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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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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01 18:52 조회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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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엄한정을 좀 남아달라고 하시였다.

《여기 가까이 와 앉으시오.》 하고 그이께서 자신의 옆에 놓인 안락의자를 가리키시였다.

엄한정은 혹시 자신의 토론가운데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나 우려하는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옮기였을 때 김정일동지께서는 팔걸이에 놓인 엄한정의 손우에 자신의 손을 얹으시며 다정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시였다.

《요새 건강이 어떻습니까?》 하고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정신적으로 어떤 고충을 느끼는것이 없는지요.》

《별로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고민이라도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걱정을 털어놓는것만으로도 후련해질수 있잖습니까.》

엄한정은 어깨를 들었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자신의 《원문그대로!》가 무너지기 시작한것이다. 견고하다고 보는 그 옹벽이 어떻게 구축되였는가. 수많은 저작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명제를 발취하고 암송하고 카트에 적어서는 그것을 분류하고 편편히 널린것들을 하나로 모아놓고 그것을 제나름으로 만든 주형에 넣어 찍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치한치 쌓아올린 옹벽이 거침없이 무너지는것이다. 100년사상사총화를 시작할 때만 하여도 그는 옹벽에 착실히 의지할수 있었기때문에 얼마간 신심이 있었다. 그런데 몇개의 저서를 연구하는 과정에 처음에는 놀라움을 가지게 되였고 그다음에는 커다란 진폭을 그으며 자신이 흔들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공산당선언》이나 《자본론》을 토론하면서부터는 자신에 대한 허무감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이 과정에 혁명리론에서 중핵을 이루고있는 수령에 관한 문제를 도출해내시였다. 그런데 학자들인 자기들은 이전에 새겨넣었던 그것을 그냥 되풀이하고있을뿐이였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엄한정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와서 보면 저는 당에서 가장 유해롭게 보고있는 교조주의를 범하고있었습니다. 100년사상사총화를 하면서부터 그것이 뚜렷이 드러났는데 요새는 그것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저는 여직 수령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옳바른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생 맑스, 레닌의 저서를 뒤지고 그 글줄에서 하나하나 주어모으고 그것을 통채로 외웠습니다. 이제 와서 저는 자신이 오래동안 쌓아올린 고전숭배라는 견고한 옹벽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리해할만합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품을 들여 우리가 고전을 연구하고 토론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100년사상사총화에 대한 은이 나타나는것 같습니다. 한데 다른 성질의것이지만 그외 어떤 고민이 또 있는것 같습니다. 그런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엄한정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역시 그이의 예리한 관찰력권을 벗어날수 없는것이다. 다음순간 그것만이 아닌 뜨겁고도 세심한 인간애가 가슴을 흔들었다. 과연 얼굴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그늘을 찾아보시였을가. 다른곳도 아니고 이런 장소에서 그처럼 내색하지않으려고 애썼건만 그이앞에서는 마음의 밑바닥까지도 숨겨낼수가 없는것이다.

아니 숨기지 않고 다 토설하고픈 충동을 느꼈으나 강잉히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한정이 미처 말도 하기전에 바로 그런 어색한 랍장을 리해하신듯 김정일동지께서는 급히 말씀하시였다.

《혹시 제철소에 나가서 너무 무리하여 몸에 탈이라도?…》

《아,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현실에 나간것이 여러모로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심신이 단련되고보니 사업의욕도 곱절이나 왕성해지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 로동계급의 열정과 패기를 보니 병진로선 관철에서 신심이 생깁니다.》

김정일동지께서 물으시였다.

