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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4]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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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7-01 10:02 조회2,1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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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장울화열사는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주석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관심을 모아 온 인물이다. 중국인 장울화열사 가정은 5대에 걸쳐 북부조국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고 지금도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 가족들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왔다.
이번에는 이 가정에서 출판한 도서 《김일성과 장울화》의 네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특별연재-4]

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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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무송현 대남문부근에 자리잡고있는 무송제1소학교는 현성에서도 비교적 큰 학교로서 10여명의 교원들과 수백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평양에서 이미 4학년까지 다니시였기때문에 5학년에 편입되여 공부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무송제1소학교에 들어가시도록 소개해준 사람은 무송현 교육회 회장 사춘태였다.
사춘태는 자가 중림으로서 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화민국12년(1923년-역주)에 무송현 교육회 회장으로 선거되였으며 제1소학교 교장직을 겸하고있다. 후에 그는 무송현 농회 회장으로 선거되였다.

첫날 김일성동지를 학교교실에까지 안내한 사람도 역시 사춘태였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남달리 영특한 그 조선학생을 소개하고나서 그이더러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 책상에는 김일성동지와 나이가 비슷한 사내아이가 앉아있었는데 아주 곱게 생겼었다. 움푹 들어간 큰 눈에 짙은 눈섭 그리고 눈섭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것이 유럽사람 비슷하였다. 그 사내아이의 얼굴표정은 아주 천진하고 선량해보였다. 다만 그 천진하고 선량한 표정속에 약간의 우울한 표정이 비껴있었을뿐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바로 전날 대영에서 본 마차우에 앉아있던 사내아이라는것을 대뜸 알아보시였다. 한책상의 옆자리에 앉은 그 사내아이가 대단히 친절하게 빈 자리를 권하는것이였다. 한창 수업이 진행되는중이라 그들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은 모두 밖에 놀러나갔다.
그런데 김일성동지께서는 교실을 떠나지 않으시였다.
생소한 나라에 낯설은 현성, 낯설은 학교, 처음 만난 학생들, 생소한 과목 등으로 하여 그이께서는 다소 부자연스러우시였다. 한 책상에 앉은 사내아이도 교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새로 온 학생을 동무해주었다. 그는 새로 온 남달리 영특하게 생긴 동무에 대하여 호감을 품게 되였다. 그 선량한 사내아이는 오늘 자기 생활에 뛰여든 그 새로 온 학생이 장차 자기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것이라는것을 아직은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 사내아이는 김일성동지께 주동적으로 《우리가 대영에서 만났댔지.》라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래, 너는 큰 마차에 앉아있었고 나는 말파리에 앉아있었지.》
《알고 지내자. 나는 장울화라고 해. 자는 아청이고.》
장울화는 1913년 1월 18일 통화현 열수하자에서 장만정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교장이 좀전에 소개한바와 같이 나는 김성주라고 해.》
《그럼 내가 너를 성주라고 부르자꾸나.》
《좋아. 난 널 울화라고 부르겠어.》
두 꼬마친구들은 손을 툭 치는것으로 《합의》에 도달하였다.
《너는 왜 중국에 와서 공부하니?》
《우리 조선이 일본놈들에게 강점당하였단다.》
《일본사람들이 대단히 나쁘나?》
《물론 나쁘지.》
《넌 중국말을 어데서 배웠니?》
《림강과 팔도구에서. 나는 거기에서 소학교를 2년동안 다니다가 평양으로 돌아가 다시 2년동안 소학교에서 공부하였어.》
《너 중국말을 아직 잘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중국에 온지 얼마 안되니까.》
《걱정말어. 내가 배워줘.》

그들은 즉시 좋은 벗이 되였다. 그후부터 김일성동지께서와 장울화는 함께 지내면서 떨어질줄 몰랐다.

<##IMAGE##> 수업시간에 그들은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 도와주었다. 장울화의 도움을 받아 김일성동지께서는 인차 중국말을 류창하게 할수 있게 되시였으며 무송지방의 일부 사투리와 토배기말까지도 할수 있게 되여 수업을 받고 공부를 하기가 훨씬 더 헐하게 되시였다. 방과후에 그들은 함께 놀았다.

장울화는 그 고장의 주인으로서 성의를 다하여 김일성동지께 버드나무 우거진 현성의 봄날의 이른 새벽, 붓꽂이처럼 생긴 산의 봄과 가을, 동산의 아침종소리, 저녁에 서강건느기, 련못에 비낀 달, 선인동의 안개, 제방뚝에서의 낚시질, 도시변두리에서 원경바라보기, 고리모양의 향강, 백산의 설경 등 무송현의 이름난 10대경치를 보여드리였다.

