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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코리아전쟁 진실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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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06-25 07:27 조회3,92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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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945년 8.15해방의 기쁨은 불과 20여일 뿐이었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가면서 우리민족은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코리아 전쟁이 터졌다. 그 주범은 미국이라고 하는데 남녘 정치인들과 보수족벌언론들은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왜곡해 왔다. 그것이 오늘 한국 정치모순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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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코리아전쟁 진실과 그 과제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코리아 전쟁의 진실을 밝혀내는데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게다가  이 전쟁이 3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북조선과 중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정전협정(1953.7.27) 을 맺은지도 60년이 되어 오는데 아직도 그 당시에 합의하고 약속하였던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못하고 코리아 반도에는 여전히 긴장정세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코리아전쟁의 본질은 '남침이다', '북침이다'라고 주장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의 주체가 어디이며 그리고 이 전쟁의 성격과 역사적 배경이 어디에 있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코리아 전쟁은 또 우리민족의 분단 전후역사에서도 그 본질과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 
 
 코리아 전쟁의 주체는 실제로 북조선과 미국이었다. 중국은 지원군으로 가담하여 보조역량으로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북조선과의 전쟁 대상국은 미국이 주동이었고 이에 보조 역량으로 남한과 미국이 끌어들인 16개국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쟁 당사국의 주체는 조선과 미국이었다.
 
