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선에 대고 수용소네 뭐네 하며 씨부리는놈들은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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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진우 작성일2016-04-04 08:52 조회1,51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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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고문 프로그램 | 국제
끝나지 않은 악몽 : CIA의 고문 들여다보기
정은선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6-04-03 19: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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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은 미 CIA가 다시금 ‘고문’이라는 악몽으로 빠져들어간 때였다. 오바마의 쿠바 방문과 함께 관타나모의 불법 구금시설이 재조명을 받았고, 28일에는 영국 가디언이 CIA가 성적 수치심을 주기 위해 촬영한 테러용의자의 나체 사진 1만4000장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CIA가 어떻게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고문했는지, 또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 들어서 CIA의 고문은 다시 불법화되었지만, 관련 증거는 공개되지 않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고문 행위에 대한 처벌은 아예 시도되지도 않았다. 알자지라는 지난달 27일 이와 관련한 영상보도물을 공개했다. 관련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원문은 The dark prisoners:Inside the CIA's torture programm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돌보다 강하고 꽃보다 여리다는 속담이 있다”
- 하비브 라흐만, CIA 구금 하에 죽은 굴 라흐만의 형
2001년 9·11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며칠만에,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미 중앙정보국(CIA)에게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구금할 권한을 줬다. 그리고 같은 해, 법무부의 변호사들은 고문과는 법적 지위가 다른 이른바 “강화된 심문기술”(enhanced interrogation)에 관한 첫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연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비밀 구금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됐다.
미국은 이내 세계 곳곳에 CIA의 비밀 고문시설(일명 ‘블랙사이트’ black site)을 만들고 테러리스트로 의심한 사람들을 납치-이송해 와서 구금한 후 온갖 악랄한 학대를 가했다. 여기엔 잠 안 재우기, 물고문, 감각 차단, 과잉 청각 자극, 항문으로 음식과 물 투입하기, 힘든 포즈로 버티기 등 모멸감과 굴욕감을 주기 위한 수많은 고문이 포함됐다. 이런 고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이를 금지한 2009년까지 거의 10년간 이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뒤인) 2014년 12월, 미 상원 정보위원회(SSCI)는 “고문실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기밀로 분류된 총 6,700여 페이지의 보고서를 500 페이지로 요약한 것이다. 이 요약본조차도 CIA의 강력한 반발 뿐만 아니라 몇몇 공화당원과 심지어는 백악관의 반대에 부딪혀 겨우 국가 기밀 문서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고문실태 보고서는 미국이 자행한 고문이 CIA가 그동안 말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한데다 효과도 없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CIA와 많은 정부 고위 관리들은 기밀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수법 등을 통해 ‘고문이 매우 효과적’이고 ‘많은 테러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기여’했다며 일반 국민과 정치권을 의도적으로 호도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전에는 CIA를 지지했던 다이앤 파인스타인(민주당-캘리포니아) 상원정보위 위원장도 “그 어떤 정의를 적용하든, CIA가 구금자들을 고문한 것이 명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고문 프로그램 때문에 구속된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는) 2007년 미국의 물고문 사실을 처음으로 폭로한 전 CIA 요원 존 키리아쿠이다. 고문 프로그램의 허가와 실행과 관련되어선 기소조차 받은 사람이 없다. CIA가 국제법 위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구금자 심문 비디오 테이프를 말소한 사건도 아무런 조치없이 그저 덮였다.
9.11 이후 미 CIA가 테러용의자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수용시설이 자리했던 캠프 엑스레이.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캠프 엑스레이는 폐쇄됐지만 관타나모의 다른 미군 기지에는 아직도 수십여명의 테러용의자가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1 이후 미 CIA가 테러용의자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수용시설이 자리했던 캠프 엑스레이.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캠프 엑스레이는 폐쇄됐지만 관타나모의 다른 미군 기지에는 아직도 수십여명의 테러용의자가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AP/뉴시스
오바마 정부도 진실을 밝히는 데는 주저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 해, 오바마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해서 얻을 것을 아무 것도 없다”며 미국의 고문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들은 미국 역사의 이 어두운 시기를 그냥 잊어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고문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당한 고문은 그들의 몸과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다.
고문실태 보고서에는 미국이 비밀 고문 시설에 감금해 심문한 119명의 공식명단이 있다. 이 명단만으로도 미국의 고문 프로그램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개별 구금자에 관한 심층 보도를 가장 많이 한 ‘The 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s Rendition Project’에 따르면, 미국은 20여 개국에서 구금자들을 지목해, 60여국 정부의 도움으로 이들을 인도받고 구금했다.
