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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총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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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1-21 09:46 조회6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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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향도》

장 편 소 설 총대


박 윤

( 제 6 회 )


제 2 장

1

김혜정은 전우들과 헤여질 때는 미처 몰랐던 고독이 렬차에 올라서야 비로소 자기 몸을 칭칭 감싸는것을 느꼈다.

출발직전의 렬차안에서처럼 사람의 마음이 앙양되고 예민해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 생각 저 생각 굴리고 더듬으며 어수선한 생각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기다 다정히 바래주는 동무조차 없을 때에는 외롭고 쓸쓸한 심정속에서 어쩔수 없는 고뇌에 빠져들게도 된다.

발들여놓을 자리도 없이 려객들로 빼곡찬 렬차칸을 피하여 그 녀자는 어두운 승강대구석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기세있게 정시로 들어선 렬차가 무슨 영문인지 발차시간이 지나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혜정은 호ㅡ 하고 한숨을 내쉬고나서 저물어가는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들판우로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간다. 우짖으며 나래치며 멀리 어두워오는 재빛숲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저것들도 제 보금자리로 날아가겠지? 제나름의 따뜻함과 안식이 기다리는 깃을 찾아 저렇게 부지런히 날아가겠지.

문득 딸의 귀가를 안타까이 고대하고있을 고향의 늙으신 부모님들의 모습이 눈앞을 콱 막아선다.

지금쯤 어머니는 집앞에 나와서서 그래도 혹시나 딸이 집에 들렸다 가지 않을가 마음 바재이며 해저무는 강변쪽을 하염없이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읍철재공장에서 일하는 영예군인인 아버지가 퇴근하시다가 추위에 떨며 호젓이 서있는 어머니를 띄여보고 억지로 등을 떠밀것이다.

두 내외만이 살고있는 집, 군관인 오빠 둘이 다 북방과 전연에 나가 복무하며 살림을 따로 펴고있으니 더 애절하게 기다리는 딸이였다.

하지만 딸이 가는 길은 기약할수 없지만 기어이 가야 할 량심의 길이였다. 아니, 량심의 길이라기보다 의무의 길, 도리를 지켜야 할 전사의 길이였다. 이제 산설고 낯설은 백금산마을이 김혜정의 영원한 인연의 고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그가 반드시 찾아가 일으켜세우고 당의 품은 변함없고 차별없는 어머니품이라는것을 일깨워주고 증명해주어야 할 사랑하는 전우 리순금이 있다.

순금이, 넌 내 가슴에 못을 박고 원망하며 떠나갔지만 난 탓하지 않아. 우리는 태여나서 지금까지 당의 품에서 자랐지. 군사복무의 나날을 함께 걸어왔고.… 너를 끝내 입당시키지 못한 이 못난 정치지도원을 탓해줘. 넌 그게 아버지탓이라 여기며 때로는 포기하고 군무생활에서 비틀거렸지만, 그로해서 상관들의 애를 먹인 일도 있지만 결코 아버지탓만이 아니야. 비록 아버지는 인생의 길에 오점을 남겼어도 너만은 순결한 마음으로 오직 우리 장군님만을 따르는 충실한 동지로 키우고싶었던것이 바로 이 정치지도원의 진정이야.

어머니당은 반드시 자기를 진심으로 따르는 전사를 사랑의 품에 안아줄거야. 그걸 네가 의심했다면 넌 정말 아직 당원이 될 자격이 없어. 이 정치지도원이 널 잘못 키운거야. 그래서 난 너의 뒤를 따라가는거야. 아버지, 어머니, 이 딸을 용서해주세요. 달리는 할수 없는 이 못난 딸을 알아주세요. 만약 저 하나의 잘못으로 동지한명을 잃게 된다면, 한 전사가 맥을 놓고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

전 우리 장군님만 믿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떤 곡절을 겪더라도 반드시 바라는 행복의 령마루에 올라선다는것을 리순금이가 꼭 믿게 하고싶어요. 그를 당원으로 키우기전에는 물러서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혜정이 모대김끝에 제대직전 일군들앞에서 토로한 심정이였고 끈질긴 설복과 복잡한 론의끝에 배치가 결정된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들이였다.

