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5권 1. 두번째 상봉 - 최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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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4-06 09:04 조회1,8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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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상봉
최 현
나는 1936년 3월초에 안도현 미혼진밀영에서 언제나 마음속에 경모하여오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다시 뵈옵게 되였다.
당시 이곳에는 크고작은 밀영들이 20~30리씩 거리를 두고 여러곳에 자리잡고있었으며 재봉소와 병원도 있었다.
이 시기 나는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모진 신열로 하여 말도 잘할수 없었고 몸조차 움직일수 없었다.
내가 앓아누워있던 밀영은 반토굴로 된 큰 집이였는데 나와 함께 50여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과 또한 예방대책이 없었던 우리 유격대에 장질부사와 같은 위험하고 전염성이 강한 병마가 침습하였다는것은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남호두로부터 장백지대로 나가시는 길에 친히 우리에게 들리시였다.
환자들이 들어있는 병실에까지 몸소 찾아오신 그이께서는 아무 주저없이 병석에 누워있는 대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면서 그들을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내가 누워있는 자리에도 올라오시여 병세에 대하여 물어보시면서 불덩어리같은 나의 머리를 손수 짚어주시였다.
북만원정의 간고한 투쟁행정에서 모진 풍상을 겪어오신 그이이시였지만 밝으신 모습과 활달한 몸짓에는 변함이 없으시였다. 그이의 건장하신 모습을 대하였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이를 뵈옵게 된 감격과 흥분에 싸인 나는 한편 종횡무진으로 적들과 싸우지 못하고 누워있는것이 매우 송구스러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그이께서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만류하시면서 다시금 나의 손목을 따뜻이 잡아주시였다.
그때 나는 그이의 손길에서 친어버이의 정을 느끼였다.
1933년 9월, 소왕청에 가서 그이를 처음 만나뵙고 돌아와 2년반이 지난 후 다시 뵈옵게 되는 두번째 상봉이였다.
그 기간에 우리 유격대의 활동에서는 많은것이 변하였다. 부대들은 더 크게 확대되였으며 전투속에서 불패의 대오로 억세게 자라났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여 5일동안 계시면서 많은 시간을 환자들이 누워있는 병실에서 보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때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남호두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우리 혁명의 당면한 중요과업들과 전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당시의 국내외정세를 명철하게 분석하시면서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각계각층 반일력량을 망라하여 전체 인민의 힘을 묶어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과업의 해결이 조선혁명가들의 당면한 중요임무라고 하시였다.
동시에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조직이 가지게 될 강령에 대하여서도 벌써 구상하시고계셨는데 큰 대목을 들어가며 나에게 설명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고 나는 실로 조국의 찬란한 앞날,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락원을 환히 보는것만 같았다. 지금은 현실로 되였지만 그 시기에는 아직 미래에 속한 투쟁목표였던 그 내용을 직접 그이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나의 감격이란 이루 다 표현할길 없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혁명이 앞으로도 더욱 간고할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럴수록 우리 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였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말씀을 끊으셨다가 나에게 매우 심중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민생단>이라고 몰리여 애매하게 희생된 동무들이 적지 않았는데 최현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제까지 느낀대로 솔직히 말씀드렸다.
《<민생단>으로 몰리였던 사람들도 다들 싸움은 곧잘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생각한바도 있었고 반《민생단》투쟁에서의 착오로 인하여 귀중한 혁명동지들이 죄없이 애매하게 루명을 쓰고 혁명대렬에서 떨어져나간것을 한두번만 본것이 아니였다.
《바로 그렇소. 동무의 생각이 옳소.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진리를 굽히지 말아야 하오.》라고 하시면서 나의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씀하시였는데 그중에서도 혁명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람들을 믿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에 대하여 반드시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하겠소. 혁명은 결코 몇사람만의 힘으로는 안되오. 군중을 믿고 단결시키며 그 힘을 발동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도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또한 당창건을 위한 방침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혁명가들의 대오를 확대하며 혁명간부들을 더 많이 육성할데 대하여 특히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백지대에로의 진출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이때 나는 그이의 말씀을 감명깊게 듣고있다가 《이전에도 근거지를 만들었다가 해산했는데 어찌하여 이제 또 유격근거지를 새로 만드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령관동지께서는 나의 질문에 대하여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였다.
