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5권 2. 공산당원의 영예를 지니기까지 - 김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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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4-07 11:04 조회2,0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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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원의 영예를 지니기까지
김 성 국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5성상에 걸치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을 훌륭한 혁명가로 육성하시였다.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진행되는 가렬한 전투마당에서, 생눈길을 헤치면서 행군하는 로상에서 그리고 수림속밀영의 우등불곁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백전백승의 혁명사상으로 우리를 무장시켰으며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과업과 그 방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나는 16살때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나를 보시고 《어떠한 곤난도 뚫고나갈수 있다니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같이 잘 싸우자.》고 격려하여주시였다.
그때부터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손길에서 자랐고 그이의 끊임없는 지도를 받아 공산당원의 영예를 지니게까지 되였다.
* *
1938년 몽강현 남패자회의후 방면군편성을 선포한날 저녁이라고 기억된다.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지 비교적 오래되며 대원들속에서 신망이 높은 동무들이 한데 모이더니 회의에 간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나갔다.
무슨 회의가 있어서 어디로 가는것일가 하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저 동무들이 바로 공산당원이므로 당회의에 가는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무척 미더워보이며 부러운 감이 들었다.
공산당원! 얼마나 흠모해오고 동경하여 마지않던 고상한 칭호인가!
혁명을 위하여 무기가 요구될 때에는 자기의 목숨을 바쳐 단 한자루의 총과도 서슴없이 바꾸었으며 야장간풀무와 녹쓴 쇠쪼각으로 폭탄도 만들어낸 그들, 교수대우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지켜 입을 꼭 다문 그들, 나는 그들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백절불굴의 의지를 배우고 본받으며 끝까지 수령님과 혁명에 충실할것을 단단히 결심하고 총을 멨으나 스스로 자기의 준비정도를 돌이켜볼 때 너무나 멀리 뒤떨어지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생활의 1년 남짓한 동안에 나는 동지들의 방조를 받으며 싸울줄 알게 되였으며 문맹을 퇴치하고 쉬운 정치서적도 읽을수 있게 되였다.
(우리는 적과 싸움만 하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대중을 조직동원할줄 아는 혁명투사가 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해서는 꾸준히 배워야 한다. 조선인민혁명군에서는 아는 사람은 가르쳐줄 의무가 있고 모르는 사람은 배울 의무가 있다.)
동지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투쟁의 첫걸음을 내여디딘 나의 생활과 학습을 꾸준히 방조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청원의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성장하면 할수록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 더 훌륭히 싸워야겠다는 욕망이 끓어옳랐다. 당원이 되고싶은 의욕은 더욱 강렬하게 일어났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날밤 늦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당원들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나는 나의 곁에 잠자리를 보는 한천추동무에게 속심을 털어놓았다.
《동무는 어떤 길을 걸어 당원이 되였는가?》 나는 두서도 가릴사이없이 이렇게 마구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천추동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뜻밖의 질문을 받게 된 그는 당장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으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였다.
얼마후에야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당원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도 성국동무처럼 가난한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이다.
이러한 계급적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과 민족의 리익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원쑤를 증오하여 용감히 싸운다면 당원으로 될수 있다. 성국동무도 능히 당원이 될수 있다.
(머슴군의 아들로 태여나 머슴군으로 자라난 나도 당원이 될수 있다!)
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는 길, 이 길이 바로 철천지 원쑤 일제놈들에게 더 무서운 타격을 주며 조국을 더 빨리 찾게 하는 길이라는것을 생각하니 눈은 더욱 또렷또렷해졌다.
나는 이날밤 먼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하였다.
행군이 계속되던 그후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를 찾으신다는 련락이 왔다. 사령부에 도착한 나는 그이께서 가리키시는대로 그이의 몸가까이에 앉았다. 그이께서는 유격대생활이 힘들지 않는가고 물으셨다.
나는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힘있게 말씀드렸다.