그리고… 김혜정은 더 생각할수 없었다. 자기가 가는 길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큰 상실의 아픔을 안겨주는 희생의 길인지를 다시한번 소스라쳐 놀라며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철준동지, 절 용서하세요. 그리고 부디 행복하세요. 몸은 비록 동지를 떠나 먼 북방땅으로 가지만 동지를 그리는 내 마음 천리를, 만리를 떨어진대도 언제나 그곁에 있을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약속에서 이제는 동지를 해방시켜요. 달리는 살수 없는, 기약할수 없는 길을 떠나는 절 용서하세요. 이 길을 벗어나선 저에게 진정한 행복이 없을거예요.

이게 제 운명인가봐요.…)

그것은 또 한철준대대장에게 보낸 그 녀자의 마지막편지의 구절이였다.

아름다운 청춘의 길에서 불꽃처럼 튕기며 마주친 그들이였고 그 줄기찬 생활의 나날속에 피치 못할 인연으로 맺어져 서로의 심장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끌어당겼고 종당에는 운명의 길에서 맞부딪친 도전자들이였다.

훈련의 나날, 붉게 타는 계곡의 진달래숲, 젊은 대대장과 녀성대대정치지도원은 대원들의 눈총속에 마주 섰다. 녀성대대에 차례진 바위가 많은 진지굴설위치를 장대한 체구의 대대장이 도맡아나선것이다. 미모로 해서, 총명함으로 해서 더욱 자존심이 도고해진 녀성정치지도원으로서는 쉽게 물러설수 없는 정황이였다.

녀성대대는 끝내 남먼저 제 위치에서 진지굴설을 완성했고 남성대대가 임무를 수행했을 때는 두 대대분의 더운물까지 준비해놓았다. 한철준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해 가을 전술훈련의 길, 녀성포병대대의 포차 한대가 가을비에 미끄러워진 비탈길을 지쳐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따르던 장갑차에서 장대한 체격의 군관이 쏜살같이 달려내려 지쳐내리는 바퀴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때 김혜정이 무슨 힘으로 의식을 잃은 그 육중한 사나이를 업고 군의소로 달렸던가.

무슨 마음으로 나이지숙한 군의를 구슬려 어깨뼈가 바사진 그의 몸에 자기의 연약한 뼈를 이식했던가. 그 작은 뼈쪼각이 그 녀자의 순정까지 그의 몸에 옮겨놓았던가. 사랑은 론리가 아니고 심장은 자기의 곡조를 가지고있다. 매 사람들이 간직한 사랑의 노래는 그 누구에게 부탁해서 지을수도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할 때는 두눈이 먼다하지만 그 녀자의 눈은 별같이 반짝이였다.… 아직도 한철준의 몸에는 김혜정의 뼈가 배겨있었고 그자신은 이것을 모르고있다. 사랑은 또한 헌신이므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렇다! 변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사랑하는 그 사람이였다. 이제는 영영 제손으로 밀어버린 귀중한 그 애인이였다.

인생은 쉬임없이 흐르고 청춘은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을 뼈저리게 생각하는 김혜정의 두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려 불타는 뺨을 적셨다.

김혜정은 그 눈물을 닦을념도 못하고 그냥 해저무는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동무, 증명서를 봅시다!》

그는 돌아섰다. 눈물이 앞을 가리웠으나 순간적인 군인다운 촉감이 경무관완장을 알아보았다.

키가 후리후리한 대위는 김혜정의 군관복차림을 뚫어지게 뜯어보더니 증명서를 펼쳤다.

《음, 제대군관이구만. 김혜정, 스물여덟살… 이게 파견장이요?》

《녜.》

경무관은 다시 김혜정을 바라보더니 황급히 얼굴을 돌려버렸다.

《갑시다.》

《네? 어디로요?》

《따라오시오. 대위동무.》

경무관은 무뚝뚝하게 내뱉더니 홱 돌아서서 먼저 걸어나갔다.

얼결에 그의 뒤를 따라섰다.

경무관은 역홈에 내려서서 앞쪽으로 얼마동안 가다가 침대칸으로 올라섰다.

첫 침대칸앞에서 대위는 김혜정을 돌아보았다.

