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추"의 매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원효탄 작성일2014-01-24 23:39 조회1,52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새정추”의 “새”라는 수식어가 갖는 마력? 혹은 매력?
들어가는 말
요즘 국내언론에는 “새정추”, “신당”, “안철수”라는 제목들이 도배되고 있다. 국민들은 국정원의 부정선거개입, 국영기업의 민영화 반대,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경제적 발전”을 이유로 강제 파괴하는 밀양 사태 등 풀어야 할 현실적 일들이 산적한 어려운 상황에서 왜 벌써부터 2017년을 대비하는 이러한 사회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왜 이른바 뛰어났다는 정치인들도 오늘의 부정선거결과를 해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싸우지 않고 2017년을 향한 언론싸움에 도취되는가?
국정원 선거개입을 파 헤치는 과정에서 “심리전”이란 개념이 얼굴을 독자들에게 내 보인 일이 있다. “심리전”이란 사회현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되는 것일까? 짧고 간단하게 한 번 알아본다.
1
“새”라는 수식어가 갖는 마력? 혹은 매력?
1. 동북아에서 심리전적 환경변화
심리학에 프라이밍(priming)이란 개념이 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점화”라 한다. 또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유식불교에 훈습이란 게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움직이는 데 있어서 무의식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몰라도 사회를 움직여 가는 힘은 사람들로부터 나오고 그 힘의 원천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말이 있다.
2차 대전 후 분단 69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어도 민족내부문제엔 변화가 없다. 민중의 삶은 질적인 면에서 보면 일제 강점기 때나, 분단초기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늘 가난하고 시간에 쪼들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배층은 예나 지금이나 3대가 지나도 떵떵거리고 살아간다. 빈부의 격차가 나날이 심화되어왔고 더욱 심화되어 간다.
다음은 우리 주변의 국제환경을 보자. 사회주의권 몰락의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아직도 ‘공산당’이 집권당으로 있으나 내용적으로 많이 마오쩌둥(모택동)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서 이탈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이러한 중국과 국교를 맺고 UN이라는 국제기구의 일원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없애려는 국제적 환경에 의지해 이웃나라들의 협력을 자청하고 다닌다. 옛날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를 쳐달라고 애걸하던 김춘추가 생각나게 하는 외교를 벌리고 있다.
우리 겨레와 나라의 분단상황은 처음엔 외세의 의해 되었으나 69년이 지난 오늘은 그간 지배해온 세력들에 의해 그대로 유지되어오며 나아가 집권자들의 집권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변화에서 일반 민중(백성)들은 무엇인가 바꿔졌으면 하는 것을 늘 마음 한 구석에 안고 살아가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삶은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별로 주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한다면 무언가 사회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마음에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지만 “새”라는 수식어가 한 번 나타나 요동을 치고 나면 그것에 희망을 걸고 힘을 보태고, 그로부터 실망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바램을 마음에 그냥 묻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세상을 바꿔 볼 용기는 그리 쉽게 실천으로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가난한 제3세계 나라들의 형편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려움을 의도적으로 혹은 “심리전”적으로 보여주는 언론매체들에 의해 69년간 훈습되어 온 까닭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적들과 싸워 시원하게 이겨본 적도 없고 뜨물에 물 탄 듯 우물쭈물 넘어간 역사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적이 너무 강해서인지는 모르나 아직은 잘 길들여진 양들이나 같다.
우리 사회지배계층은 백 년 묵은 백여우가 되었다면 민중은 양지기에 순종하는 순진한 양들-그렇지 않은 양들이 약 49%이지만-이 되어 있다.
이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적들은 여기에 “심리전”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 때 필요한 수식어가 “새” 혹은 “신”이 등장하게 된다.
2. 정치의 본질
정치란 알고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양보 없는 싸움이다. 현대 정치판에선 “민주주의”란 간판 아래 ‘도덕’과 ‘정의’라는 무기로 본의던 아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모으는 숫자의 싸움을 한다. 바로 선거다.
그렇기에 예전엔 사람들을 돈으로 사던지 권력으로 동원하던지 했으나 21세기에는 Internet을 통한 부정이 이루어지면서 선거라는 방법을 통해 부정선거가 정상선거로 탈바꿈하며 이루어 진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백성들은 또 속는다. 그래도 자랑스런 자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밥만 먹게 해주면 누가 지배를 하던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점을 지배층은 잘 안다. 그리고 ‘인권’이고 뭐고 하는 환상적인 개념들은 지배구조에 잘 길들여진 혹은 임의로 편승한 지식인들의 말 싸움을 위한 도구로 이미 전락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민중의 어려운 삶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패션쇼의 의상들처럼 눈 부시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에선 국내만이 아니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정치라는 것의 본질은 지배와 피지배간의 환상이 끼어들 틈도 없는 싸움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장사꾼이 자기물건이 좋다고 떠들지만 한 푼이라도 남지 않으면 자기 물건을 팔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의 형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 한 사람들은 예부터 써오던 “정치경제학”이란 개념에 산업화가 시작되는 19세기 이후 새로운 내용을 넣어 쓰기 시작했다.
