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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의 어제 오늘 래일(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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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hkilnam 작성일01-01-11 00:00 조회10,4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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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 연변에서도 대규모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에, 연변대 총장인 정판룡 선생이 쓰신 "중국 조선족의 어제 오늘 내일"이란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 속에는, 3·1운동을 포함하여, 중국 만주에서 벌어진, 우리 동포들의 "민족주의항쟁"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민족연합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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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의 어제 오늘 래일-

정판룡(연변대 총장)


1. 중국조선족이란

중국과 조선은 지리적으로 서러 린접된 나라이며 자고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관계를 가지고있던 나라이기에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는 많은 우리 민족이 살고있었다. 우리민족의 선인(先人)들이 일찍 중국 동북지역에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고대국가를 세웠거나 산동, 절강, 복건 등 연해지방에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다는 것을 제쳐놓고라도 수많은 력사문헌들은 료(遼), 금(金), 명(明), 원(元) 등 어느 시기에나 적지 않은 우리민족이 중국에서 살고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료사(遼事)》지리지와 《고려사》기재에 의하면 14세기중엽 원나라 지순(至順)년간(1330-1332)에만 해도 료동 일대에는 몇 십만의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하며, 명나라 홍무(洪武)년간에도 료동에는 많은 고려인들이 집거하고있다고 하였다. 명나라 홍무년간에 동녕위(東寧尉)소속부대에는 고려인 병사가 3만명이 된다고 하였으며, 영표(永票)년간 만산군(漫散軍)에도 고려인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지방에는 더 말할 것 없이 많은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료동지(遼東志)》의 기록에 의하면 명나라 홍무년간 료동일대에서 살고있던 고려인은 료동 총인구수의 10분의 3을 차지하고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그들은 서쪽으로는 료양, 동쪽으로는 개주(開州), 남쪽으로는 해주(海州). 와 개주(開州)에 이르는 광활한 지구에서 살고있었다고 하였다. 력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명나라 홍무년간에 료동에서 살고있었다는 고려인들은 대다수가 원나라 시기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시기 료동 지구에서 살고있던 고려사람들 가운데서 큰 벼슬을 하여 명문가족으로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명나라시기에 20년간이나 료동총병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을 날리던 리성량(李成梁)과 그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오래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왔는데 형통으로 보면 고려사람인것이 분명하다. 이로보면 고조선, 삼국시기는 물론 그 뒤 고려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에는 우리민족이 살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이 그들의 직접 후손들인것은 아니다. 일찍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쳤던 고구려 사람들도 기원 4세기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남으로 이동했으며 중국에 남았던 사람들도 오래동안의 력사의 흐름속에서 그곳 민족에게 동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나 원나라시기 료동지역에서 살고있었다는 고려인들도 모두 동화되고 오늘은 그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

명나라 말기 후금(後金)사람들이 여러차례 조선에 침략해가서 많은 조선사람들을 랍치해 로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도 절대다수가 만족이나 한족에게 동화되고 말았다. 최근 료녕성과 하북성에는 일부 박가성을 가진 민족들이 자기들은 원래 조선민족이였다고 하면서 조선족으로 돌아올것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그들 역시 조선사람의 기본특성을 거의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은 원나라나 명나라 시기에 건너온 조선사람의 후손도 아니며 고구려 유민은 더욱 아니다.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생활의 핍박에 의해 지난세기 중엽으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과 그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조선족은 대대로 중국땅에서 살아온 그런 토착민족과는 달리 조선반도에서 이미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뒤 중국에 이민해온 사람들로서 그 성격으로 보아서는 백여년래 로씨아나 일본, 미국 등지에 이민간 우리민족과 별로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 이민해온 우리 민족은 이민초기부터 중국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중국의 강토를 개척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일본제국주의 등 국내외의 적들을 물리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점차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주인공적지위를 얻게 되었다.