미국은 이들을 테러 용의자라는 이유로 납치해서 구금했지만, 대부분의 구금자는 기소할 만한 죄가 없어 그냥 풀려났다. 구금자들은 빈약하거나 잘못된 정보 때문에 끌려온 경우가 많았고, 몇몇은 미국이 신원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실수로 끌려왔다. 고문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CIA의 자체 기준에 맞지 않는데도 납치,구금한 사람이 26명에 이른다.
미국은 비밀 고문 시설들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119명의 구금자 중 절반 이상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 있는 비밀 고문시설을 거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정보위의 조사과정에서 “코발트(COBALT)”라는 암호명으로 불리웠던 고문 시설이 바로 여기였다. 여기에 구금됐던 사람들은 이곳을 “암흑의 수용소”(Dark Prison)이라 불렀다. 상원정보위 조사 중, 한 CIA 요원은 이 곳을 “지하감옥”이라 표현하며, 이 구금시설 자체가 “강화된 심문기술”이라고 말했다.
알자지라 취재팀은 CIA에 코발트에 관한 몇가지 질문을 보냈다. 이곳에서 14년전 사망한 구금자의 가족을 위해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기도 했다. 그러자 CIA 대변인이 짤막한 답변을 보내왔다. 그 답변에는 “프로그램에 결점이 있었고 우리 당국이 실수를 하기도 했다. CIA는 이런 실수를 모두 인정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며, 수년간 많은 시정조치를 취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사망한 구금자의 시신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고문실태 보고서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상원은 구금자들의 증언을 들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알자지라의 취재팀은 연락 가능한 구금자들에게 인터뷰를 청했지만 이를 거절한 사람이 많았다.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너무 크거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해서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또, 안전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국가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알자지라는 10여 개국에 있는 14명의 구금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 동안 어떤 매체하고도 인터뷰를 하지 않은 사람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다. 코발트 구금시설에 갇혀 봤던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나 테드 크루즈 등은 이슬람국가(IS)를 무찌르기 위해 2001~2009년 사용된 고문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뤼셀 테러 이후, 트럼프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법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나는 물고문보다 훨씬 심한 방법도 쓸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래서인가. 알자지라가 인터뷰한 구금자 중 하나인 모하메드 아메드 알쇼레이야 벤 수드는 고문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우리가 당했다.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당할 것”이라 했다. 그는 “언젠가 미국이 자국민 중 특정 부류를 위험세력이라 규정하고 이들을 고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며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래는 그와 또 다른 구금자의 인터뷰 내용이다.
Prisoner #52: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
이름:모하메드 아메드 알쇼레이야 벤 수드
활동:리비아 이슬람 투쟁 그룹 (LIFG) 대원
LIFG는 1995년 만들어진 무장단체로 2011년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알카에다와 연계가 있다며 2004년 LIFG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LIFG는 지금도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벤 수드는 LIFG가 테러집단으로 규정되기 전인 2003년 4월, 부인과 딸과 함께 살던 페샤와르에 있는 집 앞에서 납치됐다. 그는 미국에 의해 16개월 정도 구금당했다가 리비아당국에 넘겨졌고, 리비아의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고 2011년에야 풀려났다.
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
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aljazeera.com
- 당신은 누구에 의해 감금되었는지 어떻게 알게되었나?
= 첫 번째 심문에서 나를 구금한 것이 누군지 알았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심문실에 들어가 서 있었더니 그들이 내 머리에 씌어져 있던 포대를 벗겼다. 그 곳엔 미국 정보당국과 여성 심문관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을 치며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너는 이제 미국의 포로야! 9·11 이후부터 너에게는 그 어떤 권리도 없어!”
- 수감시설(일명 코발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나?
= 코발트는 기본적으로 천장이 높은 창고였다. 그 곳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구역에는 심문-고문실이 있었고, 다른 구역에는 구금자들을 가두는 감방이 있었다.
- 다른 수감자나 방을 볼 수 있었나?
= 갇혀 있는 동안 다른 감방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감방문 아래쪽에 10x30cm의 구멍이 있었다. 그 외에는 어떤 창문도 없었다. 그냥 환기용으로 구멍 하나 뚫어준 것이었다. 그나마도 쇠창살이 있었다. 그 작은 구멍으로 사람이 탈출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건물 전체가 캄캄했다. 감방도 캄캄했다. 불빛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헤드램프나 플래쉬를 들고 감방에 왔었다. 그때 본 게 아니었다면 나는 내 감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볼 뻔했다. 그 때조차도 내가 본 것은 내 바로 옆에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음식도 그랬다.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뭔지 알았다. “아, 밥이구나” 하면서 말이다.