두 소년의 집은 언제나 그들의 회합장소였다.
매번 장울화가 김일성동지의 댁으로 가면 어머님이신 강반석녀사께서는 조선음식을 해먹이군 하시였다. 가늘면서도 쫄깃쫄깃한 오리긴 랭면, 그우에 색갈고운 국수꾸미를 놓고 맛좋은 국수물을 부어먹으면 그야말로 시원하고 별맛이였다. 백설같이 흰 찰떡을 네모로 잘게 썰어 달콤한 콩가루를 묻혀먹으면 그것 또한 별맛이였다. 또한 울긋불긋한 조선김치, 고추, 새하얀 도라지, 미끈미끈한 송이버섯… 장울화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 장울화의 집으로 가시면 장울화의 어머니 원몽린은 김일성동지께 수교즈를 빚어드리였다. 장씨집 수교즈는 덩이가 크고 껍질이 얇으며 밀가루가 보드랍고 수교즈소가 맛이 있어 소년 김일성동지께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60년세월이 흐른 후 장씨집 제4대후손들인 장유와 악지운이 조선에 가서 류학을 하고있을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설명절에 그 두아이를 특별히 금수산의사당에 오라고 하시고 그애들이 빚은 수교즈를 잡숫겠다고 하시였다.

여름이 되면 김일성동지께서는 장울화와 송화강가에 즐겨 놀러가시였다. 그들은 함께 개헤염, 누운헤염, 발헤염 등 여러가지 헤염도 치고 조선씨름도 하였는데 마치 강에서 이는 물보라와도 같이 즐거웠다. 때로는 낚시질도 하군 하였다. 그때는 강에 여러가지 물고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언제나 물고기를 많이 잡아오군 하였다. 때로는 강바닥의 돌들을 뒤지며 가재잡이도 하였다. 그 가재는 바다의 왕새우와 비슷한것인데 물에서 건져낼 때에는 진한 푸른색을 띠지만 강변에서 불에 구우면 새빨개지는데 그 껍질을 벗기고 가재살을 먹으면 그 맛이 그야말로 기막힐 정도였다.
때로 수영을 하다가 지치면 그들은 강변의 따뜻한 모래불에 드러누워 머리우로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울화는 김일성동지께서 하시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군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왜놈들이 가혹한 통치하에 시달리는 조선인민의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한 조선인민의 굴함없는 투쟁에 대하여 이야기하시였으며 자신께서 직접 목격하신 평양에서 있은 《3.1인민봉기》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평양에서 종소리가 울리였다.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것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그런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거리에 나가 시위행진을 진행하였다. 시위대오는 인차 수만명으로 늘어났다. 일본경찰들과 군대가 출동하여 탄압하였다. 군도로 치고 총을 쏘고 하여 평양거리는 피바다에 잠겼다. 조선인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붉은피와 목숨을 바쳤다. 그 붉은 피와 빼앗긴 생명은 소년 김일성동지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그때로부터 그이께서는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하려는 혁명적인 지향을 간직하게 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또한 장울화에게 《3.1인민봉기》와 관련한 애국적인 노래 《압록강의 노래》도 들려주시였다.

일천구백십구년 삼월 일일은
이 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년년이 이 날은 돌아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라

압록강의 푸른 물아 조국산천아
고향땅에 돌아갈 날 과연 언젤가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김일성동지께서 장울화와 함께 얼마나 많고 많은 밤들에 책을 보시였던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보라고 하신 책들을 장울화에게 소개해주시였다. 《조선의 위인》, 《조선영웅전》, 《로씨야혁명사와 레닌》등.

그들은 또한 당시 한창 류행되던 《공산당선언》, 《사회주의대의》, 《레닌의 생애》등 공산주의소책자들을 늘 함께 탐독하였다.

어드덧 두 소년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 소리없이 싹트게 되였다.
바로 그 기간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 두 소년은 남다른 우정을 맺게 되였다. 그것은 공통된 신앙의 확립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이 성격을 서로 받아들이고 보충하는것이기도 하였다.

소년 김일성동지는 영특하고 도량이 크며 성격이 쾌활하고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체험을 쌓으시였다.

바로 그와 같은 체험으로 하여 그이께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자신의 한생을 다 바치며 장차 큰일을 하겠다는 뜻을 간직하게 되시였다.

성격이 내성적이면서도 사람들을 뜨겁게 대하는 장울화는 김일성동지의 성격과 지향에 매혹되여 벌써 저도모르는 사이에 소년 김일성동지를 숭배하고 존경하게 되였다.
김일성동지와 장울화는 친형제와 같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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