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이 통일이 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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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5-04 20:52 조회2,315회 댓글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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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Deuk Young Choi
호치민의 측근 지압 그리고 레둑토... 지난 4월 30일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기념비적인 날이다. 종전 40주년...온 나라가 떠들썩하게그 날의 감동을 기념하고 축하했다. 분단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부러운 장면들이다...
베트남인들은 역사적으로 외적을 물리친 명장들을 존경한다. 쩐흥다오, 등레로이, 하이바쯔엉 등... 그들의 이름은 대도시 큰 거리의 명칭으로 사용되며 동상을 세워 국민들에게 교육의 본이 되게 한다. 그러나 호치민은 그들 위에 최고의 영웅이다. 전쟁 승리의 상징으로 그를 국부로 추앙하고 기념관과 사이공의 이름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졌던 그가 국민들에게는 물론 자유진영 국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인물로 인정받은 이유는 입으로 만이 아닌 행동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베트남인들의 욕구가 외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민족주의를 내세워 그들과 함께 하였고 청렴결백은 물론 민족을 위해 헌신한 점을 크게 신뢰하였다.
아무리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해도 신뢰가 없으면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고 함께 희생하는 사람도 없거나 소수에 그쳤을 것이다. 모범을 보인 그의 리더쉽 때문에 주변에는 그를 뒷받침하는 인물들과 함께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지향하고 조직했던 공산당과 베트민이 외향적으로 공산주의를 내색하지 않고 철저히 민족주의를 표방한 그의 계산은 적중하였다. 분명 그는 한반도 6.25전쟁에서 어마어마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눈여겨 보았고 그 교훈을 베트남전에 적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1969년 9월에 79세의 나이로 죽었어도 그와 함께했던 베트남인들은 흔들림 없이 그의 뜻을 지켰다.
묘지를 만들지 말고 유골을 삼등분하여 북부 중부 남부의 중심부에 뿌려 주도록 유언하였지만 베트남인들은 그의 유지와는 달리 크게 묘지를 만들어 그를 모셨으며 전통적으로 3개 지역이 분할되고 단합이 안 되던 베트남은 그로 인하여 하나로 통일을 이루었고 그는 건국의 아버지로 호칭되었다.
"3불정책의 지압" 보 구엔 지압 장군은 전쟁을 지휘한 호치민 제 1 참모이며 또 다른 영웅이고 큰 전쟁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키가 작았던 그가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는데 나폴레옹의 전술에도 정통했고 특히 손자병법을 익힌 그의 “3불전략”은 게릴라 전술의 대명사가 되었다.
“3불전략”은 적이 원하는 장소와 방법과 시간의 3가지를 택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적이 원하지 않는 의외의 장소와 방법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적이 방심하는 허점을 기습하는 것이 그의 작전이다. 그는 이 전략으로 강대국과 싸워 모두 승리하였고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그를 추앙한다.
그는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할 때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침투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방어벽인 고지에 침투하고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베트남전에서는 휴일기간인 구정을 이용하여 전국적인 대공세를 펴서 거의 소멸되어 미약할 줄 알았던 그들의 대대적인 전투력을 보고 참전군은 물론 본국의 미국인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으며 반전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어서 중국군과의 전투에서도 그는 승리하여 강대국들을 상대로 베트남의 자부심을 높인 명장이다. 그가 102세의 나이로 2013년 10월에 세상을 떴을 때 온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파리협정의 레둑토" 레둑토는 파리 휴전협정에서 월맹의 대표로 미국의 키신저와 회담하였다.
그는 키신저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베트남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고 수상을 거부하였다. 세상은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베트남인들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호치민이 살아 있었더라도 그와 생각을 같이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동양적인 겸손이라고 표현했지만 동양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며 그것은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이라고 봐야 될 것이다.
베트남전의 미국 핵심 멤버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던 것을 전쟁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호치민과 지압 그리고 레둑토는 베트남인들의 뜻을 대변하는 지도자이며 그들을 지도자로 바로 서게 한 것은 그들을 따랐던 베트남인들의 민심이 단합했던 일이다.
민심이 하나로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민심이 하나로 집중되는 것을 보았을 때 호치민은 전쟁의 승리를 장담하였다.
이들 세 사람의 특징을 하나로 종합해 보면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질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사적인 이해관계에 청결하고 자기중심의 목소리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존경받을 귀한 일이지만 존경받기 위하여 애국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다. 애국자로 상 받는 것도 본인이 나설 일이 아니다. 저들 3인의 영웅은 이미 고인이 되어 갔지만 그들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는 것은 베트남인들의 뜻이 그들과 함께했다는 것이다.
댓글목록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베트남을 침략하여 살인 강도질을 하면서 2백만 베트남 백성들을 학살한 미제의 무릎을 꿇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베트남의 애국자 영웅님들을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대한미국 남녘의 떨거지같은 고엽제전우회 소속의 군바리아저씨들 이제 미친짓 그만하시죠? 나도 이런 애국심강한 아저씨만 보면 미쳐요~!!!! 건전하게 살았던 베트남이 지금은 붉은자본가들의 땅이 된거 모르셨죠? 이게 다 싸가지없는 대한미국 남녘의 극우보수개신교도들이 벌여놔서 베트남이 그렇게 타락의 나라로 다시 변질시켰다는군요?
요해님의 댓글
요해 작성일1975년4월30일. 남비엣트남과 양키가 항복을하고 쫏겨간 날이다.월남인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민족주의자 호치민 원수님이 양키와 양키의 용병으로 끌려가 개죽음한 따이한을 몰아내고 민족통일을 이룩한 절세의 지도자이다.그들이 양키에게 승전한것은 김일성수령의 막대한 도움이 있었다.빨치산 게릴라전법,죽음을 두려워않는 일당백의 사상으로 무장한 백두강군의 참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월사령관 채명신은 따블빽으로 미화를 챙겨서 도주했고 그이하놈들도 마찬가지다.전두환이도 꽤 짭짤하게 챙겼지.천민자본주의와 왜놈군바리의 정신이 계승되여 흐르는 오늘의 남괴뢰군바리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침략 대 살인 날강도 미제와 왜놈과 유엔 16개국은 북침을 하며 한사람당 1.5톤씩 폭탄을 퍼부면서
엄청난 군수물자를 소묘하며 우리 양민 5백만을 대 살인을 주야로 하고
미양키들과 유엔 16개국의 경제는 풀렸고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쫄딱 망한 왜놈들은 발목, 무릎, 허리까지 쭈욱펴 부자가 되였다.
그리고 월맹을 침략 전쟁으로 양민 2백만을 대량으로 살상하고 왜놈들은 목을 펴 갑부가 되였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참고로 저도 베트남을 두번이나 다녀왔습니다~!!!! 한번은 2004년 1월 호치민쪽으로 다른한번은 2014년 3월 하노이랑 하롱베이쪽으로요~!!!!! 호치민쪽에 갔을때 구찌터널도 가봤고 하노이쪽에 갔을때에는 호치민 주석이 생전에 살았던 집도 가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