코리아 전쟁의 본질과 성격
 
그러면 전쟁의 성격은 무엇인가. 쉽게 설명하면 우리민족 제국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북조선은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불러왔다. 미국측으로 볼때에는 남한을 돕기 위해  수만명 미군들의 생명을 잃은 전쟁에 관여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 패권의 전초기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목적의식적으로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이 국내외 양심학자들의 객관적인 평가이다.
 최강대국인 미국이 동조세력으로 16개국을 끌어들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미국은 오히려 전쟁에서 치명타를 받고 결국 정전협정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조선은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날을 가리켜 전승절 기념해 왔으나 미국은 코리아전쟁을 통하여 치욕적인 패전기록을 남겼다.
미국이 제국주의 세력이며 침략세력이라는 것은 국제사회의 일부 추종국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라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해 왔다. 미국역사 237년을 돌아보면 미국이 작은 나라들을 침략한 역사는 무려 150 차례가 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이 북조선과 정전협정을 맺고서도 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위반해 사실들도 부지기수이다.  1953 727 조선과 중국, 그리고 미국 3자는 정전협정에 조인할 90 내에 외국군은 철수하고 평화협정을 맺기로 합의된바 있었으나 미국은 이러한 약속을 깨고 이후 지금까지 유엔의 모자를 쓰고 무려 60 동안이나 코리아반도의 남녘 땅에 눌러 앉아 군사주권, 경제주권 군사외교 주권까지 장악한 영구분단을 획책하여 것이 미제국주의의 실상이었다.  소련은 북조선의 요구에 의해 이미 1948 12월에 북녘 땅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미제는 침략자의 근성을 버리지 않고 조국반도의 남녘 땅에 눌러앉아 이승만 정권을 하수인으로 만들어 점령군으로 행세 왔다.
미국은 1975 열린 유엔 30 총회에서도 미군철수를 결의한바 있었으나 이것도 무시하고 지금까지 코리아 반도의 남녘 땅에서 주인행세를 자행하고 있다. 미국이 그것을 위한 정책으로 세운것이 남북이간 정책이었다.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 혹은 대북압살고립정책이 바로 제국주의 침략정책의 일환이었다. 
게다가 미제는 코리아 전쟁시기에도 핵무기 사용을 시도했고, 이후에도 북조선을 핵공격의 대상으로 지목하며 남녘 땅에 1천여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가 철수하고 또다시 들여오는가 하면 리졸브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비롯하여 독수리 훈련 등을 통해 핵공격, 핵선제 타격훈련을 끊임없이 전개해 왔다. 심지어는 5027, 5029, 5030 각종 북침훈련과 핵공격 훈련을 전개하여 왔다.
제국주의자들은 코리아 반도 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침략하고 때려부시면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해 왔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라크 사태를 비롯하여 아프카니스탄, 리비아 중동지역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수많은 나라들을 침략하며 괴롭혀 원흉이 바로 미제국주의 세력이다.  
미국은 또한 인류역사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국제깡패로 행세해 나라로 악명이 높다. 미국의 평화운동가 브라이언 윌슨 변호사는 미국 정보국은 국제사회 2백여 나라들을 대상으로 도청감청하면서 1만여 차례나 음모하고 공작한 불법행위를 자행해 왔다고 폭로한바도 있었다.  요즘에는 전직 미중앙정보국 직원이던 에드워드 조지프 스노든(Edward Joseph Snowden, 1983 6 21 ~ ) 미국의 도감청 비리를 세계만방에 폭로하며 망명처를 찿고 있는 보도가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스노든에 따르면 정보국은 수십개 나라들을 대상으로 도감청해 사실들을 고발하면서 중에는 동맹국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유럽나라들과 일부 나라들은 이에 항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지배세력은 이러한 불법행위를 오면서도 자신들을인권국가이니자유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오도하고 왜곡하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들은 인권이니 민주니 하면서 압박하고 적대시하며 괴롭혀 왔다.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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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미제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권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단호하게 맞서기 위하여 자기 힘을 길러 나라가 바로 우리 조국의 절반인 북부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대부분 나라들은 미국의 협박에 주눅이 들고 굴복하기도 했지만 북조선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왔다. 순간에도 조선과 미국의 대결전은 세계의 관심이 되고 있다.
-미대결전의 본격적인 출발은 지난해부터였다. 북조선이 작년  2012  12 12 광명성3-2호기의 인공지구위성발사를 성공적으로 단행하자 미국이 이것을 문제 삼고   추종세력을 동원하여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결의(1.22) 것이 화근이 되었다.
조선은 이에 대해  1 23일부 외무성 성명을 통해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가 미국 주도하에 꾸며졌다면서우리에 대한 미국의 적대시정책에는 말로써가 아니라 힘으로 맞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서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면대결전에 진입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반미투쟁의 새로운 단계 전면대결전에서 북이 계속 발사하게 위성과 장거리로켓, 북에서 진행할 높은 수준의 핵시험도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인 미국을 겨냥하게 된다는것을 숨기지 않는다 초강경으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측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배격한데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이 위성을 발사할 때마다 이를 문제 삼아 제재가 가해지는 악순환 자체를 아예 단절하는데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3 핵실험을  단행(2013.2.12)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렇게 코리아반도문제의 본질이 또다시 -미대결전으로 부상하자 그동안 평화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상태의 정전체제가 무의하게 되었다. 애매모호해 정전상태가 60년이나 지속되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판단한 조선은 금년  3 6일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연습이야말로 정전협정에 대한 체계적인 파괴행위의 집중적인 발로라며 이른바한미합동군사훈련 본격화되는 지난 3 11일을 기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어온 정전협정의 효력을완전히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표명하고 이를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연장선상에서 33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는 병진노선이 결정되었고, 곧바로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으로 핵보유국임을 확정짓고 향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갈것을 내외에 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심을 하게 직접적인 배경은 바로 미국의 핵공격 위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3척동자도 주지하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추종세력들은 아직도 조선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과 추종세력들이 조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기인된 것으로 진단된다. 특히 미국의 식민지 처지에 있어온 이명박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은 시도 때도 없이 미국과 중국에 달려가 북의 비핵화를 위해 압력을 가해달라고 애걸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 왔다.  
조선의 입장과 자세는 분명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1위원장은 지난 3 29 0 30분에 조선인민군 전략로켓군 화력타격임무 수행과 관련한 작전회의를 긴급소집해 미제가 방대한 전략무력을 끌어들여 무모한 불질을 한다면 아성인 미국 본토와 하와이, 괌도를 비롯한 태평양작전구안의 미제침략군 기지들, 남조선주둔 미군기지들을 사정을 보지 말고 타격해야 한다면서 전략로켓군의 화력타격계획을 검토하고 최종수표했다는 소식이 로동신문 329일자가 보도했다. 그리고 회의장에는미본토 타격계획 나붙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워싱턴을 비롯하여 본토와 태평양지역의 주요 미군기지들을 타격하게 전략로켓 타격궤도가 그어져 있었던 것을 있었다.
미국은 이에 대해 뭔가 주춤하면서 대화의 뜻을 시사했다. 여기에 조선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지난  4 18 성명을 통해 미국이 조선과 대화를 하려면 실천적인 조치부터 취해야 한다면서 첫째, 유엔 안보리제재결의를 비롯해서 지금까지의 도발행위들을 즉시 중지하고 전면 사죄해야 하며, 둘째 다시는 북을 위협하거나 공갈하는 핵전쟁연습을 하지 않을 , 셋째  남한과 주변지역에 끌어들인 핵전쟁수단의 전면철수 재투입을 단념할 것을 요구했다.
코리아 반도의 핵위기 사태의 진상은 〈로동신문〉 4 30일자가  조선반도핵위기사태의 진상을 론함이라는 논평원의 글에서도 지적한대로  조반반도문제미국이 남조선을 강점하면서 생겨난것이자 장장 60년이상 미해결로 오늘까지 존속되여온 국제초미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코리아 반도문제의 본질 대해 다시 한번 규정해 내용이 정곡을 찔러주었다. 코리아 반도 문제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이 원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푼다는 것은  그것을 거두고 -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당국의 입장은 아직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코리아 반도의 남녘땅을 지속적으로 식민지로 이용하면서 동북아지역의 패권을 누리자는 강도적 심보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당면한 문제로 진단된다.  
 
