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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6]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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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7-28 18:40 조회2,1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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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북-중간의 관계는 남다르다. 장울화열사는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주석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관심을 모아 온 인물이다. 중국인 장울화열사 가정은 5대에 걸쳐 북부조국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고 지금도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 가족들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왔다.
이번에는 이 가정에서 출판한 도서 《김일성과 장울화》의 여섯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특별연재-6]

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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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1926년 봄 김형직선생님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시였다.
선생님께서는 너무도 과로하시였다. 다년간에 걸쳐 독립을 위하여 분주히 뛰여다니시고 몇번씩이나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시면서 그이의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였다. 그런 형편에서도 그이께서는 무송으로 가시여 조선독립을 위한 혁명활동을 중단하지 않으시였다.

1925년초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길림시 우마항으로 가시여 독립운동지도일군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조선독립운동을 지도할 정치단체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도록 하시였다.

1925년 8월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무송에서 국내외의 조선국민회 대표들, 무장단체 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독립운동대렬의 통일단결을 위한 대책을 토의하시였다. 회의는 장소를 무송, 말리허와 양지촌으로 옮겨가면서 10여일간이나 진행되였다. 회의결과 민족단체련합촉진회가 조직되고 민족독립운동통일전선이 결성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또한 무송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교육회의를 소집하시고 일부 준비된 조선사람들을 안도, 화전, 돈화 그리고 장백 등지로 파견하시여 그들로 하여금 조선인거주지역들에서 학교와 야학을 조직운영하도록 하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또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만주각지를 오가시며 독립운동자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시였다.

그와 같은 혁명활동과정에 10월혁명의 영향하에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은 무산혁명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이께서는 조선혁명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에로 방향전환을 하기로 결심하시였다.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을 더 크게 벌리려고 하던 바로 그때에 선생님께서는 무송집에서 몸져눕게 되시였다.

<##IMAGE##> 《아버지가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토방우에 낯선 신발들이 대여섯컬레씩 놓여있군 하였다. 다들 몸에 좋다는 약들을 지어가지고와서 문병을 하고 아버지를 위로하였다. 아무리 돈에 궁한 사람도 인삼 한뿌리씩은 거의 가지고왔다. 하지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아버지의 병에는 약도 효험이 없었다. 봄은 지상만물에 기름진 생명의 즙을 주며 새 계절을 노래하고있었건만 야속하게도 만사람이 그렇게도 바라고 기다리던 아버지의 건강만은 소생시키지 못하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

장만정 등 오랜 벗들이 김형직선생님의 병치료를 도와 모든 성의를 다하였지만 끝내 효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1926년 6월 5일 김형직선생님께서는 32세를 일기로 무송에서 세상을 떠나시였다.
비보가 전해지자 김씨댁은 조객들로 가득찼다. 그들중에는 조선사람도 있었고 중국사람도 있었으며 부호들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무송의 군중들도 있었고 남만, 북만, 간도(연길) 그리고 조선국내에서 달려온 조선독립운동지도자들과 동지들, 친구들, 제자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시고 공동위업에 심혈을 기울여오신 그 조선선생님과 영결하려고 찾아왔다.

외지에서 온 공영과 박진영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은 상복차림으로 령구앞채를 메고나갔다.
무송지방의 조선녀성들은 보름동안이나 머리에서 흰 댕기를 풀지 않고 김형직선생님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하였다.

장만정은 오랜 벗이신 김형직선생님의 령구를 바래드리려고 찾아왔다.
그는 령구앞에서 목놓아울었고 이국의 벗이며 서예친구인 그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추도시 주련을 썼다.

상련 : 백성들의 병치료 위해
좋은 일 많이도 하신이
서예가이신 그대의 필치
길이 빛나리
하련 : 원대한 뜻 이루지 못하고
가신 그대 그리워
흐르는 눈물
걷잡을수 없어라

중국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장만정은 또한 김형직선생님께 만장도 보내드리였다. 만장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었다.

조선의 사회활동가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영생하시리

마을사람들이 도저히 리해할수 없어한것은 상가집에는 원래 검은색이 아니면 흰색만장을 보내야 하는데 장만정이 붉은색만장을 보내온것이였다.

장만정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해석을 가하였다.

《김선생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서거하시는 마지막날까지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습니다. 생전에 불같이 열정적이시였고 서거하실 때에는 불같이 장렬하게 서거하시였습니다. 그야말로 대영걸이신 그이께서 비록 몸은 떠나가시였어도 우리들 마음속에 생존시와 같이 영생할것입니다.》

<##IMAGE##> 장만정의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치고 머리숙여 눈물을 흘리지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송현 현장도 금박향지(향내나는 종이-역주)를 가지고 김형직선생님의 령구를 바래우려고 찾아왔다.

원래 김형직선생님의 거주를 승인하지 않던 그 관리까지도 마침내 무송에 잘 알려진 선생님의 선행과 의로운 행동에 감동되여 그이의 령전에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였으며 눈물을 흘리며 조의를 표시하였다.

묘소는 무송 소남문거리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두도송화강반의 양지촌에 자리잡았다.
중국의 청산에 조선의 걸출한 렬사가 안치되였다.

중국의 대지가 조선영웅의 넋을 맞아들인것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 장만정은 식량과 돈을 가지고 김형직선생님의 댁으로 찾아와 강반석녀사께 드리였다.

강반석녀사께서는 감동되여 말씀하시였다.

《우리 집주인이 생존해있을 때 댁에 적지 않은 페를 끼쳤는데 이제 또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였습니다.》

두눈이 뻘겋게 부은 장만정이 말하였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만일 반대로 제가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면 김형직선생님께서도 우리 집사람들을 돌봐주시였을겁니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살아가기가 조련치 않을것입니다. 후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이 장만정이 굶어죽지 않는 한 이 댁에서도 굶지 않을것입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신 후에도 장씨일가와 김씨댁은 의연 자주 래왕하였다.
한번은 김일성동지께서 장울화의 집에 가시여 장울화의 어머니 원몽린이 앓고있는것을 보시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시여 김형권삼촌을 데리고와서 장울화의 어머니병을 치료해드리도록 하시였다.

1905년에 탄생하신 김형권동지께서는 조선에서 무송으로 오시여 현정부 의약회에서 실시한 내과, 외과시험에 합격하여 무림의원에서 사업하고 계시였다.

김형권동지께서는 중어를 모르시기때문에 김일성동지께서 통역을 하시였다.
김형권동지께서 병치료를 위해 장씨집으로 가실 때마다 김일성동지께서 통역을 하시였다. 병이 다 완치되자 장울화의 부모들은 그야말로 고마와하였다.

후에 김형권동지께서 혁명활동을 하시다가 군벌당국에 체포되여 투옥되시자 강반석녀사께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 이리저리 생각하시던 끝에 장만정을 찾아가 도움을 받으시였다. 장만정이 사방으로 뛰여다니며 방도를 강구하였으며 돈을 써서 김형권동지께서 인차 석방되시도록 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비록 세상을 떠나시였지만 그이께서 생전에 이어놓으신 진정한 사랑과 정은 마치도 생활력이 강한 나무종자와도 같이 장백산의 풍요한 땅에 떨어져 싹트고 가지를 치고 잎을 펼치고 꽃으로 피여났다.… 그것은 김씨댁과 장씨일가가 피를 흘리며 대를 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 마침내 하늘을 찌를듯 한 중조친선의 거목으로 자라나게 되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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