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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 안용구선생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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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준무 작성일13-08-17 02:39 조회1,8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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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 안용구선생님 영전에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큰 별이 우리곁을 떠나 가셨습니다. 민족자주진영의 원로이시자 해외동포통일운동의 선배이시고 스승이신 안용구교수님께서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이 사실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해외통일운동사에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이고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손실로 되고 있습니다.

세계적 명문음악대학인 죤합킨스 피바디음대에서 권위있는 교수님으로, 존경받는 음악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선생님은 1960년대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인기있고 저명한 교수님으로, KBS교향악단의 수석악장으로 이남의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었으며 한국의 실내악 운동에도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셨습니다.

그 시대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던 안용구스트링오케스트라, 안용구스트링트리오, 안용구 현악4중주단 등은 많은 음악애호가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려가고 있던 이들 연주 그룹들은, 음악인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되어 아름다운 화제를 뿌렸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러한 실내악운동을 벌여가심에 따라 이남 음악계는 음악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어내는 실내악의 중흥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오신 선생님께서는 일신상의 행복과 향락만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겸허하고 소박한 일상생활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은“저렇게 명예도 있고,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가시밭길과도 같은 조국통일운동의 길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일까?”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훗날에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긴 했지만, 한때는 가깝게 지냈던 음악계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통일운동을 하신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멀리하고 발걸음까지 끊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몸소 실천하셨고,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분단되어 있는 나라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신 선생님께서는 80년대 중반에 이북을 방문하시고 돌아와서 서울대학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남악단에서 같이 활동했던 재북 음악대학동창과 음악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때 해주셨던 말씀 중에 ‘우리가 자주적일 때 가장 강하게 될 수 있다’는 인상 깊은 말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0년 10월에 윤이상선생께서 발기하신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초청되어 선생님을 단장으로 모시고 참석했었습니다. 선생님은 단장연설에서 음악예술이 조국통일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을 제시하시어 청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정이 많으셨습니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1960년대 초 국민학교 교원을 하고 있을 당시 나는 소문만을 듣고 생면부지의 고명하신 선생님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소 한장만을 손에 쥐고 물어물어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보잘것없는 학생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바이올린의 기초와 문제점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지적해 주시며 그대로 해보라고 하시던 선생님은 “그것보라 처음보다 소리가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격려하시며 직업음악가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보잘것없던 그 시골 학생은 그 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였고 국립교향악단단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미국에 온 뒤에는 선생님의 인도를 받으며 83년부터 본격적인 통일운동에도 합류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선생님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그날 레슨이 끝나고, 당연한 것이지만 월사금을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먼 곳에서 온 것만도 대단한데 이 돈은 여비로 보태 쓰라”고 레슨비를 돌려주시며 따뜻하게 격려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이 뜨겁게 안겨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지도를 받으려는 다른 학생들은 높은 월사금을 내고도 줄을 서는데,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까지 손에 쥐어주며 선생님께서는 정성껏 가르쳐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정에서도 아주 행복하셨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군, 객지생활을 하느라고 고생이 많은데 차라리 우리집에 들어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제안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후로 선생님과 한집에 살면서 나는 많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모시고 조선국립교향악단공연무대에 같이 설수 있었던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습니다. 2002년 선생님은 백고산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 ”대를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를 열연하셨습니다. 그 감동의 무대, 열화같이 환호하던 평양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만족해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기만 합니다.

선생님슬하에는 삼남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하는 장남 안호,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차남 안준 그리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양념딸 안영희를 잘 키워 놓으셨고 자녀들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귀여운 손자들을 할아버지께 안겨드렸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선생님은 훌륭한 사모님을 만나신 것이 최고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사모님의 빼어난 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영방송의 최고인기를 독차지 했던 아나운서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모님을 여걸이라고도 합니다. 이민생활에서, 선생님의 가정이라고 왜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을 보필하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모님께서는 한때 미장원도 경영하시고 부동산사업도 하시면서 가정의 경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명문 피바디음대에서 평생 일하셨지만 미국대학교수들의 주머니사정은 넉넉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사모님은 남자들도 하기 힘든 집 마당의 잔디까지 손수 깎으셨습니다. 사모님은 생활비를 절약하시려고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잔디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나도 사모님의 그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데 선생님께서는 사모님의 다친 손을 보시며 얼마나 우셨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선생님을 승리자로 우뚝 서게 하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모님을 두시고 떠나셨습니다. 성공한 자랑스러운 자녀들을 남겨두시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음악계에 세우신 업적과 통일운동사에 남기신 철학적 교훈은 음악계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념원하는 우리민족모두에게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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