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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5권 16.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 김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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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12-06-01 08:06 조회1,7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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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김  자  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 소조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1944년 여름 어느날 나를 포함한 3명의 대원은 지휘부로부터 국내깊이 들어가 적의 각종 군사시설들을 상세히 정찰할 임무를 받았다.

그때의 국내형편으로 보아 이 임무수행은 결코 쉬운것이 아니였다.

일제는 두만강과 압록강일대는 더 말할것 없고 전조선땅을 군대와 경찰과 포대로 뒤덮었으며 산간오지에까지 경계망을 늘여놓고 그 누구도 얼씬 못한다고 호언장담하고있었다.

그러므로 국내공작은 그야말로 총검의 숲을 헤치고 가야 할 어렵고 힘든 과업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이 혁명임무수행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떠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기에 적극 힘썼다.

우리의 첫 목표는 평양이였다. 앞으로 맞이할 대사변을 앞두고 놈들의 군사요충지의 하나인 평양의 병력배치상태를 정찰하는것이 필요했다.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부대를 떠난 우리는 그날밤으로 두만강을 단숨에 헤염쳐건넜다.

조국땅의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재빨리 무기를 정비했다.

여기서부터 오직 지도와 지북침을 보고 방향을 찾으면서 길아닌 험산준령을 넘고 또 넘었다.

우리는 밤에 낮을 이어 걸었지만 하루에 불과 몇십리밖에 가지 못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한주일만에 길주에서 서남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다.

갈길을 예산하니 아직도 아득하였다.

제기일내에 맡은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자면 날자를 더 앞당겨야만 했다.

그러자면 지름길을 찾아들지 않고 산발만 타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초행길인지라 우리들중에는 지름길을 알고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적들이 욱실대는 이곳에서 무작정 대도로에 접어들수도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잠시 휴식하면서 서로 의논한끝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가를 찾아가 지름길을 자세히 알아가지고 떠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그길로 부근인가를 찾아떠났다. 얼마 안가서 산비탈에 자리잡은 오막살이 외딴집이 있었다. 나는 집주인을 만나 어떻게 대하며 무슨 말부터 할것인가를 미리 생각했다.

우리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이 집으로 올라오는 길목에서 한 동무가 망을 보게 하고 문가까이 가서 주인을 찾았다.

이 집주인은 거의 50이 된 중로인이였다. 우리는 그에게 길가던 사람인데 잠시 쉬여서 담배 한대 피우고 갈수 없겠는가고 말했다. 로인은 쾌히 승낙하고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집안에 들어앉아 로인에게 담배를 한대 권하고 우리도 피워물었다.

보니 로인은 순박한 농민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찰공작에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앞뒤일을 생각하고 대해야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의 길을 묻지 않고 이미 지나온 청진가는 길과 그 거리 등을 물어보았다. 로인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끝에 자기가 이전에 베를 팔러 평양과 청진으로 다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양이 멀다고 해도 산발을 타고 다녀보니 보름도 채 안걸리더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다니던 길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행군방향과 목적지를 그에게 말하지 않고도 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아낼수 있었다.

로인의 집에서 나와 지름길에 찾아들어선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두만강을 건넌지 25일만에 우리는 서포 앞산 릉선에 와닿았다.

2,000리길을 밤낮으로 행군해온 우리들의 몸은 몹시 피로하였다. 허지만 평양이 가까와온다는것을 생각한 우리들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극도로 긴장되기도 하였다.

우리 일행중에는 조선에 처음 나온 동무도 있었다. 그는 얼마나 더 가면 평양이 보이는가고 조급히 묻군하였다.

《동무들, 평양이 보이오, 평양이.》 앞에서 걸어가던 나는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우리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서로 어깨를 추어가며 멀리 평양을 바라보았다.

평양 그리고 만경대, 이름만 들어도 아름답고 유서깊은 이곳은 우리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언제나 그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이였다.

우리들은 어려운 때일수록 조국을 생각했고 조국을 생각할 때마다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처럼 마음속에서 한시도 잊은적 없는 조국땅이 일제놈들에게 짓밟히고있는것을 직접 눈앞에 본 우리들의 가슴은 몹시 아팠고 눈에서는 적들에 대한 증오의 불빛이 번쩍이였다.

(네놈들을 꼭 몰아내고야 말테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네놈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있는지 샅샅이 알아가지고 갈테다.)