유격대창설의 초시기, 동만일대에서의 고정된 유격근거지는 제한된 범위내에서 그를 무장으로 보위하였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그것이 혁명임무의 요구에 부합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조성된 모든 정세는 조선혁명을 전반적으로 조직지도할수있는 유리한 지대인 수림이 무성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천연요새에 새로운 혁명근거지의 창설을 요구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이 근거지는 적통치구역전역에 걸쳐 인민들과 혈연적련계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정세의 발전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하면서 적에게 타격을 주는 동시에 국내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더욱 긴밀히 가질수 있게 될것입니다.
나는 이때 백두산근거지창설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이의 현명한 전략과 혁명적전개력에 대하여 다시한번 느꼈고 힘을 얻었다.
그런데 사령관동지께서는 미혼진을 떠나실 때 왕청련대의 제4, 제5중대를 의란현방면으로 진출시키시고 몸소 몇명의 적은 호위대원만 데리고 적들의 중심부인 무송, 장백방면으로 떠나시였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적은 대원들을 데리고 어떻게 근거지를 꾸리실가?)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적《수비대》를 습격한다든가 《토벌대》놈들을 맞받아싸우는것외에는 더 다른것은 생각할수 없었다. 더우기 사령관동지께서 가신 장백땅은 생소한 곳이며 아직 군중토대도 없었고 게다가 국경일대로 나간다는것은 적들의 소굴로 대담하게 들어가는것을 의미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들이 감히 생각조차 할수 없는 그런 대담성과 혁명발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계셨으며 그 어떤 곤난과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적락관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참으로 사령관동지께서는 탁월한 전략전술에 기초한 현명한 령도와 함께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위대한 계획을 세우고계셨다.
그이께서는 오늘뿐만아니라 래일을 생각하고계셨고 앞날의 혁명전도에 대한 확고한 과학적인 예견성과 신념을 지니고계셨다.
그이께서는 간고한 때일수록 승리를 더욱 믿으셨고 앞을 더 멀리 내다보시였다.
이렇듯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혁명의 장래발전에 대하여 그처럼 원대한 구상을 하시고 몸소 그 실천에 정력을 기울이시면서 한편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관심하시였고 보살펴주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밀영을 찾아오시였을 때 환자들에게 의사보다 더 세심히 그들의 병세에 대하여 일일이 물으시였고 식사와 병실전반에 대한 형편을 살피시였다.
그이께서 우리 밀영에 오신후 며칠이 되지 않아 병원의 모든 질서와 제도가 달라졌다. 특히 환자들의 식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이께서는 벌써 밀영에 오신 첫날에 곳곳을 다 돌아보셨고 또 후방책임자를 통하여 이곳에서 벌어지고있는 사태를 죄다 료해하시고 대책을 세워주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린데 사실 사령관동지께서 이곳으로 오시기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환자들의 생활이란 말이 아니였다.
한사람의 유격대원은 적 천명, 만명과도 비길수 없는 귀중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일시나마 전투대오에서 리탈되여 병으로 신음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우리들의 생활을 돌볼 책임을 맡았던 김모란놈은 (이자는 유격대오에 잠입한 불순분자였다.) 전혀 우리 환자들의 생활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놈은 의식적으로 환자들에게 하루에 한두끼의 보잘것없는 콩죽마저 제대로 공급하지 않고있었다.
그놈은 몇명 안되는 녀대원들에게만 책임을 지워 우리를 맡아보게 하고 자기는 병에 전염될가봐 두려워 10여리 떨어진 밀영에 가있었다.
우리를 돌보아주던 녀대원들은 몇년간의 유격투쟁과정에서 단련되고 성장했으나 그들이 그 많은 환자들을 간호한다는것은 너무도 힘에 겨운 일이였다.
그후에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에 올라 보초를 서야 했으며 환자들을 간호하고 식량을 해결하느라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당시 우리는 오직 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병을 이겨나갔으며 참고 서로 도와나갈수 있었다.
그러면 그 당시 우리에게 정말 먹을것이 없었던가.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로획한 물자가 적지 않게 남아있으리라는것을 나는 알고있었다.
어느날이였다. 나는 자기자신을 비롯해서 환자들의 형편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곧 후방책임자를 찾아서 그에게 지시를 주었다.
《밀영주위의 발자국을 따라 여러곳을 찾아보시오. 식량과 기타물자를 숨겨둔것이 틀림없소.》
그것은 지난해말에 우리 부대가 돈화벌에서 큰 지주놈의 집을 습격하고 로획하여온 그 많은 물자가 다 떨어졌다는 김모의 말은 도저히 리해가 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나는 여기에는 반드시 무슨 작간이 있다고 단정하였다.