《힘들지 않을리 있소. 6~7년씩 단련된 로대원들도 힘겨워하는 때가 있는데. 그런데 듣자니 성국동무가 당원이 되고싶어한다지?》
나는 그때 어떻게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동무들에게 턱없이 졸라대며 물은 말이 위대한 수령님께까지 알려질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다.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앉아있는 나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빨찌산대원들은 모두가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려고 자진해서 입대한 동무들이다. 장기간의 무장투쟁행정을 통해서 이 사람들속에서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육성되였다. 또한 성국동무처럼 공청원이 되여 장차 당에 입당하기 위하여 투쟁속에서 자신을 꾸준히 단련하는 동무들도 많다.
당원의 영예를 지니기 위하여 분발하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누구나가 다 그런 마음을 튼튼히 가져야 한다.
당원이란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다 바쳐 싸울것을 결의하고 당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다시말해서 당원은 당과 인민을 위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만난을 극복하며 투쟁하는 혁명투사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을 위하여 군중의 앞장에 서서 군중을 이끌고나가는 선진투사이다.
그렇기때문에 당원의 영예는 받고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물건나누어주듯 주는것이 아니며 누구나 다 받을수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환경속에서도 계급적립장을 철저히 고수할줄 아는 그런 일군으로, 인민대중을 혁명의 승리에로 조직동원할줄 아는 그런 일군으로 되기 위하여 투쟁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맑스-레닌주의리론으로 철저히 무장할 때만이 당원이 될수 있다. 성국동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자신을 단련함에 있어서 어디에 더 힘을 기울이며 특히 학습을 추켜세우기 위하여 어떻게 생활조직을 해야겠다는것 등을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심장으로 들었다.
나는 어린 한 대원의 심정과 그가 념원하는바를 이처럼 심중히 통찰하시고 따뜻이 가르쳐주시는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를 사령관으로 모신 행복과 영광으로 해서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이상 못해낼 일이 없으며 두려울것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교시를 심장에 아로새기고 투쟁의 길에서 마음에 채찍질하고 학습하면서 하루에 열자씩 외우며 읽던 나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아직은 투쟁의 첫걸음을 내여디딘데 불과한 내가 당원들의 모범을 따르며 그들의 높은 혁명정신과 고상한 품성을 소유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힘겨운 수많은 시련을 견디여내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려울 때일수록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나를 도와주시였고 이끌어주시였다.
1938년말, 몽강으로부터 장백지구에로의 어려운 행군이 계속되던 어느날 나는 뜻하지 않게 사고를 저질렀다.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지고있는 이 행군때에 우리는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추격하는 적들과 싸우면서 눈길을 헤쳐가며 눈속에서 자고 눈을 먹으며 허기증을 참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행군뒤에 보초근무에 나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앞을 주시하였다. 얼마동안 시간이 지난 후 백포를 쓴 사람이 얼마 멀지 않은곳에서 얼른 스쳐지나가는것이 감촉되였다. 눈을 비비며 황급히 다시 앞을 주시해보니 분명히 백포를 쓴 사람이 내가 위치한 곳으로 은밀히 다가오는것으로 느껴졌다.
(적이다!) 이렇게 단정한 순간 나는 발사했다. 총소리와 함께 비로소 제정신이 들면서 앞을 바라보던 나는 기가 막혔다. 그것은 백포를 쓴 사람이 아니라 눈에 덮인 나무그루였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무거운 책임감이 사정없이 나의 심장을 때렸다.
소대장이 초소에 달려왔다,
《적들이 어느쪽으로 올라오오?》
이렇게 다급하게 묻던 소대장은 대답대신 자기앞에 얼굴을 떨구고 선 나를 보자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쓴맛을 다시였다.
극도로 피곤한 대원들이 나의 잘못으로 해서 휴식할수 없게 된것은 물론 그보다 더 엄중한것은 적들에게 아군의 위치를 로출시킨 사실이였다. 전부대는 그날밤 휴식하지 못한채 다시 행군의 길을 재촉하였다.
소대장은 엄격히 책임을 추궁한후 해이성에 대하여 지적하고 나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이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였으며 유격대의 엄격한 규률이기도 하였다. 앞으로 보다 더 큰 책벌이 내리리라는것도 각오해야 하였다.
