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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총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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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1-22 02:38 조회6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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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향도》

장 편 소 설 총대


박 윤

( 제 7 회 )


제 2 장

2

그는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솟은지 오랬으나 엷은 새털구름뒤에 숨어 좀처럼 얼굴을 제대로 다 드러내지 않는다. 해가 마치도 마지막추위를 막으려고 포단을 뒤집어쓴듯 싶다. 하지만 그 포단이 아무리 차거운 얼음색으로 느껴져도 내뿜는 해의 본색은 감출수 없는 모양이다. 락엽이 얼어붙은 대동강기슭의 마른 잔디밭에 나무그림자들이 비껴 얼른거린다.

박신철은 다시한번 주위를 둘러봤으나 일요일의 이 기슭은 고요했다. 얼음이 풀리지 않은 강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릴뿐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였다. 자기가 너무 빨리 이 장소에 나타났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에 대하여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른 잔디밭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심장이 무분별하게 끓는 애숭이처럼 되여버렸담. 기다리고 기다리기에 지친 가슴에 문득 봄날 같은것이 찾아오니 그처럼 완강하던 사나이의 심장의 박동이 너무 빨라진것이 아닌가. 분명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시간이 빨라졌다. 생활은 다른 빛갈로 물들어 그의 앞에 펼쳐졌고 시간의 척도마저 변한것이다. 본시 과묵한 그였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더 친근해보였고 그들모두에게 미소를 보내고싶었다. 이전에는 전혀 리해할수 없었고 공감하지 않으려 했던것들이 이제는 수월히 받아들여졌다.

부서책임자인 김한경대좌만해도 그렇다. 직속상관인 최남호부국장을 닮아서 그런지 대좌는 항상 말이 적고 엄격하여 아래사람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있었다. 늘 얼굴에서 메산자가 자리를 뜨지 않았고 무엇인가 불만스러워하였으며 요구성이 강했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대좌였으나 언제한번 기분좋게 웃는 법이 없었다. 그저 시퍼래서 명령하고 요구했으며 때로는 짜증을 내고 책상을 탕 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부서일군들이 은근히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내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것은 그의 랭철한 실무때문이였다. 김한경대좌는 우를 볼 때도 아래를 대할 때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찌뿌둥한 표정이 시무룩해지거나 기껏해야 정색해질뿐이다. 그야말로 뻣뻣한 성미의 소유자였다.

가끔 부서에서 그닥 바쁘지 않은 모임이 있을 때면 박신철은 대좌의 찌프린 얼굴과 갓 쉰에 이미 그 완성을 마무리한 윤기흐르는 대머리를 주시하면서 생각하군 하였다.

어쩐지 저 번들거리는 대머리조차 엄한 기운을 풍기는것 같구나. 저런 엄격한 시아버지같은 어른의 곁에서 한생을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안해의 고통은 과연 어떤것일가. 저런 아버지슬하의 자식들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례절바르고 공손한 인간이 되여야 할것이다.

며칠전 일요일, 박신철이 현지에 먼저 내려간 최남호부국장의 긴급전화를 받고 대좌의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물기를 머금은 햇비둘기같이 싱싱한 처녀애가 빠금히 얼굴을 내밀고 해쭉 웃더니 뒤를 돌아보며 발랄하게 소리질렀다.

《아버지, 손님이야! 부서에서 왔대! 빨리!…》

한순간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처녀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던것이다. 상관은 이런때면 이마의 메산자가 더 깊어져 아예 하나가 되고만다. 그는 방안에 앉아 사내애처럼 청높고 허물없는 딸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찌프릴 상관의 엄숙한 얼굴표정이 련상되였다.

그 순간 현관에 모내의바람의 웬 아바이가 재빨리 나타났다. 그 아바이는 자못 다정한 미소를 짓고 서두르며 손을 내밀었다. 얼굴이 벌개서 활짝 웃고있는 그 사람은 다름아닌 김한경대좌였다. 신철은 얼떨떨한속에 대좌의 팔에 이끌려 방안에 들어섰다.