3. 지식인들의 속성
한 사회의 변화에선 지식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책으로 알려진 인류역사를 큼직한 것만 예를 들어 보면 지식인들의 역할이 한 사회를 움직여 가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밖에선 불란서혁명, 10월 사회주의 혁명, 쿠바혁명, 남미의 볼리비안 혁명 등이 그렇고 우리 민족사에선 갑오동학혁명, 의병전쟁, 항일투쟁, 419, 광주민중봉기 등이 그렇다. 국제적 흐름이나 국내 흐름이나 그 시작은 지식인들이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과 민중의 관계에서 볼 때 지식인들의 사회계층적 특성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옛 말에 사람은 주위의 환경에 따라 의식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지식인들은 지배층에도 붙을 수 있고 피지배층에도 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갖춘 사회계층이다. 때문에 1차적 식생활에 몰두해야 하는 백성들보다 머리구조와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럼 이러한 복잡한 머릿속에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따라서 그 세계관에 기초한 의식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성 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 한 사람들의 경우를 분석해 보면 앞에서 보기로 든 혁명의 앞장을 섰던 사람들의 예를 보면 이러한 명제가 설득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무엇으로 백성편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말을 식은 죽 먹듯 하고 또 언론매체를 통해선 자기가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선전한다. “진보”를 말하나 연대는 없고, “민중”을 말하나 역사의 주체인 민족은 없다. 달콤한 말에 말로 거짓 선전하는 오늘의 현실에선 그 사람의 실천행위를 직시하고 분석해 보는 방법 밖엔 없다.
이러한 생각을 머리에 깔고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펼쳐지는 정치흐름을 분석해 보면 지배층을 이룬 한 부류에선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상황을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물질적(사회경제적)으로나 정신도덕적(항일과 사대)으로나 생사를 가늠하는 일이기에 조금도,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리겨레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다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기자신의 정신적이던 물질적이던 이해관계를 떠나 민중의 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이란 말 잔치나 말 바꿔 치기 놀이보다는 자기가 내세워 민중과 약속한 “말의 족쇄”에 충실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예로 좋은 비교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희생하신 경험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점에서 우리민족의 성원이라면 우리 민족수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과 백성의 편에 서서 싸웠던 분들의 삶 속에서 겨레의 나아갈 길을 찾고 이를 후손들에게 모범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민중과 함께 하는 지식인들을 가늠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우리 겨레의 역사를 함께해 온 “선비사상”이라 생각해 본다.
이제 본론으로 가기 위해 국내 형편을 보자. 모든 언론이란 언론이 만들어 내는 연극 아닌 연극이 하나 눈에 띄어온다. “안철수 신드럼”이다. “새정추”, “안의 신당”, “새로운 정치” 이들이 이용하는 심리학적 수식어는 바로 “새”다.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나타난 “새”란 수식어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참신한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더럽게 이용당했다.
1945년 8월15일 이른바 “해방”정국 이후 유행했던 “새나라 어린이”들이 오늘날 “어버이연합” 늙은이들이 되었고, 한겨레당은 민심이 점점 자기들로부터 멀어지자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아주 최근에 벌어지는 국내상황을 보면 또 “새”자가 국민들의 의식을 농락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새정추”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
이들이 국민에게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이 새것일까? 또 무엇 때문에 겨레의 평화통일과 사회의 민주화가 앞으로 동북아를 평화의 시대로 안내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민족사의 기로에서 “자주적 민족통일”이란 말은 빼고 어떤 과제를 새롭게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이 있는지?
이러한 국내외의 복잡한 사안들이 “새”라는 개념으로 너무 안일하게 혹은 쉽게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 “구”고 무엇이 “새” 혹은 “신”인지는 밝히지 않고 그냥 “새”를 말한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수식어 “새”를 즐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간단히 말한다면 “구태의연한 정치”를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또 수식어 “새”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속임수로는 이제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이 보여 주어야 할 때다.
다카키 마사오도, 전두환도, 이명박도, 다카키 그네도 “새”를 좋아했고, 그들도 “인권”, “민생”, “민족통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인권”은 있는 사람들의 “인권”이고, 그들의 “민생”은 잘 사는 사람들의 “민생”이고, 그들이 말하는 “민족통일”은 세계금융시장의 시장확보로서의 “통일”인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진정으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세상에 떠도는 내용 모르는 “새”에 현혹되지 말고 그 수식어가 담고 있는 “새”의 본질을 깊이 파보고 결정하는 삶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라 생각된다.