《유상철로장아바이를 만났습니까?》

《네… 그리구 한창수라는 그 제대군인도 만나고…》

《오, 그렇지. 한창수… 아주 쾌활하면서도 믿음직하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 순간 엄한정은 언뜻 리형걸이를 생각하였다. 그자신이 리형걸이 새로 한다는 로동계급물창작을 지지한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결국은 리형걸이 오늘 백암림산사업소로 나가게 하는데 부채질을 한격으로 되지 않았을가?…

리형걸이 넉달동안 로동현장에서 혁명화를 하고있는데 연극단에서 얼마전에 사람이 내려갔다. 단장은 자기대신 부단장을 보내였다. 부단장은 그쯤했으면 충분히 자기 잘못을 반성도 했을것이고 새롭게 살아갈 결심이 생겼겠는데 어떤가고 하자 리형걸은 《여기에 와서 내가 옳다는것을 더 굳게 믿게 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부단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니 참, 끝끝내 <일편단심>에서 물러나겠다는거구만… 동무의 앞길이 어떻게 되겠는지 참.》

부단장은 리형걸의 생각이 리해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를 측은히 생각해서인지 고개를 흔들었다.

《후회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보오.》

《아니, 후회하지 않을것입니다.》

이렇게 되여 리형걸은 곧 불리워올라와 백암땅으로 파견장을 받았던것이다.

리형걸이 백암으로 떠나간 날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영심이는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쉬여있었다.

영심이는 아버지앞에 나타나 한쪽무릎을 세우고 앉아 치마꼬리를 조심스럽게 펴놓으며 말하였다.

《아버지… 나 형걸동무를 따라갈래요…》

《뭐? 따라가?… 왜?…》

《아버진 다 아시지요. 형걸동무 아버지가 사연을 다 말했다고 하던데요.》

《넌 결혼을 한것도 아니잖니?》

《그게 무슨 상관있어요.》

《…》

엄한정은 말은 못하고 들어올렸던 물고뿌를 방바닥에 동댕이치고 밖으로 나와 밤새껏 거리를 헤매다가 아침에야 돌아들어갔다.

북새동에서 떠나 모란봉고개를 넘어 대동문으로 나갔다. 대동교, 평천, 그다음에는 보통강을 따라 밤새 걸었다. 기운이 진해서 비칠거리며 걸었다. 늦장을 부리는 겨울의 아침해가 솟아오를무렵 그는 집에 돌아와 침대우에 쓰러졌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간 그는 변변히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다. 오직 했다는것은 《자본론》토론을 위한 준비작업, 그것을 겨우 마무리 했을뿐이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눈이 쑥 들어가고 입술에는 덕지가 앉았고 말소리는 갈리였다. 그중에서도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는 눈이 빛을 잃고 게슴츠레해졌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바로 이것을 감촉하시였던것이다.

엄한정이 항상 후회하는것이 자신의 소심성인데 이번에도 역시 그 소심성때문에 어데가서 말 한마디 비쳐보지 못하였다.

설렁한 방안에 가만 앉아만 있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였다. 그것을 띠여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미간을 좁히면서 체온이 오르고 오한이 나지 않는가 물으시였다.

《아, 아니 일없습니다.》

목이 갈리고 말소리가 떨리였다.

《어서 말씀하시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여직 눈치가 다른걸 나는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신상에 간단치 않은 사연이 있습니다.》

엄한정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벌써 4시입니다. 점심도 건느셨는데 제 좀 생각해서 래일에…》

이런 기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하지만 정작 이렇게 되고보니 어째서인지 엄한정이 뒤걸음을 치게 되였다.

《아닙니다. 시름이 있다면 그걸 한시도 묻어두어서는 안됩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진정으로 안타까와하시였다.

엄한정은 고개를 돌리고 또 긴 한숨을 내쉬였다. 이것이 소심성때문인가. 아니다. 이런 하찮은 개인사정으로 해서 그이를 괴롭힌다는것은 하나의 죄악으로 된다.

