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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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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13-11-29 07:32 조회4,073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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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이야기지만 또 한번 읽어보세요.

김현철칼럼 - 5. 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퍼옴)

김구등 항일 민족주의자, 진보세력 제거가 미국의 목적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3/11/28 [19:01]

미 프로리다  한겨레저널 김현철 칼럼리스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한국을 대 소련전선의 최전방 군사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친미파가 아닌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모든 국내 민족주의 민중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을 약화시킬 방안을 세운다. 오늘 날 미국이 부르짖고 있는 '세계화'(세계단일정부를 목표로 하는)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각 나라의 민족주의인 것이다. 애국자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가 미 CIC(방첩대) 요원이었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은 우선 친미파 군과 경찰을 양성하기 위해 일본에 충성했던 군과 경찰 등 친일파들을 재기용해서 초창기 대한민국 군-경 지도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양육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친일을 해서 민족을 한 번 배신했다면 친미도 쉬운 법이고 또 친일파 처단이 두려워서라도 친일파들이 친미로 기울어 실권을 쥐려든다는 게 주한 미군사고문단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미군정청을 시작, 한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한국군 전 병력 및 경찰, 그리고 한국 정부의 중요 행정부서에는 미군사고문단이 파견돼 명실 공히 한국군 및 대한민국 정부 출범의 산파 역 내지 대부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한국 군,경의 일거수일투족이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보고되어 왔던 것이다.

6.25 직전, "미국의 극동방어선은 일본"이라며 주한 무장 병력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켜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했을 때도 5백여 명의 비무장 미군사고문단만은 한국에 남아 꾸준히 한국 군,경을 통제하는 임무에 충실해 왔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46년 한국에 첫 발을 디딘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ousman) 미 육군대위는 한국군 초창기인 조선경비대(총사령관 베로스 미군대령) 집행국장으로 근무했으며 조금 후 베로스 대령이 미군정의 제주도지사로 전임되자 후임 총사령관 대행으로 있으면서 실제로는 조선 경비대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어 미 군사고문관, 미 군사고문단장의 고문, 채병덕 한국육군참모총장 고문, 이승만대통령의 군사고문을 거치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마음대로 움직였고 "한국군의 아버지"임을 자칭했다.

이를 계기로 이형근,채병덕,정일권,백선엽,박정희 등 모든 일본군 장교 출신들 및 고위 정치인 등이 하우스먼을 '국군의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하우스먼의 지시는 곧 미국 정부의 지시로 받아들이게끔 됐다. 한편 일제 때 항일투쟁을 벌였던 애국자 집단인 광복군 출신은 하우스먼에 의해 냉대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군처럼 혹독한 군사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과 일본군 출신에 비해 민족주의 의식이 너무 강하고 반공의식은 약하다는 것이 었다.
 
하우스먼이 친일 장교들 중 특히 박정희를 눈여겨본 이유는 민족을 배신하고 혈서를 써서 만군 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한 철저한 친일 경력과 1등으로 졸업, 일본육사 3학년으로 편입 후 3등으로 졸업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 상을 받은 우수성, 남로당 한국군책으로 있을 때 일어난 여순반란 주모자의 하나였으나 군내 남로당 조직과 명단 일체를 수사기관에 내놓는 철저한 배신행위로 수사당국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집권할 경우 처형될 수밖에 없어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 한국군 내 중견 간부들에게 신망을 받는 청렴하고 똑똑한 군인 등의 이미지는 다른 한국 군 장교 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미국이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갖춘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우스먼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에 직보되었고(하우스먼의 회고록),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우려하던 미국 정계지도자들의 의구심을 희석시키는데 기여한다. 이 공로로 맥나마라 미국방장관은 하우스먼에게 공로표창장을 주었고 이 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하우스먼의 보고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1958년 3월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미고문단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1959년 7월 박정희는 6관구사령관으로 임명된다. 6관구 사령관의 자리는 서울 일원의 군부대를 총지휘하는 수도권 방위 임무를 띠고 있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쿠데타 계획을 세운다. 무능, 부패를 이유로 장면 내각을 몰아낸 1961년의 5.16 쿠데타는 실은 장면 내각이 들어섰던 1960년 8월 12일 훨씬 전부터 미군사고문단의 묵인 내지 교사로 계획되고 있었으니 "장면 정권의 무능, 부패"란 한갓 국민을 속이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에 대해 보인 미 대사관(성명)이나 주한 미군사령부의 첫 반응은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윤보선대통령을 만나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라'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이 쿠데타를 사전에 몰랐다거나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만드는 양면 작전(2중외교)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 미 국무성은 미 대사관의 성명에 대해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부정하면서도 쿠데타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은 채 노코멘트의 태도 내지 불간섭주의를 표방한 것도 양면작전의 하나라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주간신조는 5.16 직 후 "미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시키기 위하여 한국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해 미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서울의 미 대사관과 미군 당국에 장면 지지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는데 이는 후에 예리한 비판기사로 박정희의 미움을 사 항소심이나 대법원도 거치지 않고 지법의 사형판결이 나자마자 사형집행을 당한 당시의 엘리트 언론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쿠데타는 미CIA가 한 짓"이라며 화를 낸 것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김현철칼럼>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 2 )

