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 3은 7년 7개월 동안의 양민 학살극(펌) > 민족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2025년 11월 5일
영문뉴스 보기
최신게시글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민족게시판

제주도 4 3은 7년 7개월 동안의 양민 학살극(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3-31 20:56 조회1,909회 댓글3건

본문

제주도  4 3은 7년 7개월 동안의 양민 학살극(펌)
- 마크 리퍼트와 ‘폭력 알러지’들에게 부치는 글
글쓴이 : 김갑수

검은 흙구덩이에서는 36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60년 동안 깜깜히 묻혀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두 개의 인장이 따로 발견되었다. 그 세월 동안 마모된 인장의 자획은 희미했지만 오히려 비극은 더욱 선명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나에는 ‘희전(熙銓)’, 다른 하나에는 ‘양봉석 (梁奉錫)’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2007년 11월 14일 제주국제공항 유골 발굴 현장에서의 일이다. 며칠 후 제주대학교 조사단은 1947년, 제주도 대정국민학교 김희전 교사, 의귀국민학교 양봉석 교사의 재직 사실을 확인했다.

제주국제공항에는 최소 500명에서 700명까지의 희생자가 암매장되었다. 당시에는 정뜨르 비행장이라고 불렸던 이곳에서는 1949년 2차군법회의 사형수 249명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도내 예비 검속자 500명(추정) 등이 총살, 매장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여기 말고도 다른 학살 현장의 증언들도 부지기수로 줄을 이었다.

“군 트럭에 실려 온 주민 30여 명이 이곳에서 총살된 뒤 가릿당 동산에 암매장되었습니다.”
“화북국민학교에 집결해 있던 도피자 가족 중 일부는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들은 트럭에 태워져 누러이(제주교대 남서쪽)에서, 남자들은 고우니모루 저수지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때 저수지 물이 핏빛이었지요.”

유족들의 증언은 각종 매체에 선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말을 취합해 보면 제주도 내 학살 현장은 무려 66곳에 이른다. 희생자가 수만을 헤아린다고 하니, 이에 비하면 66곳이라는 현장 숫자가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이 중에서 우선 집단 학살 지역 11곳의 조사만 이루어지다가 지체 또는 중단된 상태로 있다.

이 비극적인 대량 참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둘째 해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당시는 대한민국이 없던 미 군정 치하였다. 8.15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 해 3·1절 기념식에는 3만의 제주도민이 참석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지역이었다. 해방 후 이방을 떠돌던 6만 명의 해외 유입 인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이 파할 무렵 일부 군중들이 “통일조국전취”를 외치며 대로로 나섰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의 총성이 터졌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무모한 발포로 인해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닷새 후인 3월 5일, 3·1 사건 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일제 때에도 전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제주도 전체 직장인의 95%가 참여한 파업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 군정의 사후대책이 얼마나 소홀하고 부당했는지를 명백한 반대급부로 일러준다.

다시 일주일 뒤인 3월 12일에는 경무부 최경진 차장(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 파업 사태를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매카시즘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동안은 그 다음의 참상에 비한다면 그리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당국이 어느 정도 단속과 선무(宣撫)를 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로 내도(來島)한 반공단체 서북청년단에 대한 불만이 차츰 고조되어 가고 있기는 했다.

불행히도 1948년 3월 14일 모슬포 지서에서 청년 양은하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보고 받은 남로당 제주위원회에서는 ‘단정반대’의 행동목표와 ‘무장투쟁’의 행동강령을 최종 확정한다. 이런 제주도민의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승만은 3월 28일, 방한한 미 육군성 드레퍼 차관에게 제주도를 미군 군사 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한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회합을 갖고 무장 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확정지었다. 급기야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제주도 남로당 무장대가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한다. 이어 미 군정장관 딘이 극비리에 제주도를 방문했다. 직후 김정호 제주 비상경비사령관은 “밤 8시 이후 통행금지 위반자는 사살하라.”는 섬뜩한 명령을 내렸다.

5월이 되도록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하여 사건을 단시일 내로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6월 2일에는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윽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발했다. 도민들의 불안감은 적중하여 닷새 후인 8월 20일에는 800명의 경찰이 제주도에 증파되었다. 이승만은 법조문에도 없는 계엄령을 반포하여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결과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다. 해안 5km 이상의 중산간 지대 마을이 모두 토벌의 표적이 되어 사람 사는 가옥이 불살라지고 최소 1만2000명 이상의 주민이 다 죽어나간 후였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가 무사히 치러진 것으로 보아 항쟁은 거의 진압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동안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시점에 제주도 지사가 발표한 인명 피해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1,000명 이하에 불과한 무장대원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양민을 무차별로 죽인 것이었다.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비극은 더욱 무자비하게 심화 확대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6일 ‘전 제주지구 예비 검속자 명부 제출의 건’이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하달된다. 이때부터 예비 검속자에 대한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게 된다. 주정공장 수감자들이 사라봉 앞 바다에 수장되고, 서귀포 관내 수감자 150명이 바다에 수장되었으며, 또한 제주경찰서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 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 앞 바다에 수장되었다.