몇분 침묵하고있다가 엄한정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별로 큰것은 아닌데… 저한테 요새 걱정거리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하고 그는 무릎우에 놓인 마디가 굵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되여 엄한정은 금년초부터 시작된 리기찬과의 관계, 형걸이와 자기 딸과의 관계를 죄다 말씀올리게 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낯색이 달라지시였다. 그이께서는 담배를 두대나 련달아 피우시였다. 그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엄한정의 말이 절반도 진척되지 않았을 때 벌써 그이께서는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엄한정이나 리기찬의 가정에 미치는 심각성을 짐작하시였던것이다. 그런데 엄한정의 말을 듣고보니 형걸의 아버지 리기찬이 해당 부서에까지 찾아왔다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 퇴각》을 한다고 단언한것으로 보아 이것은 기필코 어떤 작간이 있다는것이 확실하였다.

엄한정이와 헤여진 그이께서는 집무실로 돌아오시였다. 간단히 스쳐버릴 문제가 아니였다. 현재 나타나고있는 이러저러한 현상들은 그자체로서는 그닥 큰 문제라고 볼수 없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안에 대두한 좌우경기회주의, 특히 현대수정주의의 역풍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밀수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어느새 정원에서는 눈가루가 날리였다. 향나무가지우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눈보라가 그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이께서는 신발이 눈속에 파묻히는데도 끄떡없이 서계시였다. 그러다가 두손을 허리에 얹으시고 머리카락을 날리시며 불어치는 눈바람을 맞받아 걸음을 옮겨나가면서 정원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시였다. 그만큼 그이의 심정은 더 복잡해지시였다.

×

퇴근시간이 되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엄한정은 서재로 쓰는 맨 끝방에 올라가 문을 후려닫고 의자에 앉았다. 낯을 잔뜩 찌프리고 창밖을 내다보고있다.

엄한정이 한껏 우울해진것은 딸 영심이때문이였고 또 그 문제자체를 왜 김정일동지께까지 말씀드리게 되였는가 하는 자책때문이였다. 몹시 경망스러운것이였다. 그이의 너그러움과 따뜻한 사랑에 끌린것이기는 하지만… 가정문제란 언제나 한가정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무슨 망녕이 들어서 사위의 편역을 들고 나아가서는 자기 딸이 처한 립장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의도를 비치면서 실없는 말을 그렇게까지 하게 되였던가.

내가 그이를 모르고있는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있는 처지가 아닌가. 학교를 나와서 중앙당에서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김정일동지앞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업이 기다리고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맡아안지 않으면 안되시였다.

어느덧 그이께서 당사업을 시작하신지 벌써3년이 되여온다. 그동안 매해 부담이 가증되여 최근에는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하가 걸려 이틀이면 하루는 밤을 새우시고 어느 하루 식사시간이 지체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것을 잘 알면서도 오히려 심려까지…) 하고 엄한정은 뜨거운 입김을 내불며 한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엎지른 물을 다시 퍼담지 못하는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문소리도 없이 안해가 나타나 어깨에 세타를 걸쳐주며 저녁식사가 준비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몸져 누우시면 어쩔려구요… 그만하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않나요. 자! 일어나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비빔밥이예요. 어서…》

《그럼 한그릇 먹고 또 해봐야지.》 한숨을 쉬던 엄한정은 급기야 범상한체하면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두리반에는 김이 문문 나는 밥과 통김치와 시뻘건 깍두기가 올랐다. 비빔밥에는 고사리가 제격이라 하였더니 식성에 맞추어 만문해보이는 고사리, 콩나물 등이 보이였다. 숟가락을 든 그는 문득 전에 없던 반주 생각이 났다.

《여보.》 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거 있으면 한잔.》

《네, 있어요.》

안해는 사뿐히 일어나 부엌에 나가 가시장을 열어 《삼로주》 병모가지를 잡고 들어왔다. 이전같으면 공복에 술은 소화기에 영향이 있다, 어떻다 하련만 뜻밖에 고분고분이다. 술이 유리잔에 찰랑찰랑 부어지자 엄한정은 흠흠 냄새를 맡아보더니 입술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게 마시였다.