 
- 대결 전환의 해법은 무엇인가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코리아 반도에 안정과 평화를 정착시키고 우리 민족의 숙원이며 염원으로 되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크게 두가지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코리아반도의 본질이 -미문제, -미간의 대결이기 때문에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도록 아직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몰상식의 역사를 끝장내기 위해  -미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해내외 동포들이 모두 힘을 합쳐 -미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나라간에 외교관계가 정상화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당면 과제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민족은 이미 남과 , 북과 최고지도자들이 합의하고 서명한 평화통일의 이정표가 마련되어 있다. 그것이 6.15남북공동선언이며 10.4평화선언이다. 우리는 이미 통일의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다만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과 같은 반평화 세력, 반통일 세력의 방해 때문에 코리아 반도문제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방해책동을 청산하기 위하여 사상과 이념, 신앙과 정견, 가진 재산의 유무를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함께 손잡고 우리민족의 진로를 가로막는 세력에 과감하게 도전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기초하여 나온 해법방향으로 때만이 2 코리아전쟁을 막을 있고, 그리고 진정한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이룩할 있다고 확신한다.()
(2013.7.5)
 
 
 
 
[연재-4]코리아전쟁 진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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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그리고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코리아 전쟁은 미국에 의해 발발된 전쟁이고 북한에게는 강요된 전쟁이었다. 미군과 하수인 노릇을 이승만 정권의 군대는 6.25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의 불을 지피기 위해 실제로 군사공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마치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정권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벌인 대북대결정책과도 유사한 모습을 띄고 있다.


 본격적인  코리아 전쟁은 1950 625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전부터 미국의 북침공작에 의해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1949 6월에 일어 ‘호림(虎林)부대 사건’도 한가지였다. 사건은 남한 군과 서북 청년단이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1949 6 29일에설악산 금강산 줄기를 타고 들어가 원산 남방 안변 지구까지 침투한 사건이었다. 예로 1949 6 7일에는 남한 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으로 부터 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 6 17일에는 38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전투에 남한이 적극적이었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미군과 공모하여 입버릇처럼 말하던 ‘북진통일’의 부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전쟁 발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생길 있으므로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단행하였다.


 남한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1949 8월에도 춘천과 홍천, 그리고 인제 일대에서 남북한 정규군간의 전투가 무려 19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남한 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이르고,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지역들은 1950 6 25일에 인민군이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 혹은 코리아 전쟁의 원인은 6.25 남침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작은 북침전쟁을 수없이 도발한 데에 있었다. 반복된 북침에서 북침의 주체는 하수인 역을 맡았던 남한 군이 없고 당연히 지휘권을 미군이었다. 이러고서도 미군과 남한 당국이 지금까지 북의 남침으로 코리아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 없다


 코리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미국은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왔다. 미국은 이렇게 북한을 붕괴 시키려는 기도가 좌절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 하려고 계획 하였다. 애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북파 공작원의 침입을 받아온 북한 정권은 미국이 결국은 전쟁을 통해 자신을 붕괴시키리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1946 미군 24군단정보처는 산하에 442 CIC’라는 첩보부대를 창설했으며, 부대는 1948여러 반공단체와 통합해 KLO(Korean Liaison Office) 부대가 된다. (KLO흔히 ‘켈로’ 부대라고 불렀다) 8240부대로도 불린 켈로 부대는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생포 사살 적군 진지 주요 시설물 폭파 각종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첩보 수집 첩보망구축. 중요 요인의 암살. 주요공공기관을 방화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등을 수행했다.