한국일보(1990,11,28) 기사, ‘하우스먼의 회고록’을 보면 하우스먼은 “1961년 3월 1일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전에 나는 한국군내의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나는 한국군 친구들로부터 얻은 정보, 또는 불쑥 찾아가서 대화 중 캐낸 일들을 분석한 후 일련의 심각한 상황을 종합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실제폭풍일 것이라는 것을 한국군 육군본부 김형일 참모차장(61년 3월까지 재직)이 확인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우스먼은 여순반란 사건 진압을 지휘할 때 박정희를 구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쿠데타 발생 훨씬 이전에 쿠데타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방조 내지 교사한 인상을 주었다. 더구나 유엔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인 하우스먼이 알고 있는 그 엄청난 사실을 매그루더 사령관이 몰랐다면 말이 되는가?

실은 ‘한국 군대를 동원하면 무력충돌로 희생자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쿠데타 진압을 거부한 윤보선 대통령 등 몇몇 국내 정치인들도 박정희와 사전 내통(민의원 의장 곽상훈)하는 등 쿠데타 자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쿠데타 군인들이 한강교를 건너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현장 목격자는 쿠데타군 앞에 ‘미군 헌병차’가 선도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날 이른 아침 하우스먼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만나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다. 그는 여기서 박정희를 만난다. 그날 이른 새벽 박정희와의 이 짤막한 만남이 있은 후 두 사람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는다.(한국일보 1990,12,5)

하우스먼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의 혁명위원회 측은 연락관(한국군 대위)을 통해 구두 또는 서면으로 많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으며 하우스먼도 그 연락 장교 편에 몇 가지를 강력히 권고한다. 그것은 미 8군안에 혁명군을 들여보내지 않는 문제, 혁명군의 팔에 두른 하얀 완장을 제거하는 문제 등 비교적 단순한 형식상의 문제에서부터 한국군 장성들의 신상문제, 박정희의 얼굴 드러내기 등 까다로운 정치문제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우스먼은 박정희에게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공식적인 최고 직책을 가져야 하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모자를 빼앗아 써야 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1990,12,12>

5.16 이틀 후 하우스먼이 8군 켐퍼스 안의 자기 집에 찾아 온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는 하우스먼에게 “혁명위원회는 하우스먼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실은 당신네들(미국) 혁명이요”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미 CIA 한국지부장 씰바는 5월 15일 오전에 김종필, 다음날에는 박정희를 자주 만났으며 그 후로는 박종규(후 청와대 경호실장)와 더욱 자주 만났다.
하우스먼은 그의 회고록에서 쿠데타설이 나돌던 시점에 육본작전참모 부장으로 있는 박정희를 찾아가 많은 대화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2년 개헌을 둘러싼 부산 정치 파동 때에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의 출동을 명령하자,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통수권이 미군에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군의 부산 출동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 때 이용문 소장과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은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사령관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53년 5월, 미국은 이승만이 계속 휴전협상을 방해하자 52년의 이승만 제거 계획을 더욱 강경하게 바꿔 군부에 의한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Ever ready Plan)을 수립했으며 미군수뇌부의 지원을 받아 박정희가 이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말’지) 그렇다면 5.16 쿠데타는 이미 9년 전부터 착착 준비해 왔다는 사실인 것이다.

