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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작각, 자신의 누드 표지로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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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학생 작성일13-10-20 06:54 조회2,18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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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누드, 표지로 쓴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는 신작을 통해“죽음, 고난, 순간순간의 반짝임, 살아가는‘지금’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유씨는 지금 가마쿠라에서 고양이 11마리를 키우며 산다.

유미리의 신작‘유미리불행전기록’표지. 유씨의 누드 사진이 실려 화제가 됐다.


유미리는“아이를 키우다 보니 지금 가장 쓰고 싶은 것이 부모에 의한 아동 학대”라며“학대 당하는 아이가 아니라 학대하는 부모의 심리도 쓰고싶다”고 했다. /가마쿠라=선우정 특파원


선우정 특파원

1990년대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누드 사진을 책 표지에 실었다는 뉴스를 듣고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냐’는 의문이 생겼을지 모른다. 24세에 사상 최연소로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 28세에 최고 권위의 아쿠다가와상을 받으면서 한일 문단에서 동시에 신데렐라로 떠오른 그녀였기 때문이다.

유미리는 실제로 망가졌다. 2000년대 들어 유부남의 아이를 출산, 평생의 스승이자 연인인 연극연출가 히가시 유타카(東由多加)와 사별, 처녀작에 대한 법원의 판매금지 판결, 우울증… 사생활과 문학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 30대였다.

지난달 말 발간된 ‘유미리불행전기록(柳美里不幸全記錄)’은 바로 ‘망가진 30대’를 기록한 책이다.
 


좌절에서 재기까지 5년 6개월의 방대한 기록이 800쪽에 담겼다. 아들과 살고 있는 태평양 연안 가마쿠라(鎌倉)시에서 유미리(柳美里·38)씨를 만났다. 편집을 맡은 신초샤(新潮社)의 고우라 이쿠(古浦郁)씨도 함께 했다.

―누드 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유씨는 에필로그에서 누드 표지는 “고우라씨의 아이디어”라고 썼다.

“(편집자에 대한) 신뢰이지요. 처음부터 ‘반주자(伴走者·마라톤에서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옆에서 달려주는 사람)’였어요. 늘 원고를 처음 보여준 사람이니까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고우라씨이지요.”

고우라씨가 말을 이었다.

“힘든 길을 혼자 걸어가는 유씨의 모습을 직접 가까이서 봤어요. 이것을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 집약할까 생각하니, 결국 유씨 자신의 모습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언어는 책에 담겨있으니까 언어의 ‘출구’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육체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렇다고 왜 누드인가요?

유미리씨가 설명했다.

“알몸으로 싸워온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5년이란 시간이. ‘싱글 마더(미혼모)’로서 어떤 도움도 없었고, 재판도 있었고… 자신을 보호할 갑옷은커녕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대결했어요. ‘나체’는 그 상징이지요.”

―인생에서 너무 불행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요?

“행복과 불행은 반어(反語)는 아니지요. 히가시씨를 간호하면서도 둘이서 지내는 시간 동안엔 행복한 순간이 있었어요. 죽어가는 동안의 짧은 하루, 그리고 짧은 꿈이었지만. 난 불행이란 ‘상태(常態·늘 그런 것)’라고 봐요. 행복은 ‘순간’이고. 살아 있으면 파도가 햇빛에 반짝거리듯 행복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행복은 절대 지속되지 않지요. 순간순간 반짝이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 얻는 것보다 상실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과정이지요. 젊음을 잃고, 최후에는 목숨을 잃고. 인생은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반짝이는 행복의 순간을 얼마나 만들어 가는가가 중요하지만.”

유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2000년에 사별한 연극연출가 히가시 유타카다. 16세의 유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히가시씨가 이끄는 극단 ‘도쿄 키드브라더스’에 들어갔다. “(극작가가 되기 위해) 일기를 쓰라”는 히가시씨 지시로 그녀는 문학에 눈을 떴다. 23년 연상인 히가시씨와 동거(同居)를 시작한 때도 그때였다. 이번 신작은 그때 쓴 일기처럼 히가시씨에게 보여주는 일기 형식을 빌리고 있다.