 또한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물적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며 임무수행 부상이나 임무수행 불가능 상태에서는 자결이나 자폭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 3 1평양 앞에서 열린 3.1기념행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을 있다. 평양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기념행사에서 김일성 주석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터지려고 씩씩 소리를 내는 수류탄을 집어 들고 주석 단에서 내리뛰어 김일성 주석 등의 지도부를 구했다. 당시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 주석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소련을 방문(訪蘇) 김일성 주석과 재회했다.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2002 8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귀국길에도 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나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테러는 CIA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백의사가 일으킨 것으로 백의사와 CIC (주한미군방첩대) 공동으로 정릉의 대북암살단훈련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군번 없는 용사로 불리우는 북파 공작원은 6.25 해방 후부터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 하에 비밀리에 양성되어 전쟁 시에는 6,000여명에 이르렀다. 전시에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정식 호칭이 붙여졌다.

 
군정 치하시기 보내준 북파간첩 실종자…10,726
전쟁 발발 전까지 이미 10만여 이상 희생
 
미군정 치하에서 보내진 북파 간첩 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10,726명에이른다고 한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테러의 원조는 미국이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평화 위한 전쟁은 불가피 하다”고 하였다. 위할지라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범죄이다. 오바마가 자신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군산복합체를 대변한 말이었다. 오바마는 이어서, “미국이 지난 60 동안 미국민의 희생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는데 기여했고 미군의 희생이 독일에서부터 한국에 이르는 국가들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다  자기마음대로 평가했다.


 미국이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라고 누가 요청하였는가. 세계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논리를 내걸고 세계에 군대를 보내 모든 국가는 미군의 감독과 지휘를 받는 국가가 되라는 것이다. 결과는 미국은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인들은 코리아 전쟁의 진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비극적 아픔과 슬픔을 모른다. 우리나라 산천에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시신을 방치해 두고 아무 없는 듯이 지내고 있다. 부모를 부모라고 친척을 친척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가 이런 비극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가 살아 있어도 생이별을 강요 받으며 현재까지 68 동안 살고 있는 세계 유일한 나라라는 뼈저린 아픔도 외면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나라도 마음대로 가고 우리 안에 갇혀서 짐승처럼 살아온 지도 어언 68년이되었다. .
 
오바마는 63 코리아 전쟁이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킨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코리안의 열망을 짓밟고 일본을 대신해 코리안을 다스리기 위해 코리안을 학살하고 맘대로 코리안이 목숨 걸고 반대한 이승만 사대매국 정권을 세워 조국의 남녘 땅에 또다른  식민지를 만든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그것도 부족해 북한과 대륙을 집어 삼키기 위한 침략 전쟁을 일으켜 우리의 조국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 파괴했고, 양민들을 학살하는 천인 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 코리아 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정전된지 60년이 되어오는데에도 불구하고 전운이 덮혀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미국과 이에 편승한 사대매국 세력때문이다.  이게오바마가 말하는 평화인가? 서해상에서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도 다름 아니라 한미합동해상훈련 기간 중에 발생되었다. 북을 침략하기 위한 각본으로 서해상에서 핵전쟁 연습을 하던 과정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천안함>사건이다.  사건을 조작하여 책임을 북한에 뒤짚어 씌운 주동자도 다름 아니라 미국이다. 그래서 미국의 양심평론가 웨인 메드슨은 천암함 사건을 가리켜 미국의 조작극이라고 분명하게 비판했다. 그는 원인에 대해 일본 오끼나와 주민들이 미군철수를 요청하여 그곳에 철수해야 형편에 있었을 돌파구를 찾기 위해 사건을 북에 전가시켜 일본정부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악용했다는 것이다.
 
63 전이나 지금에 와서도 달라진 없다. 지구촌 모든 전쟁에는 언제나 미국이 관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 8.15이후 1950년대 미국이 얼마나 코리아 전쟁을 필요로 하였는지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연구에 의해 밝혀져 왔다. 1946 2 26일에국방경비대 5연대장을 맡았고 한국 정부가 수립 되고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코리아 전쟁은 이미 1949 5월의 하계 공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백선엽의 , ‘().  서울: 대륙연구소, 1989, 29]
 
미국 국무부 정보분석국의 아시아부 책임자인 메릴(John Merrill) 박사는 {한국전쟁의 기원} 에서 그리고 서주석(徐柱錫) 1996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국가체제형성과정-1공화국 국가기구와 한국전쟁의 영향”} 에서각각 6.25이전에 이미 남북한은 교전상태에 있었으며 10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38선에서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코리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 방송매체들도 공산당은 무조건 악이라고 여기는 매카시 광풍에 동조하였다.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호간의 공격행위를 공산세력이 일으킨 도발로 축소 왜곡하였다. 미군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북한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는 한국군만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일제 때부터 조선 사람 끼리 전쟁하는 싫어했다. 그래서 우익 독립투사하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냉대를 받던 친일 세력들은 한국으로 남하하여 군대와 행정부의 각종 조직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북한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남북에 각각 이질적인 정권이 출범한 수년 동안 이와 같은 한반도의 극심한 혼란과 학살 충돌 상황은 미국뿐 아니고 한반도 주변국에도 알려져 협의가 있었지만 북한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은 잦은 침범으로 위협에 놓인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지만 코리아 전쟁의 발발이 세계3대전의 시작으로 있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공개적으로 지원할 없는 입장임을 밝혔다.
 