음악이 끔찍했는데, 그걸 어찌나 크게 틀었는지 어디서나 쩌렁쩌렁 울렸다. 락음악이었다. 끔찍했고 무서웠다.
- 감방에 대해서 또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 감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그마한 매트리스 하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바닥이었다. 기억에 제일 남는 것은 ‘화장실’이었다. 그냥 양동이였다. 뚜껑을 열면 냄새가 진동했다.
감방 주변은 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식을 받아보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쥐들이 먹어버린 것이다.
- 지금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나?
= 일년동안 같은 감방에 있었다. 감방의 세세한 부분까지 외웠고, 지금도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크기가 어땠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벽에 뭐라고 썼는지.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CIA에 의해 구금되어 고문을 받은 벤 수드가 그린 고문실 모습.
CIA에 의해 구금되어 고문을 받은 벤 수드가 그린 고문실 모습.ⓒaljazeera.com
천장에는 고리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거기에 온갖 포즈로 매달아 놓았다. 그 고리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정말 오랫동안 우리를 매달아 놓았다. 매번 지치고 힘든 포즈로 말이다. 우리는 손과 발이 고리에 묶인 채로 자기도 했다. 간수가 플래쉬를 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가 자는지 감시했다.
첫 5개월 동안 샤워를 못하게 했다. 고문받을 때 외에는 물을 만질 기회도 없었다. 머리도 못 잘랐다. 손톱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아무런 보살핌이나 치료 없이 그렇게 5개월을 보냈다. 5개월이 지난 2003년 9월 3일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손톱을 자르고 화장실을 쓰고 씻을 수 있게 해 줬다.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정말 힘든 5개월이었다. 모든 것이, 그 감방의 구석구석에 우리의 엄청난 고통이 새겨져 있다.
마시고 씻고 볼 일을 본 다음에 쓸 물을 1.5리터짜리 병 2개에 주었다. 3리터로 하루를 버텼다. 그들은 절대 깨끗한 물을 주지 않았다. 금속 병 2개에는 늘 더러운 물이 있었다.
- 천장의 고리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 달라.
= 난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래서 나를 고리에 매달 때는 두 손과 오른쪽 다리를 묶었다. 그래서 지금은 몸 왼쪽에 힘을 실어야 그나마 좀 편하다. 물론 왼쪽 다리를 깔고 앉으면 금방 다리에 감각이 사라진다. 지금도 조금만 걸어도 금방 통증을 느낀다.
우리가 있었던 감방 말고도 구금자들이 가끔 끌려갔던 더 작은 방이 있었다.
- 그 방을 본 적이 있나?
= 감방보다는 무덤이라고 불러야 맞다. 가장 높은 천장에 걸려 있는 막대기가 있었다. 그 막대기는 온통 피에 뒤덮여 있었다. 그 막대기에다가 우리를 매달았다. 발가락이 겨우 닿을 정도로 해서. 나도 하루 반 동안 그렇게 매달려 있던 적이 있다. 피가 아래로 몰려 부러진 다리가 퉁퉁 부었다. 무서웠다. 발가벗겨 매달린 채 하루 반 동안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고 기도도 못했다.
구금됐던 내내 가장 위험하다고 내가 느꼈던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짓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때리든 죽이든... 그들은 원하는대로 다 할 수 있었다. 인권도, 인륜도, 원칙도, 도덕도 없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들이 어디까지 갈지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을 감독하거나 그들의 책임을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들의 목표는 하나였던 것 같다. 우리의 기를 꺾는 것. 우리의 의지와 정신을 완전히 꺾고 우리가 모든 것에 희망을 잃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 같다.
Prisoner #55:Ammar al-Baluchi
이름:아마르 알발루치
활동:9·11의 총기획자로 알려진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의 조카.
알 발루치는 9·11 당시의 여객기 납치범들에게 돈을 건네준 혐의를 받았다. 그는 2003년 고국인 파키스탄에서 납치됐다. 그 후 코발트 구금시설에서 고문을 받다가 쿠바에 있는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송되어 현재까지 13년째 구금돼 있다.
알발루치는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낸 36명의 구금자 중 하나이다. 최근까지도 미국은 구금자들의 기억조차 기밀로 묶어놨었다. 알발루치의 변호인 제임스 코넬에 따르면, 고문실태 보고서가 나온 이후 이런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알자지라는 알발루치에게 자신이 당한 고문과 관련된 질문을 보냈다. 그 중 몇 몇은 알발루치가 수기로 답변을 작성했고 몇몇의 답변은 검열을 거친 후 미국 정부가 타이핑을 해서 보내왔다. 답변을 안 했거나 답변을 했는데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질문도 있었다.
