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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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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5-13 19:53 조회2,8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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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운동권 지도자가 운명했다. 농민운동을 위해 한생을 바친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1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고소식이 전해지자 트위터를 비롯하여 페이스 북을 통해 애도의 조문들이 쇄도했다.
향년 74세. 조선대학병원과 정광훈 고문의 유가족들에 따르면 13일 정 고문의 병세가 급격히 위독해졌고,
가족들이 병원에 모여 정 고문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병원에서는 마지막까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정 고문은 이날 오후 8시51분께 끝내 숨을 거뒀다.



[속보]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운명



한국진보연대 정광훈(74) 상임고문이 별세했다. 조선대병원과 정 고문의 가족들에 따르면 13일 정 고문의 병세가 급격히 위독해졌고, 가족들이 병원에 모여 정 고문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병원에서는 마지막까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정 고문은 이날 오후 8시51분께 끝내 숨을 거뒀다.

<##IMAGE##> 정 고문은 지난달 26일 재보궐 선거지원을 마친 뒤 차를 타고 해남의 자택으로 이동 중에 전남 강진군의 한 도로에서 아반테 차량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정 고문은 횡경막이 파열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해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이후 정 고문은 지난 9일부터 의식이 돌아오는 등 회복추세를 보였고 병원측에서는 혈압치료와 혈액투석을 병행해왔다.

............................................................................

‎5월 13일 20시 51분 정광훈 진보연대 상임고문님이 영면 하셨습니다.

장례식장은 조선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입니다.

5일장으로 치뤄지고 ...17일 9시 발인 예정입니다.


약력


1939년 9월 13일 해남 출생

목포공업고 졸업

해남군 농민회 회장

전농 전남도연맹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

1992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투쟁으로 구속. 4년간 수감생활

1999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2003 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

2005 APEC반대 국민행동 대표

2006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7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2009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2010 범민련 남측 본부 고문

2011년 4월 26일 화순군수 보궐선거 지원후 해남으로 이동중 교통사고

2011년 5월 13일 오후 8시 51분 조선대학교 병원에서 운명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최혜옥씨와 아들 경철, 성운, 딸 진아, 며느리 정옥난, 사위 민경진 씨가 있다.

* 고인을 추모하여 해당 단체와 기관들에서 조전을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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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영원한 청년’ 정광훈

노동자와 청년학생에게 사랑 받으며

‘혁명의 축제’를 꿈 꾼 혁명가



[서울=민중의 소리 이정무 기자]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지난달 26일의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 고문은 치료 중 한 때 의식을 회복하는 등 호전 조짐을 보였으나 끝내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3일 밤 운명했다.

노동자에게 사랑받은 농민운동가

1939년 전남에서 태어난 정 고문은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 청년학생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보기 드문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다. 정 고문은 목포공고를 졸업하고 1969년 해남읍에서 전파상을 차려 생활하다가 사회 봉사활동에 이어 1970년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참여함으로써 민중운동의 길을 시작했다.

정 고문은 1977년 김남주 시인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결성했고, 78년 전남기독교농민회 활동을 거쳐 89년에는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해 부의장을 맡았으며, 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에 선출됐다. 정 고문의 전농 의장 선출은 전농이 민주노동당에 힘을 보태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정 고문은 2003년 민주노총, 전빈련, 전농 등 대중조직과 정치·사회단체 등 40여 개 조직이 참여해 결성된 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를 맡아 지역과 부문을 뛰어넘는 전선운동을 이끌었다.

정 고문은 평소 “우리의 개인이나 조직은 전국운동을 하는 것이지 부문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으로 “‘구멍가게’라 할 수 있는 자기조직의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연대연합에 큰 관심이 없고 당위적으로만 연대”하는 모습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그는 “자기 조직 본위적 사고는 변혁적 관점이 아니며 ‘위대한 과업’을 담당한 간부의 모습이 아니”라고 역설했었다.

정 고문의 이러한 사고와 실천은 그가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선의 지도자로 서게 된 이유였다.

“혁명가는 고정자산의 비율이 높으면 안 된다.”

정 고문은 평생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운동가였다. 정 고문은 해남에서 난청 지역 해소를 위해 산꼭대기에 무허가 중계소를 설치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92년에는 UR반대 등으로 4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정 고문은 이 시기에 ‘자본론’을 통독하는 등 “전술과 전략에 있어서 공부를 많이 한” 때로 기억했다. 정 고문은 2007년 칠순을 앞두고 겪은 수감 생활에 대해서도 “채소와 김치, 보리밥으로 구성된 식단이 딱 내 입맛”이고, “다른 재소자들과 배드민턴을 함께 친 즐거운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특유의 낙관을 보여줬다.

정 고문은 생활에서도 청빈을 고수했다. 정 고문은 집 없고 땅 없고 돈 없는 생활을 자랑으로 여겼다. 서울에서 민중운동단체의 대표를 맡으면서도 해남에서 틈틈이 농사를 지었던 정 고문은 자기 집이 없었다. 1999년 전농 의장 선출 이후 11년간 객지 생활을 하면서 정 고문은 농민회 사무실 등에서 지냈고, 2010년 해남으로 돌아가면서도 후배들이 ‘집을 사라’고 모아준 돈을 모두 동지들에게 나누어 줬다.

정 고문은 평소 “혁명가는 고정자산의 비율이 높으면 안 된다.”며 운동가로서의 삶이 ‘가진 것’에 대한 미련으로 왜곡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영원한 혁명아(革命兒), 정광훈

정광훈 고문은 진보진영의 ‘원로’였지만, 그 누구보다 새로운 것을 사랑했던 청년이었다.

정 고문은 ‘미래’나 ‘꿈’ ‘행복’ ‘축제’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정 고문은 “모든 개인과 조직은 혁명을 통해서만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역설했다.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비정규 문제나 청년들의 취직 문제는 ‘사회 변혁’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정 고문에게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는 말이 꼬리처럼 붙어 다녔다. 이수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정 고문을 “항상 무겁고 두꺼운 책을 읽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책장에 꽂힌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 나온 좋은 책이 많은 데 왜 아는 책을 또 읽겠느냐는 것이다.

정 고문이 해남군 마산면에 짓고 있던 민중학교는 그래서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다. 민중학교를 통해 농민과 청년을 ‘의식화’하고, 이를 통해 ‘혁명의 종자’를 만들겠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책의 가제는 ‘혁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였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마중 나온다는 확신, 그것이 그를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민중의소리=이정무 기자>

기사입력: 2011/05/14 [10:49] 최종편집: ⓒ 사람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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