《이 호실에 앉아가야겠소.》

《아니, 전 아무데나 일없습니다.》

김혜정은 당황하여 그가 내미는 증명서를 받아들었다.

경무관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지으니 그가 자기 또래의 젊은 군관이라는것이 알렸다.

《달리 생각할건 없습니다. 그저 상관의 명령을 집행할 따름이지요.》

김혜정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자기가 고운 녀자라는것을 모르는 그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속도빙상을 전문해온 김혜정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날씬한 체격을 가졌고 티없이 맑은 갸름한 미모의 얼굴에 매력있는 눈매와 입매를 타고났다.

경무관은 김혜정의 배낭을 상단우에 올려놓더니 무엇이 즐거운지 벌씬 웃어보이고나서 복도로 나가버렸다.

《처녀, 어서 이리와 앉으라구. 적적하댔는데 마침 됐어. 아이구, 곱기두 해라. 배우인게지?》

《할머닌 어디까지 가시나요?》

김혜정은 옷을 두텁게 껴입은 몸이 체소한 녀인의 주름많은 얼굴을 공손히 건너다보았다.

《오, 난 검덕에 있는 딸네 집에 가. 사위는 거기 청년동맹비서야. 딸애가 입쓰리를 한 첫날부터 앓아누웠다구 매일 전보질이야. 그래 우리 맏이가 떠밀지 않겠나. 우리아들은 이 근방에서 사령관을 한다네.》

로인은 이 기회에 자식자랑을 하려고 결심한것 같았다.

《호, 그럼 리평해사령관동지의…》

《아니, 처녀가 우리 아들을 어떻게?》

할머니는 머리를 기웃하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지었다.

《호호, 저도 그 군부대에서 복무했어요.》

《어쩐지ㅡ 내 남 같지 않다 했다니. 우리 손주딸은 저 평양에서 비행기를 탄다네. 민항이라던가. 그리구 맏손주는 해군대학을 나왔어. 그 녀석이 의젓하기란. 키가 구척인데 몸은 또 얼마나 날랜지. 전번에 정치위원어른이 훈련장에서 허리를 다쳤는데 글쎄 그 녀석이 휴가왔다가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그 흉물스러운 까마귀를 두마리나 산채로 잡아오질 않았겠나. 아직 총각이라네…》

갑자기 렬차가 덜커덕하고 완충기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혜정은 가슴이 섬찍해지는것을 느꼈다. 그 녀자는 차창으로 다가가 정신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나의 렬차, 드디여 시작된 나의 길.

떠나온 길, 양지마다 락엽을 뚫고 잔디풀이 파릿파릿 돋아난 들길로 멀리까지 따라서며 손저음을 보내주던 녀병사들은 어디로 갔나. 아직 물기가 오르지 않은 숲너머, 그가 거쳐온 청림속의 군부대지휘부너머, 정을 묻고 정을 안고 떠나온 정다운 대대는 아득한 저 하늘아래 어디에 있나. 병사시절을 보낸 중대를 그리며 온 가으내 과일나무를 떠다 심은 대대의 언덕은 왜 보이지 않나.

눈물속에 웃으며 떠나온 길, 전사의 언약과 맹세가 슴배인 땅, 하건만 지금 뿌연 눈에 안겨오는것은 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치는 황토색의 오솔길뿐이였다.

김혜정은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리는것을 의식했다.

로인은 자식자랑에 지쳤는지 벽에 기대여 혼곤히 잠들었다.

내가 왜 이럴가? 애수에 잠긴 사람처럼 이렇게 감상적일가.

마음이 서슬차야 할 내가, 천날을 순간같이 긴장해야 할 내가…

김혜정은 살풋이 눈을 감았다. 마음이 번거로울 때 사람이 즐거운 생각을 끄집어낼수 있을가. 녀자는 도섭이 많아서 방문을 열며 닫으며 생각이 열두번 변한다지만 나는 녀자다운 감정이 마른 《랭풍기》야, 단아가 편지에 그렇게 써보냈지.

