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님의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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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1-19 06:56 조회1,526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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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
<진술서>
저는 오늘 다시 이십대 대학생이 되어 이 자리에 선 듯합니다.
국제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하고 일부 언론이 종일 저라는 사람을 악마화 하며 지난 몇 해 동안 해오던 토크쇼를 문제 삼을 때, 어쩌면 이 일로 생각지 못했던 고난을 또 한 번 당할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대학생대표로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 방북을 하고 휴전선을 넘어 돌아온 그날 이후, 꿈같은 정상회담도 보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개성까지 내달리는 통근버스도 보고 금강산에서 수시로 만나는 이산가족도 보았습니다.
수 해 동안 청춘시절 그 한 번의 결행으로 감옥살이를 했지만 이 모든 평화의 징조에 저의 정성도 작게나마 담긴 것 같아 정말 좋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이 만들어 낸 화해분위기에 힘입어 가석방도 되었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육로 방북으로 사면복권까지 되었습니다. 금강산과 개성, 평양에서 남북의 동포들이 어우러졌고 그 속에 때때로 저도 있었지만 남북이 만나 합법적인 회합통신을 하던 그 시절, 안보는 오늘보다 더 튼튼했고 국민들 마음은 더 평화로웠습니다.
90년 대 어느 날 감옥을 각오하고 행했던 일이 2000년대에는 그저 추억의 일부였습니다.
오늘 저는 애초 문제가 된 통일토크콘서트가 아니라 결국 17년 전 여대생의 몸으로 방북을 감행했던 그 죄로 다시 이곳 법정에 불려나온 셈 입니다.
수사기관이 다그치는 모든 것은 이미 1998년 혹은 2001년 두 차례나 저에게 문제 삼았던 것들입니다.
17년 전 스물다섯 살 결기 넘치고 조금은 유치했을 저도 분명 저입니다.
북한이라는 곳이 극단의 모습이길 바라는 사람조차 막상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서는 화기애애하고 서로를 고무찬양 합니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도 언론사 대표도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단상태의 한반도에서 지상낙원을 바라는 것도 무리지만 심각한 고립과 경제난 속에서도 70년을 지탱해온 일방에게 사람이 살지 못할 지옥을 고대하는 것도 망상일 뿐입니다.
그간 세 차례나 공직선거에 출마도 하였고 어떻게 하면 더 대중적이고 합법적이고 더 감동적인 통일을 만들 것인가 고민 했습니다. 제가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도 결국 분단극복 없이는 이 나라의 물질적 대박 뿐 아니라 정신적 풍요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성숙한 통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매 번 국가가 나서서 저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방북할 당시는 물론이고 그 어떤 집단이나 사람의 일방적 지령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지독하게 탐구하고 읽고 사색하고 납득이 되고 가슴밑바닥부터 동 해야 움직였습니다. 저에게 편견과 선입견이 아니라 기회를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도래할 남북 화합, 공존공영의 시대에 저의 경험과 고민을 모두 바치고 싶습니다.
딱 한 가지, 열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게 된 아이들, 여전히 아빠를 낯설어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딸들이 크게 걸립니다. 제가 만약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는 것을 접었다면 그것도 딸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을 위해 통일을 더 꿈꾸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 매카시즘을 끝내지 못한다면 저의 딸이 그 출생지와 이름, 부모 때문에 저와 똑같이 때마다 마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고 오랜 수배와 투옥 중인 남편의 바라지를 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시부모님과 함께 연년생 두 딸을 키웠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투사의 길보다 어렵고 무겁구나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삶에서 한 발자국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님의 후대도 여기 공안수사기관원의 아이들도 저의 딸들도 더불어 누려야 할 이 땅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이 마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당당합니다.
이미 수사당국도 저의 이런 의지와 자신감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재판과 관련해서 역시 억울하다고 도주할 의사도 이유도 없습니다. 증거자료라는 것도 이미 모두 확보했다고 여러 차례 언론에 흘려 준 당국을 믿고 햇수로 삼년에 걸쳐 잊을만하면 영문도 모르는 채 압수수색을 당하고 소환조사를 받았지만 늘 차질 없이 응했던 저에게 불구속 수사와 재판을 결정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오작교가 되고자 하는 착한 해외동포들을 모시고 통일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그 자리의 관객 누구도 참여 후 적화통일을 꿈꾸거나 더 과격해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여론몰이를 당하고 앞산조차 맘 놓고 나갈 수 없어지고 사제폭탄테러까지 당했지만 저의 토크쇼에 함께 해 준 관객들은 오히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공영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을 것이라 지금도 확신합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용단을 내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을 때,
그 소식에 눈물 흘리는 우리에겐 보수도 진보도 좌익도 우익도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 우리국민들의 순수한 그 마음을 믿습니다.
2015. 1. 13.