중국은 코리아 전쟁이 시작되자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과 우호관계에 있으므로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침범하면 중국이 참전하여 전쟁이 확대될 것이므로 전쟁지역을 남한으로 한정하고 북한지역을 침범하지 것을 수차에 걸쳐 요구하였으나 요구는 묵살되었다.
 
8년간 항일투쟁과 4년간의 국공 내전의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 북한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중공군의 코리아 전쟁 참전을 예상치 했다. 남한에서 북한군을 후퇴시킨 유엔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북한 지역까지 침범해 들어갔다. 남한을 발판으로 하여 드디어 대륙 침략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중국은 자신의 요구가 묵살되자 동맹국에 의용군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역시 세계대전으로의 비화를 막기 위해 전쟁을 조선족과 미국의 전쟁으로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항미원조 의용군을 조선족으로 조직하였다. 소련도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염려하여 공식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서 세계대전을 끝내게 세계 최강임이 입증된 미국과의 전쟁은 북한을 비롯하여 주변의 소련 중국 어느 나라도 원치 않았으나 북한은 이에 맞서 전쟁을 결행하지 않을 없었다. 미군과 휘하에 놓여있는 남한군의 48, 49, 50년에 걸친, 점점강도를 더해가는 북침으로 마침내 강요된 전쟁, 예고된 전쟁이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북침으로 위협을 느낀 북한으로서는 근원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 외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코리아 전쟁이 남북한 간의 전쟁 또는 동족간의 전쟁이나 동족상잔이란 소리는 미군의 침략을 감추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코리아 전쟁 발발 까지 10 이상이 희생된 작은 전쟁에 세계는 관심을 쏟지 않고 조선 민족만 계속 피를 흘리는 상황이 계속되어 세계에 호소하기 위한 코리아 전쟁을 북조선은 맞서 싸울 밖에 없었다.
 
코리아 전쟁은 미국 매카시즘 시기와 함께 예고된 전쟁
 
코리아 전쟁은 당시 미국의 극단적인 매카시즘과 여기에 행동으로 나타난 팽창주의로 말미암아 예고된 전쟁이었다 전쟁이 남침에서 비롯됐다는 남침주장은 진위여부를 가릴 없는 문서만 있을 뿐이고 반면에 미국에 의한 북침 주장은 문서로서 아니고 문서와 당시의 상황이 들어맞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결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전쟁이 발생한 원인과 배경이 된다. 남침이냐 북침이냐보다 전면적 충돌을 낳은 요인이 중요하다고 브루스 커밍스도 그의 저서 코리아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에서 주장했다.
 
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해방된 코리안의 독립국 열망과 미국의 대륙으로의 세력 확대가 상충했던 것이 근본 원인이다.
 
미국은 당시에 합리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는 대신에 무력으로 해결 하고자 하는 데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반인륜적 범죄를 수단으로 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코리아 전쟁’이었다.
 
남한에서와 달리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그것도 1948 4 김일성 주석이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약속하였고, 소련군은 이북 땅에서 철수작업을 마쳤다.
 
한편 1950 624 일어난 가지 경우를 통해 북의 남침 유도설을 엿볼 있다. 남한군 분위기를 돌아 보면, 6 24일이 토요일이어서 숱한 장병이 외출외박을 나갔다. 부대원 절반 정도가 전선을 떠나 있던 상황이었다. 6 들어 비상 상황이 이어져 외출외박을 금지해 오다가 모처럼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냈다고 누군가 설명해 줬다. 그나마 문산 방면의 13연대가 검열준비와 야외훈련으로 병력 대부분이 대기하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라는 수기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내내 비상상황이 이어지다가 전쟁개시 날짜가 잡힌 그날에는 미군 지휘를 받은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다.
 
