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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 쿠바혁명 64주년 - 세계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장(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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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1-11 11:35 조회1,00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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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 쿠바혁명 64주년 - 세계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장(章)

올해는 1959년 1월 1일 성공한 쿠바혁명이 64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통일시대는 쿠바혁명 64주년을 맞아 글로벌리서치 지에 실린 기고문을 번역게재합니다. 쿠바혁명의 전개과정과 그 의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자: 버슨 필립 박사(Dr. Birsen Filip). 글로벌리서치 기고가. 철학박사.

역자: 이승규.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쿠바혁명 64주년 - 세계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장(章)


원문보기:https://www.globalresearch.ca/the-60th-anniversary-of-the-cuban-revolution-an-unprecedented-chapter-in-world-history/5664387



오늘날, 쿠바인들은 그들의 독립 64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59년 이 날, 쿠바혁명은 피델 카스트로의 7·26운동*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지속적인 신식민지주의, 자본주의, 패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혁명의 결과 미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쿠바의 부패하고 잔인한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1901-1973)는 그의 충실한 지지자 일부와 함께 쿠바를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탈출했다. 쿠바혁명의 승리는 1959년 1월 1일 쿠바인들이 467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세력에 의한 농노와 착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진: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7·26운동(Movimiento 26 de Julio, 약칭 M-26-7)은 쿠바혁명을 주도한 쿠바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게릴라 조직이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과 제국주의에 반대했으며,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1955년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으로 혁명운동을 시작하여, 1962년에 해체된 혁명조직이다.

스페인은 1510년부터 쿠바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 최초의 국가였다. 하지만,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배했지만 쿠바인들이 기대했던 해방을 가져오지 못했고, 이후 이 섬은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모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종결과 1959년 쿠바혁명의 승리 사이의 기간에, 미국은 쿠바에 제국의 권력을 행사하여, 쿠바의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을 착취하고, 내정과 외교정책을 좌우했다. 1933년부터 미국의 지지를 받던 바티스타가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자, 그와 그의 부패한 동료들은 쿠바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미국 및 미국 마피아와 즉시 협력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스위스은행 계좌에 수백만 달러가 입금되는 대가로 미국 마피아가 섬의 모든 카지노를 장악하는 것을 허락했다(디아스 브리케츠와 페레스 로페즈 2006, 77). 한편, 미국인들이 쿠바에 제국의 권력을 행사했던 전체기간 동안, 미국은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 결과 섬의 모든 경제부문을 지배하게 되었고, 최고의 농업토지, 광산, 천연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1950년대까지 미국은 쿠바 전력회사의 80%, 쿠바광산의 90%, 국가 정유공장의 거의 100%, 가축목장의 90%, 설탕산업의 40%를 통제했다.' 쿠바가 미국의 손에 장악된 내용은 1968년 10월 10일 멕시코 만사니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가장 잘 설명되었다.

“양키가 우리 경제를 장악했다. 1898년에, 쿠바의 미국재산은 5천만 페소에 달했고, 1906년에는 1억 6천만 페소에 달했고, 1927년에는 14억 5천만 페소에 달했다…나는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가장 좋은 땅, 모든 광산, 천연자원을 차지할 수 있도록 경제적 침투가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진 또 다른 나라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공서비스, 설탕산업의 대부분, 가장 효율적인 산업, 전기산업, 전화서비스, 철도, 가장 중요한 사업과 은행을 통제했다.”

