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균전! 아직도 모르시는분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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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진우 작성일2015-10-12 08:35 조회1,24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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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국의 두 기둥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이야기 3
한국전쟁에서 실험한 세균전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10/12 [07: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전쟁과 미군의 세균전
“근대적 병기를 연구함으로써, 로마 제국시대 이래로 수십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수적으로 아무리 많다 해도 조직력과 무기의 우월이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진리는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 두 가지를 갖고 있으면 어떠한 대군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딘 에치슨 국무장관, 1950년 9월 10일)
에치슨의 말은 원론적으론 옳다. 그러면 에치슨이 말한 근대적 병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연상하리라 본다.
원폭이 새로운 병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 잔인하며 수많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는 병기이기도 하다. 실제 미국인들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투하했던 원폭과 한국전쟁 중 네이팜탄 폭격이 야만스럽다고 인정한다. 그 이유는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균전의 경우는 다르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가 부인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은 미군이 세균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1992년 6월 20일, MBC는 9시 뉴스 첫 소식으로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미군이 이북 전역에 걸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날조하고 이를 소련, 동독 등에 적극 선전해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에 의무 활동을 총괄했던 옛 소련군 장성이 한국전쟁 때 세균전의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곧 보시게 될 화면은 북한이 전상자를 세균전의 피해자로 날조하는 등 허위선전을 위해서 꾸며진 것입니다.”
당시 TV를 시청하던 사람들은 뜬금없는 이 뉴스에 대단히 어리둥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으론 당혹스럽기도 했을 터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조차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조차 잘 알지 못한다.
하물며 미군에 의한 세균전이라니…? 하지만 미군의 세균전 의혹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다. 한국전쟁 중 미 공군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북한과 중국의 비난과 그러한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미국과 한국의 진실게임을 거론하기 전에, 세균전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첫째, 1925년 제네바협정에서 세균전은 국제적으로 금지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만이 이를 거절하였다.
둘째, 1950년대에 유엔에서 모든 국가들이 세균전 금지를 규정한 제네바협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미국은 계속 거절하였다.
셋째, 1969년에야 비로소 닉슨행정부가 세균전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과 한국전쟁 당시 크리시(Creasy), 블레인(E. T. Bullene) 등의 장군들이 공개적으로 세균전을 찬성했다는 사실은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세균전에 관련해 간과해선 안 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하얼빈 731 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三郞, 1892-1959) 중장에 대한 미국의 처리 방안이다. 1949년 12월 시베리아의 하바로프스크 시에서 일본군인 12명에 대한 전범재판이 있었다.
피고 전원은 2년에서 25년에 걸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40년에 공장을 만들어 세균병기를 중국인에 대하여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죄목이었다. 피고인 중 이시이가 있었다. 하지만 세균전 부대 731부대를 설립한 이시이는 전후 만주로부터 일본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이시이의 범죄행위를 재판하겠다는 소련의 요구에 대해 맥아더는 끝까지 신병인도를 거부하였다. 결국 이시이는 궐석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세균전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강력한 어조로 이시이를 보호한 사실 마저 부인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시이가 철저히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뒤 그 기록에 의하면, 1949년 이시이는 메릴랜드 주 포트테릭에 있는 세균전 연구소에 근무한 것으로 들어났다.
분명한 것은 이시이와 그의 참모들은 일본이 15년 동안 개발한 세균전의 비밀연구 결과를 미국 측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이 전범들을 불기소 처분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과 사실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지금도 세균전 관련을 부인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 중 세균전을 시행했다는 것은 당시 과학자들도 인정했다. 1952년 3월 29일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 집행위원회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미군의 세균전 의혹에 대하여 규명할 것을 결의하고 곧 실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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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안드레아 안도렌 박사(스웨덴); 스톡홀름 시병원 중앙 임상연구소장
•쟌 마르텔(프랑스); 농업기사, 크리니옹의 국립농업대학 동물생리학 연구 소장, 전 유엔구제부흥회의 가축 전문가,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가축학회 통신 위원
•죠셉 니담 박사(영국); 영국 학사원 회원, 캠브리지 대학 윌리암 니담 경 기념강좌 생화학 강사, 전 중경 주재 영국대사관 참사관(과학담당), 유네스코 자연과학 국장
•올리뷔엘로 올리브 박사(이탈리아); 볼로니아 대학 의학부 인체해부학 교수, 전 토리노 대학 일반 생물학 강사
•사뷰엘 B. 베소아 박사(브라질); 상파울로 대학 기생충학 교수, 전 상파울로 주 공중위생과장, 레시페 대학 및 파라이버 대학의 의학부 명예교수
•N. N. 슈코프 벨레니스코프 박사(소련); 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세균학 교수·부총장, 이전 세균전 참가의 이유로 고소된 전 일본 군인에 대한 하바로프스크 재판에서는 주임이학 전문가였음
•프랭크 크라찌오 박사(이탈리아); 로마 대학의 미생물학 연구소 조수
이들 조사단은 우여곡절 끝에 600페이지가 넘는 최종 보고서를 남겼는데 아래는 주요 내용이다.
