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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전 대법원 판사 인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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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14-02-06 23:56 조회1,56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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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전 대법원 판사 인권철학(펌)

한반도일보 

김홍섭 대법원 판사는 고무신을 신고 골덴 바지 차림이나 물감 들인 군복을 입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대법원에 출근했습니다. 법원 마크가 달린 관용차를 타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대법원 판사는 몇 명되지 않은 시절 이였습니다.
 
그만큼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여덟 자매를 공부시키고 ‘사형수의 아버지’로서 죄수들을 위한 종교서적을 사는데 그의 월급을 거의 써 버렸습니다. 그러니 점심 한 끼 사먹지 못하고 날마다 단무지 반찬의 도시락을 들고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16세 지적장애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 대상자가 집행유예 된 사건을 두고 판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등 논란이 되고 있다. 법사위에 대한 국정감사 기간 중 검찰, 대법원의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국회의원들은 ‘왜 그냥 놔두냐’는 말을 한다.
 
한 고소인이 대법관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체포조가 결성돼 6개월간 수사를 펼쳤다는 얘기 등 ‘법의 공정성’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재판취재를 할라치면 부장판사가 들어설 때 참관인들에게 “모두 일어서세요”라는 구령에 따라 자리에 일어섰다 앉게 하는 것을 보면 아직 ‘사법부의 권위’(?)는 자못 살아있는가 싶다.
 
월간 투데이로우를 창간하면서 ‘이 시대의 변호사’의 코너를 맡아 취재를 하려고 했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판단은 주관적이어서, 대상자를 선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한 시대에 존경받았던 법조인이 있었을까. 그러던 차에 1965년 임종한 지 43년이 되었지만, 법을 공부하는 이에게, 또 종교인이 되려는 이에게, 여러 소시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김홍섭 판사(1915-1965)를 찾았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표현한다.
 
‘고무신을 신고, 군복물 들인 옷에 도시락을 옆에 끼고 법원에 출근할 정도로 검소한 사도법관’- 수많은 일화들과 철학이 여전히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깨운다.
 
김홍섭 판사는 1915년 전북 김제군 원평,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원평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점 점원으로 일을 하다가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어 해방되던 해, 1945년 10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했다가 1946년 2월 판사로 자리를 옮겨 서울고등법원 판사 및 부장판사, 광주고등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내 자신이 법률이란 이름으로 과연 남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남을 단죄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안목과 지식, 인간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기초한 재판철학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지' '재판은 어떤 근거에 의하여 하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본인에게 던지며, 재판하기 전 공정한 재판이 되길 기원했다.그는 판결 후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덕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을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이 정도로 인간적으로 대하니 참석한 피고인과 가족들도 김홍섭 판사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재판에 임하는지 피부로 느끼며 감명했다’고 한다.
 
판사의 판결에 따라 어떻게 보면, 사람의 생명 줄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인간이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늘 신중했다. 그래서 관련 일화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사형수와의 대화이다.
 
판사였던 김홍섭은 어느 해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만난다. 김 판사는 정말 불가피하게 그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며칠 후 감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를 찾아가서,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으나, 법률이 정한 원칙에 따라 불가피하게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며 사형수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하루는 타고 있던 버스가 불심검문을 받았다. 고무신에 허름한 복장을 한 김 판사 앞에 이른 경찰관이 다짜고짜로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판사입니다.” “판사는 무슨 판사야? 신분증 내놓아”하고 경찰관이 소리쳤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신분증을 꺼내 공손히 내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그러지 뭐라고 하겠습니까?”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신분증에서 대법원 판사임을 알아본 경관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직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때면 김홍섭 판사의 ‘청백리’를 떠올리며, 비교한다.1965년 3월16일 임종 시에는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던 장기수와 사형수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라고 표현했다.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 지니라" 묘지빗돌에는 이와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의지할 데 없는 사형수들의 묘를 세워주었는데, 바로 김홍섭 판사도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천주교회이다.
 
“그들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이었다.김홍섭 판사의 임종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문하며 ‘한국의 사도 법관’, ‘한국 법조인의 기둥’, ‘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법관’ 등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판사님을 아버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더 사셔야 할 분인데 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살지 말라고 일직 데려가신 것만 같습니다'라는 사형수들의 편지글들이 셀 수없이 전해졌다고 한다.이와 같은 행보에 많은 법조인들이 김홍섭을 그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정도를 걷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회고한다.
 
어수선한 세상살이 속에 법조계 또한 국민들의 불신과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 김홍섭 같은 선자가 있는 것은 영원히 기억할만한 자랑스러움이라고. 친구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김 판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술회했다.대법원은 법원조직법이 공포된 1949년 9월26일을 대한민국 사법창립일로 기념하여, 올해가 대한민국 사법 60주년 이란다. 대한민국 사법 60주년을 뒤로 하고 내년부터는 거슬러 가는 역사의 인물을 찾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에 김홍섭 판사의 뒤를 잇는 제2의 사도법관이 나오기를 진정 기대한다.

또한 법이 인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법위에 있음을 일깨우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에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소신,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 그리고 재물에 연연해하지 않는 김홍섭 판사의 삶의 청빈함 등은 법조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깨우쳐야 할 진리라는 생각이다. 김홍섭 판사는 그가 지은 시「불혹」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조용히 전하고 있다.

-길이면 모든 길이 남이 간다 따를 것이 대도라고 방심 말고, 협로라고 가릴 탓을 사람이 제간다 하여 저만 옳다 하더라. 천만 길 있다 하되 취할 길은 오직 하나 그 하나 찾자하되 이렁저렁 금일이라 이제서 돌아다보니 그도 한낱 길이네. 본시 길이 없었거니 가고 보면 그게 길을 길 물어 반 세월에 깨고 나니 허송이라 이후 길이니 묻고 앞만 살펴 가리라.-

-기본인권은 법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는 것이 법관으로서의 기본신조이다.                      - 1960.11.13 일기


기사입력: 2014/02/04 [21:55]  최종편집: ⓒ 한반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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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이런 법관님이 한국땅에도 있었군요.
우리 조선땅에 -  중국땅에 노자, 공자, 맹자, 장자들 못지 않는 대 사상가님들인 정도전, 김시습, 최한기 같은 분들도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김구, 김일성 등등 절세의 애국자님들이 참 많았다. 
오늘에 한국땅에서 절세의 애국자님들은 꿈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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