―유미리씨의 20대는 빛나는 시간이었지요.

“세상의 시선이 집중된 시기였지요. 그때는 뭐랄까…‘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지요. ‘가족시네마’(아쿠다가와상 수상작)를 썼을 땐 소설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틀을 그리고 싶어서 ‘영화처럼 카메라가 돌아가는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지요. 지금은 소설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도, 틀을 깨버려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쓰고 싶어요.”

―이번 책도 그런가요?

“죽음, 고난, 순간순간의 반짝임, 살아가는 ‘지금’을 쓰고 싶었어요. 독자들도 함께 살았으니까, 그 시간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30대의 유미리씨는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기를 낳고 그랬지요. 그때까지는 ‘관념’이었지요. 10대 때 자살을 시도하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막다른 길을 걸어갈 때,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기분은 들었지만 관념적이었지요. 하지만 히가시씨를 죽음으로 보내고, 젖먹이를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땐 관념이 아니었지요.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결국 글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다케하루를 낳지 않고 히가시가 죽지 않았다면.”

다케하루는 2000년 1월 태어났고, 히가시씨는 그해 4월 숨을 거뒀다. 다케하루는 유부남 방송기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임신 사실을 안 아버지는 아내에게 돌아갔다. 유씨는 히가시를 다시 찾았다. 그때 그가 말기 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유미리씨의 인생을 바꿀 두 번째 ‘지시’를 했다. “꼭 아기를 낳으라”고.

―유미리씨의 인생을 바꾼 시기였군요?

“그렇죠. 생명과 죽음이 함께 왔으니까.”

―아기를 낳을 때 누가 옆에 있었나요?

“히가시씨가 있었지요.”

―통증이 있을 때는?

“탈고할 때 진통이 왔어요. 진통을 무시하고 원고를 썼어요. 병원 갈 때까지 원고를 인쇄해야 한다는 생각에 워드프로세서를 들고 허둥지둥했지요. 그때 옆방에 있던 히가시씨가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쳐서 “인쇄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아픈 히가시씨가 빗속으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고, 짐을 챙겨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요.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어요. (병원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야말로 병자, 말기 암 환자니까 침대 같은 것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지요. ‘없다’고 하더군요.”

―숨질 때까지 함께 살았지요?

“암이 전이돼 임파선이 퉁퉁 부었어요. 팔을 조금만 올리면 심한 통증이 일어났지요. 그러면서도 다케하루를 목욕시켰어요. 아이에게 기억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유미리씨는 지난 4월 그림책 ‘달에 올라간 겐타로군(君)’을 출간했다. 히가시씨의 유업(遺業)이었다. 히가시씨는 생전에 “아이와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살고 싶지만 무리이겠지. 하지만 남겨주고 싶어. 이야기를. 그림책이라면 곧 읽을 수 있겠지”라고 유미리씨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곧 숨을 거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16살, 그가 39살 때였지요.”

―히가시씨도 유부남이었지요?

“처음엔… 그렇지요. 히가시씨는 몇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어요.”

―남녀 관계(섹스)는 유지됐나요?

“20대 중반 이후에 남녀 관계, 연인 관계는 전혀 없었어요.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상대와 관계했지요. 남녀 관계는 처음 수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3~4년 정도였을까. 그 후엔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끝내 함께했습니다.

“스승이라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은 것은 연애 감정이 아니라 스승이라는 것이었지요. 16세 때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가출 소녀처럼 있던 여자 아이에게 문학과 연극을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이렇게 보살핌을 받은 ‘자식(子)’은 어떤 배신을 당해도 변할 수 없지요. 은의(恩義)랄까. 무조건이었어요. 병든 그가 투병을 할 때 이번엔 내가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히가시씨와 관계에서 가장 컸던 것은 ‘이야기’였습니다. 15년간 대화를 계속했지요. 히가시씨도, 나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하루 20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럼 지금 남자와는 왜 같이 삽니까?

지금 유씨는 인터넷을 통해 만난 15년 연하남과 가마쿠라에서 동거하고 있다. 아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유씨는 책에서 지금 동거남과 말이 안 통하는 문제를 토로했다.