“…조사단은 결론적으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제출된 증거에 의해서, 또 조사단의 조사와 의사 및 일반의 다수 증인을 장시간에 걸쳐 심문한 결과,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즉 탄저열병에 감염된 갖가지 생물류가 중국의 2개 지방 외 많은 장소에 전파되었고, 이것에 의해 그 지방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치명적인 전염병이 몇 가지 발생했다. 즉 폐탄저열과 그것에 이은 출혈성수막명 등이다. 의심할 수 없는 목격자의 증언으로 미국의 비행기가 병원균에 감염된 생물을 운반한 운반수단이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주요 언론은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졸리오 퀴리 박사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각료 존 W. 바튼 같은 사람들은 세균전 고발이 정확하다는 논평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공산주의자의 선전’이라고 무시하고 기사로 게재하는 것을 거부해버렸다. 미국 내 정치인, 군인 및 과학자들도 조사단을 성토하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세균전에 대한 비난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한국전쟁 외에도 이슈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미군의 세균전에 대하여 망각을 한 상태이다. 그러던 중 알자지라 통신이 미국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합동참모장회의에서 촉구한 생화학전
2010년 3월 19일, 연합뉴스는 두바이의 알자지라 통신을 인용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북한에서 세균전 현장 실험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북한에서 세균전 현장 실험을 명령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아랍권 위성채널 알-자지라가 보도했다. 알-자지라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방영한 `피플파워'라는 심층 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다.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 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 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은 미국 참전용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미 합참이 세균전 실험을 명령했다는 문서가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일제 관동군 소속으로 세균전 연구를 담당했던 731부대 소속원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이 한반도에서 세균전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때 세균전을 벌였다는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미군이 731부대 대원들로부터 생체실험 자료를 건네받는 등 생화학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돼 왔다. 일본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2005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기밀 해제 문서에도 미군 주도 연합군이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주고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지급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을 방문한 알-자지라 취재진과 인터뷰한 북한 주민 윤창빈 씨는 "전쟁 중이던 3월인가 파리들이 꽤 커지고 갈색 빛을 띠더니 4월부터 마을에 장티푸스처럼 전염병이 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50가구였던 마을에서 주민들이 팔, 다리가 가렵고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30명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알-자지라는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과 관련해 미 국방부와 국무부에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일본의 관련 전문가 모리 마사타카 교수는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생화학 무기 사용은 제네바 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미국은 세균전 의혹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그러나 나는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알-자지라는 당시 북한 폭격에 가담했던 미군 조종사 케네스 에노크(85. 현 텍사스주 거주)씨는 항공기 추락으로 북한군에 포로가 됐을 당시는 자신이 세균 폭탄 투하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으나 종전으로 석방된 후엔 강요에 의한 거짓 진술이라고 밝혔다면서 그럼에도 케네스 씨는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으나 세균전이 수행됐을 개연성에 대해선 일부 시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 합참의 명령이 실행됐음을 보여 주는 확증은 아직 없으며, 미국 정부가 관련 기록도 모두 없애 진위가 가려지지 않았다고 밝힌 알-자지라는 따라서 공정한 조사를 통해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는 한 미군의 한국전 당시 생물학전 여부는 풀리지 않는 냉전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미국과 북한 관계에 망령으로 떠돌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래에 관련 기밀문서와 번역문을 소개한다.
1급비밀
합동참모장회 1837/26
1951년 9월 21일
합동선진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비망록
결 론
"3. 생물학전은 전쟁무기로서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다.
"4. 국가안보는 미합중국이 지체 없이 강력하고 효과적인 생물학 전력을 획득할 것을 요구한다. 온전한 군사적 발전은 생물학 무기의 사용에 관하여 전예에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전쟁수행에 효과적인 수단의 개발을 요구한다.
