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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2]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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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26 17:54 조회2,2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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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김일성주석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가 장렬하게 희생된 75돌을 맞은
해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 민족지도자를 위해 한 목숨 바쳤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김일성주석이 항일투쟁 당시 알게된 장울화에 얽힌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장울화열사의 장남 장금천은 그의
벗 려명휘를 통해 중국어로 《김일성과 장울화》를 발행했다. 이 도서는 동지적 사랑을 비롯하여 항일투쟁사,
북부조국이 걸어 온 길 그리고 김일성주석의 폭넓은 인간미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서이다. 민족통신은
이 도서의 우리말 번역판이 북의 외국문출판사에서 발행한 것을 발견하고 이 도서에 게재한 내용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기로 하고 그 첫 이야기에 이어 두번째 글을 번역된 원문 그대로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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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2]

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주석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관심을 모아 왔던 중국인 장울화열사는 북녘동포들 누구에게나 알려져 온 인물이다. 장울화열사 가정은 5대에 걸쳐 북부조국과 인연을 맺고 지금도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 가족들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왔다. 이번에는 이 가정에서 출판한 도서 《김일성과 장울화》의 두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1. 어린 시절의 동창


《불우한 망국소년 김성주와 대부호의 아들 장울화의 동석공부, 어찌보면 력사의 장난같기도 한 이 파격적인 결합속에서 우리의 류례없는 우정이 싹트고 개화하였다는것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을것이다. 하지만 함께라는 그 조건부속에 우리 우정의 출발점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나와 장울화의 우정은 나의 아버지 김형직과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의 친교에 그 출발점을 두고있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1


중국, 동북, 장백산.
여기서 말하는 장백산이란 오랜 세월 화산이 분출되여 형성된 거대한 화산원추체-장백산줄기전반을 이끄는 해발 2 750m의 장백산(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백두산이라고 한다.-역주)주봉을 말한다.

장백산은 원래 하나의 적막한 큰 산이였다.
만청왕조가 그것을 조상들의 발상지로 간주하면서 《성산》으로 봉하였다.
그 풍수좋은 곳을 보호가기 위하여 청나라 강희16년(1677년-역주)에 어지를 내려 《흥경(오늘의 신빈현)동쪽, 이통주(오늘의 이통현)이남, 두만강이북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면서 군대를 파견하여 파수를 세웠다.

뿐만아니라 버들가지들로 울타리를 치고 제왕들만 거기에 들어가 멀리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고 백성들이 거기에 들어가 사냥을 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봉쇄로 하여 원시림이 형성되였다.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장백산에는 인적기가 없었다. 원시림속에 재부가 형성되였다.
기름진 땅들이 묵어있었고 이름있는 약재들과 진귀한 풀들이 키돋움하며 자랐고 진귀한 산짐승들이 마구 번식하였다. 재부는 유혹을 자아내기마련이다.

적지 않은 주변인민들이 목숨을 내걸고 산으로 들어가 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잡았으며 몰래 황무지를 개간하고 사금도 채취하고 약초와 인삼도 캐고 벌목도 하였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지배권이 쇠퇴되면서 봉쇄가 늦추어졌다.

광서 4년(1878년-역주)에 성경장군이 청나라 조정에 상주하여 봉쇄를 취소함으로써 보다 많은 주변인민들이 장백산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장백산지구의 원시림속의 여기저기에 차츰 인가들과 마을들, 도시들이 생겨나게 되였다.

장백산아래의 두도송화강일대에도 이런 식으로 점차 인가들이 들어앉게 되였다. 처음에는 20~30호의 사냥군세대와 인삼재배농가들이 송화강 동쪽강안에 드문드문 널려있었다. 설명절때에는 명절을 즐겁게 보내기 위하여 어른들은 수교즈를 빚어 가마에 넣어 끓이기 전에 아이들을 시켜 길가에 나가있다가 지나가는 길손이 있으면 집에 데리고와서 수교즈를 함께 먹도록 하였다.

후날 산동에서 수많은 이민들이 쓸어들자 이곳은 목재와 토산물, 특산물의 집산지로 되였다.
많은 토산물과 특산물들이 림강, 영구, 대련, 천진, 상해 등지로 실려갔으며 거기에는 점차 작은 도시가 형성되였다.