“최악의 순간에 만났으니까요. 4년 전이었을까요. 글을 쓸 수 없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도 학교에 못 가고 병원에 다닌 적이 있을 정도로 우울한 기질이 있지만, 그때는 ‘인간 불신’에 이를 정도로 지독했어요. 사람을 만날까 아이를 유치원에도 못 데려갔습니다. 글을 쓸 수 없으니까 먹는 것까지 고민할 정도였지요. 그때 그를 만났어요. 열정적인 독자였지요.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사람은 함께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좋을 때 온 사람은 힘들어지면 ‘거미 새끼를 흩어놓은 듯(많은 사람이 사방으로 달아나는 모양을 뜻하는 일본 상용구)’ 달아나 버렸지요.”

―처녀작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출판금지 판결을 받은 것이 우울증까지 간 계기였지요.

2002년 일본 법원은 유씨의 첫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 대해 실존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사생활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판매금지 판결을 내렸다. 당시 법원 판결을 두고 일본 언론과 문단에서 격렬한 ‘표현의 자유’ 논쟁이 벌어졌으나 유씨를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 전후(戰後) 최초의 판매금지 처분이었지요. 신문 1면, TV 톱뉴스였어요. 책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TV에 나와 ‘쓸 때 브레이크를 잊어버리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고 멋대로 말했지요. ‘배싱(bashing·비난)의 폭풍’ 같았어요. 싫어하는 작가 순위 1등에 올랐고. 그것도 2등에 비해 압도적인 차이로.”

―‘쓰는 입장’과 ‘쓰여지는 입장’은 다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밟고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요. 곱고 예쁜 일은 아니지요. 쓴다는 것은 ‘쓰는 사람’과 ‘쓰여지는 사람’이 모두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는다고 할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쓸 수 없고, 밟지 않으면 쓸 수 없어요. 자신을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쓰고 싶다는 원망(願望)이 아니라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땐 쓸 수밖에 없지요. 누구를 상처 입히든….”

―상대를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까?

“재판에서 ‘타인의 아픔을 넌 아는가’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8년간 계속. 당연히 알 수 없지요. ‘타인의 아픔을 아파할 수 없다는 아픔’뿐이지요. 그런 느낌으로 쓰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아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왜 씁니까?

“살기 위해서. 쓰지 않았던 3년간 집에서 계속 죽음을 생각했지요.”

―아들 다케하루(丈陽)군이 있는데도?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의무라고. 하지만 아이의 존재가 자신의 생(生)을 지탱해 주지는 못하지요.”

―유미리씨는 왜 귀화(歸化)하지 않았나요?

“재일한국인이기 때문에 불이익이 생긴다든가, 귀찮고 싫은 일이 생긴다면 전 귀화하지 않겠습니다. 작가인 이상 그것을 짊어져야겠지요. 모두 평등하고 불이익이 없다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귀화를) 하지 않고 할 수도 없고 생각한 일도 없습니다.

―아들은 일본 국적이지요?

“저는 양친이 한국인이고 작가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난문(難問)과 고난을 짊어진다는 각오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일본인이고….”

―아이의 성(姓)은?

“‘유’입니다. ”

―유미리씨는 아이의 아빠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혈연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히가시’라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아이에게 ‘아빠’는 어떤 존재입니까?

“(노래를 시작했다) ‘지붕보다 높은 고이노보리(단오 때 높은 장대 위에 종이나 천으로 잉어 모양을 만들어 다는 것)/큰 잉어는 아빠/작은 잉어는 아이들/재미있는 듯 헤엄치고 있어요…’ 유치원에서는 이렇게 배웠지만 집에서는 ‘아빠’를 ‘엄마’로 바꿔서 배웠지요. 아이에게도 아빠는 없는 존재. 엄마가 슬퍼하니까 말하면 안되는 언어입니다. ”

―유미리씨에겐?

“아빠는 집에 없었습니다. 도박을 한다든가. 어린 시절 아빠는 휑하게 뚫린 구멍 같은 존재였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큰 존재였습니다. 큰 공백이었지요.”