"5. 대규모 야전 실험을 포함한 보다 더 적극적인 실험계획을, 작전상황에서의 특정 생물학 병균의 효율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되어야 한다.
"6. 생물학전은 구조물이나 재산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기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7. 만일 생물학 세군의 낮은 생산가가 실현된다면, 우리의 경제 구조를 위험하게 하지 않고 장기간 군사적 강력한 자세 유지에 대한 절실한 필요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생물학적 능력의 성취는 현재 우리 무기 체제의 획득과 경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8. 생물학전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복무중인 적은 수의 군 인원들에게 생물학전쟁에 대한 주입과정을 설치하여 소개하여야 한다.
"9. 생물학전을 채택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유리할 때에는 언제나 미합중국이 생물학전을 채택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적극적 군사 정책을 채택한다면, 생물학전에 대한 활용 관심을 자극할 것이며 생물학전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고엽제살포가 생화학전의 일환이라는 주장은 베트남전쟁에서 치열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한국에서의 고엽제 살포와 세균전의 관계는 베트남에서와 같이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쟁중인 주제다. 과연 고엽작전은 세균전 또는 생화학전과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세균실험을 실시하라는 명령문서가 최근 발굴됨으로써 세균전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상기 인용한 “합동선진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비망록” 제5항에 따르면 한반도 작전 상황 아래 미 합참은 특정 세균전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증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포함한 더 강력한 실험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음이 확인된다. 그동안 세간에 떠돌던 미군의 생화학전 실행이 실제로 한국전쟁 동안 실시되었다는 뜻이다. 세균전 계획과 고엽제 작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균전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종전과 함께 폐기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월남전에서 엄연히 부활하여 고엽제라는 화학전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후유증을 남겼다.
미국은 세계적인 고엽제 논란에 휩싸여 1969년 제네바생화학금지조약에 참여하면서도 끝까지 고엽제는 생화학전쟁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집요하게 견지해 왔다.
그러나 1975년 포드 대통령의 실행명령으로 결국 고엽제 사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면서 미국은 고엽제가 생화학전 금지 대상의 하나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2844
어제: 10465
미 제국의 두 기둥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이야기 3
한국전쟁에서 실험한 세균전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10/12 [07: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전쟁과 미군의 세균전
“근대적 병기를 연구함으로써, 로마 제국시대 이래로 수십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수적으로 아무리 많다 해도 조직력과 무기의 우월이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진리는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 두 가지를 갖고 있으면 어떠한 대군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딘 에치슨 국무장관, 1950년 9월 10일)
에치슨의 말은 원론적으론 옳다. 그러면 에치슨이 말한 근대적 병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연상하리라 본다.
원폭이 새로운 병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 잔인하며 수많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는 병기이기도 하다. 실제 미국인들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투하했던 원폭과 한국전쟁 중 네이팜탄 폭격이 야만스럽다고 인정한다. 그 이유는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균전의 경우는 다르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가 부인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은 미군이 세균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1992년 6월 20일, MBC는 9시 뉴스 첫 소식으로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미군이 이북 전역에 걸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날조하고 이를 소련, 동독 등에 적극 선전해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에 의무 활동을 총괄했던 옛 소련군 장성이 한국전쟁 때 세균전의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곧 보시게 될 화면은 북한이 전상자를 세균전의 피해자로 날조하는 등 허위선전을 위해서 꾸며진 것입니다.”
당시 TV를 시청하던 사람들은 뜬금없는 이 뉴스에 대단히 어리둥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으론 당혹스럽기도 했을 터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조차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조차 잘 알지 못한다.
하물며 미군에 의한 세균전이라니…? 하지만 미군의 세균전 의혹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다. 한국전쟁 중 미 공군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북한과 중국의 비난과 그러한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미국과 한국의 진실게임을 거론하기 전에, 세균전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첫째, 1925년 제네바협정에서 세균전은 국제적으로 금지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만이 이를 거절하였다.
둘째, 1950년대에 유엔에서 모든 국가들이 세균전 금지를 규정한 제네바협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미국은 계속 거절하였다.