그들의 뒤를 따라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풍만한 녀인이 들어왔다.

《아유, 여보! 이 젊은이가 당신이 늘 입이 닳게 칭찬하는 그 총각군관이군요. 꼭 학자님처럼 생겼네! 정말 반가와요.

우리 집 령감은 늘 집에 오면 걱정이예요. 이처럼 당당한 소좌의 눈에 들 처녀가 있을가? 아니, 여보 뭘 그렇게 꾸물거려요? 손님을 앞에 놓고…》

《어, 신철동무… 우리 집은 그저 이렇네. 어서 앉소. 나두 방금 직일관한테서 들었소. 자 어서…》

《이 군관은 국수를 싫어한댔지요? 내 얼른 차릴게요. 아유, 국수를 싫어하니 아직 총각이지요? 호호호.》

녀인은 활달하게 웃으며 그를 허물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졌다. 늘 《신대원》이라고 시퍼래서 추궁하고 닦아세우던 대좌가 새삼스럽게 칭찬이라니? 아직 단아동무도 모르는 내 식성은 언제 다 알고?

《여보, 뭘 멍하니 그래요? 귀한 손님인데 담배라도 먼저 내놓지.》

《어, 그렇지, 담배!》

대좌는 서둘러 일어나 웃방으로 올라갔다.

《그렇잖아두 내 부서의 총각군관을 집에 모셔오라구 몇번 일렀는데 저 어리무던한 령감이 뭣해서 말을 떼지 못했을거예요. 마음이 너무 약해서 야단이라니까요.

자, 어서 군복을 벗으세요.》

녀인이 부엌으로 나가고 대좌가 교대하여 들어섰다. 대좌는 전혀 어색해하는 빛이 없이 그의 손에 담배를 쥐여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사람이 저래뵈두 한때는 고사포중대장이였다네. 소위였던 내가 저 로친을 후리느라 숱한 애를 먹었지. 신철동무두 눈치를 보니 처녀가 생긴것 같은데 아예 처음부터 꿈쩍못하게 틀어쥐오. 녀자란 남자와 달라서 일단 정이 쏠리게 되면 그저 죽을둥살둥 모르고 졸졸 따라오기마련이지. 녀자를 다루자면 전술이 있어야 하네, 전술이… 허허허.》

대좌가 웃자 얼굴에서 메산자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찌글써 뜬 작은 눈으로 주위를 내다보는 대좌의 관찰력은 또 얼마나 예민한것인가. 마음은 또 얼마나 사려깊은것인가.

푸짐하고 후하고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육친적대접을 받고 대좌의 집을 나선 그는 눈덮인 보통강기슭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서에서와는 판판 다른 가정에서의 대좌의 모습이 준 유쾌한 충격이 사라지자 은연중 불안한 행복감 같은것이 체내에 깃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것이였다.

가정이란 사람을 저렇게 변모시키는것일가?

안해의 눈치를 보며 사람좋은 미소를 짓던 대좌의 인자한 모습이 이전같으면 가벼운 조소의 감정을 자아낼것이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부러움에 가까운 흐뭇하고 만족한 기분을 불러오는것이였다.

박신철은 지금 잔디밭에 훌렁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흐릿한 저 하늘을 올려다보고싶었다.

등뒤에서 인민대학습당의 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천천히 그 음향을 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차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두눈을 꼭 감싸쥐였다.

《누군지 맞춰보세요.》

정찬 목소리,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금 낮고 부드러운 거의 속삭이는듯한 따뜻하고 아리숭한 목소리였다.

박신철은 그 녀자의 손안에서 두눈을 감았다.

《전혀 모르겠소.》

《그래도 맞춰봐요.》

《음, 예술인숙소의 그 새침데기 성희동무요.》

《틀렸어요.》

《그럼 우리 독신자숙소의 주방장 드살로친네요.》

《또 틀렸어요.》

《오ㅡ 이건 바보 온달의 〈평강공주〉목소리요.》

《맞았어요!》

최단아는 깔깔거리며 박신철의 등을 두드려댔다.