4347(2014)년 1월 24일
원효탄
들어가는 말
요즘 국내언론에는 “새정추”, “신당”, “안철수”라는 제목들이 도배되고 있다. 국민들은 국정원의 부정선거개입, 국영기업의 민영화 반대,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경제적 발전”을 이유로 강제 파괴하는 밀양 사태 등 풀어야 할 현실적 일들이 산적한 어려운 상황에서 왜 벌써부터 2017년을 대비하는 이러한 사회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왜 이른바 뛰어났다는 정치인들도 오늘의 부정선거결과를 해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싸우지 않고 2017년을 향한 언론싸움에 도취되는가?
국정원 선거개입을 파 헤치는 과정에서 “심리전”이란 개념이 얼굴을 독자들에게 내 보인 일이 있다. “심리전”이란 사회현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되는 것일까? 짧고 간단하게 한 번 알아본다.
1
“새”라는 수식어가 갖는 마력? 혹은 매력?
1. 동북아에서 심리전적 환경변화
심리학에 프라이밍(priming)이란 개념이 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점화”라 한다. 또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유식불교에 훈습이란 게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움직이는 데 있어서 무의식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몰라도 사회를 움직여 가는 힘은 사람들로부터 나오고 그 힘의 원천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말이 있다.
2차 대전 후 분단 69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어도 민족내부문제엔 변화가 없다. 민중의 삶은 질적인 면에서 보면 일제 강점기 때나, 분단초기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늘 가난하고 시간에 쪼들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배층은 예나 지금이나 3대가 지나도 떵떵거리고 살아간다. 빈부의 격차가 나날이 심화되어왔고 더욱 심화되어 간다.
다음은 우리 주변의 국제환경을 보자. 사회주의권 몰락의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아직도 ‘공산당’이 집권당으로 있으나 내용적으로 많이 마오쩌둥(모택동)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서 이탈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이러한 중국과 국교를 맺고 UN이라는 국제기구의 일원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없애려는 국제적 환경에 의지해 이웃나라들의 협력을 자청하고 다닌다. 옛날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를 쳐달라고 애걸하던 김춘추가 생각나게 하는 외교를 벌리고 있다.
우리 겨레와 나라의 분단상황은 처음엔 외세의 의해 되었으나 69년이 지난 오늘은 그간 지배해온 세력들에 의해 그대로 유지되어오며 나아가 집권자들의 집권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변화에서 일반 민중(백성)들은 무엇인가 바꿔졌으면 하는 것을 늘 마음 한 구석에 안고 살아가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삶은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별로 주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한다면 무언가 사회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마음에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지만 “새”라는 수식어가 한 번 나타나 요동을 치고 나면 그것에 희망을 걸고 힘을 보태고, 그로부터 실망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바램을 마음에 그냥 묻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세상을 바꿔 볼 용기는 그리 쉽게 실천으로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가난한 제3세계 나라들의 형편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려움을 의도적으로 혹은 “심리전”적으로 보여주는 언론매체들에 의해 69년간 훈습되어 온 까닭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적들과 싸워 시원하게 이겨본 적도 없고 뜨물에 물 탄 듯 우물쭈물 넘어간 역사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적이 너무 강해서인지는 모르나 아직은 잘 길들여진 양들이나 같다.
우리 사회지배계층은 백 년 묵은 백여우가 되었다면 민중은 양지기에 순종하는 순진한 양들-그렇지 않은 양들이 약 49%이지만-이 되어 있다.
이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적들은 여기에 “심리전”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 때 필요한 수식어가 “새” 혹은 “신”이 등장하게 된다.
2. 정치의 본질
정치란 알고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양보 없는 싸움이다. 현대 정치판에선 “민주주의”란 간판 아래 ‘도덕’과 ‘정의’라는 무기로 본의던 아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모으는 숫자의 싸움을 한다. 바로 선거다.
그렇기에 예전엔 사람들을 돈으로 사던지 권력으로 동원하던지 했으나 21세기에는 Internet을 통한 부정이 이루어지면서 선거라는 방법을 통해 부정선거가 정상선거로 탈바꿈하며 이루어 진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백성들은 또 속는다. 그래도 자랑스런 자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밥만 먹게 해주면 누가 지배를 하던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점을 지배층은 잘 안다. 그리고 ‘인권’이고 뭐고 하는 환상적인 개념들은 지배구조에 잘 길들여진 혹은 임의로 편승한 지식인들의 말 싸움을 위한 도구로 이미 전락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민중의 어려운 삶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패션쇼의 의상들처럼 눈 부시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에선 국내만이 아니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정치라는 것의 본질은 지배와 피지배간의 환상이 끼어들 틈도 없는 싸움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장사꾼이 자기물건이 좋다고 떠들지만 한 푼이라도 남지 않으면 자기 물건을 팔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의 형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 한 사람들은 예부터 써오던 “정치경제학”이란 개념에 산업화가 시작되는 19세기 이후 새로운 내용을 넣어 쓰기 시작했다.
