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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는 민족투쟁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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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태영/최인 작성일13-12-05 13:18 조회2,1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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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는 민족투쟁의 역사이다. 민족투쟁에 있어서 가장 요구되는 요소가 3가지다.
(1)인화단결, (2)자주자존의 민족의식, (3)우수한 무기 등이 그것이다. 한국사가 민족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긍정하면 한국의 문화사상이 인화단결을 이룩하는 인간사상, 자주 자존의 민족의식을 북치는
천민사상 (天民思想), 우수한 무기를 발명하는 중물사상 등 3대사상으로 발전한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고려가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40여 년간 몽골에 저항한 힘도 바로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 등
3대사상이었다. 이는 한민족의 생명이요 불멸의 역사를 창조한 진리이며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외적
보다 내적(內賊)이 문제다.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도 외적에 앞서 내적이 문제되고 있다. 3대 사상은
우리 민족적 자존심, 민족적 자주성을 북돋았다. 이에 민족의식이 환기되고 용기와 인내력이 발휘되어
외적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민족 불멸의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을 시조로 한 사대사가
(事大史家)들이 이들 사상을 지우고 딴 민족에 예속된 이단적 역사를 위조했다. 우리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가 이러한 사대주의자들인 내적(內賊)에 의해 망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한국역사를 중단케 하고 파멸케 한 자들이다.
 
한국사는 위대한 한국사상에 의해 창조되고 사대주의자들의 외래사상에 의해 파멸됐다. 한국역사를
창조한 시기는 상고시대로 부터 단군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다. 조선의 시대는 사대주의 병에 걸린
대중화주의자(大中華主義者)들에 의해 중국의 시녀노릇을 했다. 이때는 예(禮)만을 중시하고 무(무(武)
를 경시해 병자호란에 당하고 일본의 야만적인 무력·불법의 경술합병에 이르게 했다. 이로써 우리역사
는 만신창이 되고 말았다. 삼국시대에 유(儒), 불(佛) 사상이 수입됐으나 고려조 까지는 한국사상이요
외래사상이 아니다. 부여, 삼국시대 이전은 유(儒), 불(佛) 등 외래사상이 수입되지 않았기에 한국사상
이 전체적이다. 삼국시대에 비로소 유, 불 사상이 수입됐으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까지도 한국사상이
주체적이었다. 그 실증을 든다면 유교는 효(孝)가 본(本)이라 해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喪)을 가장
중시한다. 그런데 위략집본(魏略輯本, 卷 二十一, 夫餘條, 高麗條,)에 보면 부여는 다섯 달 상(喪)을 입
는다하고, 고구려는 고유한 백일 상(喪)을 입는다고 했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유교의 3년 상(喪)을 입지
않고 고유한 백일 상(喪)을 입었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가장 발전한 때가 그 말기 정몽주(鄭夢周)시대다.
그런데 고려사에 정몽주 당시에 상류계급도 고유한 백일 상(喪)을 입는다고 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사상은 한국사상이 주체요 유교가 발전치 못한 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유한 산악사상(山岳思想) 장려
 
불교가 가장 왕성한 때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였다. 신라시대에 불교를 주도한 자는 원효대사(元曉大師)
와 원광법사(圓光法師)이다. 그런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속인화(俗人化)한 것은 한국화(韓國化)한 것이다.
즉, 한국풍속화(韓國風俗化)한 것이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불교의 십계(十戒)를 선전하지 않고 화랑
(花郞)의 오계(五戒)를 가르쳤다.
 



 ▲ 국내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우고 그림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일반적으로 모시고 있다. 한민족은 천신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고 자처해 천신(天神)을 존중했다. 따라서 사천왕(四天王)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것 외에도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는 수호신의 신앙적 상징이다. 사진은 대구 동화사 내의 사천왕상 전경. ⓒ스카이데일리