그들은 대동강기슭으로 내려갔다. 동평양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음덮인 강반을 비자루질한다. 최단아는 박신철의 등뒤에 서서 군용외투에 붙은 마른 풀들을 털어준다. 그리고도 무엇이 안심치 않은지 외투깃이며 혁띠들을 이것저것 바로 잡아준다. 박신철은 찬바람속에서도 따스한 봄향기 같은것이 가슴을 어루만지는것을 느꼈다.

《어제 난 우리 성은주조장한테서 욕을 먹었어요.》

불쑥 그 녀자가 볼부은 소리를 했다.

《아니, 왜요?》

《무대에서 훈련을 할 때 그만 신철동지생각을 하다가 삐뚜로 나갔지요 뭐.》

《허, 주인공역을 맡아가지고 욕먹을만한짓을 했구만.》

최단아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폭 내쉬였다.

《글쎄, 나도 이젠 자기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왜 자꾸 박동지모습이 눈앞에서 얼른거리는지…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이상하지요? 대학땐 남동무들이 날 보고 뭐랬는지 알아요?》

갑자기 최단아는 검은 동자가 큰 눈을 깜박이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랭풍기〉라고 했겠지.》

《피ㅡ 〈눈심장〉이라고 했어요. 하긴 때없이 찬기운을 풍긴건 사실이지만 우리 녀자들한테 지분거리며 걸치는 남자들과는 끝까지 도맡아서 해봤거든요. 야, 그렇던 내가 이런 물렁팥죽이 될줄이야.》

그 녀자는 행복에 겨워 아쉬운듯 말꼬리를 길게 뽑았다.

《허허 참, 동문 물렁팥죽이 아니라 차돌같은 녀자요. 난 아직도 동무를 대하면 문득 숙제를 못하고 엄한 녀선생앞에 선것같은 기분이거든.》

《호호호, 거짓말! 난 아마 외곬이 돼서 그런지 사랑에 빠져도 이렇게 푹 빠지는것 같애요. 늘 박동지가 보고싶은데 어찌겠어요. 은주조장동지가 또 뭐랬는지 알아요? 〈일단 사랑의 총탄을 맞으면 심리적으로 부상을 입는것이 녀자의 마음이야.

이땐 다른 때와는 달리 모든것에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구 주위를 랭담하게 무시해버리거든. 조심해야 돼. 알겠어?〉 이러질 않아요. 무슨 알쑹달쑹한 소린지.》

《동무네 조장아주머니가 대단한 철학가구만. 뜻이 깊은 소리야. 그러니 우리사이가 다 알려졌구만.》

《고 입빠른 성희동무가 재잘거렸는지 이젠 예술단의 나이먹은 작곡가들까지 날 보면 해군정찰병이 잘 있는가고 묻질 않아요.》

《허허허…》

박신철은 자못 유쾌하게 웃으며 푸른빛이 짙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포단을 차버렸다. 황백색의 눈부신 빛이 눈을 시울게 한다. 하지만 해는 조금도 따뜻한감을 주지 못한다.

《참 신철동지, 난 오늘중으로 대학에 갔다와야 해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예요. 전문부에 있는 동창생교원에게서 음악교과서와 인민학교교재와 교측본들을 가져오면 되거든요. 호호, 그 다음은 다 우리 시간! 휴식일도 이제부터는 바쁠것 같아요. 래일부턴 공화국창건기념일공연준비로 예술단이 바글바글 끓거든요. 대학엔 후에 들리기로 하고 지금은 먼저 식물원으로 가자요. 성희랑 점심때 올거예요. 뭐 사진을 찍어주겠다나? 난 아직 남자와 단둘이서 사진을 찍은 일이 없어요. 아마 내 일생의 첫사진이 될거예요.》

최단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이 웃는다. 해빛에 연한 주근깨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약간 갈색이 도는 그리 숱이 많지 않은 검은 머리가 강바람에 나붓긴다.

얼마나 정차고 아름다운 녀자람. 얼마나 순진하고 랑만적인 처녀람.