알발루치는 논란이 됐던 미국 스릴러 액션 영화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의 첫 장면에서 미국이 고문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됐다는 구금자의 실제 모델이다. 이처럼 CIA는 ‘강화된 심문기술’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발루치를 예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었음은 상원의 고문실태 보고서로 이미 드러났다.
Ammar al-Baluchi
Ammar al-Baluchiⓒaljazeera.com
아래는 알발루치가 직접 한 첫 번째 인터뷰이다.
- ‘심문’받을 때 물이 어떻게 쓰였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 물고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얼음물 고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큰 천 위에 세워놨다. 이를 ‘방수포’라 부른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내가 넘어질 때까지 나를 때렸고 쓰러지고 나면 반듯이 눕혔다. 그 이후 네 사람이 방수포의 귀퉁이를 하나씩 잡아 올려 내가 방수포의 가운데에 가면 그들은 내 얼굴에 얼음물을 부었다.
내 몸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고 얼음물이 부어지기도 전에 이미 너무 추웠기 때문에 얼음물은 차갑다 못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한 사람이 내 얼굴에 얼음물을 붓는 동안, 네 사람은 자기가 잡고 있는 방수포의 귀퉁이를 내리고 올리며 얼음물을 이리 저리로 몰았다. 고인 물 밖으로 얼굴이 나오면 나는 숨을 들이쉬려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다시 귀퉁이를 들어올려 얼음으로 내 몸통을 덮고 얼굴에 얼음물을 다시 들이부었다. 공기는 못 들이마시고 나는 얼음물만 먹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 후 그 방수포로 내 시신을 싸려고 한다고 나는 확신했다.
- ‘잠 안 재우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내가 굶주리고 거의 얼어 죽을 지경에서 나체의 상태로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돼 있는데, 그들은 며칠씩 나에게 잠을 못 자게 했다. 아주 고통스러운 포즈로 나에게 수갑을 채우거나 나를 묶었다. 그래도 나는 잠을 자려 했다. 하지만 잠이 들 때마다 그들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때렸다. 문쪽에서 사람 기척이 들리면, 나는 그들이 내가 잠든 줄 알고 나를 때리려고 온다고 생각했다. 나를 때리고 나면 그들은 나에게 다시는 잠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나를 다시 묶어 놓은 다음에 나가곤 했다.
수없이 얻어 맞다 보니 잠과 통증을 등치하게 됐다. 그들은 내가 잠을 못자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깨어있도록 나를 훈련시켰다.
- CIA의 심문을 받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한가지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 2003년 5월 말인가 6월초 쯤이다. CIA 고문실에 끌려간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그들이 내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는 반복적으로 내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매번 셀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했다. 머리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들이 내 머리를 계속 부딪칠수록 이 불빛이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 속에 강한 전류를 느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곤 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다른 장소에 옮겨져 있었다. 불빛이 전혀 없는 어둡고 차가운 감방의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 CIA의 프로그램을 고안한 사람들이나 당신을 심문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내가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나는 내게 가한 고문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보았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나보다도 더 괴로워했다. 나에게는 신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잔인함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유별날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마친 후면,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이 마치 친구인 양 와서 말을 걸곤 했다. 자기네가 누굴 위해서 일하는 것 같냐고. 내가 “FBI”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나를 고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내게 직접 물어볼 때도 있었다! 나는 나를 고문한 사람들의 인간성과 비인간성 모두를 봤다.