그 작은 도시의 남쪽과 북쪽에 두개의 대전자 (큰 물판)가 있은것으로 하여 쌍전자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청나라 광서33년 (1907년-역주) 에 쌍전자는 길림 몽강주의 관할지역으로 되고 선통원년(1909년-역주) 12월 6일에는 현을 내오고 쌍전현이라고 불렀다.

선통2년(1910년-역주) 7월 19일에 무송현으로 개칭되여 봉천지방장관의 관할하에 속하게 되였다.
중화민국이 설 때(1912년-역주)에는 봉천동변도에 속하였고 중화민국 2년(1913년-역주)에는 현관청이 현공서로 고쳐졌다.

1920년대초에는 무송현성에 약 3, 000호의 인가가 살았다.
1924년 12월 무송현에서 당시로서는 극히 범상한 일이였지만 후날에는 세상을 놀래우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그것으로 하여 무송현은 수십년후에 변강지대의 이름있는 현성으로 되였다.

무송현성에 조선사람 한분이 오신것이다.

당시 무송현에는 이미 적지 않은 조선이민들이 살고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박하여 《을사5조약》을 조작함으로써 조선은 주권국가로부터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1907년 8월 1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리조정부의 군대를 강제적으로 해산시키고 조선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조선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이와 같은 강도적인 행위는 조선군민의 강한 반항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은 민족적독립을 위하여 일제와의 결사적인 투쟁을 벌렸다.

하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하여 투쟁은 여러차례에 걸쳐 실패하고 조선국내에서의 폭압통치는 더욱더 가혹해졌다.

하여 수많은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이 중국 동북지방의 장백산지구로 옮겨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에 이르러 두만강과 압록강이북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의 수는 근 20만명이나 되였다.

당시 무송현성과 대영, 만강 등 농촌들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왔다.
1924년 12월 어느날 무송현성에 오신 그 조선사람이 바로 저명한 독립운동지도자이시며 24년후에 탄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수령이신 김일성동지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이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1894년 7월 10일 평양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였다.

<##IMAGE##> 선생님의 할아버님께서는 만경대의 산당지기로서 가정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아버님이신 김보현선생님과 어머님이신 리보익녀사는 모두 농사일을 하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맏아드님으로서 어려서부터 서당공부를 하시였다.

집안에서는 아껴쓰고 아껴먹으면서 1911년 봄에 그분을 평양숭실중학교에 보내시였다. 재학기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 대한 일본당국의 학대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시였고 방학기간에는 안주, 강동, 순안 등지로 편답하시면서 군중계몽활동을 벌리시였다.

그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만경대의 순화학교 그다음은 봉화리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였다.

1917년 3월 23일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뜻있는 청년들과 함께 혈서로 맹약하시고 반일비밀조직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시였으며 조선국내와 중국의 여러 도시들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하시였다.
같은 해 가을 일본경찰들은 김형직선생님을 체포하여 그이께 강압적으로 형을 들씌웠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옥중에서 적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시면서도 절대로 굴하지 않으시였다.

1918년 가을 감옥에서 출옥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계속 민족독립활동을 전개하시였으며 선진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시였다.

일본특무놈들의 요시찰명단에 올라있은것으로 하여 더는 조선한복판에서 활동할수 없게 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하는수없이 북부국경일대로 자리를 옮기시였다.

그이께서는 중강으로 가시였으나 일본경찰들의 계속되는 추적으로 하는수없이 압록강건너 중국 길림성변강지대 작은 도시 림강으로 가시였다.

일본경찰놈들이 사복경찰을 내몰아 도강하여 체포하려 하자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또다시 집안식솔을 데리고 팔도구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시였다.

조선주재 일본총독부는 또다시 밀정들을 팔도구대안의 포평에 파견하여 김형직선생님께서 도강하여 활동을 전개하시는 기회에 그이를 체포하였다.

신의주로 호송되여 가시던 도중 황선생의 도움으로 탈출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압록강 조선쪽강기슭의 산속에서 며칠동안 몸을 피해있다가 다시 압록강을 건느시여 조선독립군 중대장 장철호가 파견한 두명의 대원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무송을 향해 떠나시였다.