1950년 8월 19일 밤에는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500명 이상이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8월 20일에는 모슬포 관내 수감자 252명이 군에 송치되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되었다. 아울러 섬이 아닌 목포형무소 수감 제주인과 대전 형무소 수감 제주인 300명이 여수 순천 관련자 700명과 함께 영문도 모르는 즉결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1950년 10월 10일에는 제주도 계엄령이 해제되고 잔류 예비 검속자가 석방된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954년 1월 15일 제주도 경찰국장은 잔여 무장대가 6명뿐이라고 발표한다. 이들이 마저 소탕된 1954년 9월 21일에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됨으로써 4·3사태는 7년 7개월 동안의 악몽 같은 검은 터널을 외면상으로나마 벗어나게 되었다.

4·3 항쟁의 초기에는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월간조선>이나 극우단체들의 주장대로 제주위원회가 북과 연락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북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흑색선전에 불과한 것이다.

제주는 잠들지 않는다. 아직도 숱한 희생자들이 암매장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지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진상 규명과 화해에 적극적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들에게 이로운 줄을 알기 때문이다.

4·3 항쟁은 2차대전 후 벌어진 세계 최대의 폭력극이었다. 최근 마크 리퍼트 미 대사가 칼침 공격을 당했다. 나는 이 글을 마크 리퍼트에게 읽히고 싶다. 그리고 일제히 “모든 폭력은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 ‘폭력 알러지’들에게도 묻고자 한다. 어느 것이 폭력인가? 어느 것이 폭력이 아닌가?

사진 1)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1948. 5. 5)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 2)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주로 보인다(1948. 5)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김기종 열사님을 보고 2!

4348(2015)년3월5일 난 보았다.
70년만에 처음 보았다.
대한민국의 상전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의 뻘건 피
김기종 열사께서 통쾌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열사님은 큰소리로 고함쳤다.
우리민족 통일을
한. 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 하라고 외쳤다.

당당하게 칼로 쭈으윽 그어 버린 총통 마크 리퍼트의 얼굴
길이 11센치미터에서 뼐건피를 나는 보았다. 
깊이 3센치미터라는 말
70년 거짓말을 하는 낯바닥이 3센치미터로 두터워졌다는 말

당당한 코리아의 남아
김기종 열사님 만세!
김기종 의사님 만세!

그  총통의 피는 거미 발에 피다.
그 대사의 피는 개미 발에 피다.
왜놈, 미제 총통의 피를 처음 보았다.

1905년 왜놈에게 영국, 미국이 돈을 빌려줘
그 엄청난 돈으로 우릴 침략케 해서 40년 동안 이자까지 포함하여
글거간 우리의 생명의 피는 얼마였고 

1945년9월8일부터 1953년7월27일까지 살인한 군포함 6백만의 피
우리의 양민의 피는 얼마였고
1953년7월28일부터 2015년2월까지
우리의 생명의 피를 얼마나 많이 글거가고 있는가 말이다. 
 
그  총통의 피는 거미 발에 피라고
그 대사의 피는 개미 발에 피라고
김기종 열사께서 당당히 보여주셨다.

환웅사 1만년
고조선 5200년
단군사 4348년
서양사/기독교 2015년03월05일
서양사/기독교 2015년03월15일

똥이나먹어님의 댓글

똥이나먹어 작성일

참 잔인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다 보네..임선생..
어찌 나이를 드실 만큼 드신 양반이 이제 생을 뒤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도 충분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보이는데도 이러시나?
정력은 좋으시네...허나 다시 인생을 사신다면 이리 사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무슨 철천지 원수가 되었기에 그리도 가슴속 깊이 그런 울분이 나올까?
육이오때 인민군의 총칼로 같은 동포를 잔인하게,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육당한 가족의 마음과도 같아보이네.
이보세요 임선생, 태권도를 일평생한 무도인으로서 가족의 어른으로서 부끄럼없는 삶을 매듭지시기를 바랍니다.
태권도의 정신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었입니까?
억지를 부리고, 악의에 가득찬 마음을 동족에게 돌리라고 가르쳤습니까?
내가 아는 진정한 태권도인들은 그럽디다..
싸움을 하여도, 그상대를 제압하는 그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참다가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태권도를 하는 그런 무도인의 정신을 가져야한다고요..
임선생...당신은 뭡니까?
왜 이리도 잔인한 마음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동과 마음에 대한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당신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개인적인 그늘과 억눌린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푸는 방법을 달리 생각하셔야 하겠지요..
개인적인 문제를 이런식으로 호도하고 억지부리는건 나이드신 양반이 할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많진않지만 몇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임선생의 글을 봅니다.
본인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는, 좀더 세련된 언행을 기대해봅니다.
할 수 있지 않나요?
아니면 그렇게 평생을 살아 오셨나요?
자...임선생에게 정신 차리시라고 한마디 쏩니다..
똥이나 먹어라 !!!

ㅎㅎㅎ님의 댓글

ㅎㅎㅎ 작성일

억지를 부리고, 악의에 가득찬 마음을 동족에게 돌리라... ?
잔인한 마음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동과 마음에 대한 억지를... ??
당신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개인적인 그늘과 억눌린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푸는 방법을 달리 생각하셔야 ...????
본인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는, 좀더 세련된 언행을 ?????...

ㅎㅎㅎ적반하장인데...
어르신을 그만 욕되게 하라!!
미친개에게는 미친개 몽둥이가 제일이지!!!

똥이나 먹어라  - 조까치

회원로그인

민족TV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21세기
러시아 투데이
전략문회재단
글로벌 리서치
운츠
요람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