사고발생의 전말을 확정하기 위한 거듭되는 담화과정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반성하는데 무척 애썼다. 생각할수록 만회할수 없는 과오를 범하였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였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치는것은 나에게 주신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스스로가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에 잠기였다.
사고를 친 때로부터 4일이 지난후 련대에 내려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찾으시였다.
그이앞에 무슨 면목으로 나서며 무엇이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고의 전말에 대해서와 그후의 나의 생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물으시였다.
이때 나에게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는 오늘까지도 가슴깊이 간직하고있다.
성국동무가 범한 과오는 매우 엄중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나어린 동무가 그런 과오를 저지르게된데는 부대를 책임진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벌써 수일동안 낟알구경은 전혀 못하고 눈길을 헤치며 행군하다가 보초까지 서게 되니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혁명을 하는 사람이 그런 곤난을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어찌겠는가. 그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공산주의자는 맡겨진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생명도 서슴없이 바칠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 생명을 바치는것보다 피곤을 참는 일이 더 어렵겠는가.
공산주의사상의 위대한 생활력을 믿으며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확신할 때 어떤 곤난도 인내성있게 극복해나갈수 있는것이다.
만일 범한 과오로 해서 자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큰과오를 범할수 있다. 과오를 범하였을 때 공산주의자는 거기서 심중한 교훈을 찾고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보다 인내성있게, 완강하게 투쟁을 한다. 공산주의자는 산속에 있건 절해고도에 있건 혁명을 위하여 실망을 모르고 살아나가며 배워나간다.
성국동무는 이번 기회에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품성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만 목이 꽉 메여 한참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사령관동지, 제가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저에게 처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시면서 고무하여주실뿐이였다.
대렬에 돌아온지 얼마후에 소대장동무가 찾아서 가니 그는 나에게 총을 주었다. 소대장동무는 총을 받아쥐고 기뻐하는 나에게 이 총이 다시 돌아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사령부에서 나온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대장동무를 불러 나에게 총을 도로 주는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였다고 한다.
별빛도 총총한 숙영지의 밤, 그이께서 돌려주신 총을 틀어쥔 나의 두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였다.
이 총을 들고 범한 과오를 씻으며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충실히 싸우는 투사로 될것을 믿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신임에 나는 기어코 보답하리라고 다시금 맹세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쩍부쩍 솟아나고 앞길에 부닥치는 물과 불도 헤아리지 않을 힘과 자신이 생겼다.
나는 계속 원쑤를 무찌르면서 혁명적리론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힘차게 혁명의 험준한 한길로 내달리였다.
홍기하전투후 안도, 돈화방면으로의 진군을 앞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후방병원으로 후송할것을 지시하시였다. 나도 이 후송되는 대렬에 속해야 할 몸이였다. 나는 홍기하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었던것이다.
적들과 싸워야 하며 투쟁을 통하여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결코 대렬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 일을 알아차리신 그이께서는 나를 부르시고 앞으로도 계속 싸우기 위하여서는 우선 상처를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면서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하시였다.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투쟁의 대렬에서 떨어지고싶지는 않았다. 얼마후에 대오는 떠나게 되였다. 나도 대렬을 따라나섰다.
나는 아픔을 숨기며 걷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한걸음한걸음 옮겨디딜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몇시간을 실히 행군한 후 부대는 점심식사를 위하여 휴식하게 되였다.
점심식사가 다 준비되였을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부르시였다.
이번에는 영낙없이 후방병원으로 후송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이를 찾아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보시자 상처는 아프지 않은가, 따라오기가 힘들지 않은가고 물으셨다.
견딜만 하다는 나의 결심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죽그릇을 나의 앞에 내놓으시였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 대접하려고 대원들이 쒀드린것이라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더는 지체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렬에 돌아가서 먹겠습니다.》 라고 위대한 수령님께 말씀드리고 나는 급히 일어서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의 손을 잡으시고 도로 앉히시였다. 나는 몇번이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며 명령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권하시였다.