신철은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애정을 느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 그는 낮 12시까지 청사에 도착해야 한다. 부대에서 올라온 군용차를 타고 먼 훈련장으로 떠나야 했던것이다. 저녁녘엔 어김없이 현지에 도착하여 상관에게 보고해야 할것이다.

하지만 일없다. 아직도 옹근 두시간반이 남아있다. 지금 그는 애인과 함께 있는것이다.

《단아동무, 먼저 대학에 가는게 어떨가? 얼마 멀지도 않은데…》

《거긴 나 혼자 가도 돼요.》

《어쩐지 함께 걷고싶소.》

《그래요?》 최단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난다.

《좋아요. 그럼 우리 걸어서 가자요.》

최단아는 박신철의 팔을 끌고 무작정 기슭을 내려섰다.

최단아는 강기슭의 얼음우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중학교시절까지 난 휘거를 하댔어요. 처음엔 빙상무용을 좀 배우다가 개인종목으로 넘어갔지요. 글쎄 한번은 강에서 놀다가 그만 금지구역표말을 지나쳤거든요. 이악을 부리며 마지막까지 남아있은지라 난 혼자였어요. 갑자기 발밑의 얼음이 움씰하더니 길게 쩡 갈라지고 그만 난 물속에 빠지고말았어요. 야, 그때 얼마나 혼났던지. 덤벼치며 얼음장을 잡았으나 그냥 툭툭 떨어져나가요. 신철동지,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아세요?》

최단아는 심각한 낯색을 지었다. 박신철은 웃음이 나갔으나 참지 않을수 없었다.

《글쎄, 어느 고마운이가 뛰여오지 않았소?》

《날은 벌써 어둑어둑하고 강변은 멀었어요. 난 책을 많이 본 덕분에 살아났어요. 어느 소설책에선가 얼음물에 빠졌을 때는 몸의 면적당 무게를 될수록 작게 하고 침착해야 한다고 썼더군요. 그래서 난 일단 얼음판을 잡자 팔을 길게 펴고 엎디면서 조금씩 앞으로 기였어요. 하긴 그땐 지금보다 바싹 마른 명태였으니까 몸이 가벼웠을거예요. 얼음이 용케 나를 견디더군요. 난 그렇게 굳은 얼음장에 올라와서도 한 열걸음은 착실히 더 기여간것 같아요. 한참만에 얼굴을 드니 숨가삐 달려온 동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있더군요.…》

《동문 정말… 용감한, 아니 침착한 녀자요!》

박신철이 진정으로 감탄하자 최단아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나봐요.》

그 순간 숫눈이 깔린 얼음판으로 활기있는 걸음을 옮기던 최단아가 미끄러져 기우뚱대며 박신철의 팔을 붙잡았다.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박신철은 그 녀자의 몸무게에 밀려 보기좋게 나가 넘어졌다. 그에 따라 최단아도 어쩔새없이 얼음판우에 정면으로 엎어지였다.

덩지 큰 녀자가 미처 빼지 못한 팔을 깔고 넘어지는 순간 박신철은 가벼운 아픔과 함께 정신이 아찔해지는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상쾌한 느낌에 온몸의 금선이 쩡 울리며 짜릿한 전률이 지나갔다. 목수건이 벗어져나간 그 녀자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박신철의 곁, 얼음우에 흘러내려 춤을 추었다. 상긋한 꽃향기 같은것이 진하게 풍겨왔다. 그 녀자를 만날 때마다 멀고 아슴푸레하게, 연하고 야릇하게 스며오던 그 향기였다.

그 녀자의 검갈색머리칼사이로 맑고 선명해진 파아란 겨울하늘이 눈부시게 빛난다.

최단아는 그의 어깨를 짚고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두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아이들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들리지?…》

《네?》

《귀를 대보오. 얼음장밑에서 무슨 소리가 나누만.》

그 녀자도 얼음장우에 귀를 가져갔다.

눈이 꼭 감기고 발그레한 입술이 열려진다. 소녀처럼 길다란 그 녀자의 속눈섭이 연한 주근깨가 박혀있는 눈기슭까지 내려앉아 파들거린다.