나의 생각은 틀림없었다.
그후 후방책임자는 밀영에서 얼마간 떨어진 눈속에서 흰쌀과 부식물을 얻어냈다.
이것은 김모란놈의 고의적인 작간이였다.
나는 병이 좀 차도가 있었는데 이 일로 하여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몸소 우리 밀영에까지 찾아오시여 환자들을 보살펴주시고 온갖 치료대책을 세워주셨던것이다.
우선 그이께서는 환자들이 있는 밀영에 녀대원들로만 보초를 세운것은 잘못이라고 엄격히 지적하시면서 직접 북만에서부터 데리고 나오신 대원들로써 보초근무를 교대하여주시였다. 그리고 환자들을 보살핌에 있어서는 사령관동지께서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였다.
혁명동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마음, 친어버이처럼 따뜻이 보살펴주신 그이의 깊은 사랑으로 하여 그후 환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와의 두번째 상봉, 그것은 비록 짧은 며칠간이였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잊혀지지 않는 나날이였으며 귀중하고 뜻깊은 상봉이였다.
나는 그때 그이께서 밤늦도록 들려주신 간곡한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가슴깊이 새겨두었다. 그리고 그이처럼 생활하고 그이의 교시에 충실하리라고 굳게굳게 결심했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신 그이의 위대한 구상은 그후 훌륭히 실현되였다.
수십만의 군중을 망라하여 전국적판도에서 전개된 조국광복회의 활동에서,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준비에서 그리고 백두산근거지창설에서 거대한 승리를 전취하였고 우리 나라 혁명운동은 일대 앙양기에 올랐다.
오늘 우리는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촉진하기 위하여 힘차게 투쟁하고있다.
오늘 우리 인민은 그이의 령도밑에 무한히 행복하고 영예로운 인민으로 되였다.
간고한 싸움의 나날에 우리들이 항상 념원하던 락원이 우리의 조국땅우에 건설되며 꽃피고있다.
우리는 이 영광, 이 행복을 생각할 때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믿음직한 혁명전사로 되리라는 맹세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된다.
최 현
나는 1936년 3월초에 안도현 미혼진밀영에서 언제나 마음속에 경모하여오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다시 뵈옵게 되였다.
당시 이곳에는 크고작은 밀영들이 20~30리씩 거리를 두고 여러곳에 자리잡고있었으며 재봉소와 병원도 있었다.
이 시기 나는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모진 신열로 하여 말도 잘할수 없었고 몸조차 움직일수 없었다.
내가 앓아누워있던 밀영은 반토굴로 된 큰 집이였는데 나와 함께 50여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과 또한 예방대책이 없었던 우리 유격대에 장질부사와 같은 위험하고 전염성이 강한 병마가 침습하였다는것은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남호두로부터 장백지대로 나가시는 길에 친히 우리에게 들리시였다.
환자들이 들어있는 병실에까지 몸소 찾아오신 그이께서는 아무 주저없이 병석에 누워있는 대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면서 그들을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내가 누워있는 자리에도 올라오시여 병세에 대하여 물어보시면서 불덩어리같은 나의 머리를 손수 짚어주시였다.
북만원정의 간고한 투쟁행정에서 모진 풍상을 겪어오신 그이이시였지만 밝으신 모습과 활달한 몸짓에는 변함이 없으시였다. 그이의 건장하신 모습을 대하였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이를 뵈옵게 된 감격과 흥분에 싸인 나는 한편 종횡무진으로 적들과 싸우지 못하고 누워있는것이 매우 송구스러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그이께서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만류하시면서 다시금 나의 손목을 따뜻이 잡아주시였다.
그때 나는 그이의 손길에서 친어버이의 정을 느끼였다.
1933년 9월, 소왕청에 가서 그이를 처음 만나뵙고 돌아와 2년반이 지난 후 다시 뵈옵게 되는 두번째 상봉이였다.
그 기간에 우리 유격대의 활동에서는 많은것이 변하였다. 부대들은 더 크게 확대되였으며 전투속에서 불패의 대오로 억세게 자라났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여 5일동안 계시면서 많은 시간을 환자들이 누워있는 병실에서 보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때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남호두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우리 혁명의 당면한 중요과업들과 전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당시의 국내외정세를 명철하게 분석하시면서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각계각층 반일력량을 망라하여 전체 인민의 힘을 묶어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과업의 해결이 조선혁명가들의 당면한 중요임무라고 하시였다.