단아가 찾은 사랑, 랑만적인 사랑, 그 애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얼마나 어른스럽담. 새침한것 같으면서도 애교있고 변덕쟁이면서도 이악하고 진실하고. 박신철소좌, 나도 그를 알고있어. 본 일은 없지만 한철준대대장이 늘 외우는 군사대학동창생. 가만 그의 고향이 백금산이라고했던가.…

인간세상이란 얼마나 좁은가. 운명의 희롱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한걸음 내짚어도 아는 사람, 두걸음 옮기며 생각해도 밭은 인간관계… 이제 광산양복부 재단사를 한다는 신철동지의 어머니를 만나면 단아자랑을 입이 닳도록 할테야.

행복하길 바래. 단아, 너처럼 생활에서도 사랑에서도 순풍에 돛단 배처럼 일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행운아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가? 군사대학을 나온 나이 지숙한 리상적인 해군정찰병, 《국제소좌!》… 넌 늘 자기를 콱 움켜쥘수 있는 나이차이가 있는 원숙하고 지혜로운 로총각을 꿈꾸는 어리석은 《공주》였거든.

이악쟁이, 인민학교시절의 하급생, 겨울철전국학생체육경기때 만나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애를 먹이더니 끝내 성공했구나.… 하긴 나도 중학교때 너처럼 키가 조금만 더 컸어도 그 길을 버리진 않았을거야.…

김혜정은 어쩌다 최단아의 정다운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이 따뜻해지는것을 느꼈다. 늘 얼굴이 자기는 혜정이보다 밉다고 투정하며 부러워하던 단아다. 지난해에는 군부대예술선전대동무들과 함께 대대에까지 와서 공연을 하며 회포를 나누었다. 그때 김혜정은 배낭 깊숙이 감춰두었던 비밀의 그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철준이 군사대학을 졸업한후 전나무숲을 배경으로 장갑차앞에서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였다. 검은 동자가 류달리 큰 눈을 깜빡이며 연방 감탄사를 내뿜던 최단아의 연한 주근깨가 박인 귀여운 얼굴이 떠오른다.

《야, 혜정언닌 정말 행복해. 난 언제면 이런 의젓한 애인을 가질가?》

《애인이 뭐 인형이라구 가질가? 찾아서 쟁취해야지.》

《아니 난 싫어. 쟁취당할래.》

《피, 너같은 자존심덩이가 쟁취당해? 일단 심장이 명령하면 누구에게 빼앗길가봐 이악을 부릴걸.…》

최단아는 그렇게 이악을 부려 애인을 쟁취했다지. 멀리 피해 달아나는 그 소심한 해군정찰병에게 먼저 접근하고 길목을 지켰다지. 정말 용감한 애야. 정말 녀성지휘관감이야.

렬차가 덜컥하고 멎는 바람에 김혜정은 와뜰 놀라 눈을 떠버렸다. 어느새 렬차가 다음역에 와서 멎은것이다. 역홈이 떠들썩했다. 군소재지역이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분주했다. 사람보다 짐들이 더 많아보인다. 엄혹한 현실을 불평없이 감수하며 눈물겹게 헤치며 붉은기를 지켜나가는 우리 인민이다.

별안간 등뒤에서 차칸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찬 기운이 확 풍기며 심상치 않은 예감과 륙감에 가슴이 후두둑 뛴다. 그 녀자는 《그》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꼈다. 돌아설수 없었다. 왜 심장이 이렇게 남의것처럼 뛸가? 왜 내가 죄진 사람처럼 이렇게 겁을 먹을가?

《정치지도원! 이렇게 도망칠텐가?》

목소리는 가늘고 연하다. 하지만 하늘땅을 찢는 천둥소리도 김혜정을 그보다 더 놀래우지는 못할것이다.

《?!…》

귀익은 경무관의 조심스러운, 낮은 목소리에 이어 슬며시 자리를 피하는 할머니의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왜 돌아보지 못하오? 왜 선뜻 나를 보지 못하는가? 이 한철준의 심장이 그렇게 옅은줄 알았소? 두렵소, 놀랍소! 사랑을 서슴없이 배신하는 인간이 자기스스로 선택한 신성한 의무는 어떻게 지킬테요?…》

《철준동지!…》

김혜정은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싸쥐고 돌아섰다. 거목처럼 서있는 장대한 사나이의 드넓은 가슴이 앞을 꽉 막아버린다. 땀에 푹젖은 군복앞가슴이 큰 호흡으로 오르내린다. 김혜정은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볼수 없었다. 한순간 그가 너무도 까마득히 높아보이고 자신이 작게 느껴졌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철준동지… 저를 더 책망하세요. 저를 더 때려주세요. 난 동지를 사랑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녀자예요. 하지만, 하지만…》

김혜정은 오열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혜정이, 똑똑히 새겨두오. 이 한철준이 사람은 작아도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 알겠소?…》

《?!…》

《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앞에서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아오?