그런데 도중 그이께서는 만강경내에서 또다시 토비놈들에게 붙잡히시였다.
그들 셋은 토비놈들이 아편을 피우고 잠든 틈에 포승을 풀고 놈들을 해치운 다음 무송현성으로 갔다. 그때 김형직선생님께서는 30살이시였다.

름름한 몸매, 길쑴한 얼굴, 동방사람으로서는 보기드문 높은 코마루, 억센 아래턱, 그야말로 미남자이시였다.

그이의 두눈에서는 지혜와 재능이 넘쳐나고있었다.
다만 머나먼 로정을 달려온 피로가 얼굴에 어리여있었을뿐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집을 팔도구에서 무송현성으로 옮겨오려고 생각하시였다.
집에는 강반석녀사와 큰아드님이신 김성주동지(김일성동지), 둘째 김철주동지, 셋째 김영주동지가 계시였다.

현정부에서는 김형직선생님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거주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때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너무도 지치시였다. 련일 여기저기로 분망하게 오가신것으로 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시였던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극히 필요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자인 최경민에게 도움을 요청하시였다.
비교적 오래전에 무송으로 온 최경민은 어느 정도 사회활동능력이 있었다.
최경민은 김형직선생님께 그곳의 부유한 상인인 장만정(1927년에 상회 부회장, 회장으로 선거되였다.)이 현장과 교섭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당시 장만정이 앓고있었는데 의술이 높은 김형직선생님께서 그의 병을 봐주면서 기회를 보다가 거주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자는것이였다. 장만정의 집으로 가시던 길에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무송현성거리쪽에 있는 크고작은 상점들의 간판에 매우 큰 흥미를 가지시였다.

그 간판들의 모양과 이름은 비록 천태만상이지만 글씨체만은 한사람의것이였다.
그 글씨체가 매우 독특하였다.

글씨들이 가늘면서도 힘이 있고 규칙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보였다.
그것을 쓴 사람의 솜씨가 대단하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비록 조선사람이기는 하지만 어리실 때부터 한문공부를 많이 하시였고 특히 서예에 능하시였다.

《이 간판들은 누가 쓴것입니까?》

김형직선생님께서 최경민에게 물으시였다.
《그것은 모두 장만정의 필적입니다.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그 부유한 상인말입니다.》
《아, 신통하군요. 보건대 장만정은 난 사람이구만요.》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다면야 내가 왜 선생님을 그리로 모셔가겠습니까. 장만정이란 사람은…》
최경민은 걸어가면서 김형직선생님께 장만정에 대하여 소개해드렸다.

장만정은 자는 붕구로서 1889년에 산동성 제성현(현재의 교남시)채가촌에서 태여났다.

장만정의 아버지는 서당훈장이였다.

산동에 기근이 들어 살아갈수 없게 되자 1899년에 관내에서 나와 동북지방의 무송현으로 왔다.

1913년에 통화현 열수하자에 가서 좀 살다가 1914년에 다시 무송현으로 이사와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당에서 공부를 한 장만정은 지식도 있고 머리도 좋았으며 또 일에서 몸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전병(종이장같이 얇게 지지는 지짐-역주), 순두부같은 소소한 장사를 하면서 이거리저거리를 다니였다. 어느 정도 축적이 생긴 다음에는 몇사람이 합영하는 《천성영》이라는 잡화점을 내왔는데 장만정이 책임자노릇을 하였다.

당시 무송현성의 다른 상가들이 등록한 자금은 많아서 몇백원이고 천원이상은 얼마 없었는데 《천성영》이 등록한 자금은 무려 7, 500원으로서 실로 큰 상가였다. 장만정은 가정이 부유하고 사람됨도 정직하여 개명한 신사에 속하였다.

당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일본놈들이 림강에 령사관을 설치하는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장만정을 비롯한 개명한 신사들이 그것을 지지성원하였다. 사람이 선량하고 가난한 가정출신인 장만정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초를 잘 헤아려 언제나 그들을 도와주고 마을사람들의 복리를 도모해줌으로써 무송에서 평판이 자자하였다. 그때 그는 이미 무송현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여있었다.…
그들은 말하는 사이에 어느덧 장만정의 집에 도착하였다.
장씨집은 하나의 큰 뜨락에 본채, 사랑채를 가진 도합 열두칸짜리 집이였다. 흙담벽에 검은 색갈의 작은 기와들을 씌웠다. 본채가 여섯칸이고 부엌은 가운데 있었으며 부엌 동쪽에 있는 방이 장만정내외가 식사도 하고 생활하는 방이고 그 안방이 장만정부부의 침실이였다.