《야, 물소리!》

그것은 두터운 얼음장밑에서 흐르는 대동강의 물소리였다. 그 녀자의 고향도시의 크낙한 심장이 내뿜는 순결한 피의 흐름소리인가, 그것은 분명 웅심깊은 대동강의 물소리였다. 행복을, 희망을, 사랑을 약속해주는 아름다운 대하의 선률이였다.

그들은 대동강유보도에 올라섰다.

일요일이여서인지 행인도 오가는 자동차도 뜨음하다.

가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가로수의 눈송이들이 떨어져내려 그들의 어깨우에 뿌려졌다. 그럴 때마다 최단아는 얼굴을 들고 나무가지를 올려다보았다. 눈가루들이 그 녀자의 백옥같이 흰 얼굴에서 은빛으로 부서지다가는 가뭇없이 녹아버리군 한다.

두사람 다 명상에 잠겨 말이 없었다.

문수원옆을 지나 대학에 가닿았다.

최단아는 가방을 그에게 맡긴후 대학정문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가다가는 돌아보고 다시 걸으면서 얼핏 뒤돌아보며 그에게 미소를 날렸다. 그 나른한듯 한 류다르고 독특한, 아기자기한 걸음새가 시야에 새삼스레 안겨들었다. 박신철은 음악당옆의 식료상점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바투 그의 등뒤로 조여들고있었다.

연록색풍을 친 군용차 한대가 네거리를 꺾어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음악당앞 공지에 멈춰섰다.

장대한 키에 기름한 얼굴이 거뭇거뭇한 거쿨진 중좌가 날랜 동작으로 인도우에 내려섰다.

(아니, 저 동무가?…)

《허, 그래 어디 갈데가 있나. 여기 쭈그리고 앉아 뭘하지?》

우람찬 몸집에 비해 아이같은 목소리가 제법 틀지게 흘러나왔다.

《철준동무가 어떻게? 그러지 않아도 오늘중으로 동물 만나려니 했댔는데…》

박신철은 한철준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흔들었다.

한철준은 손을 뽑아 친구의 등을 철썩하고 갈겼다.

《자네를 우리 부대로 모시고 오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았지.》

《아니 그럼 낮 12시까지 오게 된?…》

《어찌겠나. 아래사람들이 움직이는수밖에… 허허허, 실은 우리 대대 소형수력발전소 자재때문에 후방총국에 왔댔네. 군대답게 어제 하루동안 욱 내밀어 완결했지.》

한철준은 박신철의 어깨우에 그냥 손을 얹은채 만족한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나를 여기서 만날줄은 어떻게 알았나?》

《허, 자네들 정찰병들만 판단력이 있는줄 아나? 이 머리는 뒀다 어디 쓰게. 흠, 아침 일찌감치 숙소에 찾아가니 벌써 자릴 떴더군. 생각해봤지. 참새 방아간을 그냥 지나갈라구? 그 길로 예술인숙소에 찾아갔지. 김성희라는 갈람한 배우가 나오더군. 어찌 새침데긴지 겨우 얼렸네. 사진기까지 척 멘 멋쟁이처녀한테서 동무 애인의 하루일정을 자상히 알아낸후 주저없이 이리로 달려왔지.》

박신철은 저으기 얼굴이 벌개져서 괜히 군모를 벗어들었다.

《제기랄, 자네네 간부일군들이 큰 착오를 범했구만. 자넨 영낙없이 군부대 정찰부장재목이야.》

《흥, 대대를 지휘하는 사람들을 낮추 보다간 큰코 다쳐! 참 강인동무, 인사하오. 무력부 참모동지요.》

차곁에서 머밋거리던 호리호리한 중급병사가 절도있게 다가와 인사하였다.

박신철은 그의 손을 무랍없이 잡았다.

한철준은 미소를 내뿜으며 눈을 찡긋했다.