이이상 거절하면 그이를 더 괴롭힐뿐이라고 생각한 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어찌 한공기의 죽이였으랴!
그것은 그이의 깊고깊은 어버이정이였으며 지극한 사랑이였다.
죽을 먹고있는 나를 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에서 나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미소를 보았다. 그때의 내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수 있으랴.
다만 나는 위대한 수령님께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 충직하리라는 굳은 결의를 다졌을뿐이다.
백배의 힘과 용기를 얻은 나는 그 모진 고통을 용감히 이겨내여 끝내 대오를 따라가고야말았다.
그후 수많은 전투들을 비롯하여 중중첩첩한 곤난을 돌파하는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 더욱더 단련되여갔다.
어엿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손길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되는 전투를 지휘하시면서 전체 부대를 일일이 돌아보시는 그처럼 바쁘신 나날에도 시간을 내시여 나에 대한 개별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투에서 용감하고 적을 많이 잡아 공로를 세웠다하여 당원이 될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졌다고는 볼수 없다고 하시며 공산당원이 되려면 학습도 잘하여 자기의 정치리론수준을 부단히 높여야 한다는 말씀을 나에게 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원들의 정치학습을 지도하시는 한편 나의 학습을 위하여 보충적으로 하루에 꼭꼭 2시간씩 시간을 내시여 글을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이 특별히 바쁘실 때에는 다른 동무들에게 위임하여서까지 나의 학습을 방조하게 하셨다.
이렇게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끊임없는 지도와 동지들의 방조에 의하여 점차 입당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1941년 5월에 나의 입당문제를 심의하는 당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나는 영예로운 공산당원이 되였다.
나는 당원이 된 긍지감을 심장깊이 느끼면서 이날 당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의를 다지였다.
《지금부터 나는 평범한 한 전사가 아니다. 나는 수백만 근로대중을 향도하는 공산당의 한 당원이다. 공산당원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훼손시키지 않을것을, 그리고 우리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바칠것을 당앞에 엄숙히 맹세한다.》고.
김 성 국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5성상에 걸치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을 훌륭한 혁명가로 육성하시였다.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진행되는 가렬한 전투마당에서, 생눈길을 헤치면서 행군하는 로상에서 그리고 수림속밀영의 우등불곁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백전백승의 혁명사상으로 우리를 무장시켰으며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과업과 그 방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나는 16살때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나를 보시고 《어떠한 곤난도 뚫고나갈수 있다니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같이 잘 싸우자.》고 격려하여주시였다.
그때부터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손길에서 자랐고 그이의 끊임없는 지도를 받아 공산당원의 영예를 지니게까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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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몽강현 남패자회의후 방면군편성을 선포한날 저녁이라고 기억된다.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지 비교적 오래되며 대원들속에서 신망이 높은 동무들이 한데 모이더니 회의에 간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나갔다.
무슨 회의가 있어서 어디로 가는것일가 하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저 동무들이 바로 공산당원이므로 당회의에 가는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무척 미더워보이며 부러운 감이 들었다.
공산당원! 얼마나 흠모해오고 동경하여 마지않던 고상한 칭호인가!
혁명을 위하여 무기가 요구될 때에는 자기의 목숨을 바쳐 단 한자루의 총과도 서슴없이 바꾸었으며 야장간풀무와 녹쓴 쇠쪼각으로 폭탄도 만들어낸 그들, 교수대우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지켜 입을 꼭 다문 그들, 나는 그들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백절불굴의 의지를 배우고 본받으며 끝까지 수령님과 혁명에 충실할것을 단단히 결심하고 총을 멨으나 스스로 자기의 준비정도를 돌이켜볼 때 너무나 멀리 뒤떨어지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생활의 1년 남짓한 동안에 나는 동지들의 방조를 받으며 싸울줄 알게 되였으며 문맹을 퇴치하고 쉬운 정치서적도 읽을수 있게 되였다.