부엌 서쪽에 있는 3개의 방들이 차례로 맏아들 장울중, 둘째 아들 장울화, 셋째 아들 장울민이 사는 방이였다. 동쪽사랑채의 세칸은 림시로 일부 타고장에서 이사온 사람들에게 세방으로 내주었다. 서쪽 사랑채의 세칸은 창고와 방아간이였다. 본채 맞은켠은 강냉이창자였고 그아래에는 짐승우리가 있었다.

장씨집 큰 뜨락은 화려하게 꾸려지지 못하였다. 장만정은 다년간 간고분투하면서 부지런하고 검박한 생활에 습관되였다. 집안사람들은 아주 검박하게 생활하였다. 옷도 광목천옷을 입었고 식사도 간소하게 하였으며 설날이나 되여야 새옷을 갈아입고 고기와 물고기를 맛볼수 있었다.

평상시 식사할 때에는 장만정내외와 세 아들이 안방에서 식사를 하고 상점점원들과 손자, 손녀들은 모두 부엌에서 식사를 하였다.

며느리들은 밥을 짓고 망질을 하고 전병을 지지군 하였다. …
장만정은 자기 집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땅을 샀으며 몇명의 농군을 고용하였다.
《땅은 내것이지만 농사는 당신들이 짓고 가을에 수확물은 똑같이 나누어먹자.》
장만정은 농민형의 부자 혹은 부자형의 농민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는 또한 점장식의 점원 혹은 점원식의 점장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복잡하게 말할것없이 장만정은 그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장만정이다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가난할 때 부자가 되려고 하였고 부자가 된 다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 가난할 때에도 부자가 된 다음에도 언제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사상관점과 도덕행동에서 중화민국시대의 력사적제한성을 가지고있는 그런 인간이였다.

최경민은 김형직선생님을 모시고 장만정의 집으로 들어갔으며 안방에서 그를 만났다. 장만정은 당년 35살로서 중간키의 전형적인 산동사나이였다.
몸이 날 나이였지만 의연 매우 단단하였다.

넓은 얼굴, 곧은 코마루, 큰 입, 단정한 눈섭, 인정미가 넘치는 두눈, 한마디로 지혜가 있어보였다.

그의 옆에는 나이가 그와 비슷한 한 녀인이 있었는데 그는 머리뒤에 낭자를 틀어올리였고 발은 쪽발이였으며 이마에는 부항을 붙인 보라색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장만정의 부인 원몽린 (1893년 길림성 통화현에서 태여났다.)이였다.
최경민이 소개를 하였다. 장만정은 아주 겸손하게 손님을 식탁으로 안내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차를 드시면서 장만정의 집안을 둘러보시였다.

상인의 집으로서는 퍽 검소해보였다. 벽에는 간단한 필치로 주제사상을 뚜렷이 표현한 매화, 란초 국화 등 그림족자가 걸려있었고 창문우에는 당나라시기의 해서체로 위나라시기의 맛도 나게 《편안한 집》이라고 가로 쓴 서예품이 붙어있었다.

그 필적이 거리량쪽에 나붙은 간판들과 같은것으로서 장만정이 쓴것이였다.
큰 식탁우에는 붓, 먹, 종이, 벼루같은것들과 먹즙이 아직 마르지 않은 작은 해서체로 쓴 몇장의 종이가 놓여있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장만정을 진찰하기 시작하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평양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실 때 의사인 왕고모부 김승현의 집에서 의학공부를 하시였으며 옥중에서도 많은 의학서적을 보시였다.
출옥후 왕고모부집에서 상처를 치료하시면서 의학공부를 계속하여 의사가 되시였으며 의술 또한 대단히 높으시였다.

조선독립운동에 투신하시면서도 의사라는 직업으로 위장하시고 줄곧 쉬임없이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시였다.

