를 훑어보고 얼굴색이나 기분을 가늠해보는데 습관되여있었다. 어릴적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해지고왔다든가 머슴을 살다가 간혹 집에 오게 될 때면 이렇게 낱낱이 훑어보군했던것이다.

《아애비, 거 이번 며느리감은 꽤 무던히 생겼어. 우린 사람복이 있다니. 한번 얼핏 보구 좋수다 하문 되오.》

가까이 다가서서 키가 껑충한 아들을 올려다보며 거의 조르다싶이 간청을 한다. 하긴 온갖 생활풍파를 다 이겨내면서 70이 넘도록 살아온 늙은이의 눈은 언제나 사람을 빗보지 않았다.

《어머니가 좋다면 좋은거지요. 나야 뭐.》

《아니요. 그래두 시아비 될 사람이 봐야지.》

책상에 턱을 고이고 앉아 시름없이 창문밖을 내다보고있노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차곡차곡 개올리던 사색의 갈피가 불의의 충격에 의해 마구 흔들리며 뒤죽박죽이 되였다. 《흰구름 피는 땅》을 비롯한 자기 작품의 장정과 제자들이 휙휙 눈앞을 스치는가 하면 그 소설들을 놓고 축하해주고 고무해주던 동료작가들의 얼굴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살펴보았다. 갖가지 도서들이 꽉 차있는 맨 웃칸에 자신이 쓴 책들이 주런히 꽂혀있었다. 단편집과 장편소설 《대하는 흐른다》, 《고난의 력사》, 《석개울의 새봄》 등등, 한눈으로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부피가 큰것들이였다. 그것은 마치 리력문건의 칸사리처럼 어떤것은 한두해 또 어떤것은 사오년 등으로 모두 제나름이였지만 거기에 담긴 생활의 색갈과 부피는 대략 몇가지로 분류할수 있었다. 그것을 이 가정에 비유한다면 6남 1녀를 키운 후대양육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하고 몇번 갑자르다가 마침내 《안개흐르는 새 언덕》이라고 호화장정을 한 책을 뽑아들었다. 잠간 그것을 펴보고있노라니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바람에 책장이 마치 날짐승이 푸덕이는것처럼 흔들렸다.

《자! 여기로 들어오너라.》

어머니가 앞서서 방문을 열어잡고 말하였다.

《부끄러워할것도 없다. 이제 다 한식구가 되겠는데.》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얌전한 처녀가 마치 살얼음을 타는것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놓았다. 요새 멋을 부리는 녀성들이 좋아하는 뜨개옷차림이 아니라 수수한 깜장치마저고리였다. 천세봉은 황황히 책을 서가에 얹어놓고 처녀를 맞아들이였다. 며칠전에 처녀네 집에 청혼을 갈 때 당사자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녀편네가 직접 가보았기때문에 구태여 이제와서 그 무엇을 보고 새삼스럽게 언약을 한다. 어쩐다 할것이 없었다. 이제는 일사천리로 결혼에까지 들이대야 하는 단계여서 그닥 간참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 지금은 그럴 정신적여유도 없었다.

《됐소, 그만하고 나가보우.》

천세봉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손짓부터 하였다.

《아니 말 한마디 안해보고… 쯧쯧.》

원래 삽삽한 성미가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어머니는 혀를 차며 나무랐다.

《글쎄 됐어요. 저희끼리 좋다면 좋은거지 우리야 뭐.》

이렇게 되여 몇시간동안이나 기다려 이 집 가장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던 긴장한 순간은 흐지부지된채로 넘아가고말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천세봉의 내심을 잘 들여다보는것은 그의 안해였다. 아무래도 수상쩍은데가 있었다. 아들딸 몇을 키우면서도 언제 한번 이렇게 랭랭히 지내본적이 없었던것이다. 물론 쾌활한편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술을 몇잔 마시고 거나한 기분으로 좋은말을 어지간히 하던 남편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안해의 우려가 어찌되였든간에 방안분위기는 흥성거리였다. 음식을 날라들이고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왁작 끓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모두 흩어졌다. 밤이 깊어 다른 방들에서도 다 잠들어버리였다. 그러나 천세봉은 잠들수 없었다. 자리에 누워보았지만 눈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귀에서 중앙당일군이 읽어주던 교시내용이 그대로 들리였다.