(우리는 적과 싸움만 하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대중을 조직동원할줄 아는 혁명투사가 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해서는 꾸준히 배워야 한다. 조선인민혁명군에서는 아는 사람은 가르쳐줄 의무가 있고 모르는 사람은 배울 의무가 있다.)
동지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투쟁의 첫걸음을 내여디딘 나의 생활과 학습을 꾸준히 방조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청원의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성장하면 할수록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 더 훌륭히 싸워야겠다는 욕망이 끓어옳랐다. 당원이 되고싶은 의욕은 더욱 강렬하게 일어났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날밤 늦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당원들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나는 나의 곁에 잠자리를 보는 한천추동무에게 속심을 털어놓았다.
《동무는 어떤 길을 걸어 당원이 되였는가?》 나는 두서도 가릴사이없이 이렇게 마구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천추동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뜻밖의 질문을 받게 된 그는 당장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으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였다.
얼마후에야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당원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도 성국동무처럼 가난한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이다.
이러한 계급적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과 민족의 리익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원쑤를 증오하여 용감히 싸운다면 당원으로 될수 있다. 성국동무도 능히 당원이 될수 있다.
(머슴군의 아들로 태여나 머슴군으로 자라난 나도 당원이 될수 있다!)
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는 길, 이 길이 바로 철천지 원쑤 일제놈들에게 더 무서운 타격을 주며 조국을 더 빨리 찾게 하는 길이라는것을 생각하니 눈은 더욱 또렷또렷해졌다.
나는 이날밤 먼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하였다.
행군이 계속되던 그후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를 찾으신다는 련락이 왔다. 사령부에 도착한 나는 그이께서 가리키시는대로 그이의 몸가까이에 앉았다. 그이께서는 유격대생활이 힘들지 않는가고 물으셨다.
나는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힘있게 말씀드렸다.
《힘들지 않을리 있소. 6~7년씩 단련된 로대원들도 힘겨워하는 때가 있는데. 그런데 듣자니 성국동무가 당원이 되고싶어한다지?》
나는 그때 어떻게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동무들에게 턱없이 졸라대며 물은 말이 위대한 수령님께까지 알려질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다.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앉아있는 나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빨찌산대원들은 모두가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려고 자진해서 입대한 동무들이다. 장기간의 무장투쟁행정을 통해서 이 사람들속에서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육성되였다. 또한 성국동무처럼 공청원이 되여 장차 당에 입당하기 위하여 투쟁속에서 자신을 꾸준히 단련하는 동무들도 많다.
당원의 영예를 지니기 위하여 분발하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누구나가 다 그런 마음을 튼튼히 가져야 한다.
당원이란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다 바쳐 싸울것을 결의하고 당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다시말해서 당원은 당과 인민을 위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만난을 극복하며 투쟁하는 혁명투사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을 위하여 군중의 앞장에 서서 군중을 이끌고나가는 선진투사이다.
그렇기때문에 당원의 영예는 받고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물건나누어주듯 주는것이 아니며 누구나 다 받을수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환경속에서도 계급적립장을 철저히 고수할줄 아는 그런 일군으로, 인민대중을 혁명의 승리에로 조직동원할줄 아는 그런 일군으로 되기 위하여 투쟁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맑스-레닌주의리론으로 철저히 무장할 때만이 당원이 될수 있다. 성국동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자신을 단련함에 있어서 어디에 더 힘을 기울이며 특히 학습을 추켜세우기 위하여 어떻게 생활조직을 해야겠다는것 등을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심장으로 들었다.
나는 어린 한 대원의 심정과 그가 념원하는바를 이처럼 심중히 통찰하시고 따뜻이 가르쳐주시는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를 사령관으로 모신 행복과 영광으로 해서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이상 못해낼 일이 없으며 두려울것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교시를 심장에 아로새기고 투쟁의 길에서 마음에 채찍질하고 학습하면서 하루에 열자씩 외우며 읽던 나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아직은 투쟁의 첫걸음을 내여디딘데 불과한 내가 당원들의 모범을 따르며 그들의 높은 혁명정신과 고상한 품성을 소유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힘겨운 수많은 시련을 견디여내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려울 때일수록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나를 도와주시였고 이끌어주시였다.
