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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용석 작성일12-06-02 11:06 조회1,7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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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흙담집 지붕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보다

[인민경제 35]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인민사상②, 인민사랑 정신 배워라

막상 지함 자신은 과거에 별 뜻을 두지 않는다. 벼슬 없이 난세를 처사로 살았던 스승 화담의 영향 때문일까?
마지못해 과장(科場)에 나가더라도 글을 짓지 아니하고, 혹 글을 지어도 내지 않고 나온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오.”라고 답한다.

이 무렵 지함은 조카 산해(큰형 지번의 맏이로서 선조 때 영의정에 오른 북인의 영수)에게 틈틈이 글을 가르친다.
큰형이 어렸을 적 자신을 보살펴준 은혜에 보답하는 셈이다. 산해는 4살(1543년) 때부터 신동에다 명필로 소문이 자자하여,
당시 9살이던 경원대군(훗날 명종)은 이황(1501~1570)에게 그의 글씨를 받아오도록 시킨다.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한다.

여전히 난세이다. 1545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재위 1544~1545)이 즉위 8개월 만에 급사하자, 또 다른 계비인
문정왕후의 아들, 즉 명종이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소윤)
간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고 결국 소윤이 승리한 결과이다.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소윤 일당은 내친김에 윤임 일파를 모두 숙청하거나 참살시키니, 곧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당시 지함의 친구인 안명세(1518~1548)가 사관(史官)이었고, 사화의 모든 과정을 ‘춘추필법’으로 사초(史草)
에 담는다. “돌아가신 선왕(인종)이 아직 빈소에 계신데 같은 날에 세 대신을 죽이니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닌가?”라면서 윤원형
일파가 많은 선비들을 잡아다가 매질해서 억지로 만든 옥사(獄事)였고, 명종을 아예 제끼고 문정왕후가 직접 주살을 결정하자,
과연 누가 의기양양하였고 누가 비통해했는지를 일일이 기록한다.

병오년인 1546년(명종 1년)에 큰형 지번은 나이 38세로 뒤늦게 진사시에 합격한다. 같은 해에 스승 서화담은 타계한다.
지함은 이때서야 3년 후의 다음 ‘식년’(式年), 곧 1549년에 과거를 보기로 작정한다. 결국 자신의 첫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던
지번이 그때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던 것이 그간 과거를 등한시했던 지함의 속내였던 걸로 짐작된다.
(정기 과시를 3년 간격으로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가는 해, 곧 ‘식년’(式年)에 시행하였다)

▲ 청운의 꿈은 사라지고 역마살이 들다 - 사건사고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을사사화의 뒤를 이어 1548년 이른바 ‘안명세 필화사건’이 터진다. 사초는 당대에 공개하지 않는 게 절대 원칙이고 임금조차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동료 사관이었던 한지원이 안명세가 적은 내용을 윤원형 일파에 고자질한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하지 않던가. 소윤 일당과 문정왕후는 이에 격분한 나머지 안명세를 즉각 붙들어다 중죄를 추궁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살. 사초의 수정을 요구한 형리들에게 부당함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현실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한 채
혹독한 국문에 온몸으로 맞선다. 마지막 형장에서도 사관의 책무에 한줌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소신을 밝히며 망나니의
칼을 의연히 받는다. 오늘의 재벌독재 시대에 더 이상 ‘군홧발’이 아닌 ‘돈다발’ 권력에 곡학아세하면서도 이를 잘 하는 일로
잘못 확신하는 주류매체 언론인들로선 감히 시늉조차 못 낼 일이리라.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한 사관의 마지막 모습이다. “명세가 조복을 입은 채 수레에 실려서 형장으로 가는 걸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장 사람들까지 모두 울었다.” 한양의 당현(唐峴)에서 참수 직전 남긴 말은 “한 친구가 처형
시각에 앞서 술을 먹였더니 명세가 ‘잘 있거라’ 하였고, 이어서 집안사람들에게는 ‘부디 자식들은 글을 가르치지 말라’ 하였다.”
실은 그런 말조차 필요 없었다. “명세의 처자는 모두 노비가 되었다.”