고려시대에는 고유한 산악사상(山岳思想)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불교를 장려했다. 고려사 태조 훈요
(訓要 第2條)에 ‘모든 절은 도선(道詵)의 산천설(山川說)을 따라서 세우라’고 했다. 고려사, 절요(節要)
에는 문종(文宗) 9~10월條에 왕건태조(王建太祖)가 산천의 위배(違背)를 진압하기 위하여 불교의 절
(寺刹)을 세웠다고 했다. 역대 임금(帝王)은 왕건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산악사상을 위반하고 세운 절
을 철거했다고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中篇)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고려말기 공민왕(恭愍王)
시대는 민족의식이 소침(銷沈)되고 불교가 왕성했다. 그런데 그 당시 명승인 나옹화상(懶翁和尙)은
중흥조풍 복국우세(重興祖風 福國祐世)의 업적이 있다고 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列傳 第十九,
東國輿地勝覽(卷 三, 漢陽府)에 보면 공민왕(恭愍王) 시대의 불교를 주도한 현승(賢僧) 보우(普愚)가
삼각산(三角山)에 거주하면서 한양에 국도를 정하면 36국이 한국에 조공(朝貢)한다는 고유한 산악사상
을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조에 와서 유교의 주자학파(朱子學派)들은 사대주의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 사상으로
국가와 민족을 그르치게 했다. 그것 때문에 한국은 식민사관과 외래사상에 구걸하는 망국적 병폐로
나라마저 잃는 비극을 맞게 했다. 국제적 흐름도 외면한 우물안 개구리의 갑론을박만을 일삼은 결과
국가와 민족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예(禮)를 숭상하며 무(武)를 키우지 않고 세계의 흐름을
외면한 결과 간사한 일제에 침략을 받았다. 그 원흉이 바로 대중화주의자(大中華主義)에 미친 주자학
파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류는 지금도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으며 건재하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찬란한 우리역사를 외면하고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거짓꾸민 역사로 찬란하고 위대한 한민족사
를 지금도 거짓꾸미고 있다. 결국 우리국민은 고조선의 영광도 알지 못한 채 식민사관의 역사만을
역사로 알고 있다.  거짓꾸민 역사가 우리 역사인양 받아들이고 식민사관의 망국적 작태가 그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날 의용(義勇)으로 가득 찼던 우리 선조들이 대륙을 지배한
진취적인 기상과 기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 한민족의 상고사 강역은 대륙이 중심임에도 이를 잊고 있다.
 
한국사는 민족투쟁 통해 문화사상 창조
 
우리역사는 한반도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대륙이 활동무대였다. 이제는 중국 대륙으로 이동해야 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백제, 신라의 생활무대가 중국의 넓은 대륙이었다. 대륙에 그 왕조의 왕릉과
선조들의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고대 한민족의 왕국이 대륙에 있었고 그 왕국의 왕릉과 역사유물이
대륙에 널려 있으므로 대륙의 장대한 우리역사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 고대국가들의 왕릉은 한반도가
아니라 거의 대륙에 있음에도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은 잘못이다.
 

 ▲ 고구려 광개토태왕 강역도. <이미지=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우리의 강역은 황하강, 양자강 유역을 포함한 길림성(吉林省), 요녕성(遼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뿐만
아니라 섬서성, 사천성(四川省), 청해성(靑海省)을 비롯해 멀리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까지 넓어진다.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는 중국 전역에 이른다. 고대는 이처럼 우리가 강대국으로 대륙을 지배했다.
고대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가 수, 당을 깨부쉈다. 이어 중세의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의 투쟁을
거쳐서 근세 일본과 항쟁하기까지 민족투쟁으로 일관해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왔다.
 
우리는 서구사회 처럼 대규모 농민전쟁이나 노예반란이 거의 없었다. 고려·조선시대에 귀족에 반항하는
노예들이 오히려 외적이 침입하면 합심·협력해 민족투쟁을 벌였다. 때문에 한국사는 민족투쟁의 역사이며,
민족투쟁으로 성장한 한(韓)민족은 그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사상을 창조했다. 이 같이 한민족의 민족투쟁
은 이소항대(以小抗大)의 전통을 계승했다. 즉, 역사상 한민족은 강토, 인구, 물자에 있어서 동등한 민족과
투쟁한 예가 없고 몇 배, 몇 십 배나 강대한 민족을 상대로 투쟁했다. 여기서 지지 않고 이긴 원인이 강토,
인구, 물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사상에 있었다. 정신무장, 사상무장에서 창안한 전략전술로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 민족투쟁을 살피는 것이 한민족의 문화사상을 찾는 방향이다. 역대 민족투쟁에 있
어서 가장 강열한 것이 고구려가 동양의 패자라 하는 수나라, 당나라를 깨부순 것이다. 이 같은 역사 속에
한민족의 문화사상이 녹아 있다. 수당(隨唐)을 깬 문화사상은 고려가 몽골에 저항한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고려가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에 저항한 것은 고구려가 수, 당을 깨버린 전통의 문화사상 전략·
전술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4대 황제인 홀필열(忽必烈)이 “고려는 당태종도 항복 받지 못한 민족
으로서 화(和)를 청함은 천의(天意)”라고 했을 정도다.
 