셋째, 1969년에야 비로소 닉슨행정부가 세균전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과 한국전쟁 당시 크리시(Creasy), 블레인(E. T. Bullene) 등의 장군들이 공개적으로 세균전을 찬성했다는 사실은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세균전에 관련해 간과해선 안 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하얼빈 731 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三郞, 1892-1959) 중장에 대한 미국의 처리 방안이다. 1949년 12월 시베리아의 하바로프스크 시에서 일본군인 12명에 대한 전범재판이 있었다.
피고 전원은 2년에서 25년에 걸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40년에 공장을 만들어 세균병기를 중국인에 대하여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죄목이었다. 피고인 중 이시이가 있었다. 하지만 세균전 부대 731부대를 설립한 이시이는 전후 만주로부터 일본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이시이의 범죄행위를 재판하겠다는 소련의 요구에 대해 맥아더는 끝까지 신병인도를 거부하였다. 결국 이시이는 궐석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세균전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강력한 어조로 이시이를 보호한 사실 마저 부인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시이가 철저히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뒤 그 기록에 의하면, 1949년 이시이는 메릴랜드 주 포트테릭에 있는 세균전 연구소에 근무한 것으로 들어났다.
분명한 것은 이시이와 그의 참모들은 일본이 15년 동안 개발한 세균전의 비밀연구 결과를 미국 측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이 전범들을 불기소 처분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과 사실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지금도 세균전 관련을 부인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 중 세균전을 시행했다는 것은 당시 과학자들도 인정했다. 1952년 3월 29일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 집행위원회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미군의 세균전 의혹에 대하여 규명할 것을 결의하고 곧 실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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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안드레아 안도렌 박사(스웨덴); 스톡홀름 시병원 중앙 임상연구소장
•쟌 마르텔(프랑스); 농업기사, 크리니옹의 국립농업대학 동물생리학 연구 소장, 전 유엔구제부흥회의 가축 전문가,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가축학회 통신 위원
•죠셉 니담 박사(영국); 영국 학사원 회원, 캠브리지 대학 윌리암 니담 경 기념강좌 생화학 강사, 전 중경 주재 영국대사관 참사관(과학담당), 유네스코 자연과학 국장
•올리뷔엘로 올리브 박사(이탈리아); 볼로니아 대학 의학부 인체해부학 교수, 전 토리노 대학 일반 생물학 강사
•사뷰엘 B. 베소아 박사(브라질); 상파울로 대학 기생충학 교수, 전 상파울로 주 공중위생과장, 레시페 대학 및 파라이버 대학의 의학부 명예교수
•N. N. 슈코프 벨레니스코프 박사(소련); 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세균학 교수·부총장, 이전 세균전 참가의 이유로 고소된 전 일본 군인에 대한 하바로프스크 재판에서는 주임이학 전문가였음
•프랭크 크라찌오 박사(이탈리아); 로마 대학의 미생물학 연구소 조수
이들 조사단은 우여곡절 끝에 600페이지가 넘는 최종 보고서를 남겼는데 아래는 주요 내용이다.
“…조사단은 결론적으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제출된 증거에 의해서, 또 조사단의 조사와 의사 및 일반의 다수 증인을 장시간에 걸쳐 심문한 결과,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즉 탄저열병에 감염된 갖가지 생물류가 중국의 2개 지방 외 많은 장소에 전파되었고, 이것에 의해 그 지방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치명적인 전염병이 몇 가지 발생했다. 즉 폐탄저열과 그것에 이은 출혈성수막명 등이다. 의심할 수 없는 목격자의 증언으로 미국의 비행기가 병원균에 감염된 생물을 운반한 운반수단이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주요 언론은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졸리오 퀴리 박사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각료 존 W. 바튼 같은 사람들은 세균전 고발이 정확하다는 논평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공산주의자의 선전’이라고 무시하고 기사로 게재하는 것을 거부해버렸다. 미국 내 정치인, 군인 및 과학자들도 조사단을 성토하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세균전에 대한 비난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한국전쟁 외에도 이슈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미군의 세균전에 대하여 망각을 한 상태이다. 그러던 중 알자지라 통신이 미국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합동참모장회의에서 촉구한 생화학전
2010년 3월 19일, 연합뉴스는 두바이의 알자지라 통신을 인용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북한에서 세균전 현장 실험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북한에서 세균전 현장 실험을 명령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아랍권 위성채널 알-자지라가 보도했다. 알-자지라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방영한 `피플파워'라는 심층 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다.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 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 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은 미국 참전용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미 합참이 세균전 실험을 명령했다는 문서가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일제 관동군 소속으로 세균전 연구를 담당했던 731부대 소속원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이 한반도에서 세균전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때 세균전을 벌였다는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미군이 731부대 대원들로부터 생체실험 자료를 건네받는 등 생화학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돼 왔다. 