청년 지함에게 ‘죽마고우’ 안명세의 억울한 죽음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함은 처형의 순간순간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대성통곡하였고, 친구의 주검을 수습해준다. 안명세와 친한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어명이 내리자, 지레짐작으로 도피
아닌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는 처사의 길을 선택한다.
아니 그로서는 이런 세상에 그리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지함의 방랑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간의 과거 준비를 다 팽개치고 여기저기 발길 가는 대로 무작정 떠돌아다닌다.
“이지함은 안명세가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미친 행세를 하면서 세상을 외면하였다. 주살을 벗어나려는 기러기처럼
몸을 피하여. 저 궁벽한 시골에서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 기둥이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그릇(高才)이건만…” (송자대전)

한번쯤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진화의 역사가 우리 몸에 새겨놓은 동물적인 위기 인지능력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실의에 빠졌던 이지함이 어느 날 장인과 처남들의 운수를 짚어봤더니 바로 그런 불길한 괘가 나온다.
그는 맏형에게 "내가 처가를 관찰했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이에 피하지 않으면 장차 나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고선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나갔다고 한다.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이른바 ‘청홍도 사건’으로 지함, 천민(賤民)으로 전락하다 - 설상가상으로 1549년(명종 4년)의 소위 ‘이홍남 고변 사건’은 지함을
안명세 사건보다 더 고통스런 시련에 봉착케 한다. 형제간 불화로 형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무고하는데,
이홍윤은 능지처참되고 이에 연루해서 충주 일대의 수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된다.
갑자기 ‘역적 소굴’에 돼버린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라는 이름이 사라지면서 청홍도(淸洪道)로 개명된다.

윤원형 등의 간신들은 사건을 더욱 확대시켜 지함의 장인 이정랑을 역모사건의 괴수로 엮어냈고, 그는 모진 태형을 받다 죽음에 이른다.
지함의 처가는 역적 집안이 돼서 풍비박산난다. 처남들도 죽어나가고, 장모와 처남댁들 그리고 처조카들은 종살이를 했을 걸로 짐작된다.
지함 자신도 당시의 연좌법에 의해 천민 신분으로 전락했으니, 그에게 이제 과거는커녕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걸 먼저
배워야만 했으리라.

질긴 게 목숨 아니던가? 일단 먹고는 살아야하니 지함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파는 일에 직접 나선다.
고향 앞바다의 서해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가 가을에 거두어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렇게 수년을 지내면서 수천 섬의
양곡을 모았고, 자신은 청빈하게 살면서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준다.
당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질병과 학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그는 마치 ‘미륵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의 거주지인 마포와 출생지인 보령 등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섬과 바다를 두루 돌아다닌다.
스스로를 ‘해상에 사는 광민(狂民)’이라고 하면서 물길과 항해술을 배웠고, 성품 자체가 배타기를 좋아했으며 항해 중에 조수의
흐름을 잘 알아 큰 위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로는 쉽지 않았을 제주도와 중국 등 먼 바다로 나갈 때면, 쪽배의 네 귀퉁이
에다 큰 바가지를 달아서 풍파를 견디면서 수차례 항해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이가 훗날 이지함이 죽은 후 제문(祭文)을 쓰면서 그가 살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수선’(水仙)이라 칭했던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지함의 조카 산해가 쓴 ‘묘비 글’에서도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 토정 이지함. 마포 강변의 흙담집 지붕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보다 - 지함은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마포 강가의
허름한 흙집에서 보낸다. ‘토정’이라는 호는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이나, 말이 좋아 토정이지 흙으로 쌓아올린 토굴에 불과하다.
밤에는 고단한 몸을 토굴 속에 뉘이고, 낮에는 지붕에 올라 이를 마치 정자인 양 삼아 때로는 글을 읽고 때로는 세상을 내려다본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흙으로 언덕을 쌓아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亭舍)를 지어, 스스로 토정(土亭)이라 이름 지었다.”