이러한 결의를 다지고난 우리들은 다음의 행동을 위하여 이곳에서 변장을 다시 했다.

적들의 소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다 대담해야 한다고 결심한 우리들은 일본군으로 변장했다.

우리는 어둡기 시작할무렵 산마루에서 내려와 서평양조차장을 거쳐 보통강을 따라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에서 일제헌병과 경찰놈들을 여러번 만났지만 우리는 뻐젓이 걸었다.

얼마후에 화장터(현재 평천구역 북성동)근처에 이르렀다.

우리는 평천리 군수공장과 평양역을 정찰할것을 계획하고 강낭밭에서 밤을 새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아침 붉은 노을이 떠오르기 시작하더니만 얼마후 해빛이 부채살처럼 퍼졌다. 나는 같이 온 두 동무에게 주변을 감시하게 하고 재빨리 사진기를 꺼내여 군수공장과 정거장에 렌즈를 돌려댔다. 그리고는 원쑤들의 가슴팍에 멸망의 불벼락을 안길 폭약에 불을 다는 마음으로 샤타를 눌렀다.

이곳에서의 임무는 끝났다. 다음의 공작지점에로 옮기기 위해서 어둠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강낭밭에 그대로 숨어있을 생각으로 사위를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밭에는 전날 김을 매다 못다 매고 남겨둔 밭이랑들이 더러 남아있었다. 필경 이날 아침 김군들이 다시 나올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옆에 깊이 패인 물홈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장난을 하던 어린아이들의 놀이감들이 널려있었다.

우리는 될수록 이 놀음터《주인》들과도 만나지 않기 위하여 이미 김을 다 맨 콩밭속에 들어가 숨었다.

이윽하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더니만 그 말소리는 콩밭머리에로 점점 가까와오는것이였다.

순간 적들이 냄새를 맡았는가 하고 생각한 우리는 긴장해서 총을 그러쥐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바로 전에 우리가 숨어있었던 강낭밭과 그옆 조밭에 김을 매러 나온 사람들이였다. 키가 서너뽐밖에 되지 않는 콩밭에 몸을 감추자니 누운채로 꼼짝하지 않고있어야 했다.

온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있느라니 가지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내 나라, 내 땅이건만 이렇게도 자유가 없이 숨어다녀야만 한단 말인가.)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막 터지는것만 같아 참을수가 없었다.

나는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머니조국이여! 그대는 멀지 않아 참된 아들딸들을 품에 안으리라. 광복된 조선인민들을 한가슴에 안으리라.)

다음날 우리는 모란봉에 올라가 평양시내와 비행장을 촬영하고 나무덩굴속에 숨어서 앞으로의 공작을 계획하였다.

이날 여기서 우리는 별의별 구역질나는 꼴을 다 보았다. 일본고관놈들과 장교놈들, 부자놈들이 기생들을 데리고와 술을 처먹고 갖은 추태를 다 부렸다.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너털웃음을 웃어대는 이 승냥이무리들을 눈앞에 본 나는 순간에 손이 싸창에 가닿는것을 느꼈다.

모란봉에서 떠난 우리들은 미림부근의 일제놈들의 병력상태를 비롯하여 평양주변의 일체 군사시설들을 거의 다 알아내였다. 마지막으로 적들의 무장상태와 훈련정형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영가까이 접근해야 하며 순간에 적들의 훈련정형을 샅샅이 관찰해야 했다. 이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였다.

나는 싸창과 쌍안경, 사진기를 제외한 기타 소지품들을 같이 간 소조원들에게 맡기고 어둠을 타서 적의 병영 담밑에까지 접근하여 은페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자 나팔소리가 울리더니 적들은 조기훈련을 하기 위하여 훈련장에 집합했다. 놈들은 화염방사기로 화점을 공격하는 훈련을 진종일 되풀이했다.

나는 필요한 모든것을 머리속에 새겨넣었고 아울러 놈들의 부대대호까지 기억했으며 사진도 찍었다.

평양에서의 공작임무를 끝마친 우리는 교외로 나섰다.

그후 도중에서 장마를 만나 우리는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면서 마식령고개를 넘었다.

청진, 회령일대의 적군사시설까지 정찰하고난 우리들은 하루바삐 공작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며 사랑하는 전우들을 만날 뜨거운 심정을 안고 두만강을 향해 바삐 길을 걸었다.