3. 지식인들의 속성
한 사회의 변화에선 지식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책으로 알려진 인류역사를 큼직한 것만 예를 들어 보면 지식인들의 역할이 한 사회를 움직여 가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밖에선 불란서혁명, 10월 사회주의 혁명, 쿠바혁명, 남미의 볼리비안 혁명 등이 그렇고 우리 민족사에선 갑오동학혁명, 의병전쟁, 항일투쟁, 419, 광주민중봉기 등이 그렇다. 국제적 흐름이나 국내 흐름이나 그 시작은 지식인들이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과 민중의 관계에서 볼 때 지식인들의 사회계층적 특성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옛 말에 사람은 주위의 환경에 따라 의식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지식인들은 지배층에도 붙을 수 있고 피지배층에도 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갖춘 사회계층이다. 때문에 1차적 식생활에 몰두해야 하는 백성들보다 머리구조와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럼 이러한 복잡한 머릿속에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따라서 그 세계관에 기초한 의식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성 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 한 사람들의 경우를 분석해 보면 앞에서 보기로 든 혁명의 앞장을 섰던 사람들의 예를 보면 이러한 명제가 설득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무엇으로 백성편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말을 식은 죽 먹듯 하고 또 언론매체를 통해선 자기가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선전한다. “진보”를 말하나 연대는 없고, “민중”을 말하나 역사의 주체인 민족은 없다. 달콤한 말에 말로 거짓 선전하는 오늘의 현실에선 그 사람의 실천행위를 직시하고 분석해 보는 방법 밖엔 없다.
이러한 생각을 머리에 깔고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펼쳐지는 정치흐름을 분석해 보면 지배층을 이룬 한 부류에선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상황을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물질적(사회경제적)으로나 정신도덕적(항일과 사대)으로나 생사를 가늠하는 일이기에 조금도,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리겨레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다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기자신의 정신적이던 물질적이던 이해관계를 떠나 민중의 편에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이란 말 잔치나 말 바꿔 치기 놀이보다는 자기가 내세워 민중과 약속한 “말의 족쇄”에 충실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예로 좋은 비교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희생하신 경험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점에서 우리민족의 성원이라면 우리 민족수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과 백성의 편에 서서 싸웠던 분들의 삶 속에서 겨레의 나아갈 길을 찾고 이를 후손들에게 모범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민중과 함께 하는 지식인들을 가늠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우리 겨레의 역사를 함께해 온 “선비사상”이라 생각해 본다.
이제 본론으로 가기 위해 국내 형편을 보자. 모든 언론이란 언론이 만들어 내는 연극 아닌 연극이 하나 눈에 띄어온다. “안철수 신드럼”이다. “새정추”, “안의 신당”, “새로운 정치” 이들이 이용하는 심리학적 수식어는 바로 “새”다.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나타난 “새”란 수식어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참신한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더럽게 이용당했다.
1945년 8월15일 이른바 “해방”정국 이후 유행했던 “새나라 어린이”들이 오늘날 “어버이연합” 늙은이들이 되었고, 한겨레당은 민심이 점점 자기들로부터 멀어지자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아주 최근에 벌어지는 국내상황을 보면 또 “새”자가 국민들의 의식을 농락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새정추”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
이들이 국민에게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이 새것일까? 또 무엇 때문에 겨레의 평화통일과 사회의 민주화가 앞으로 동북아를 평화의 시대로 안내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민족사의 기로에서 “자주적 민족통일”이란 말은 빼고 어떤 과제를 새롭게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이 있는지?
이러한 국내외의 복잡한 사안들이 “새”라는 개념으로 너무 안일하게 혹은 쉽게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 “구”고 무엇이 “새” 혹은 “신”인지는 밝히지 않고 그냥 “새”를 말한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수식어 “새”를 즐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간단히 말한다면 “구태의연한 정치”를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또 수식어 “새”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속임수로는 이제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이 보여 주어야 할 때다.
다카키 마사오도, 전두환도, 이명박도, 다카키 그네도 “새”를 좋아했고, 그들도 “인권”, “민생”, “민족통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인권”은 있는 사람들의 “인권”이고, 그들의 “민생”은 잘 사는 사람들의 “민생”이고, 그들이 말하는 “민족통일”은 세계금융시장의 시장확보로서의 “통일”인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진정으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세상에 떠도는 내용 모르는 “새”에 현혹되지 말고 그 수식어가 담고 있는 “새”의 본질을 깊이 파보고 결정하는 삶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라 생각된다.
4347(2014)년 1월 24일
원효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