조선 시대에 마포는 서해에서 한강 하구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는 각종 물산의 집산지로 상업과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온갖 상인들과 어울리며 민초들의 활기 넘치면서도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어느새 가난이 일상으로 돼버린 백성
들의 삶을 구제하고자, 농사에만 의존하던 조선 사회에서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힘을 써야 한다는 자각도 이때의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당시 염리동 일대에는 소금창고가 있어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며, 용강동 일대에는 옹기를 만드는
독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의 한계를 거침없이 뛰어넘은 자유인(自由人)! 지함은 정신과 행동 모두에서 어느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마포의 토정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전국 산천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열흘 동안 화식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더위
에도 물을 마시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사대부들과 놀면서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한다. “그가
강해(江海)를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기옹만필)

모든 자유인은 기인이지만, 그 역은 아니다. 조선의 3대 기인 중 두 명이 16세기의 인물들이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1506~1549)으로, 전자가 시대의 피해자였다면 후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소윤 일당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가해자 입장에서 평생 괴로워한다. 조선 전기의 김시습(1435~1493)을 포함하여 이들 셋 중에서도 오늘의 무속인들이 유독
서해 바닷가의 탁 트인 이지함 묘소에다 북어포와 탁주를 올리면서 아직 치성을 올리는 걸 보면, 이지함의 도력(道力)이 그중 가장
높은가 보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닌 일. 성인식(관례)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지자, 기발한 착상 끝에 나온
일명 ‘솥갓’이다. 구멍 난 밥솥을 때워서 그걸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오면 그 솥으로 밥을 지어먹는다.
그런 후 이를 씻어서 다시 쓰면 그만이다. 보기에도 괴상한 솥갓을 장대한 사내가 쓰고 다녔다는 기인다움도 기인다움이지만,
그의 청빈한 마음가짐이 더욱 빛나는 듯하다.

당연한 일로 지함은 이내 서울의 명물이 된다. 학식이 풍부하다면서 과거는 숫제 포기하였다 하고, 양반 출신임에도 베옷을 입고
머리에 솥을 뒤집어 쓴 모습에다 손수 나무를 파서 만들었다는 나막신까지 신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차림으로
관인(官人)들의 앞길을 감히 막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매 맞기를 자청하는 행동을 때때로 보이다니…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지함이 굳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자유는 선택 이전에 책임이다 - 바로 그래서 사르트르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 받았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지함의 삶, ‘자의 반, 타의 반’의 실존적 모습이다. 아니, 그 누구라도 그런 극단적 상황에 처한다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소간에 기인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조차 실은 반쯤만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세상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실로 토정 이지함의 자유정신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진수가 아닐 수 없다. 이황 등의 경우처럼 당대 지배계급의 한갓 통념에 불과한
성리학에 전혀 갇혀있지 않았던, 16세기의 권위와 전통을 전면에서 부정하였던 대 사상가이다.
그는 당대 인민의 일상적 삶에 대해 우여곡절을 거치며 나름의 현장체험 학습을 치렀던 것이고, 당대의 반인민적 현실에 올곧게 저항
하였던 것이니, 요즘말로 일종의 ‘1인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오늘 쌍용차 문제 등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두고 이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여 온몸으로 실천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어른거린다. 역사라는 이름의 굵은 동아줄에 한 가닥 정신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바로 오늘의 ‘인민사랑’(PD) 정신이다. 그 현장이다.

* 글쓴이는 현재 개방과 통합 (연) 소장으로 경제민주화와 양극화 해소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울법대 졸업 후 미국 오리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은, 금감원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https://www.facebook.com/fssoh  (기사입력: 2012/05/30 [02:16]최종편집: ⓒ 대자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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