1938년말, 몽강으로부터 장백지구에로의 어려운 행군이 계속되던 어느날 나는 뜻하지 않게 사고를 저질렀다.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지고있는 이 행군때에 우리는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추격하는 적들과 싸우면서 눈길을 헤쳐가며 눈속에서 자고 눈을 먹으며 허기증을 참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행군뒤에 보초근무에 나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앞을 주시하였다. 얼마동안 시간이 지난 후 백포를 쓴 사람이 얼마 멀지 않은곳에서 얼른 스쳐지나가는것이 감촉되였다. 눈을 비비며 황급히 다시 앞을 주시해보니 분명히 백포를 쓴 사람이 내가 위치한 곳으로 은밀히 다가오는것으로 느껴졌다.
(적이다!) 이렇게 단정한 순간 나는 발사했다. 총소리와 함께 비로소 제정신이 들면서 앞을 바라보던 나는 기가 막혔다. 그것은 백포를 쓴 사람이 아니라 눈에 덮인 나무그루였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무거운 책임감이 사정없이 나의 심장을 때렸다.
소대장이 초소에 달려왔다,
《적들이 어느쪽으로 올라오오?》
이렇게 다급하게 묻던 소대장은 대답대신 자기앞에 얼굴을 떨구고 선 나를 보자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쓴맛을 다시였다.
극도로 피곤한 대원들이 나의 잘못으로 해서 휴식할수 없게 된것은 물론 그보다 더 엄중한것은 적들에게 아군의 위치를 로출시킨 사실이였다. 전부대는 그날밤 휴식하지 못한채 다시 행군의 길을 재촉하였다.
소대장은 엄격히 책임을 추궁한후 해이성에 대하여 지적하고 나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이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였으며 유격대의 엄격한 규률이기도 하였다. 앞으로 보다 더 큰 책벌이 내리리라는것도 각오해야 하였다.
사고발생의 전말을 확정하기 위한 거듭되는 담화과정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반성하는데 무척 애썼다. 생각할수록 만회할수 없는 과오를 범하였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였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치는것은 나에게 주신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스스로가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에 잠기였다.
사고를 친 때로부터 4일이 지난후 련대에 내려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찾으시였다.
그이앞에 무슨 면목으로 나서며 무엇이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고의 전말에 대해서와 그후의 나의 생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물으시였다.
이때 나에게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는 오늘까지도 가슴깊이 간직하고있다.
성국동무가 범한 과오는 매우 엄중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나어린 동무가 그런 과오를 저지르게된데는 부대를 책임진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벌써 수일동안 낟알구경은 전혀 못하고 눈길을 헤치며 행군하다가 보초까지 서게 되니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혁명을 하는 사람이 그런 곤난을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어찌겠는가. 그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공산주의자는 맡겨진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생명도 서슴없이 바칠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 생명을 바치는것보다 피곤을 참는 일이 더 어렵겠는가.
공산주의사상의 위대한 생활력을 믿으며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확신할 때 어떤 곤난도 인내성있게 극복해나갈수 있는것이다.
만일 범한 과오로 해서 자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큰과오를 범할수 있다. 과오를 범하였을 때 공산주의자는 거기서 심중한 교훈을 찾고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보다 인내성있게, 완강하게 투쟁을 한다. 공산주의자는 산속에 있건 절해고도에 있건 혁명을 위하여 실망을 모르고 살아나가며 배워나간다.
성국동무는 이번 기회에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품성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만 목이 꽉 메여 한참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사령관동지, 제가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저에게 처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시면서 고무하여주실뿐이였다.
대렬에 돌아온지 얼마후에 소대장동무가 찾아서 가니 그는 나에게 총을 주었다. 소대장동무는 총을 받아쥐고 기뻐하는 나에게 이 총이 다시 돌아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사령부에서 나온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대장동무를 불러 나에게 총을 도로 주는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였다고 한다.