이 섬은 본질적으로 도박, 마약밀매, 마피아, 갱단, 매춘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인들의 놀이터였으며 바티스타는 그들의 충실한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바티스타의 독재적이고 부패한 정권이 쿠바국민들을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민주주의 원칙(평등과 자유)에 반하는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결코 미국에 의해 비판되거나 비난받지 않았다. 바티스타의 독재통치는 극심한 농촌빈곤, 비참, 문맹, 매춘종사자의 증가, 착취, 높은 실업률을 동반했다. 쿠바성인의 거의 절반과 전체인구의 37.5%가 문맹이었고, 미국의 지배기간 동안 모든 어린이의 70%가 교사를 접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주택을 얻거나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고, 전기와 수도 인프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미국의 지배로 인해 악화된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쿠바인들이 착취, 인종차별, 경찰의 잔혹성, 기아, 굴욕을 경험하게 했다. 도시지역 출신의 많은 소녀들이 미국 관광객들과 사업가들을 위한 매춘부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특히 착취에 취약했다. 섬에서 활동하는 미국 마피아가 이 상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불법 마약판매로 벌어들이는 돈에 추가로 아바나에서 거의 300개의 사창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은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 165명에게 정확하게 영감을 주었지만, 1953년 7월 26일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한 전복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 근처의 몬카다 병영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후, 카스트로는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중, 그는 수감자들의 친척들과 동료들, 바티스타 정권의 반대자들에 의해 조직된 강력한 사면운동 때문에 겨우 2년을 복역했다. 석방된 후,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부에 의한 생명위협 때문에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그의 첫 시도 날짜를 기념하여 '7·26운동'으로 알려진 새로운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훈련하고 무장시켰다.


7·26운동이 바티스타 정권의 전복을 시도할 준비가 되었을 때, 이 단체는 피델을 주요 조직자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 라울 카스트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후안 알메이다 보스케(1927~2009) 등 총 82명의 혁명가가 모였다. 1956년 11월에, 82명의 혁명가들은 겨우 12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그란마’란 이름의 요트를 타고 멕시코를 떠나 10일간의 항해로 쿠바로 갔다.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바티스타 독재에 대항하는 혁명운동의 다른 지지자들을 만나기 위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쿠바군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82명의 혁명가들 중 12명만이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란마 요트의 생존자들과 섬의 혁명운동 지지자들은 섬 전역의 마을과 도시에 저항단체를 조직하여 게릴라전쟁을 계속했다. 바티스타 정부는 혁명가들을 약화시키고 결국 패배시키기 위해 많은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고문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959년 게릴라전의 승리로 바티스타 정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독재자 중 한 명이 전복되었는데, 바티스타는 집권 7년 동안 20,000명 이상의 쿠바인을 살해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변모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 모든 것은 미국 내 그의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진: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1957, 피델 카스트로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를 통치했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총리를 지냈으며, 1976년부터 200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처음부터, 그의 정부는 일관되게 반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장려했으며 미국에 의한 쿠바의 식민지화, 굴욕, 착취를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치들을 시행했다. 여기에는 섬의 모든 카지노와 사창가를 폐쇄하고 마피아를 청소하고 국제관광의 축소가 포함됐다. 새 정부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은행과 전화회사를 포함한 외국기업과 공공사업을 국유화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은 미국기업에 속해 있었다. 또한 셸, 엑슨 등 미국 기업이 지배하던 정유소가 국유화되고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석유를 구매하는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또한 토지소유권을 제한하고 외국인이 자국 내 토지를 구매하거나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많은 토지 및 농업개혁을 시행했다. 쿠바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교육과 의료서비스는 예외 없이 모든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카스트로 사회주의정권은 또한 주택건설과 사회기반시설 개선에 대규모 투자를 했는데, 여기에는 6개월 만에 600마일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최초의 영토'라는 명성을 얻었다(피델 카스트로, 2003년 5월 1일, 아바나).