동시에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조직이 가지게 될 강령에 대하여서도 벌써 구상하시고계셨는데 큰 대목을 들어가며 나에게 설명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고 나는 실로 조국의 찬란한 앞날,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락원을 환히 보는것만 같았다. 지금은 현실로 되였지만 그 시기에는 아직 미래에 속한 투쟁목표였던 그 내용을 직접 그이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나의 감격이란 이루 다 표현할길 없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혁명이 앞으로도 더욱 간고할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럴수록 우리 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였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말씀을 끊으셨다가 나에게 매우 심중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민생단>이라고 몰리여 애매하게 희생된 동무들이 적지 않았는데 최현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제까지 느낀대로 솔직히 말씀드렸다.
《<민생단>으로 몰리였던 사람들도 다들 싸움은 곧잘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생각한바도 있었고 반《민생단》투쟁에서의 착오로 인하여 귀중한 혁명동지들이 죄없이 애매하게 루명을 쓰고 혁명대렬에서 떨어져나간것을 한두번만 본것이 아니였다.
《바로 그렇소. 동무의 생각이 옳소.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진리를 굽히지 말아야 하오.》라고 하시면서 나의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씀하시였는데 그중에서도 혁명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람들을 믿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에 대하여 반드시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하겠소. 혁명은 결코 몇사람만의 힘으로는 안되오. 군중을 믿고 단결시키며 그 힘을 발동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도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또한 당창건을 위한 방침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혁명가들의 대오를 확대하며 혁명간부들을 더 많이 육성할데 대하여 특히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백지대에로의 진출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이때 나는 그이의 말씀을 감명깊게 듣고있다가 《이전에도 근거지를 만들었다가 해산했는데 어찌하여 이제 또 유격근거지를 새로 만드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령관동지께서는 나의 질문에 대하여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였다.
유격대창설의 초시기, 동만일대에서의 고정된 유격근거지는 제한된 범위내에서 그를 무장으로 보위하였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그것이 혁명임무의 요구에 부합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조성된 모든 정세는 조선혁명을 전반적으로 조직지도할수있는 유리한 지대인 수림이 무성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천연요새에 새로운 혁명근거지의 창설을 요구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이 근거지는 적통치구역전역에 걸쳐 인민들과 혈연적련계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정세의 발전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하면서 적에게 타격을 주는 동시에 국내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더욱 긴밀히 가질수 있게 될것입니다.
나는 이때 백두산근거지창설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이의 현명한 전략과 혁명적전개력에 대하여 다시한번 느꼈고 힘을 얻었다.
그런데 사령관동지께서는 미혼진을 떠나실 때 왕청련대의 제4, 제5중대를 의란현방면으로 진출시키시고 몸소 몇명의 적은 호위대원만 데리고 적들의 중심부인 무송, 장백방면으로 떠나시였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적은 대원들을 데리고 어떻게 근거지를 꾸리실가?)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적《수비대》를 습격한다든가 《토벌대》놈들을 맞받아싸우는것외에는 더 다른것은 생각할수 없었다. 더우기 사령관동지께서 가신 장백땅은 생소한 곳이며 아직 군중토대도 없었고 게다가 국경일대로 나간다는것은 적들의 소굴로 대담하게 들어가는것을 의미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들이 감히 생각조차 할수 없는 그런 대담성과 혁명발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계셨으며 그 어떤 곤난과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적락관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참으로 사령관동지께서는 탁월한 전략전술에 기초한 현명한 령도와 함께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위대한 계획을 세우고계셨다.
그이께서는 오늘뿐만아니라 래일을 생각하고계셨고 앞날의 혁명전도에 대한 확고한 과학적인 예견성과 신념을 지니고계셨다.
그이께서는 간고한 때일수록 승리를 더욱 믿으셨고 앞을 더 멀리 내다보시였다.
이렇듯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혁명의 장래발전에 대하여 그처럼 원대한 구상을 하시고 몸소 그 실천에 정력을 기울이시면서 한편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관심하시였고 보살펴주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 밀영을 찾아오시였을 때 환자들에게 의사보다 더 세심히 그들의 병세에 대하여 일일이 물으시였고 식사와 병실전반에 대한 형편을 살피시였다.