황선
<진술서>
저는 오늘 다시 이십대 대학생이 되어 이 자리에 선 듯합니다.
국제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하고 일부 언론이 종일 저라는 사람을 악마화 하며 지난 몇 해 동안 해오던 토크쇼를 문제 삼을 때, 어쩌면 이 일로 생각지 못했던 고난을 또 한 번 당할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대학생대표로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 방북을 하고 휴전선을 넘어 돌아온 그날 이후, 꿈같은 정상회담도 보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개성까지 내달리는 통근버스도 보고 금강산에서 수시로 만나는 이산가족도 보았습니다.
수 해 동안 청춘시절 그 한 번의 결행으로 감옥살이를 했지만 이 모든 평화의 징조에 저의 정성도 작게나마 담긴 것 같아 정말 좋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이 만들어 낸 화해분위기에 힘입어 가석방도 되었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육로 방북으로 사면복권까지 되었습니다. 금강산과 개성, 평양에서 남북의 동포들이 어우러졌고 그 속에 때때로 저도 있었지만 남북이 만나 합법적인 회합통신을 하던 그 시절, 안보는 오늘보다 더 튼튼했고 국민들 마음은 더 평화로웠습니다.
90년 대 어느 날 감옥을 각오하고 행했던 일이 2000년대에는 그저 추억의 일부였습니다.
오늘 저는 애초 문제가 된 통일토크콘서트가 아니라 결국 17년 전 여대생의 몸으로 방북을 감행했던 그 죄로 다시 이곳 법정에 불려나온 셈 입니다.
수사기관이 다그치는 모든 것은 이미 1998년 혹은 2001년 두 차례나 저에게 문제 삼았던 것들입니다.
17년 전 스물다섯 살 결기 넘치고 조금은 유치했을 저도 분명 저입니다.
북한이라는 곳이 극단의 모습이길 바라는 사람조차 막상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서는 화기애애하고 서로를 고무찬양 합니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도 언론사 대표도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단상태의 한반도에서 지상낙원을 바라는 것도 무리지만 심각한 고립과 경제난 속에서도 70년을 지탱해온 일방에게 사람이 살지 못할 지옥을 고대하는 것도 망상일 뿐입니다.
그간 세 차례나 공직선거에 출마도 하였고 어떻게 하면 더 대중적이고 합법적이고 더 감동적인 통일을 만들 것인가 고민 했습니다. 제가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도 결국 분단극복 없이는 이 나라의 물질적 대박 뿐 아니라 정신적 풍요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성숙한 통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매 번 국가가 나서서 저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방북할 당시는 물론이고 그 어떤 집단이나 사람의 일방적 지령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지독하게 탐구하고 읽고 사색하고 납득이 되고 가슴밑바닥부터 동 해야 움직였습니다. 저에게 편견과 선입견이 아니라 기회를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도래할 남북 화합, 공존공영의 시대에 저의 경험과 고민을 모두 바치고 싶습니다.
딱 한 가지, 열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게 된 아이들, 여전히 아빠를 낯설어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딸들이 크게 걸립니다. 제가 만약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는 것을 접었다면 그것도 딸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을 위해 통일을 더 꿈꾸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 매카시즘을 끝내지 못한다면 저의 딸이 그 출생지와 이름, 부모 때문에 저와 똑같이 때마다 마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고 오랜 수배와 투옥 중인 남편의 바라지를 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시부모님과 함께 연년생 두 딸을 키웠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투사의 길보다 어렵고 무겁구나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삶에서 한 발자국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님의 후대도 여기 공안수사기관원의 아이들도 저의 딸들도 더불어 누려야 할 이 땅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이 마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당당합니다.
이미 수사당국도 저의 이런 의지와 자신감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재판과 관련해서 역시 억울하다고 도주할 의사도 이유도 없습니다. 증거자료라는 것도 이미 모두 확보했다고 여러 차례 언론에 흘려 준 당국을 믿고 햇수로 삼년에 걸쳐 잊을만하면 영문도 모르는 채 압수수색을 당하고 소환조사를 받았지만 늘 차질 없이 응했던 저에게 불구속 수사와 재판을 결정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오작교가 되고자 하는 착한 해외동포들을 모시고 통일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그 자리의 관객 누구도 참여 후 적화통일을 꿈꾸거나 더 과격해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여론몰이를 당하고 앞산조차 맘 놓고 나갈 수 없어지고 사제폭탄테러까지 당했지만 저의 토크쇼에 함께 해 준 관객들은 오히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공영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을 것이라 지금도 확신합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용단을 내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을 때,
그 소식에 눈물 흘리는 우리에겐 보수도 진보도 좌익도 우익도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 우리국민들의 순수한 그 마음을 믿습니다.
2015. 1. 13.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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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절세의 애국자 황선님 만 만세!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황선씨 두딸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라도 힘내세요! 한때 반공보수주의자였던 저도 황선씨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