《또 한잔.》

《안돼요. 40프론데 석잔이면 만족입니다.》

《아 아, 오늘은 자.》

잔을 내들고 웃는데 령감의 그 기분이 너무 고마와 안해는 두잔이나 더 선심을 썼다. 그렇게 되여 밥그릇이 낮아지고 김치보시기가 비여가건만 처음에 한번 들렸다가 숙여진 영심의 머리는 좀체로 바로서지 않았다.

술기운을 타면 사촌한테 기와집도 지어준다지만 엄한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신이 멀쩡해지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는 게슴츠레해진 눈덕을 들고 맞은켠을 건너다보았다. 딸 영심이는 활짝 피여난 한송이 꽃같은 처녀였는데 요즘은 그것이 서리를 맞은것처럼 되였다.

밥을 씹으며 딸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느라니 가슴 한쪽구석에서 불이 일기 시작하였다. 옛적에 누군가는 인생은 고행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제 그앞에 무슨 일인들 없을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일찌기, 너무나 가혹하게, 너무나 뜻밖에 다닥치고있는것이다. 꽃은 아진 망울도 터치지 못했는데 모진 광풍은 잎을 뜯어내고 가지를 부러뜨리려 하고있다. 그래 꽃나무는 모지름을 쓰면서 바들바들 떨고있다.

밥 한그릇을 거의 비우는동안 엄한정은 진홍색세타에 장발머리를 뒤에 질끈 동여놓은 윤기도는 딸애의 머리태를 바라보고있었다. 밥상가녁에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뜨는둥마는둥 하면서 아버지의 괴로운 심리적움직임을 살피고있던 영심이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의 얼굴을 피뜩 띠여보게 되여는데 눈이 퉁퉁 부었고 온통 눈물범벅이였다. 엄한정은 가슴에 전류가 흐르는것 같은 자극을 느끼며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자식이란 그저… 에익.》

딸자식 하나 고이고이 자래웠다가 이러한 풍파가 들이닥칠줄 누가 알았으랴. 사랑의 응결체가 고통의 응결체로 변해버리다니. 그러나 딸아이의 정신에는 고결한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대로 옳고 타당성이 있으며 동정이 갔다.

엄한정자신도 벌써 여러번 말했지만 정식 결혼을 한것도 아닌데 굳이 지방에 나가는 남자를 따라갈 필요가 있는가, 더구나 너는 이집의 외동딸이다, 너 없는 이 집을 생각해보았느냐? 하였건만 영심이는 《나는 교육자입니다.》라고 한마디 했을뿐이다. 엄한정자신이 이전에 교단에 섰던 경력이 있었던지라 리해가 갔으나 일단 일이 복잡해졌을 때 그렇게 립장을 세운다는것은 결코 조련한 일이 아니라는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딸이 나이로 보아도 다 자랐고 또 리성의 키도 이제는 상당히 자란 성인이라는 대견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여보.》 하고 불러놓고 영심이가 사라진 부엌쪽을 가리키며 안해에게 말하였다.

《저애는 이젠 어쩐다오.》

《쟈 일이 정말 골치거리야요. 래일 떠나겠다는겁니다. 눈치를 봐가다가 직방 아버지한테 말하겠다고 했는데 자꾸 울기만 하다가 저렇게 자리를 피하고마는군요… 여보, 내버려둡시다. 의지가 있으면 거기 가서도 예술을 할수 있는거구 또 영심이는 교육자로 있음 되잖아요. 그러다가 요행 형걸이문제가 풀려서 또 올라오면 오는거구. 우선 난 당신이 너무 그러니까 막 속상해 못견디겠어요. 쓩이 되든 개가 되든 운명에 맡겨둡시다.》

《속이 편안해서 좋긴 하겠소. 그건 그렇고 요새 형걸이녀석은 아무 말이 없습데?》

《형걸이는 며칠전에 영심이한테 와서 자기 불행을 남에게까지 미치게는 할수 없다면서 전번날 왔던 그것으로써 완전히 절연이라고 선포했다는군요.》

《완전히 절연이라.》

이때 엄한정은 제철소에서 만났을 때 작품에 대한 구상을 듣고 형걸이를 지지했던 일을 상기하였다.