미국관리들은 쿠바혁명과 카스트로정부에 의해 시행되는 사회주의개혁을 쿠바에서의 미국의 이익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하며 만장일치로 반대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카스트로의 국유화 과정과 반제국주의 정책에 격노해 결정적인 보복으로 결국 1961년 1월 3일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아이젠하워는 또한 마피아와 협력해서 쿠바의 사회주의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CIA의 작전을 승인함으로써 대응했다. 이것은 '카스트로에 대한 비밀행동 프로그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작전은 1961년 4월 17일 피그스 만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CIA에 의해 훈련되고, 무장되고, 자금을 지원받은 약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이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쿠바를 공격했다. 비록 이 실패한 침공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 실행되었지만, CIA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아직 권력을 잡고 있던 1959년 3월에 이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1962년 케네디정부는 쿠바에 완전한 상업적, 경제적 그리고 재정적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는 사실상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무역을 차단했고 미국시민들이 그 섬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제정된 이후 이 무역금수조치는 이후 모든 미국행정부에서 사회주의혁명을 전복시킬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수조치 부과의 근거는 1960년 4월 6일 전 국무부 부차관보 레스터 D. 맬러리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되었다.

“쿠바국민의 대다수는 카스트로를 지지한다. 효과적인 정치적 반대는 없다…내부 지지를 제거하는 유일한 예측가능한 수단은 환멸과 불만 그리고 어려움을 통해서이다… 쿠바의 경제적 삶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을 신속히 취해야 한다...쿠바에 대한 자금과 공급을 차단하고, 통화 및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며, 굶주림과 절망, 정부전복의 도모 등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미국의 금수조치는 1962년 이후 쿠바 경제발전의 주요 장애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쿠바외무부는 2014년 현재 총 피해액을 1조 1천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미국은 경제금수조치를 인권침해로 보지 않고 정권교체가 해제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세계여론과 배치된다.

상업적, 경제적, 재정적 봉쇄 외에도, 미국인들은 또한 쿠바의 사회주의정권을 불안정하게 하고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다른 전술들을 사용했다. 쿠바망명자들의 테러공격을 조직하고 쿠바의 경제를 파괴하기 위한 자금지원, 화학 및 생물학적 전쟁, 국제은행의 신용 및 대출에 접근을 금지하고 자유무역을 막는 경제 및 정치적 제재,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CIA의 작전지원이 포함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CIA의 총 암살시도 수는 638건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세계역사상 한 나라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공격과 반혁명작전 배경 속에서도,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일관되게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문제들은 논의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는 협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특히 카스트로는 1961년 5월 1일 아바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쿠바인들은 자기 자신의 정부를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논의할 가능성을 고려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만 논의할 것이다.”