1950 6 24 육군본부 정보국(국장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 수뇌부는 바로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일제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돌연히 북한 진지에 맹렬한 사격을 시작하여 24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204발을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 오후 12 25분부터 6 30분까지 300발을쏘았으며 번째는 25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남한 당국은 백선엽 대령의 17연대가 1950 6 24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여 점령했다고 당시에 공식 발표했었다.
 
미국도서 《미국과 한국전쟁》(일문판) 99쪽에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6 24토요일 아침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 주에서 , 딸과같이 조용히 주말휴가를 지내기 위해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이는뜻밖의 일이었다. 트루먼은 1945 2월부터 그때까지 5년이 넘는 재임기간에 주말휴가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때가 없었다.
 
트루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결단은 수중에》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없이 모든 일에 참견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관록 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니고 장성급을 지닌 경력도 없고 1세계대전시기에 겨우 포병대위로 복무한 초라한 경력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탓으로 상대방이 깔볼 것이라는 선입견이 언제나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의 승인이 없이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트루먼은 처와 딸까지 데리고 형이 경영하고 있는 자기 농장 개조문제를 토의하러 간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소문이 퍼지자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없었다.
 
트루먼은 고향의 농장으로 가던 도중 프린드씨프 국제공항에 들러 확장공사의 완공 테이프를 끊고 연설 하였는데 그는 앞으로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평화의 화신처럼 생각하도록 그럴 하게 행동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통령뿐 아니라 국무장관 애치슨도 코리아 전쟁 발발 전야에 메릴랜드 근처의 자기 농장에 있었다.
 
결국 코리아 전쟁이 도발되기 전야에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자기 농장에 가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나 애치슨에게는 코리아 전쟁 발발에 관한 상황이 즉시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도서《한국전쟁: 대답 없는 질문》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일이었다. 미국이 싸운 번째로 값비싼 전쟁전야에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야 대통령과 국무장관 외출하였던 것이다. 국무성에 모여온 중간 급의 관리들은 정책 작성자들이 아니라 장관급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6.25 코리아 전쟁이 일어나는 전날 (토요일 ) 미국은 완전히 해이되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장관뿐만 아니라 정책 작성자들 까지도 모두 부재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서방세계의 학자들까지도 이상야릇한 것으로 지적해 왔다. 코리아 전쟁이 발발될 모르고 해이되어 국무성이 비어있었다는 것인데 나라가 절대로 그렇게 되었을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되였다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실린 리차드 코엔의 칼럼(2003.2.24) '반전과 비논리(Antiwar and Illogical)' 첫머리에 다음과 같다.
 
'거짓말쟁이' 워싱턴 정가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건 워싱턴에 거짓말쟁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나중에 주워 담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싱턴 정가에는 오래 전부터 말을 쓰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트루먼이나 애치슨 아니고 정가에는 거짓말이 일상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내무장관 김효석의 증언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행동개시의 시간은 6 25 새벽으로 정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반이 휴일로 생각하고 있는 일요일 새벽을 기해 진격을 개시하면 불의공격의 효과를 얻을 있을 것이며 그날 서울을 비롯한 전략적 지점들에 예비로 배치한 사단들에서는 하급사관 사병들의 외출을 허락했다가 개전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북한에서 공산군이 침입해 왔다고 비상소집을 하라. 그러면 일반시민들도 북한에서 먼저 내려온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요일을 이용하여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범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독소전쟁을 도발한 히틀러 도이칠란트군은 1940 6 22 일요일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한 불의의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 12 8 일요일을 이용하여 진주만에 대한 불의의 타격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믿는 미국, 남한에서 일요일이 안식일이어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는 틈을 타서 인민군대가 남침 하였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전쟁개시날짜를 일요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주재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준장은 전쟁개시날짜를 6 25일요일로 선택하게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25일로택하게 되는가. 여기에는 우리의 심중한 의도가 있다. 25일은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국가인 미국이나 남조선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있다. 우리가 일요일에 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전쟁을 먼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승만은 국군에 북침공격명령을 하달하고서도 6 25일은일요일이어서 태평하게 낚시질을 하였다고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였다. 워싱턴의 휴가와 괴뢰군의 계속되었던 비상상태의 해제 그리고 이승만의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낚시질 떠난 이런 것은 각각 따로따로 생각해봐도 보통 때도 여간 해서 일어나기 힘든 상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의도되지 않고는 일어날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비상식적인 3가지 일이 모두 6.25 맞춰서 하나같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히 취한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없는 것이다. 그밖에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도 우연으로 생겼을까..
 