생활이란 이렇게 공교롭게 얄궂은것인가. 한쪽에서는 과오라는 랭풍이 불어닥치고 다른쪽에서는 자식의 결혼이라는 꽃송이가 한들거리고있는것이다.

다시 자리에 누워 탁상등까지 껐다. 한동안 눈앞이 캄캄한것 같더니 몇분 지나니까 다시 대낮처럼 앞이 밝아졌다. 이미 지나간 일이여서 후회했대야 아무 소용이 없는것이지만 영천에서 교시를 받고서라도 정신을 똑똑히 차렸더라면 이런 과오가 없었을것이 아닌가.

작품을 자체로 검토하고 당장 공장에 찾아가 이미 인쇄기에 물려있는것이라 하더라도 원고를 찾아내와야 했던것이다. 그것은 또 그렇다치고 로동자를 왈패로 만들었다든가 순영이의 운명을 비참하게 처리한것 등은 제 한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과오를 범한것은 또 그렇다치고 새로운 혁명문학을 건설할데 대한 과업을 받은지 옹근 한해가 되였는데 그동안 해놓은것이 과연 무엇인가.

결국 이제와보면 혁명문학이라는 그 의미조차 똑똑히 알지도 못하고있지 않는가. 물론 새 문학 건설이 한두해에 눈에 띄울만치 실적이 나타나는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부터 이렇게 떨떨한 상태에 있었으니 여기서 무슨 성과를 기대할수 있겠는가. 성과는 고사하고 자신이 과오를 범하고있는 형편이 아닌가.

전실에 걸린 벽시계에서 《뗑 뗑 뗑》 석점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잠들기는 다 틀렸다. 가뜩이나 심했던 불면증이 다시 머리를 쳐든것이다. 불을 끈채로 누워있노라니 생시인지 환각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만치 의식이 혼몽해졌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앞에서는 새로운 혁명문학을 하겠노라고 맹세를 다지고 한편에서는 혁명문학과는 거리가 먼것을 내놓지 않았는가. 결국 이것은 배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창작과 그 공정에 대한 순위는 어떻든간에 결과가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무엇으로 이 죄악을 씻을수 있을것인가. 결국 어느 누가 말한것처럼 고원에 다시 내려가 농촌물이나 다루면서 서서히 작가로서, 인생으로서 침몰되는것이 상책이 아닌가? 내가 이제 무슨 체면으로 작가라고 사람들앞에 나서겠는가.

그 순간이였다. 나들문이 살며시 열리였다.

《왜 아직 이러고있어요?》

문짬으로 가무잡잡한 안해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잠 자고 일어났소. 문을 닫소.》

《당신은 정말 오늘은 왜 이래요. 여태 이런 일이 없었는데. 난 벌써부터 이상하다 하면서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어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무 일도 없소. 내게 불면증이 있다는걸 그래 당신이 모르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여기엔 꼭 무슨 곡절이 있어요.》

안해는 실토를 하라고 애원한다.

이때 천세봉은 한당대 같이 살아오면서도 반백이 된 안해를 처음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한벌 덮인 잔주름과 부시시한 머리카락을 차례로 보고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는 안해에 대한 측은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별일 없으니 나 좀 혼자있게 해주오.》

《아니예요. 난 못나가요.》

안해는 무릎을 꺾고 한쪽구석에 앉았다. 그러는 안해를 천세봉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는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작가의 안해는 단 한가지만은 알수 없다고 했다. 남편인 작가가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머리속으로 일을 하고있다는것을…

천세봉은 안해를 그 한가지만 아니라 자기의 창작과 사색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모른다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때만은 안해가 자기의 마음을 너무도 똑똑히 알고있는듯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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