나를 고문한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 나를 취조했다. 내가 있던 각종 구금시설에서 150명 정도를 만난 것 같다. 온갖 전문가들이 다 왔다. 로켓 전문가가 와서 내게 로켓에 대해 물었다. 알카에다의 난장이에 대해 알고 싶다며 난장이까지 보냈다! 나는 그 모두와 상대했고 그들이 듣고 싶어할 것 같은 모든 얘기를 다 해줬다.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날 심문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수백가지 질문을 해대는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에 불과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내가 그들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나는 영원히 그들의 수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고문실태 보고서를 보니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CIA가 나에 대한 관할권(operational control)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난 군사법정에서 CIA가 관여하고 있음을 봤다. 그리고 군사법원에 서 있는 CIA 통역관을 보는 순간,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의 협박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나지 않은 악몽 : CIA의 고문 들여다보기
정은선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6-04-03 19:50:51
이 기사는 0번 공유됐습니다
지난 달은 미 CIA가 다시금 ‘고문’이라는 악몽으로 빠져들어간 때였다. 오바마의 쿠바 방문과 함께 관타나모의 불법 구금시설이 재조명을 받았고, 28일에는 영국 가디언이 CIA가 성적 수치심을 주기 위해 촬영한 테러용의자의 나체 사진 1만4000장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CIA가 어떻게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고문했는지, 또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 들어서 CIA의 고문은 다시 불법화되었지만, 관련 증거는 공개되지 않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고문 행위에 대한 처벌은 아예 시도되지도 않았다. 알자지라는 지난달 27일 이와 관련한 영상보도물을 공개했다. 관련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원문은 The dark prisoners:Inside the CIA's torture programm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돌보다 강하고 꽃보다 여리다는 속담이 있다”
- 하비브 라흐만, CIA 구금 하에 죽은 굴 라흐만의 형
2001년 9·11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며칠만에,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미 중앙정보국(CIA)에게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구금할 권한을 줬다. 그리고 같은 해, 법무부의 변호사들은 고문과는 법적 지위가 다른 이른바 “강화된 심문기술”(enhanced interrogation)에 관한 첫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연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비밀 구금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됐다.
미국은 이내 세계 곳곳에 CIA의 비밀 고문시설(일명 ‘블랙사이트’ black site)을 만들고 테러리스트로 의심한 사람들을 납치-이송해 와서 구금한 후 온갖 악랄한 학대를 가했다. 여기엔 잠 안 재우기, 물고문, 감각 차단, 과잉 청각 자극, 항문으로 음식과 물 투입하기, 힘든 포즈로 버티기 등 모멸감과 굴욕감을 주기 위한 수많은 고문이 포함됐다. 이런 고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이를 금지한 2009년까지 거의 10년간 이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뒤인) 2014년 12월, 미 상원 정보위원회(SSCI)는 “고문실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기밀로 분류된 총 6,700여 페이지의 보고서를 500 페이지로 요약한 것이다. 이 요약본조차도 CIA의 강력한 반발 뿐만 아니라 몇몇 공화당원과 심지어는 백악관의 반대에 부딪혀 겨우 국가 기밀 문서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고문실태 보고서는 미국이 자행한 고문이 CIA가 그동안 말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한데다 효과도 없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CIA와 많은 정부 고위 관리들은 기밀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수법 등을 통해 ‘고문이 매우 효과적’이고 ‘많은 테러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기여’했다며 일반 국민과 정치권을 의도적으로 호도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전에는 CIA를 지지했던 다이앤 파인스타인(민주당-캘리포니아) 상원정보위 위원장도 “그 어떤 정의를 적용하든, CIA가 구금자들을 고문한 것이 명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고문 프로그램 때문에 구속된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는) 2007년 미국의 물고문 사실을 처음으로 폭로한 전 CIA 요원 존 키리아쿠이다. 고문 프로그램의 허가와 실행과 관련되어선 기소조차 받은 사람이 없다. CIA가 국제법 위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구금자 심문 비디오 테이프를 말소한 사건도 아무런 조치없이 그저 덮였다.
9.11 이후 미 CIA가 테러용의자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수용시설이 자리했던 캠프 엑스레이.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캠프 엑스레이는 폐쇄됐지만 관타나모의 다른 미군 기지에는 아직도 수십여명의 테러용의자가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1 이후 미 CIA가 테러용의자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수용시설이 자리했던 캠프 엑스레이.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캠프 엑스레이는 폐쇄됐지만 관타나모의 다른 미군 기지에는 아직도 수십여명의 테러용의자가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AP/뉴시스
오바마 정부도 진실을 밝히는 데는 주저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 해, 오바마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해서 얻을 것을 아무 것도 없다”며 미국의 고문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들은 미국 역사의 이 어두운 시기를 그냥 잊어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 고문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당한 고문은 그들의 몸과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다.
고문실태 보고서에는 미국이 비밀 고문 시설에 감금해 심문한 119명의 공식명단이 있다. 이 명단만으로도 미국의 고문 프로그램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개별 구금자에 관한 심층 보도를 가장 많이 한 ‘The 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s Rendition Project’에 따르면, 미국은 20여 개국에서 구금자들을 지목해, 60여국 정부의 도움으로 이들을 인도받고 구금했다.