《영심이는 형걸이가 그렇게 나오기때문에 더더구나 배반할수가 없다는거죠. 영심이 말은 차라리 우리는 약혼한 사이니까 같이 가자 하고 나왔다면 안갔을거라구 합디다.》

《아, 참말 쉑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에트>도 왔다가 울고 가겠는걸…》

엄한정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서재로 건너갔다. 그는 습관적으로 론문원고를 꺼내놓았다. 책상앞에서도 오랜 학자생활에서 습관된 기분전환이 얼른 되지를 않았다.

얼마후에야 엄한정은 자신을 다잡고 자기의 론문세계에 잠겨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생산자대중의 주인으로서의 역할, 당위원회의 집체적지도 이런 개념들이 차츰 생생히 떠오르면서 그것을 론문체계에서 두드러지게 할 궁리를 하였다.

하지만 때없이 자꾸 생각이 헛갈리였다. 무엇인가 지꿎게 사색을 방해하는듯하였다.

마침내 그는 어슴푸레 떠오른 사색의 실마리를 잡아쥐고 론문의 체계부터 고치려고 하였다.

딸 영심이문제를 잠시나마 잊을수 있는 그런 순간이였다.

《아버지!》 누가 부르면서 잔등을 흔드는 바람에 엄한정은 와뜰 놀라 깨여났다. 책상에 엎드린채 깜박 잠이 들었던것이다.

안경을 벗으며 돌아다보니 영심이였다. 뒤따라 안해가 나타나 잠옷을 내놓으며 침대에 누우라고 하였다. 이때 영심이가 아버지 귀에 대고 말하였다.

《나 아침차로 떠나요. 그런줄 알고계셔요.》

《뭐 아침차?》

《본평양역에서 아침 9시.》

《정말이냐?》

《어머니랑 다 의논이 있었어요.》

입이 붙어 더이상 말이 나가지 않았다.

엄한정은 책상뽑이를 열고 수면제 두알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은 그는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하고 거듭 같은 말을 외워보았다. 그러느라면 가슴이 좀 진정될것 같았다.

한편 영심이는 아래방벽에 기대여 뜨개질을 하고있었다. 어깨가 넙적한 남자세타를 뜨는것이다. 벌써 초겨울부터 영심이는 아버지입은 속옷이 물이 날았고 류행에도 무척 뒤떨어졌다면서 모실을 사서 손수 떠주겠다고 했던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내지 못했다. 그래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마무리를 할 작정이였다.

영심이옆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트렁크를 열어보고 갖출것이 다 들어있는가를 알아보고있었다. 그러다가 젊은것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면서 또 한개의 트렁크를 내려다놓고 이것저것 주어담고있다.

《어머니, 인차 또 왔다가겠는데…》

《야, 정신있니. 여름이면 몰라라 이 추운 겨울에. 거기는 또 춥기로 유명한데 내의를 넉넉히 가지고 가야 해.》

다심한 녀인은 밤이 깊었는데도 트렁크며 구럭이며 영심이가 입을 옷가지들을 손질하고있다.

그러다가 차츰 말이 적어지길래 영심이가 이상하다 하고 건너다보니 돌아앉아 울고있었다. 머리수건을 벗어서 입을 가리우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엄마!》

영심이의 말소리도 떨리였다.

《엄마가 그러면 난 어떻게 해요. 노상 죽으러 가는것도 아닌데 엄마는 공연히…》

그럴수록 녀인의 어깨는 더 높이 오르내리였다.

《엄마!》

뜨개질을 그만두고 영심이는 구석에 옹송그리고 앉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엄마, 왜 그래요?》

《누가 어쨌니.》

녀인은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목에 감긴 딸의 손을 끌어내린다. 이렇게 되자 영심이의 가슴이 왈칵 흔들리였다. 한숨을 내쉬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였다. 손밑에서는 쿵쿵소리가 들릴만치 심장이 뛰고있다. 두무릎사이에 이마를 눌러댄 영심이도 울기 시작하였다.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다.