일본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2005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기밀 해제 문서에도 미군 주도 연합군이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주고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지급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을 방문한 알-자지라 취재진과 인터뷰한 북한 주민 윤창빈 씨는 "전쟁 중이던 3월인가 파리들이 꽤 커지고 갈색 빛을 띠더니 4월부터 마을에 장티푸스처럼 전염병이 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50가구였던 마을에서 주민들이 팔, 다리가 가렵고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30명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알-자지라는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과 관련해 미 국방부와 국무부에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일본의 관련 전문가 모리 마사타카 교수는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생화학 무기 사용은 제네바 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미국은 세균전 의혹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그러나 나는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알-자지라는 당시 북한 폭격에 가담했던 미군 조종사 케네스 에노크(85. 현 텍사스주 거주)씨는 항공기 추락으로 북한군에 포로가 됐을 당시는 자신이 세균 폭탄 투하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으나 종전으로 석방된 후엔 강요에 의한 거짓 진술이라고 밝혔다면서 그럼에도 케네스 씨는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으나 세균전이 수행됐을 개연성에 대해선 일부 시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 합참의 명령이 실행됐음을 보여 주는 확증은 아직 없으며, 미국 정부가 관련 기록도 모두 없애 진위가 가려지지 않았다고 밝힌 알-자지라는 따라서 공정한 조사를 통해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는 한 미군의 한국전 당시 생물학전 여부는 풀리지 않는 냉전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미국과 북한 관계에 망령으로 떠돌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래에 관련 기밀문서와 번역문을 소개한다.
1급비밀
합동참모장회 1837/26
1951년 9월 21일
합동선진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비망록
결 론
"3. 생물학전은 전쟁무기로서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다.
"4. 국가안보는 미합중국이 지체 없이 강력하고 효과적인 생물학 전력을 획득할 것을 요구한다. 온전한 군사적 발전은 생물학 무기의 사용에 관하여 전예에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전쟁수행에 효과적인 수단의 개발을 요구한다.
"5. 대규모 야전 실험을 포함한 보다 더 적극적인 실험계획을, 작전상황에서의 특정 생물학 병균의 효율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되어야 한다.
"6. 생물학전은 구조물이나 재산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기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7. 만일 생물학 세군의 낮은 생산가가 실현된다면, 우리의 경제 구조를 위험하게 하지 않고 장기간 군사적 강력한 자세 유지에 대한 절실한 필요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생물학적 능력의 성취는 현재 우리 무기 체제의 획득과 경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8. 생물학전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복무중인 적은 수의 군 인원들에게 생물학전쟁에 대한 주입과정을 설치하여 소개하여야 한다.
"9. 생물학전을 채택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유리할 때에는 언제나 미합중국이 생물학전을 채택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적극적 군사 정책을 채택한다면, 생물학전에 대한 활용 관심을 자극할 것이며 생물학전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고엽제살포가 생화학전의 일환이라는 주장은 베트남전쟁에서 치열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한국에서의 고엽제 살포와 세균전의 관계는 베트남에서와 같이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쟁중인 주제다. 과연 고엽작전은 세균전 또는 생화학전과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세균실험을 실시하라는 명령문서가 최근 발굴됨으로써 세균전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상기 인용한 “합동선진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비망록” 제5항에 따르면 한반도 작전 상황 아래 미 합참은 특정 세균전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증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포함한 더 강력한 실험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음이 확인된다. 그동안 세간에 떠돌던 미군의 생화학전 실행이 실제로 한국전쟁 동안 실시되었다는 뜻이다. 세균전 계획과 고엽제 작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균전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종전과 함께 폐기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월남전에서 엄연히 부활하여 고엽제라는 화학전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후유증을 남겼다.
미국은 세계적인 고엽제 논란에 휩싸여 1969년 제네바생화학금지조약에 참여하면서도 끝까지 고엽제는 생화학전쟁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집요하게 견지해 왔다.
그러나 1975년 포드 대통령의 실행명령으로 결국 고엽제 사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면서 미국은 고엽제가 생화학전 금지 대상의 하나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진짜로 좇되게 노는 미국세균맨들아~!!!! 이제는 제발 그만해라~!!!! ㅡ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