1991년에, 쿠바는 공식적으로 봉쇄의 종료에 대해 유엔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유엔총회는 매년 금수조치의 지속적인 영향을 비판하는 구속력 없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왔다. 그것은 매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이 글은 2019년의 글이다) 2018년 10월 투표에서 총회 193개 회원국 중 189개국이 구속력이 없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표를 던졌고 몰도바와 우크라이나는 기권표를 던졌다. 실제로 27년 역사 동안 이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4개국이 채 안 되는데, 매번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뿐이다. 결의안에 대한 지지도는 최초 투표 이후 기권자 수가 감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꾸준히 증가해 왔다. 많은 미국 동맹국들을 포함한 유엔총회 회원국들은 쿠바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금수조치의 파괴적인 경제적 영향을 정당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역금수조치는 모든 쿠바국민을 무차별적으로 겨냥한 것으로, 이는 세계인권선언(UDHR) 2조, 13조, 25조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실제로, 1997년 세계보건미국협회에 의해 수행된 철저한 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의 쿠바 금수조치는 많은 일반 쿠바시민들의 건강과 영양에 극적으로 해를 끼쳤다…미국의 금수조치는 쿠바에서 고통과 심지어 사망자까지 크게 증가시켰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금수조치는 쿠바의 의료시스템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부과해 왔다…1992년 이후 필수의약품이나 적절한 장비와 의사 없이 의료절차를 수행하는 미충족 의료행위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경향은 1992년 미국의 무역금수조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쿠바에 식량판매를 금지하고 의약품과 의료장비의 판매를 급격히 제한하는 가장 엄격한 금수조치 중 하나인 1992년 ‘쿠바민주주의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나아가 미주인권위원회도 “이러한 제재가 쿠바국민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했으며, 따라서 금수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정권을 미국인들의 편에서 파괴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로부터 상당한 고난을 견뎌냈지만, 쿠바인들은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특별한 시기'로 알려진 소련의 해체로 인해 특히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쿠바는 가장 중요한 무역파트너를 잃었고 사회주의블록에서 나오는 많은 보조금을 잃었다. 대략, 쿠바수출의 80%는 소련으로 향했고, 비슷한 규모의 수입이 그곳에서 발생했다. 그 결과, 쿠바경제는 1992년에만 40% 이상 축소하면서 붕괴되었다. 이것은 음식과 약을 포함한 기본적인 필수품의 심각한 부족을 초래했으며, ‘특별한 시기’ 동안 영양실조와 심각한 건강문제의 증가를 초래했다. 물론, 미국은 1992년 쿠바민주주의법과 1996년 헬름스-버튼법을 통과시켜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를 강화함으로써 나사를 더 조일 수 있는 그런 거창한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특별한 시기’와 관련된 고난에 대응하여, 피델 카스트로 정부는 준자유시장을 도입하는 등 여러 경제개혁을 시작했고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추구했다. 여기에는 소규모 민간기업 허용, 1993-94년에 섬의 외국관광 재개, 생명공학 투자 등이 포함되었다. 실제로, ‘특별한 시기’에 시행된 개혁은 현재 섬에서 운영되고 있는 많은 호텔과 리조트 체인들이 쿠바정부와 주로 스페인과 캐나다에서 온 외국기업들 사이의 합작사업인 이유이다. 이것은 쿠바가 1989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이상을 버리는 대신에, 사회주의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별한 시기’의 비참한 경제적 후과와 이에 수반된 미국의 금수조치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쿠바사회주의는 완전고용 달성, 무료교육 및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 사회정의 개선을 포함하여 많은 인상적인 성과를 지속적으로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이 섬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높은 식자율과 평균수명을 달성하고 아동 사망률, 아동 영양실조, 빈곤율을 낮출 수 있었다(나바로, 2014, 반데피트, 2011). 사실, 세계은행은 “쿠바의 국제적인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의 성공,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의 성공을 능가하는 사회서비스, 그리고 특정분야에서, 선진국들의 성공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했다. 게다가, 유엔개발계획의 추정치에 따르면, 쿠바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2017년 유엔인간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쿠바의 2017년 인간개발지수 0.777은 인간개발지수가 높은 국가그룹의 평균 0.757을 초과하고,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의 평균 0.758을 초과한다.”

인간개발 분야에서 성공한 것 외에도, 쿠바는 교사, 의사, 기술자 등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을 긴급히 필요로 하는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형태의 실질적인 대외원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959년 이후 쿠바는 30만 명 이상의 의료 전문가들을 자국민의 의료수요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에 파견했다. 이것은 쿠바가 특히 높이 평가받는 관례이다.