누가 꼭 오라는것도 아니고 또 꼭 가야 할 용무나 어떤 의무를 지닌것도 없는 길인것이다.

그러나 심장은 꼭 가야 한다고 재촉하고있다. 이제 어떤 일에 부닥치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의지력이 강한 사나이와 동행한다면 그 모든것을 이겨낼것 같은 신심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늘 말하는 그것, 《당을 믿으라.》 그것이 오직 마음의 기둥이 되고있다. 당은 정의의 화신이다, 정의는 이긴다… 교단에 서서 어린 넋들앞에서 자랑스럽게 웨친 정의, 그것은 꼭 이긴다.

시간이 퍼그나 흘렀다. 벌써 3시가 되였다. 그러나 영심이도 무릎을 세운채 앉아있고 구석쪽에 돌아앉은 녀인도 그대로였다. 가뜩이나 불면증이 심한 엄한정은 자는지 어쩐지 숨소리마저 없다.

영심이는 뜨개질을 하던것을 다시 집어들고 얼마 남지 않은 마무리를 마저 해치웠다.

그런후 그는 부엌으로 나갔다. 마지막삼아 아침을 잘 지어볼 생각이였다. 물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쌀을 일고 동태국을 끓이였다.

어느덧 5시가 넘었다. 서둘러야 하였다. 어머니를 깨우고 아버지의 방문짬을 들여다보니 잠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누워있는지 알수없었다. 이 집 가풍으로서는 누구든지 먼길을 떠날 때에는 온 가족이 정거장까지 나가 바래워주군하였다. 영심이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일찌기 집에서 나설 작정이였다.

웃방에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났다. 늘 이맘때면 깨여나군하였는데 역시 그 시간에 일어나신것이다.

어머니가 밥상을 들여왔다. 아침을 대수간 치른 세식구는 각기 제 할 일을 서둘렀다.

이때 영심이가 조마조마하게 생각한것은 아버지가 《정거장까지 같이 가자.》 하고 나설것 같은 느낌이였다.

영심이는 입었던 솜옷을 벗어놓고 양복저고리의 단추를 채우고나서 잠간 생각하였다.

《그렇지 세타.》 영심이는 농짝안에 정성스럽게 포개넣은 세타를 꺼내였다. 티 하나 없이 다듬은것이다. 두손으로 세타를 받쳐든 그는 아버지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입어보세요. 실이 좋아서 포근할것 같아요.》

쌍까풀진 눈이 아버지를 정답게 쳐다보면서 웃고있다.

《이걸 입으시면 감기에도 안걸릴거야요.》

엄한정은 세타를 받아서 훌쩍 어깨에 걸치였다.

《좋구나, 꼭 맞는다. 색갈도 곤색이니까 더 젊어보이구.》

좋도록 말은 하는데 얼굴은 서글픈 빛을 띠였다.

《그래, 이제 떠나겠다는거지.》

엄한정의 목소리는 갈리였다.

《가서 직장이랑 정하고 인차 왔다가겠습니다. 군교육부에서는 읍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고 했답니다.》

《그럭저럭 살아갈수야 있겠지. 그런데 형걸이는 떠났느냐?》

《벌써 며칠전에 떠난다고 했으니까요. 그후는 인연을 완전히 끊자고 했구요.》

엄한정은 더 물을 말이 없었고 그 무슨 주의를 준다든가 깨우쳐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떠나거라.》

엄한정은 영심의 등을 떠밀면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영심이는 다시 돌아서서 발을 모으더니 몇초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고있다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절을 하는것이였다.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도 맑고 챙챙하던 음성은 너무 젖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 없고 고개를 숙일 때 눈굽에 솟아올랐던 이슬방울이 아래로 떨어져내리는것이 보이였다. 엄한정은 어깨를 쓸어만지며 입술을 굳게 사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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