몽골군에 저항 저력, 한민족 사상이 바탕
 
몽골태조 징키스칸(Chinggis Khan=成吉思汗)은 뛰어난 전략가다. 아울러 그는 부하에 대해 강철같이 엄격한
규율을 시행하고 몽골의 전통에 의한 군대조직을 꾸렸다. 징기스칸은 군대를 10인, 100인, 1000인의 부대로
나누고 각 부대에 유능한 지휘관을 임명해 내부조직을 강화했다. 동시에 이슬람(Islam)의 대상군(隊商軍)과
협력해 그들의 재정적 지원과 정보를 받음으로서 멸리걸(蔑里乞), 달조(韃靻), 내만(乃蠻), 극열(克烈) 등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다시 남러시아를 정복한 뒤 이어 서하(西夏=吐藩)를 무릎 꿇렸다. 징기스칸은 이 같은
제국의 토대를 닦은 뒤 출전 중 말에서 떨어져서 뇌를 다쳐 1227년에 진중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 태종(太宗)
이 금제국(金帝國)을 정복하고 그 손자 발도(拔都)가 대군을 거느리고 러시아를 짓밟고 유럽에 출정해 폴란드
를 정복했다. 또 독일에 침입해 1241년 Wahlstatt에서 폴란드 군과 독일무사단(獨逸武士團)의 연합군을 깨부수
고 다시 헝가리를 침략하던 중 1242년에 태종이 죽자 귀환 한 후 남러시아에 흠찰한(欽察汗)국을 세웠다.
 
몽골 제4대 홀필열(忽必烈) 시대에 송(宋)나라를 정복하고 인도(印度)를 빼고 아시아 대부분과 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동서의 사가들은 몽골제에 대해 전무후무한 대제국이라 불러 왔다.
이런 대제국(大帝國)이 고려를 정복하려고 3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침입했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고려가 능히
그 침략에 맞서고 강력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몽골과 강화가 되어도 삼별초군(三別抄軍)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투항하지 않고 항쟁을 계속했다.
 

 ▲ 고려가 송나라 수도에서 요나라와의 전쟁 승전파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몽골군을 맞아 싸운 고려군은 최우(崔瑀) 일가를 중심으로 한 무신(武臣)들이다. 그런데 그 무신들이 물러나고
문관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몽골에 화(和)를 청하니 홀필열(忽必烈)이 놀라면서 “천의(天意, 하늘의 뜻)”라고
말했다. 당시 몽골은 고려를 무력으로는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해 몽골의 왕녀를 고려 충열왕(忠烈王)에게 시집
보내는 우호정책을 취했다. 고려는 실제로 자주독립을 보전한 역사였다. 고려 역사에서는 이처럼 고구려의
문화사상과 전략전술을 엿 볼 수 있다. 신원사열전(新元史列傳, 第146 高麗)을 보면 몽골 황제 홀필열(忽必烈)
이 “천하에 군신(君臣), 인민, 사직(社稷)을 그대로 보전한 나라는 오직 고려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고려가 형식상 몽골을 섬긴 것이나 내실적인 자주독립을 보전 한 것을 증언한 것이다. 세계 천하무적의
몽골군에 저항하고 실제로 자주독립을 보전한 고려는 천하에 강대한 민족의 기상을 보여 준 것이다. 고려가
이처럼 강대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사대주의사가(事大主義 史家)는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불교의 힘
에 의해 몽골에 저항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견해다. 무아(無我), 무저항(無抵抗), 물질무시(物質無視)
의 원리를 믿고 산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현세를 잊어버리는 불교가 천하에 무적인 몽골군을 맞서 강하게 저항
할 수 있었겠는가? 사대사가(事大史家)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불교의 힘에 의하여 몽골군에 저항했다고 말하
는 것은 불교도 모르고 한국도 모르는 견해다. 이것은 고려사를 그릇되게 해석한데 원인이 있다.
 