미국은 이들을 테러 용의자라는 이유로 납치해서 구금했지만, 대부분의 구금자는 기소할 만한 죄가 없어 그냥 풀려났다. 구금자들은 빈약하거나 잘못된 정보 때문에 끌려온 경우가 많았고, 몇몇은 미국이 신원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실수로 끌려왔다. 고문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CIA의 자체 기준에 맞지 않는데도 납치,구금한 사람이 26명에 이른다.
미국은 비밀 고문 시설들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119명의 구금자 중 절반 이상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 있는 비밀 고문시설을 거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정보위의 조사과정에서 “코발트(COBALT)”라는 암호명으로 불리웠던 고문 시설이 바로 여기였다. 여기에 구금됐던 사람들은 이곳을 “암흑의 수용소”(Dark Prison)이라 불렀다. 상원정보위 조사 중, 한 CIA 요원은 이 곳을 “지하감옥”이라 표현하며, 이 구금시설 자체가 “강화된 심문기술”이라고 말했다.
알자지라 취재팀은 CIA에 코발트에 관한 몇가지 질문을 보냈다. 이곳에서 14년전 사망한 구금자의 가족을 위해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기도 했다. 그러자 CIA 대변인이 짤막한 답변을 보내왔다. 그 답변에는 “프로그램에 결점이 있었고 우리 당국이 실수를 하기도 했다. CIA는 이런 실수를 모두 인정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며, 수년간 많은 시정조치를 취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사망한 구금자의 시신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고문실태 보고서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상원은 구금자들의 증언을 들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알자지라의 취재팀은 연락 가능한 구금자들에게 인터뷰를 청했지만 이를 거절한 사람이 많았다.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너무 크거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해서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또, 안전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국가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알자지라는 10여 개국에 있는 14명의 구금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 동안 어떤 매체하고도 인터뷰를 하지 않은 사람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다. 코발트 구금시설에 갇혀 봤던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나 테드 크루즈 등은 이슬람국가(IS)를 무찌르기 위해 2001~2009년 사용된 고문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뤼셀 테러 이후, 트럼프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법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나는 물고문보다 훨씬 심한 방법도 쓸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래서인가. 알자지라가 인터뷰한 구금자 중 하나인 모하메드 아메드 알쇼레이야 벤 수드는 고문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우리가 당했다.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당할 것”이라 했다. 그는 “언젠가 미국이 자국민 중 특정 부류를 위험세력이라 규정하고 이들을 고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며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래는 그와 또 다른 구금자의 인터뷰 내용이다.
Prisoner #52: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
이름:모하메드 아메드 알쇼레이야 벤 수드
활동:리비아 이슬람 투쟁 그룹 (LIFG) 대원
LIFG는 1995년 만들어진 무장단체로 2011년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알카에다와 연계가 있다며 2004년 LIFG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LIFG는 지금도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벤 수드는 LIFG가 테러집단으로 규정되기 전인 2003년 4월, 부인과 딸과 함께 살던 페샤와르에 있는 집 앞에서 납치됐다. 그는 미국에 의해 16개월 정도 구금당했다가 리비아당국에 넘겨졌고, 리비아의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고 2011년에야 풀려났다.
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
Mohamed Ahmed al-Shoreiya Ben Soudⓒaljazeera.com
- 당신은 누구에 의해 감금되었는지 어떻게 알게되었나?
= 첫 번째 심문에서 나를 구금한 것이 누군지 알았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심문실에 들어가 서 있었더니 그들이 내 머리에 씌어져 있던 포대를 벗겼다. 그 곳엔 미국 정보당국과 여성 심문관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을 치며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너는 이제 미국의 포로야! 9·11 이후부터 너에게는 그 어떤 권리도 없어!”
- 수감시설(일명 코발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나?
= 코발트는 기본적으로 천장이 높은 창고였다. 그 곳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구역에는 심문-고문실이 있었고, 다른 구역에는 구금자들을 가두는 감방이 있었다.
- 다른 수감자나 방을 볼 수 있었나?
= 갇혀 있는 동안 다른 감방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감방문 아래쪽에 10x30cm의 구멍이 있었다. 그 외에는 어떤 창문도 없었다. 그냥 환기용으로 구멍 하나 뚫어준 것이었다. 그나마도 쇠창살이 있었다. 그 작은 구멍으로 사람이 탈출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건물 전체가 캄캄했다. 감방도 캄캄했다. 불빛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헤드램프나 플래쉬를 들고 감방에 왔었다. 그때 본 게 아니었다면 나는 내 감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볼 뻔했다. 그 때조차도 내가 본 것은 내 바로 옆에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음식도 그랬다.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뭔지 알았다. “아, 밥이구나” 하면서 말이다.