《장선생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병이 별로 큰것이 아닙니다.
다만 겨울이 다가왔으니 감기에 걸렸을뿐입니다.
내가 약처방을 써드리겠으니 약을 쓰면 곧 나을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식탁우의 붓을 드시여 약처방을 쓰기 시작하시였다.
약처방을 받아든 그 중국상인 장만정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김형직선생님께서 무슨 묘한 약처방을 써주셨기때문이 아니라 약처방에 씌여진 그 멋있고 활달한 한문글체때문이였다.

장만정은 글씨를 그처럼 잘 쓰는 조선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는 서예에 조예가 깊은 훌륭한 벗을 만나게 된셈이였다.
《김선생님의 필치가 대단하십니다.》
《장선생님이 과찬하시는군요. 나는 다만 붓글씨를 쓰기 좋아할 따름입니다.》
《김선생님께서 붓글씨를 하나 써주셨으면 하는데 선생님께서 수락하시겠는지요?》
《뭐 힘들게 있습니까.》

장만정은 재빨리 큰 식탁우에 종이를 펴놓았다.
붓을 드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먹즙을 듬뿍 찍어가지고 팔굽을 드시고 팔목을 놀려 활달한 글씨체로 힘있는 두 글자를 큼직하게 쓰시였다.

《지원》

<##IMAGE##> 《지원》, 문자그대로 그것은 곧 큰 뜻을 품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김형직선생님의 좌우명이다.
조선에 있는 선생님의 댁과 그이께서 교편을 잡으시였던 순화학교와 명신학교에도 모두 《지원》이라는 큰 두 글자가 걸려있었는데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밝히신것이다.
붓을 놓으시였다.

《장선생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만정은 그 큼직한 두 글체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천근무게로 붓을 대니 글체에 기백이 넘쳐나고 모나면서도 동실하고 모난것과 동실한것이 잘 어울리고 억세면서도 부드러웠다. 위나라시기 비석조각의 풍채가 있으면서도 독특한 맛이 있었다.
《훌륭합니다! 대단합니다!》

장만정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사람이 한자를 이렇게 잘 쓰다니,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장선생님도 서예에 대한 조예가 아주 깊습니다. 거리에 있는 상점간판들을 보고 잘 알게 되였습니다.》

장만정은 겸손하게 《그것은 식사후 여가에 심심풀이로 쓴것에 지나지 않은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두분의 서예가들은 서예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경민은 이야기짬을 보아가다가 찾아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장만정은 두말없이 수락하였다. 뿐만아니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중조 두 나라는 산과 강이 잇닿아있고 순치관계에 있는 우방입니다. 자고로 두 나라 인민들은 함께 왜놈들을 맞받아싸운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일본놈들이 조선을 삼키고나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있었습니다. 그 <사마소>(3세기 위나라 대장군으로 왕을 죽였다.ㅡ역주)의 빤한 속심을 길가는 사람도 다 알고있습니다.》

장만정은 그 이튿날에 곧 무송현공서를 찾아갔다.
현공서는 무송현성 십자거리의 동남쪽모퉁이에 있었는데 동쪽은 현상회와 이웃하고있었고 남쪽은 현인삼회와 마주하고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경찰서가 마주보였다. 그리고 북쪽은 동대거리와 잇닿아있는 대문을 세개나 거쳐야 하는 큰 건물이였다. 첫번째 대문밖에는 하나의 큰 가림담벽이 있었고 그 량쪽에는 접수실과 위병실이 있었다. 첫번째 대문안에 들어서면 바깥뜨락이 있는데 그 동쪽별채에는 세무국, 필사실 등이 있었다. 서쪽별채에는 재정국과 심문대기실, 위병실이 있었다. 다시 두번째 대문으로 들어가면 중간뜨락이 있는데 뜨락의 동쪽채에는 응접실, 사무실, 문건접수실이 있었다. 서쪽채에는 필사실, 접수실, 창고가 있었다.

본채에는 현정부가 자리잡고있는데 동쪽은 사무실이고 서쪽에는 재판소가 자리잡고있었다. 뒤뜨락에 현장실, 과장실, 그리고 재판실이 있었다. 현공서의 건물은 모두 푸른 벽돌집에 비늘무늬기와를 씌웠으므로 고색이 창연하였다.