별빛도 총총한 숙영지의 밤, 그이께서 돌려주신 총을 틀어쥔 나의 두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였다.
이 총을 들고 범한 과오를 씻으며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충실히 싸우는 투사로 될것을 믿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신임에 나는 기어코 보답하리라고 다시금 맹세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쩍부쩍 솟아나고 앞길에 부닥치는 물과 불도 헤아리지 않을 힘과 자신이 생겼다.
나는 계속 원쑤를 무찌르면서 혁명적리론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힘차게 혁명의 험준한 한길로 내달리였다.
홍기하전투후 안도, 돈화방면으로의 진군을 앞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후방병원으로 후송할것을 지시하시였다. 나도 이 후송되는 대렬에 속해야 할 몸이였다. 나는 홍기하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었던것이다.
적들과 싸워야 하며 투쟁을 통하여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결코 대렬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 일을 알아차리신 그이께서는 나를 부르시고 앞으로도 계속 싸우기 위하여서는 우선 상처를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면서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하시였다.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투쟁의 대렬에서 떨어지고싶지는 않았다. 얼마후에 대오는 떠나게 되였다. 나도 대렬을 따라나섰다.
나는 아픔을 숨기며 걷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한걸음한걸음 옮겨디딜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몇시간을 실히 행군한 후 부대는 점심식사를 위하여 휴식하게 되였다.
점심식사가 다 준비되였을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부르시였다.
이번에는 영낙없이 후방병원으로 후송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이를 찾아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를 보시자 상처는 아프지 않은가, 따라오기가 힘들지 않은가고 물으셨다.
견딜만 하다는 나의 결심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죽그릇을 나의 앞에 내놓으시였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 대접하려고 대원들이 쒀드린것이라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더는 지체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렬에 돌아가서 먹겠습니다.》 라고 위대한 수령님께 말씀드리고 나는 급히 일어서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의 손을 잡으시고 도로 앉히시였다. 나는 몇번이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며 명령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권하시였다.
이이상 거절하면 그이를 더 괴롭힐뿐이라고 생각한 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어찌 한공기의 죽이였으랴!
그것은 그이의 깊고깊은 어버이정이였으며 지극한 사랑이였다.
죽을 먹고있는 나를 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에서 나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미소를 보았다. 그때의 내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수 있으랴.
다만 나는 위대한 수령님께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 충직하리라는 굳은 결의를 다졌을뿐이다.
백배의 힘과 용기를 얻은 나는 그 모진 고통을 용감히 이겨내여 끝내 대오를 따라가고야말았다.
그후 수많은 전투들을 비롯하여 중중첩첩한 곤난을 돌파하는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 더욱더 단련되여갔다.
어엿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손길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되는 전투를 지휘하시면서 전체 부대를 일일이 돌아보시는 그처럼 바쁘신 나날에도 시간을 내시여 나에 대한 개별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투에서 용감하고 적을 많이 잡아 공로를 세웠다하여 당원이 될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졌다고는 볼수 없다고 하시며 공산당원이 되려면 학습도 잘하여 자기의 정치리론수준을 부단히 높여야 한다는 말씀을 나에게 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원들의 정치학습을 지도하시는 한편 나의 학습을 위하여 보충적으로 하루에 꼭꼭 2시간씩 시간을 내시여 글을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이 특별히 바쁘실 때에는 다른 동무들에게 위임하여서까지 나의 학습을 방조하게 하셨다.
이렇게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끊임없는 지도와 동지들의 방조에 의하여 점차 입당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1941년 5월에 나의 입당문제를 심의하는 당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나는 영예로운 공산당원이 되였다.
나는 당원이 된 긍지감을 심장깊이 느끼면서 이날 당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의를 다지였다.
《지금부터 나는 평범한 한 전사가 아니다. 나는 수백만 근로대중을 향도하는 공산당의 한 당원이다. 공산당원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훼손시키지 않을것을, 그리고 우리 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바칠것을 당앞에 엄숙히 맹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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