우린 통일이 된 다음에 가정을 이루겠다고 보고드렸소!》

한철준의 침착해진 목소리에 김혜정은 와뜰 놀라 얼굴을 돌렸다.

《네? 장군님앞에서요?》

《이제 보니 최고사령관동지께 동무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안하길 정말 잘했소.… 허허 참, 됐소.… 시간이 없구만. 리만순정치위원동지가 차를 줘서 왔던 길이요. 잘가우. 항상 이 철가슴이 동무와 함께 있고 기다리고있다는걸 잊지 마우. 편지하겠소!》

한철준은 뚜벅뚜벅 걸어와 김혜정의 연약한 두어깨를 으스러지게 부여잡고 흔들더니 홱 돌아서서 나갔다.

한참 지나서야 김혜정은 벌떡 일어나 승강대쪽으로 쫓아갔다. 한철준이 몸을 돌려 마주 보았다.

《이건 우리 대대정치지도원이 모아주는거요. 사회생활을 처음하게 되는 동무에게 필요할거라면서… 박신철의 어머니를 꼭 만나보우.》

한철준은 갑자기 열적어하며 두툼한 봉투를 그의 손에 쥐여주더니 움직이기 시작한 렬차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김혜정은 정신없이 달려가 승강대손잡이를 쥐고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안타까이 눈에 담았다.

《〈중대장〉동지! 〈공주〉걱정은 마십시오!》

경무관이 김혜정의 머리우로 유쾌하게 소리 지른다. 아마도 한철준은 경무관의 병사시절 중대장이였던 모양이다.

《부탁하오. 〈1분대장!〉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해주오!》

《알았습니다. 〈중대장〉동지!》

렬차가 점점 속도를 빨리했다. 김혜정은 눈물속에 정다운 사람이 서있는 역홈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렬차가 굽이를 돌아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둠이 깃든 역홈의 불그레한 화광만이 느껴질뿐이다.

《철준동지… 고마와요.》

렬차가 목메인 기적소리를 어두운 광야에 내던진다.

김혜정은 그냥 승강대에 서있었다. 들판과 언덕이 스쳐지나가고 눈앞에 불쑥 겨울의 밤바다가 펼쳐졌다. 검은 파도가 기슭의 바위너설을 때리며 길길이 일어선다. 차거운 해풍이 훅훅 밀려들어 그 녀자의 숱많은 머리칼을 마구 휘여잡고 희롱한다.

멀리 바다 한끝에서 외로운 불빛 하나가 깜박인다. 김혜정은 그 끝없이 펼쳐진 밤바다를 때없이 장식해주며 정답고 아늑하게 반짝이는 그 불빛을 넋을 잃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불빛, 바다의 불빛! 그것이 그 녀자가 찾는 행복의 등대인가. 가고 가고 또 가닿아야 할 희망의 항구인가. 그 행복의 불빛을 찾으려고 지금 렬차에서 내려 주저없이 서슴없이 달려가리라 생각을 굳히는 사이에 어느덧 그 불빛은 사라져버리고 캄캄한 겨울바다만이 앞을 가린다.

행복, 행복이란 저런것일가? 행복이란 희망속에만, 리상속에만 존재하는것일가.

눈에는 보여도 손에는 잡을수 없는 신기루인가. 하지만 지금 이 시각 김혜정은 외롭지 않았고 크낙하고 감사하고 애모쁜 감정,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면 인생의 먼 길에서 흔히는 맛볼수 없는 그 소중한 행복감을 분명 느끼고있었다. 그리고 마음은 이 순간 저 가없는 바다처럼 점점 더 넓어지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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