후퇴 명령에 거역하고 맞섬으로써 유엔군을 끌어오는데 차질이 생기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예방하는 조치였다. 남한군을 초기에 확실하게 후퇴시키기 위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을 전쟁 발발 직전에 단행하였다. 새로 부임해서 지휘관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인민군에 대해 자체 방어도 담당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어 고문단의 지시대로 무질서하게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렇게 공산군이라면 지옥까지 쫓아갈 듯이 덤비던 남한군이 한발 쏘지 않고 물러나기만 했던 것은 후일을 도모 하는 뭐가 있지 않으면 있을 없는 일이었다. 유엔군이 합류하는 것은 문학작품에서 수없이 보아온 바로 그거였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악당을 물리칠 뛰어난 능력의 초인을 필요하게 만들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1950 6 11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 0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코리아 전쟁은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유엔 일부 국가들을 코리아 전쟁에 끌어 들이는 구실로 작용했다.
 
미국과 연계된 박헌영 간첩사건
 
미국은 상대국을 교란시키는 음모를 통해 전쟁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미국정보기관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 주석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알았다.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 주석과 함께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없을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흐뜨릴 없다는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전쟁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1952 8 3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 당하면서 그들의 '반란'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코리아 전쟁 휴전 직후 '미국의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1955 12 15, 북한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것은 박헌영의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코리아 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사건의 피의자 13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 7 30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 6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 후인 1955 12 3기소되어 12 15일에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죄악을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일제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변절한 것을 밝히면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포섭될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1945 8 15 8.15 해방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 격문이 돌았다. 이것은 박헌영이 자작으로 붙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내용을 담은 자료를 고스란히 접수하였고 이를 통해서 미제는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이러한 미제의 공작에 넘어갔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양심' 보다강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당시에 남한의 친일파 당국은 김일성이 박헌영 일행을 숙청 했다고 비난 하였다. 박헌영 일파가  미국이 보낸 스파이였다는 것이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가증스런 사기꾼 미국은 전쟁이 나자 뜻밖의 전쟁이 것처럼 연기하였다. 음모를 꾸미는 기관인 CIA 극동지역 고위 책임자였던 하리마오 6.25 코리아 전쟁은 미국의 작품이었다”고 불편한 진실을 털어 놓았다. .
코리아 전쟁이 일어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전개과정에서 미국은 민족에게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범했다고 증언 하였다. 증언에 따르면 미국은 자신의 국익만을 위해 한반도에서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 판을 벌렸다는 것이다.
 
코리아 전쟁이 일본에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여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었고 이후 유럽 아시아에서 돌아온 500명의 참전 군인들의 일자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1949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7%까지 떨어져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1930년을 전후한 대공황이 다시금 오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나와 워싱턴은 어디에선가 전쟁 발발 같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코리아 전쟁으로 5백만 명이 죽었고, 사망자의 90%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집집마다 가족이나 친척이 죽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미군은 타민족의 시체 더미 위에서 축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야수들이었다.
 
북한은 코리아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전쟁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국과 우리민족과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남한 땅은 미국 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코리아 전쟁을 말하면서 북에서 미국의 점령군과 싸운 것을 가리켜 그것을 남침한 것으로 조작하여 전쟁의 원인과 진실을 왜곡하여 것이 동안의 전쟁역사였다.
 
박헌영과 관련하여서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을 두고서도 남녘에서는 진짜와 가짜 논쟁을 많이 벌여 왔다.
 
 해방 박헌영은 자신이 일제의 앞잡이였다 것을 감추기 위해 남로당을 이끌었으나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코리아 전쟁은 이미 1950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625 코리아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쟁의 배경과 진실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있다. 권투에서 상대방이 약한 잽을 여러 얻어맞다가 강한 펀치를 한번 날리자 그때부터 경기가 시작됐다고 우기는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한 민중들은 자신의 정부나 자신의 군대를 갖지 못했다. 남한에는 남한 민중들이 결사 반대하므로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미국의 하수인 역을 맡은 이른바 ‘괴뢰정권’인 이승만 정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친일파들이 거느린 괴뢰군이 있었다. 남한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꼭두각시는 있지도 않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국가보안법’ 만들었다. 국가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구실로 식민지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법이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 노릇을 하는 땅을 말한다. 북조선은 남한과 전쟁을 것이 아니고 남한 양민을 학살하고 남한 국민들이 결사적으로 싫어하는 괴뢰정권을 세운 미국과 전쟁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북조선은 미국을 몰아내고 전체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조국해방전쟁 시작한 것이다.
 