그이께서 우리 밀영에 오신후 며칠이 되지 않아 병원의 모든 질서와 제도가 달라졌다. 특히 환자들의 식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이께서는 벌써 밀영에 오신 첫날에 곳곳을 다 돌아보셨고 또 후방책임자를 통하여 이곳에서 벌어지고있는 사태를 죄다 료해하시고 대책을 세워주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린데 사실 사령관동지께서 이곳으로 오시기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환자들의 생활이란 말이 아니였다.
한사람의 유격대원은 적 천명, 만명과도 비길수 없는 귀중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일시나마 전투대오에서 리탈되여 병으로 신음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우리들의 생활을 돌볼 책임을 맡았던 김모란놈은 (이자는 유격대오에 잠입한 불순분자였다.) 전혀 우리 환자들의 생활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놈은 의식적으로 환자들에게 하루에 한두끼의 보잘것없는 콩죽마저 제대로 공급하지 않고있었다.
그놈은 몇명 안되는 녀대원들에게만 책임을 지워 우리를 맡아보게 하고 자기는 병에 전염될가봐 두려워 10여리 떨어진 밀영에 가있었다.
우리를 돌보아주던 녀대원들은 몇년간의 유격투쟁과정에서 단련되고 성장했으나 그들이 그 많은 환자들을 간호한다는것은 너무도 힘에 겨운 일이였다.
그후에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에 올라 보초를 서야 했으며 환자들을 간호하고 식량을 해결하느라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당시 우리는 오직 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병을 이겨나갔으며 참고 서로 도와나갈수 있었다.
그러면 그 당시 우리에게 정말 먹을것이 없었던가.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로획한 물자가 적지 않게 남아있으리라는것을 나는 알고있었다.
어느날이였다. 나는 자기자신을 비롯해서 환자들의 형편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곧 후방책임자를 찾아서 그에게 지시를 주었다.
《밀영주위의 발자국을 따라 여러곳을 찾아보시오. 식량과 기타물자를 숨겨둔것이 틀림없소.》
그것은 지난해말에 우리 부대가 돈화벌에서 큰 지주놈의 집을 습격하고 로획하여온 그 많은 물자가 다 떨어졌다는 김모의 말은 도저히 리해가 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나는 여기에는 반드시 무슨 작간이 있다고 단정하였다.
나의 생각은 틀림없었다.
그후 후방책임자는 밀영에서 얼마간 떨어진 눈속에서 흰쌀과 부식물을 얻어냈다.
이것은 김모란놈의 고의적인 작간이였다.
나는 병이 좀 차도가 있었는데 이 일로 하여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몸소 우리 밀영에까지 찾아오시여 환자들을 보살펴주시고 온갖 치료대책을 세워주셨던것이다.
우선 그이께서는 환자들이 있는 밀영에 녀대원들로만 보초를 세운것은 잘못이라고 엄격히 지적하시면서 직접 북만에서부터 데리고 나오신 대원들로써 보초근무를 교대하여주시였다. 그리고 환자들을 보살핌에 있어서는 사령관동지께서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였다.
혁명동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마음, 친어버이처럼 따뜻이 보살펴주신 그이의 깊은 사랑으로 하여 그후 환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와의 두번째 상봉, 그것은 비록 짧은 며칠간이였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잊혀지지 않는 나날이였으며 귀중하고 뜻깊은 상봉이였다.
나는 그때 그이께서 밤늦도록 들려주신 간곡한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가슴깊이 새겨두었다. 그리고 그이처럼 생활하고 그이의 교시에 충실하리라고 굳게굳게 결심했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신 그이의 위대한 구상은 그후 훌륭히 실현되였다.
수십만의 군중을 망라하여 전국적판도에서 전개된 조국광복회의 활동에서,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준비에서 그리고 백두산근거지창설에서 거대한 승리를 전취하였고 우리 나라 혁명운동은 일대 앙양기에 올랐다.
오늘 우리는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촉진하기 위하여 힘차게 투쟁하고있다.
오늘 우리 인민은 그이의 령도밑에 무한히 행복하고 영예로운 인민으로 되였다.
간고한 싸움의 나날에 우리들이 항상 념원하던 락원이 우리의 조국땅우에 건설되며 꽃피고있다.
우리는 이 영광, 이 행복을 생각할 때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믿음직한 혁명전사로 되리라는 맹세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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