우리가 두만강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들이게 된것은 날밝기 착전이였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우리 일행은 적정을 살피면서 어떤 방법으로 강을 건늘것인가에 대하여 심중히 토의했다.

적의 화점과 포대 그리고 군경들이 욱실거리는 《요새》를 뚫고나가야만 했다.

우리는 온 정신을 눈과 귀에 모아가지고 어둠을 헤치며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는 고요했으며 물기찬 강바람만이 우리의 살결을 핥으며 조용히 불었다.

우리가 산을 거의 내렸을 때였다. 강역과 마을일대에서 요란한 개짖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전지불이 일시에 나타났다. 이윽고 일제놈들의 구두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바삐 숲속에 몸을 숨기면서 총을 앞으로 내댔다. 발밑에서 일제놈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있을 때 부락을 수색하던 적들이 곡식밭을 뒤지면서 우리가 있는 산쪽으로 몰려들어오고있었다.

우리는 바삐 그 자리를 떠야만 했다.

(산으로 갈가. 안된다. 지금 적의 시선이 산으로 옮겨지고있으며 게다가 산에는 나무 한그루 없을뿐만아니라 당장 날이 밝아오고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옆으로는 더욱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망설이고있을 때 발밑에서 서성대던 놈들이 강줄기를 따라 바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저놈들의 뒤를 바싹 따르자. 그러다가 두만강물속에 몸을 숨기자.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한 나는 대원들과 함께 그놈들을 뒤쫓아 재빨리 강역으로 기여갔다. 우리가 숲속에 몸을 숨기자마자 다른 한패의 적들이 우리가 방금 들렸던 일대를 뒤지기 시작하는것이였다.

우리가 두만강물속에 몸을 감추었을 때는 벌써 먼동이 훤히 트고있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목만 내놓고 물속에 숨어있었다.

놈들은 30분이 멀다하게 우리옆을 지나면서 순찰했으나 끝내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때 적들은 우리의 다른 소조원들의 활동을 눈치챘던것이였다.

해가 지자 나는 순찰대놈들이 지나간 짬을 리용하여 배가 있는 곳에서 약 20Om가량 떨어진 바위에로 은밀히 기여갔다.

바위를 약 8Om앞에 둔 지점에서였다. 지나가던 순찰대놈들이 무슨 기미나 차린듯이 갑자기 전지불을 사방에 비쳐대면서 내가 숨어있는 일대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장교인듯한 놈은 전지불을 휘저으면서 곧바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것이였다.

긴장된 순간이 흘렀다. 나는 그놈의 숨통에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그놈은 내가 숨어있는 코앞까지 와서 우뚝 멎어서더니 전지불만 비쳐대는것이였다. 불빛은 서너번이나 나의 몸을 비치면서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그놈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윽고 수색하던 놈들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채 강쪽으로 몰려갔다. 나는 그 틈을 리용하여 날쌔게 바위에 다가갔다. 그리고 수류탄묶음을 바위짬에 장치하고 길게 뽑은 도화선에 불을 달고 살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

《꽝》하는 굉장한 폭음과 함께 수많은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야음을 뒤흔드는 요란한 폭발소리가 멀리에로 산울림쳐나갈 때 놈들의 호각소리, 총소리, 나팔소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때에야 폭발소리에 질겁하여 땅에 머리를 처박고있던 놈들이 몸을 일으키며 바삐 바위쪽으로 달려가는것이였다. 놈들을 한곳에 유인하려던 우리 의도대로 되였다. 배가 있는 곳에 우리가 모여들었을 때는 그곳을 경비하는 보초놈조차 어디엔가 도망치고 없었다.

우리는 얼른 배에 올라타고 널쪼박과 손으로 물을 저으면서 감쪽같이 어둠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배는 복판으로 서서히 미끄러져들어갔다.

우리는 점점 멀어져가는 조국땅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둠속에 잠긴 조국산천을 지켜보고있는 우리의 눈앞으로는 조국강산의 아름다운 풍치와 그속에서 일제놈들의 총검밑에 신음하는 부모형제들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나는 이때 다시한번 맹세를 다졌다. (오직 조국광복과 혁명을 위하여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을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리라고.)

그후 다시 행군하여 우리는 수일만에 지휘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어려운 임무를 성과적으로 끝마친 기쁨과 긍지를 안고 피로를 가시면서 새로운 임무수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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