당시 사대매국적 생각을 갖지 않은 우리 민족성원이라면 누구든 침략자 미국을 몰아낼 전쟁을 반드시 해야 의무가 있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북한에서 소련군이 우리형제를 대량 학살해 죽인다면 남쪽에 있는 우리는 분단됐다고 바보같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아니면 북한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을 받더라도 싸워야겠는가?
 
더구나 38선에서 소련군의 명령을 받은 매국노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끊임없이 작은 전쟁을 벌려 남북한 우리 겨레인 장병들이 죽어 가면 어떻게 것인가? 계속장병들이 죽게 내버려 것인가? 이때북한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면 우리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걸로 되는가?
 
김일성 주석은 해방직후 중국혁명을 도와주기 위하여 수많은 항일혁명투사들을 동북지구에 파견하였다. 당시 일본관동군도 김일성 장군이 영도하는 조선군대라면 꼼짝 못하고 손을 들었는데 우리 같은 거야 어림도 없어 하면서 국민당 군대는 달아났고 그래서 조선인 부대만이 아니고 중국인부대에 조선사람 명만 있어도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시의 역사와 관련하여 많이 흘러 나왔다.
 
김일성 장군은 당시 중국해방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전체 조선 사람들이 중국동북지방이 해방되었다고 싸움을 그만둘 것이 아니라 중국혁명이 완전 승리하는 날까지 끝까지 싸우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당시 모택동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오성 붉은기에는 조선인민들의 피가 스며있다'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렇게 북조선과 중국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다음에 계속…) 
(201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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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코리아전쟁 진실을 밝힌다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코리아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애국세력과 매국세력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보여 왔다. 코리아전쟁 63주년, 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금년에 와사도 코리아 전쟁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도 제국주의자들의 강요논리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곳이 바로 남녘의 사회풍토이다.

남녘의 조,동,중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족벌언론들은 6.25전쟁을 말하면서 그 주범인 ‘미국’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고 이 전쟁을 남북관계로 애써 왜곡하면서 ‘남침’이라는 시각을 고정화시켜 놓고 북을 매도하고 중상하는데 집중시켜왔다. 그리고 코리아 반도의 남녘 땅을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무려 70년 가까이 눌러 앉아 간섭하고 지배하면서 한국군의 군사작전권까지 장악하고 있는데도 이들에게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노예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정치 행태이다.

이명박정권에 들어와 그러한 사대매국적 행태는 그 어느때보다 심화되었고,  박근혜정권에 들어와 그러한 행태들은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 한국정치의 현주소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배후에는 국정원이 있고,  국정원 배후에는 미국 지배세력이 있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래서 요즘 청년학생들이 박근혜가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이미 ‘퇴진’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고 있다. 국정원의 비리사건으로 박근혜가 당선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당선이 무효라는 것이 이들 양심적인 학생들의 목소리로 울려퍼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사대매국언론들은 박근혜가 미국에 가서도 미국의 주요정책인 대북적대시정책을 잘하였는데 중국에 가서도 북을 고립하고 압살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중국이 북을 향해 비핵화 할 것을 요구해 달라고 사설이며 기획기사 등으로 부추기는 한편 박근혜에 대한 발자취에 대해 동정하면서 그가 마치도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같은 가정배경을 가진것처럼 묘사하는 한국 족벌언론들의 자세들도 나타나고 있다. 

6.25전쟁의 원인과 그 배경에는 주요한 몇가지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뿌리는 미국 지배세력과 이와 결탁한 이승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시기에 급하게 도망치다가 그만 기밀문서를 두고 간것이 인민군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미국의 침략전쟁에 관한 비밀들이 드러난 것들도 적지 않았다.

인민군에게 몽땅 압수당한 이승만의 극비전쟁문서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 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었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 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 군이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선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 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 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승정권을 북침전쟁의 길로 내몰기 위해 1949년 한해에만도 10만 5천여정의 최신보병총, 2천정 이상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5천만발 이상의 탄약 등 수많은 각종 포들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양의 포탄들, 5천여대의 군용차들과 79척의 함정과 20대의 비행기를 제공했다.

미국의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두고 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남한의 한개 연대는 북한의 한개 여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다.<맥아더의 수수께끼>일문, 1951년판 238쪽

 무기를 공급한 것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전쟁의 불 집을 안심하고 터뜨리라고 공급한 것이다. 한국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1월에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북진통일을 간청하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미국은 코리아 전쟁을 사전 준비하면서 내외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작업을 해 온 것으로 밝혀져 왔다. (다음에 계속…)

*연재-1-2에 보도한 자료보기—아래를 짤각해 열람하세요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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