음악이 끔찍했는데, 그걸 어찌나 크게 틀었는지 어디서나 쩌렁쩌렁 울렸다. 락음악이었다. 끔찍했고 무서웠다.
- 감방에 대해서 또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 감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그마한 매트리스 하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바닥이었다. 기억에 제일 남는 것은 ‘화장실’이었다. 그냥 양동이였다. 뚜껑을 열면 냄새가 진동했다.
감방 주변은 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식을 받아보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쥐들이 먹어버린 것이다.
- 지금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나?
= 일년동안 같은 감방에 있었다. 감방의 세세한 부분까지 외웠고, 지금도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크기가 어땠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벽에 뭐라고 썼는지.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CIA에 의해 구금되어 고문을 받은 벤 수드가 그린 고문실 모습.
CIA에 의해 구금되어 고문을 받은 벤 수드가 그린 고문실 모습.ⓒaljazeera.com
천장에는 고리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거기에 온갖 포즈로 매달아 놓았다. 그 고리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정말 오랫동안 우리를 매달아 놓았다. 매번 지치고 힘든 포즈로 말이다. 우리는 손과 발이 고리에 묶인 채로 자기도 했다. 간수가 플래쉬를 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가 자는지 감시했다.
첫 5개월 동안 샤워를 못하게 했다. 고문받을 때 외에는 물을 만질 기회도 없었다. 머리도 못 잘랐다. 손톱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아무런 보살핌이나 치료 없이 그렇게 5개월을 보냈다. 5개월이 지난 2003년 9월 3일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손톱을 자르고 화장실을 쓰고 씻을 수 있게 해 줬다.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정말 힘든 5개월이었다. 모든 것이, 그 감방의 구석구석에 우리의 엄청난 고통이 새겨져 있다.
마시고 씻고 볼 일을 본 다음에 쓸 물을 1.5리터짜리 병 2개에 주었다. 3리터로 하루를 버텼다. 그들은 절대 깨끗한 물을 주지 않았다. 금속 병 2개에는 늘 더러운 물이 있었다.
- 천장의 고리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 달라.
= 난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래서 나를 고리에 매달 때는 두 손과 오른쪽 다리를 묶었다. 그래서 지금은 몸 왼쪽에 힘을 실어야 그나마 좀 편하다. 물론 왼쪽 다리를 깔고 앉으면 금방 다리에 감각이 사라진다. 지금도 조금만 걸어도 금방 통증을 느낀다.
우리가 있었던 감방 말고도 구금자들이 가끔 끌려갔던 더 작은 방이 있었다.
- 그 방을 본 적이 있나?
= 감방보다는 무덤이라고 불러야 맞다. 가장 높은 천장에 걸려 있는 막대기가 있었다. 그 막대기는 온통 피에 뒤덮여 있었다. 그 막대기에다가 우리를 매달았다. 발가락이 겨우 닿을 정도로 해서. 나도 하루 반 동안 그렇게 매달려 있던 적이 있다. 피가 아래로 몰려 부러진 다리가 퉁퉁 부었다. 무서웠다. 발가벗겨 매달린 채 하루 반 동안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고 기도도 못했다.
구금됐던 내내 가장 위험하다고 내가 느꼈던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짓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때리든 죽이든... 그들은 원하는대로 다 할 수 있었다. 인권도, 인륜도, 원칙도, 도덕도 없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들이 어디까지 갈지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을 감독하거나 그들의 책임을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들의 목표는 하나였던 것 같다. 우리의 기를 꺾는 것. 우리의 의지와 정신을 완전히 꺾고 우리가 모든 것에 희망을 잃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 같다.
Prisoner #55:Ammar al-Baluchi
이름:아마르 알발루치
활동:9·11의 총기획자로 알려진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의 조카.
알 발루치는 9·11 당시의 여객기 납치범들에게 돈을 건네준 혐의를 받았다. 그는 2003년 고국인 파키스탄에서 납치됐다. 그 후 코발트 구금시설에서 고문을 받다가 쿠바에 있는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송되어 현재까지 13년째 구금돼 있다.
알발루치는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낸 36명의 구금자 중 하나이다. 최근까지도 미국은 구금자들의 기억조차 기밀로 묶어놨었다. 알발루치의 변호인 제임스 코넬에 따르면, 고문실태 보고서가 나온 이후 이런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알자지라는 알발루치에게 자신이 당한 고문과 관련된 질문을 보냈다. 그 중 몇 몇은 알발루치가 수기로 답변을 작성했고 몇몇의 답변은 검열을 거친 후 미국 정부가 타이핑을 해서 보내왔다. 답변을 안 했거나 답변을 했는데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질문도 있었다.