《이 강인동문 배꼽떨어져 평양이 처음이요. 겸사해서 벼르고 묻어왔지만 임무수행중이라 어디 품을 놔서 돌아볼수가 있나. 차를 탄채 거리를 쭉 지나며 참관대상들을 선만 보였지. 이 동무 관청에 온 촌닭 한가지라니. 너무 물어보는통에 이젠 배가 다 출출하오. 강인동무, 여긴말이요, 이 건물이 바로 음악무용대학이야! 저건 체육대학, 그다음 연극영화대학, 미술대학…》

《야, 이거 뭐가뭔지 뗑해서…》

중급병사는 뒤더수기를 만지며 어리숙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정문으로 인민학교용 교과서들과 교측본들을 한아름안은 최단아가 급하게 달려나와 사방을 쭉 둘러보더니 활기있게 군용차쪽으로 걸어왔다.

《단아동무, 한철준대대장동무요.》

박신철이 열적게 소개하자 최단아의 맑은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 혜정언니에게서 사진을 봤어요. 이렇게 만나 정말 기쁩니다.》

《제 이 신철동무 형님벌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제수님이 많이 귀여워해주십시오. 아이들의 책을 안고오는걸 보니 벌써부터 전선마을 학교를 생각하고있군요.》

한철준이 비위살 좋게 능글거리자 최단아의 얼굴은 금시 익은 사과알같이 되였다. 그러자 얼굴에 다문다문한 주근깨들이 수집은듯 즉시 숨어버렸다.

《강인동무, 인사를 해야지?》

한철준은 뒤전에 가있는 김강인의 등을 떠밀었다.

《배우동지, 중급병사 김강인입니다.》

《어마나, 그럼 수력발전소를 설계했다는?… 야, 정말 대단해요!》

최단아의 아낌없는 찬사에 김강인은 히죽이 웃으며 손을 뒤더수기에 가져갔다.

박신철은 그들의 모습을 굳어진 눈길로 바라보며 저으기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괜히 두손을 맞쥐고 비비며 최단아의 눈치를 살폈다.

헤여지기가 이토록 어려우리라는것을 그는 지금껏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촉기 빠른 최단아가 홱 얼굴을 돌렸다.

《신철동지, 왜 그러세요? 마침 잘됐어요. 다 함께 식물원으로 가요. 성희동무가 사진기를 들고 안타까이 기다릴거예요.》

《단아동무.》 박신철은 눈길을 내리웠다.

《우린 이제 당장… 떠나야 하오.》

최단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연한 주근깨들이 금시 되살아났다.

《이렇게 빨리… 전 저녁차로 떠나는줄 알았어요.》

그 녀자는 풀기없는 어조로 경황없이 중얼거렸다.

한철준이 박신철에게 눈을 찡긋하고 돌아섰다.

《제수님, 이제 훈련이 끝난 다음 꽃이 활짝 핀 식물원을 찾읍시다.》

최단아는 한철준을 빤히 쳐다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아이참, 대대장동지두. 저도 군인이였답니다. 군관의 애인은 모든걸 각오하고있습니다. 신철동지, 이건 내가 어제밤 준비했던건데… 건강에 주의하세요. 그리고 편지를 꼭 보내주세요.》

최단아는 가방에서 크지 않은 보꾸레미를 꺼냈다. 김강인이 받아가지고 잽싸게 날라갔다.

군용차는 발동을 거느라 부르릉거렸다.

박신철은 차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최단아가 네거리건늠길까지 따라오며 정신없이 손을 흔들었다.

군용차는 그 아련한 모습을 뒤에 떨군채 사정없이 오른쪽으로 꺾어 앞으로 달려갔다.

한철준이 라이타를 꺼내 몇번 켜댔다.

《우느만. 참 녀자들이란…》

어쩐지 침울해진 그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

《헤여질 때 눈여겨봤네. 그 녀동문 자네 얼굴에서 한순간도 눈길을 뗄줄 모르더군. 정말 순진하고 마음도 얼굴도 깨끗한 녀성이야. 정신적각오도 높고, 동문 복덩이를 잡았어! 흠! 그래서 엉큼한 사내들은 때를 기다리며 장가를 늦게가는 모양이지?ㅡ》

한철준은 한결 눈길이 밝아져가지고 말소리를 길게 내끌었다.