―신작에서 아이 아빠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양육비로 매달 5만엔씩 보내준다는 언급 이외엔.(유미리씨는 이 돈을 아이의 미래를 위한 보험금으로 적립하고 있다고 썼다)

“소식도 전혀 없고, 지금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요. 그다지 관계하고 싶지 않고.”

―마음 속에서 지워졌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케하루가 커서 아빠를 알고 싶다고 하면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알려줘야죠.”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도 없습니까?

“한국이라면 자기 아이에 대한, 혈연에 대한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없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결혼은 한 상태였습니다만 아이는 없었는데. 역시 성격이지요.”

―독특한 타입이군요. 임신했을 때 출산에 반대했습니까?

“생명에 대한 이야기라 조심스럽습니다만,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어요. 이혼하겠다고 했다가, 못한다고 했다가… 그런 흔들림에 따라 아이에 대한 기분도 달라졌지요.”

―‘이혼하라’고 요구한 적 있습니까?

“있습니다. ”

―결혼하려고 했나요?

“사귈 때는 그런 기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케하루를 임신했을 때는 히가시씨가 암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일이 됐지요. 히가시씨도 ‘아이를 함께 키우자’고 했습니다.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임신 사실을 안 것은 (1999년) 5월, 히가시씨의 암 사실을 안 것은 6월이니까, 한 달 동안은.”

―유미리씨는 젊었을 때 ‘절대 결혼을 안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지요.”

―유미리씨 인생에서 히가시씨의 그림자가 너무 짙습니다.

“그의 그림자는 강한 햇볕을 피해 들어간 그늘 같은 의미, 나쁜 이미지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


―다시 사회 문제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지금 가장 쓰고 싶은 것이 아동학대,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입니다. 아동 학대에 대한 신문 보도는 ‘부모가 어떻게 이래, 믿어지지 않아’ 이런 반응이 나오도록 쓰지 않습니까. ‘이해의 회선(回線)’이 통할 수 있는 코드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 ‘아, 이 스위치를 누르면 결국 학대로 가는구나’라는 순간이 있지요. 신경이 곤두서고 화가 나는 버턴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학대당하는 아이가 아니라 학대하는 부모의 심리도 쓸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16세 때 가출… 23살 연상과 동거… 임신과 이별…

“쓰는 것이 사는 것”이란 그녀의 말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지옥에 떨어져도 (지옥을) 정확히 그려낼 것’이란 일본 작가의 평가처럼, 유미리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철저히 문장으로 기록해낸 것이 ‘유미리불행전기록’이다.

유미리는 2001년 ‘생명(命)’이란 에세이를 출간한 적이 있다. 유부남과의 불륜, 임신, 이별, 출산, 그리고 평생의 연인과의 사별(死別) 등 자신의 불행을 냉혹한 다큐멘터리 시각으로 담아내 밀리언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2년 1월부터 2007년 7월까지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신작(新作)은 ‘생명’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미리의 30대 기록이다. 미혼모의 육아(育兒) 과정,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마라톤을 완주한 이야기, 소설 ‘8월의 저편’을 둘러싼 아사히(朝日)신문과의 갈등, 고양이를 11마리 키우게 된 과정 등 생활 이야기까지 소상히 담겨 있다. 과장과 감춤이 없어, 그녀의 황당한 인생에 수긍하진 못해도 책을 들고 하룻밤을 새울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유미리는 할아버지 시대에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한국인 3세다. 손상된 가정과 국적 차별 속에서 강요된 어린 시절의 불행은, 23살 연상 스승의 품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가출한 16세 미성년 시절이었다. 동거 중에 서로 다른 이성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버지 뻘 연인과 대결하는 대목을 읽으면 ‘유미리’란 인간형에 섬뜩함까지 느낄 수 있다. 스승과의 사별로 시작된 유미리의 30대는 불행했던 10대로 돌아간 시간인지 모른다. 하지만 10대 때와 달리 그녀의 품엔 그녀가 ‘생명(命)’이라고 표현한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책 마지막 문장에 “불행의 깊이가 그대로 삶의 깊이가 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썼다.



[선우정 특파원(도쿄·가마쿠라(鎌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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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차라리 미혼모가 되는게 낫다! 뭐하러 결혼해서 임신을 하냐?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저 기사도 내리지마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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