알발루치는 논란이 됐던 미국 스릴러 액션 영화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의 첫 장면에서 미국이 고문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됐다는 구금자의 실제 모델이다. 이처럼 CIA는 ‘강화된 심문기술’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발루치를 예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었음은 상원의 고문실태 보고서로 이미 드러났다.
Ammar al-Baluchi
Ammar al-Baluchiⓒaljazeera.com
아래는 알발루치가 직접 한 첫 번째 인터뷰이다.
- ‘심문’받을 때 물이 어떻게 쓰였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 물고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얼음물 고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큰 천 위에 세워놨다. 이를 ‘방수포’라 부른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내가 넘어질 때까지 나를 때렸고 쓰러지고 나면 반듯이 눕혔다. 그 이후 네 사람이 방수포의 귀퉁이를 하나씩 잡아 올려 내가 방수포의 가운데에 가면 그들은 내 얼굴에 얼음물을 부었다.
내 몸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고 얼음물이 부어지기도 전에 이미 너무 추웠기 때문에 얼음물은 차갑다 못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한 사람이 내 얼굴에 얼음물을 붓는 동안, 네 사람은 자기가 잡고 있는 방수포의 귀퉁이를 내리고 올리며 얼음물을 이리 저리로 몰았다. 고인 물 밖으로 얼굴이 나오면 나는 숨을 들이쉬려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다시 귀퉁이를 들어올려 얼음으로 내 몸통을 덮고 얼굴에 얼음물을 다시 들이부었다. 공기는 못 들이마시고 나는 얼음물만 먹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 후 그 방수포로 내 시신을 싸려고 한다고 나는 확신했다.
- ‘잠 안 재우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내가 굶주리고 거의 얼어 죽을 지경에서 나체의 상태로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돼 있는데, 그들은 며칠씩 나에게 잠을 못 자게 했다. 아주 고통스러운 포즈로 나에게 수갑을 채우거나 나를 묶었다. 그래도 나는 잠을 자려 했다. 하지만 잠이 들 때마다 그들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때렸다. 문쪽에서 사람 기척이 들리면, 나는 그들이 내가 잠든 줄 알고 나를 때리려고 온다고 생각했다. 나를 때리고 나면 그들은 나에게 다시는 잠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나를 다시 묶어 놓은 다음에 나가곤 했다.
수없이 얻어 맞다 보니 잠과 통증을 등치하게 됐다. 그들은 내가 잠을 못자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깨어있도록 나를 훈련시켰다.
- CIA의 심문을 받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한가지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 2003년 5월 말인가 6월초 쯤이다. CIA 고문실에 끌려간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그들이 내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는 반복적으로 내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매번 셀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했다. 머리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들이 내 머리를 계속 부딪칠수록 이 불빛이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 속에 강한 전류를 느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곤 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다른 장소에 옮겨져 있었다. 불빛이 전혀 없는 어둡고 차가운 감방의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 CIA의 프로그램을 고안한 사람들이나 당신을 심문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내가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나는 내게 가한 고문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보았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나보다도 더 괴로워했다. 나에게는 신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잔인함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유별날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마친 후면,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이 마치 친구인 양 와서 말을 걸곤 했다. 자기네가 누굴 위해서 일하는 것 같냐고. 내가 “FBI”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나를 고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내게 직접 물어볼 때도 있었다! 나는 나를 고문한 사람들의 인간성과 비인간성 모두를 봤다.
나를 고문한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 나를 취조했다. 내가 있던 각종 구금시설에서 150명 정도를 만난 것 같다. 온갖 전문가들이 다 왔다. 로켓 전문가가 와서 내게 로켓에 대해 물었다. 알카에다의 난장이에 대해 알고 싶다며 난장이까지 보냈다! 나는 그 모두와 상대했고 그들이 듣고 싶어할 것 같은 모든 얘기를 다 해줬다.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날 심문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수백가지 질문을 해대는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에 불과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내가 그들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나는 영원히 그들의 수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고문실태 보고서를 보니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CIA가 나에 대한 관할권(operational control)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난 군사법정에서 CIA가 관여하고 있음을 봤다. 그리고 군사법원에 서 있는 CIA 통역관을 보는 순간,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의 협박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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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미국을 추종하는 대형교회 목사님들 부디 식음을 전폐하심이 가한줄로 아뢰오~!!!!! 무슨말이냐면? 굶어라 굶어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