장만정은 현공서에게 현장 류천성을 만났다.
류천성의 자는 정탁으로서 하남성 상성사람이였다. 그는 중화민국11년(1922년-역주)에 현장으로 부임되여왔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무송으로 오시였을 때에는 류천성이 방금 부임된 뒤였다.
둘은 무송현 상층인물들로서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던것만큼 장만정은 별로 에돌지 않고 곧바로 현장이 조선사람인 김형직선생님의 거주승인을 비준하여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류천성이 난감해하면서 말하였다.

《붕구형님, 내가 그 조선사람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것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압력이 너무나도 크기때문이요. 일부 형편에 대해서는 당신도 알고있겠지만 조선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이민들속에는 독립운동자들이 많소. 그들은 장백산줄기 깊은 밀림속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국경을 넘어가 일본군을 불의에 치고는 다시 재빨리 중국경내로 철수하군 하오. 조선주둔 일본군이 포위토벌하려고 하여도 국경을 넘어와 군사행동을 하는것은 두 나라사이의 관계와 관련되는것만큼 일본당국은 봉천의 최고통수자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그가 조선독립운동자들이 장백산지구로 옮겨오는것을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소. 일본사람들에게서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장작림최고통수자는 조선이민들을 엄격히 통제할데 대하여 이미 각급 정부들에 명령을 내렸소. 지금 일본사람들의 세력이 벌써 동북전반에 침투되였소. 여러 큰 도시들에 령사관들이 설치되였고 최근에는 또 우리 무송에서 멀지 않은 림강에도 령사관이 설치되였소. 귀가 밝은 일본사람들은 일단 무슨 움직임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봉천의 최고통수부에 압력을 가하고있소. 봉천에서 나에게 트집을 걸면 내가 어찌 감당해낼수 있겠소.》

《아마 한 보통조선사람이 거주하려고 한다면 정탁형은 이처럼 신중하지는 않겠지요?》
류천성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하였다.
《김형직은 평범한 조선사람이 아니요. 들은바에 의하면 그는 조선의 직업적인 혁명가로서 전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있다고 하오.》

정면으로 말하여서는 류현장의 마음을 움직일수 없을것으로 본 장만정은 측면으로 우회하면서 말하였다.

《류현장이 인정미가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무송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현장이 무송에 온 후로 사업에 열중하면서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제1학교와 녀학교를 위해 의연금을 모아 교사를 지어주었으며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백성들을 위하여 상급에 재해구제를 요청하였지요. 그와 같은 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우리 현민들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고있지요.… 오늘에 와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한 조선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류현장답지 않지요.》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류천성은 마음이 좀 동하기 시작하였다.
장만정은 말을 계속하였다.

《하물며 김형직선생님은 결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는 의술에 능하여 나의 병을 보았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병이 씻은듯이 나았지요. 그처럼 재능있는 조선사람을 우리 현에 남겨두면 차후 우리 현민중에게도 좋을것이구요.…》
《나는 일본사람들이 시끄럽게 굴가봐 걱정스러워 그러는거요.》

일본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장만정은 음성을 높였다.
《타지방에서 온 사람을 거주시키는것은 당당한 중화민국 현정부의 직권범위내에 속하는 문제인데 일본사람들이 무슨 권리가 있어 그에 간섭한단 말이요? 지금 동북을 강점하려는 일본사람들의 의도가 더욱더 뚜렷해지고있지요. 만약 언제인가 당신이나 내가 집없는 류랑자로 된다면 김형직선생님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지 않겠소?》

장만정은 어조를 낮추면서 계속하였다.
《그리고 일본령사관이 림강에 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게 하면 별일이 없을것이 아니요.》

장만정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류천성은 부유한 상인인 장만정이 다음번 상회선거에서 부회장으로 당선될수 있고 무송지방에서 그가 세력이 있는 인물이라는것을 고려하여 타지방에서 온 자신이 이 지방부자들과의 관계를 잘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김형직선생님께서 무송에 거주하는데 동의하였다.

장만정이 그 결과에 대하여 김형직선생님께 알려드리자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장만정의 손을 잡으시고 《당신은 나의 중국은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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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보기-- 조선의 별(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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