절은 불교 말고 한국사상 수련장(修練場)
 
고려사에 중(僧), 승군(僧軍), 절(寺)을 많이 말하고 민족의식을 북친 팔관회(八關會)와 전통에서 발전한 연등
(燃燈)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사대사가들은 중(僧)을 불교의 중(僧)으로 해석하고 절을 불교를 믿는 곳으로
만 해석하고 팔관회(八關會)를 불교의 팔관재(八關齋=8개의 계명(戒名)로 해석했다. 또 연등(燃燈)을 불교의
의식으로 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僧)은 화랑이요, 절(寺)은 불교만을 신
앙하는 곳이 아니고 한국사상을 수련(修練)하는 곳이다. 또 팔관회(八關會)는 신선사상의 의식이요 연등(燃燈)
은 달을 숭배하는 전통을 발전시킨 의식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四)와 ‘삼국사기’(卷 四十七)에 보면 화랑
(花郞)을 중(僧)이라고 불렀다. 즉, 불교는 의무교육으로 실시한 일이 없으나 화랑 중(花郞 僧)의 교육은 고려가
온 국민에게 의무교육으로 실시했다. 북방 강대족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는 고려가 산속에 도피하는 불교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결사(決死) 투쟁하는 화랑도(花郞道) 정신이 요청됐기에 이를 온 국민에게 의무교육으로
실시한 것이다. 천하에 적이 없는 몽골군에 저항한 중(僧)은 불교 중(僧)이 아니고 분명히 화랑 중(花郞僧)이다.
이 화랑 중(花郞僧)이 거란(契丹)도 깨부수게 한 원동력이었다.
 

 ▲ 한국의 사찰 내에서는 산신각(山神閣)을 볼 수 있다. 이는 절(寺)이 불교만을 신앙하는 곳이 아니고 한국의 독자적인 사상을 수련하는 곳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화랑승(花郞僧)이다. 신라시대 원광법사는 세속적 경구인 임전무퇴 등 ‘세속오계’를 설파해 화랑의 상징이 됐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실용적 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사진은 대구 동화사 내의 산신각 전경. ⓒ스카이데일리

절(寺)은 불교만을 신앙하는 곳이 아니고 한국사상을 수련하는 곳이기에 화랑승(花郞僧)이라고 부른 것은
산사(山寺)에서 수련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가 큰 절에 가보면 반드시 산신각(山神閣)이 병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불교에 없는 산신각(山神閣)을 세운 것은 무엇인가? 이는 고려시대에 절(寺刹)에서 한국의 산악
사상을 신앙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경천사(敬天寺), 순천사(順天寺), 흥천사(興天寺)라는 명칭이 있다.
또 불교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천녕사(天寧寺), 천수사(天壽寺)라는 명칭이 있다.
 
천신을 존중하지 않는 불교가 경천(敬天), 순천(順天), 흥천(興天)이라는 천신(天神) 존중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한민족이 천신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고 자처해 천신(天神)을 존중했다. 따라서 경천사
(敬天寺), 순천사(順天寺), 흥천사(興天寺)는 경천(敬天), 순천(順天), 흥천(興天)이라는 천신사상(天神思想)
을 신앙한 것이다. 또한 고려사 신종(神宗) 6년 9월에 최충헌(崔忠獻)이 봉은사(奉恩寺)에서 태조진전(太祖
眞殿)에 제사했다고 했다. 이는 절에서 한국의 임금(帝王)을 경모(敬慕)했다는 기록이다. 또 문종(文宗) 15년
6월에 임금이 봉은사에 가서 공자(孔子)는 백왕의 스승(師)이라고 말하면서 재배(再拜)했다고 했다. 이는 절
에서 불교를 부정하는 유교를 신앙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같이 고려시대의 절에서는 불교만을 신앙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임금(帝王)을 신봉한 것이요, 도리어 불교를 반대하는 유교까지 신앙했던 것이다.
 
< 이 글은 최태영·최인 선생의 서책 일부를 참조하고 퍼왔읍니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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