미 CIA국장이었던 엘런 덜레스(Allen W. Dulles)는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제가 재직 중에 CIA의 해외 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바로 이 5.16혁명이다. 미국의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는 장면 내각은 부패해서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응하지 못했다. 참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바로 미국이 5.16에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쿠데타 성공 후 군사정권은 자주적 발전을 지향하기 보다는 “용공분자”를 색출, 체포하는 일에 최대의 역점을 둠으로써 자주적 지향을 보인 4월 민중항쟁의 주도세력을 가장 철저하게 탄압한다. 이것은 바로 미국이 쿠데타에서 얻고자 했던 한국민족주의의 제거와 일치하는 것이다.
해제된 미국무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5.16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전례 없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잔슨 부통령이 공항까지 나와 박정희 의장을 환대했다는 사실은 위에 지적한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플로리다 한겨레저널 김현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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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사대 매국 역적놈이었던 개승만은 씨앗도 없었지만
개정희는 딸자식 3마리와 아들 새끼 1개를 두었다.
야들도 미 상전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그중 둘째 딸년은 불법, 부정 선거로 가짜 대통령이 되더니
미제 흔 F-35를 40대 더하기 20대를 산다고 한다.
720조원을 드려서
서민들은 밥이 없어서 자살로 죽는 백성들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고 
어린 새끼들은 결식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는데
이 어마어마한 돈으로 매년 미제에게 퍼주고 있다. 
한국은 69년째 오직 미제의 무기 시장일 뿐이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미제가 한국의 군통수권을 완벽하게 쥐고 있는데
박정희가 무슨 힘으로 미제의 허락도 없이 혼자 군 혁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이냐!
그것은 상식이다.
그후 박정희는 한미행정협정(SOFA)을 맺어 한국의 정치, 경제, 금융, 군사를 미. 일에 200% 예속시켰다.
그 여파로 IMF가 오게된 근본 원인이다.
박정희가 한국 경제를 살렸다고 하는데
살닌 것이 아니고 완벽히 미. 일에 예속시켜 근본적으로 망쳐먹은 놈이다.

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박정희 5.16쿠테타
미국의 작품에 동의합니다.

3.8선 분단조작도
미국의 작품이고,

6.25전쟁 공작도
미국의 작품이고,

7.4공동성명 파괴도
미국의 작품이고,

6.15선언 파괴와
10.4선언 파괴도
미국의 작품이고,

박근혜 대선당선 조작도
미국의 작품이며,

종북몰이 공작도
그 배후가 미국의
씨나리오입니다.

그래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것이
우리민족의 진정한
애국적 구호이며
애국적 실천입니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고슴도치님의 글을 퍼갑니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고슴도치님의 200% 완벽한 말씀을 주야로 쌍수들고 적극 지지합니다.

잘아시듯!
미국의 정치정책은 1400년 - 1600년 - 1776년 - 1801년 - 2013년 오늘까지
침략 대 살인 강도질을 위해서 거짓, 사기, 매도, 우롱, 조작으로 먹고 사는 동내가 미제지요.
 
잘아시듯!
한국에 미대사라는 자는 한국인이고
중국에 미대사도 중국인라 합니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이번에는 김종필의 부인 고 박영옥여사에 대한 기사도 올리셨으면 좋겠네요? 물론 김종필 전 총재는 알다시피 닭그네의 사촌형부고 박영옥여사는 닭그네의 사촌언니라잖아요? 너무 정치적인기사만 올리는것도 좋은것 아니거든요? 하기야 진보입장에서는 김종필 전 총재가 욕얻어먹고 살기에는 충분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인만 생각하고 다른여자와 바람안피우고 평생을 부인하고만 해로하며 살아온 한마디로 아내바보인 로맨티스트라고 하네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남자인데 외도를 안하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에 대해서 싫든좋든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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