《제길할, 자긴 또 어떻구!…》

두 군관은 서로 마주 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 소리높은 웃음조차도 마음속에 깃든 우수를 다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두사람 다 그것을 느끼고있었다.

《그래 가정래력은 알아봤나?》

한철준이 선배답게 왼심을 쓰며 화제를 돌렸다.

박신철은 피식 웃어버렸다.

《알아볼게 있나. 아버지가 군인이라면 다지. 난 원래 본인이 똑똑하면 그 나머진 무시하네.… 아버진 아마 평양주변 구분대에서 지휘관을 할거야. 단아동문 그래서 합숙생활을 하지.》

《사람두 덜퉁하기란… 그래 아직 그 처녀의 부모님들도 못만났나?…》

한철준은 어처구니 없는듯 혀를 찼다.

《됐네. 철준동무, 동무도 빨리 그 결혼문제를 결속해야지. 그러면 그 고통과 기쁨의 의미를 깨달을수 있을거네.》

박신철의 목소리에서는 어쩐지 선배연한 기색이 엿보인다.

한철준의 입가에 비양조에 가까운것이 떠올랐다.

《고통과 기쁨의 철학이라.… 사람마다 자기가 선택하고 찾는 행복이 있지. 나의 길… 언젠가는 동무도 내 심정을 알게 될거요. 아마 난… 어깨에 대좌별쯤 박고서야 가정을 이룰지도 몰라.》

한철준은 미소를 지었으나 눈에는 고뇌와 사색이 비껴있었다.

박신철은 차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한점없이 파랗게 트인 하늘에서 차거운 해가 눈시울게 빛나고있다. 박신철의 마음은 또다시 그 창공아래로 달리고있었다.

그런데 최단아가 나의 출장을 어떻게 알았을가? 녀성의 예감인가? 얼마나 영민하고 정이 뚝뚝 흐르는 녀자인가?

눈물, 그 녀자의 눈물, 난 왜 보지 못했을가. 그러고보면 분명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덜퉁스러운가. 왜 다정한 말한마디 남기지 못했을가.

《대대장동지, 저게 평양산원이 아닙니까?》

《어디?… 응, 그건 직총청사요.》

《아니, 이제 지나갔습니다. 야, 우리 공장마을의 직장장아저씨네 쌍둥이가 저 집에서 태여났거든요.… 앗, 저길 보십시오. 양각다리!》

《허허, 제길, 관찰력두 참. 그건 릉라다리요. 그다음 줄을 드리운 기둥이 보이지? 그게 바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우리 군인들에게 명령으로 하달하시여 일떠세운 청류다리고…》

《그렇습니까? 정말 황홀합니다. 야, 저길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한장 찍었으면 청진내기 김창모땅크장동지를 깜짝 놀라게 하는건데…》

박신철은 눈을 감았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느껴진다.

그 녀자의 길, 《새침데기》가 기다리는 식물원, 그래도 그 녀자는 갈것이다. 밝게 웃으며 사진기앞에 나설것이다.

이번 출장길이 끝나면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자. 우린 인차 결혼할것이다. 외삼촌도 꼭 리해할거야. 교외에 있는 단아의 부모님도 찾아뵙자. 아버지가 군인이라니 우릴 찬성할것이다.

단아는 말했지. 이제는 한순간도 떨어져살수 없다고. 참 나를 생각하다가 무대우에서 실수를 했다지. 얼마나 정이 깊고 세심하고 발랄하고 예민한 처녀람.

박신철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떠버렸다.

그는 바라던 행복이, 그토록 멀리, 지평선너머 아득한 곳에 있다고 굳이 여겼던 공상의 그 기슭이 이제는 자기앞으로 바투 다가오고있다는것을 뜨거운 충격속에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자 심장이 터질것처럼 높뛰는것이였다.

군용차는 숙소에 잠간 들렸다가 즉시 눈보라 우는 먼 전선동부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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