현재, 약 5만 명의 쿠바 의료종사자들이 66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수치를 전체적으로 보면, 2014년에 ‘쿠바 의료진은 G8 전체와 세계보건기구, 국경없는 의사회를 합친 것보다 많은 7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쿠바는 또한 다양한 개발도상국의 학생들에게 무료 의과대학을 제공함으로써 의사부족의 퇴치를 도왔다. 실제로, 아바나의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의과대학'으로 2005년 이후 90개국에서 약 29,000명의 의사를 배출하고 있다. 쿠바의 의료시스템의 품질은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도 인정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위 개발도상국들 중에서 쿠바는 단연코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그들의 지원프로그램은 어디에서도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카스트로정부는 또한 환경에 대한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국가의 지속가능한 천연자원 사용과 과소비와 지구온난화에 맞서기 위한 노력으로 증명되었다. 2006년 이래로 쿠바는 유엔개발계획에 의해 정의된 지속가능한 개발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국가였다. 2014년에, 쿠바는 1인당 1.8헥타르 미만의 낮은 생태발자국을 등록했는데, 이는 세계평균인 2.8헥타르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서방의 주류언론 말고, 쿠바는 사실 1959년 사회주의혁명 이후 평화, 사회정의, 평등, 인도주의적 지원에 대한 헌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쿠바만큼 '국제연대의 정신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피델 카스트로 2003). 1963년 피델 카스트로정부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와 연대하는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들은 쿠바의 의료전문가, 기술자, 그리고 기술자문을 보내 베트남전쟁 시기 이 나라들에 도움을 제공했다. 카스트로정부는 또한 1964년 쿠바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인정한 최초의 국가가 된 것에서 증명되었듯이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자였다.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는 것 외에도, 카스트로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쿠바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고, 1973년 욤키푸르전쟁(1973년 10월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으로부터 시리아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4,000명의 쿠바군인을 파견했으며, 2012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봉쇄한 데 대해 '팔레스타인 홀로코스트'라고 비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또한 2011년 3월에 시작된 NATO 주도의 리비아 군사개입을 비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 초기 이래 아랍세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쿠바는 아프리카 대륙의 해방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쿠바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했다. 그 후, 1963년 10월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해방된 후, 쿠바는 ‘모래전쟁’에서 모로코 팽창주의에 맞서 알제리가 최근 획득한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군대를 파견했다(피델 카스트로, 2003년 5월 1일 아바나). 쿠바는 또한 1960년대 후반 앙골라 해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보냈다. 1975년 11월 앙골라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후, 쿠바는 2만 5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자이르의 개입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앙골라의 좌파 해방운동을 지지했다. 자이르와 남아프리카가 군대를 철수했지만, 쿠바군은 앙골라 내전(1975-2002)에서 앙골라 민족해방운동(MPLA)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남아 있다가 결국 1991년에 떠났다.




쿠바혁명의 영향은 쿠바인들을 미국지배의 복종에서 해방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았다. 쿠바는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전역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의 모델로 여겨졌다.

“쿠바는 고립된 나라가 아니다. 쿠바의 사례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쿠바의 사례는 모든 후진국의 사례이다. 콩고, 이집트, 알제리, 이란, 그리고 최종적으로 운하를 되찾기를 원하는 파나마의 사례이다. 국가정신이 파괴되고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사례이다. 영토의 일부가 점령된 온두라스의 사례이다. 요컨대, 다른 나라들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쿠바의 사례는 모든 저개발국가들과 식민지국가들의 사례이다…라틴아메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머지 후진국의 문제와 같다. 세계는 독점으로 분할되어 있고,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독점은 중동에서도 발견된다.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그리고 세계 구석구석의 석유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재정적 이익에 의해 통제되는 독점기업들의 손에 달려 있다…독점적 이익은 국민의 발전과 관계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국민들을 착취하는 것이다.”(피델 카스트로, 1960년 유엔총회에서 연설)

쿠바 국민들은 60년 동안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싸워왔다. 두 나라의 상대적 규모, 인구, 군사력 등을 고려할 때 '이렇게 불평등한 싸움은 세계가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피델 카스트로, 2003년 5월 1일, 아바나). 하지만, 미국에 유리한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미국행정부가 조직한 피그스만 용병침공을 분쇄하여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막았다…1962년에, 쿠바는 수십 개의 핵무기로 공격받을 위험에 직면했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쿠바는 미국정부에 의해 조직된 수천 건의 파괴행위와 테러공격을 냉철하게 견뎌냈다. 쿠바는 혁명지도자들에 대한 수백 건의 암살음모를 좌절시켰다”(피델 카스트로, 2003년 5월 1일 아바나).

쿠바가 이러한 승리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기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강력할지라도 쿠바는 '사상, 이성, 대의명분의 도덕성'이 있다.”(피델 카스트로, 2003년 5월 1일, 아바나) “이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개인과 함께 멸망하는 것'도 아니다.”(피델 카스트로, 2007년 6월 23일).

'자유쿠바 만세!' 혁명승리 만세!'(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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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is님의 댓글

otis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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