우리민족이 중국땅에 발을 내디디기 시작할 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천여리 땅은 청나라의 봉금책으로 사람 없이 거의 비여있다싶이 되었다.

중국관내지방과 가까운 료녕성일대에는 산동, 하북 등 지구에서 이사온 한족들이 많이 살고있었지만 북간도와 서간도 등 조선과의 접경지에는 소수 토착민족이외 다른 민족이 별로 많이 살고있지 않았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민족의 초기 이민들은 관내에서 들어오는 한족과 함께 오래동안 황무지로 묵여두었던 땅을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이국땅에서 살고있는 고독감과 슬픔을 감지하면서도 제손으로 일군 땅과 삶의 터전에 정을 붙였으며 또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마수가 중국에까지 뻗칠 때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의 다른 민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이런 력사 과정에서 중국의 조선족은 점차 중국을 자기 삶의 유일한 고장으로 여기게 되었고 또 자기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놓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에 있어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되었으며 자기를 재중국조선교민, 재중한인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조선족이라고 한다.


2. 중국조선족의 어제

중국의 조선족은 이민력사가 근 2백년이나 된다. 그동안 그들은 봉책금으로 하여 수백년간 묵여두었던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었고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했으며 청나라정부의 《변발이복, 귀화입적(弁發易服, 歸化入籍)》의 동화정책과 민국시기 봉계군벌(奉系軍閥)의 민족기시, 위만기시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등과 싸워 민족생존권리를 확보해야 했다. 더욱이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거주지역은 오래동안 방일무장투쟁의 주요한 근거지 및 전쟁터로 되고있었으므로 중국조선족의 력사는 말 그대로 처절한 민족의 수난사이자 생존사로 되고 있다.

우리민족이 중국으로 많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중엽 조선 북부지구에서 련속 재황이 들고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으로 들어오던때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밀로 중국에 들어온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많지 못했으며 또 있다고 해도 대다수는 봄, 여름에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다시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다.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청나라 봉건통치배들의 민족기시정책의 유린을 당하면서 굳은 삶의 의지와 노력으로 묵은 땅을 개간하고 논을 풀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더욱이 중국동북지역은 자고로 밭곡식을 위주로 재배하던 곳인데 조선족초기이민들은 동북 각지에서 만난신고를 들여 논을 풀고 벼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로 하여 한국의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이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한 《살기 위한》움직임만이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 성격을 띤 이민자도 적지않았다.

당시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인구집계를 보면 1907년에 7만명이였다면 한일강제합병을 선포한 1910년에는 10만명을 초과하였고 1916년에는 20만명을 넘었으며 1920년에는 45만9천여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때부터 중국으로의 이민은 단순히 살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일제통치를 피해오거나 반일을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대에 중국으로 이주한 반일지사들과 초기 이민들은 즉각적인 항일투쟁보다 우선 학교를 설립하고 후세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1906년 리상철, 리동녕 등이 먼저 룡정에다 서전서숙을 꾸렸으며 그뒤에는 명동학교, 창동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으며 1919년에는 군사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신흥무관학교까지 세워졌다.

1910년대 이렇게 반일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연변에만 해도 72개소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191개소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조선족 거주지역에서 반일운동은 새로운 고조를 이루었다.

같은해 3월초, 조선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지자 우선먼저 연길, 룡정 등지의 학생들이 자동적으로 거리에 나가 강연을 하거나 삐라를 산포하는 방식으로 3.1운동의 실화의 의의를 대중들에게 선전했다. 3월9일에는 조선인반일단체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고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사》발표를 경축하는 민중대회를 룡정에서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3월13일 예정대로 룡정에서 2만여명의 사람이 모인 성세호대한 민중대회가 조직되였으며 대회 이후에는 큰 규모의 반일시위행진이 있었다.

일제와 당지 반동경찰들은 맨주먹의 시위군중을 향해 란폭한 사격을 퍼부어 10여명이 당장에서 숨지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0여명이 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다. 룡정에서 일어난 《3.13》반일민중시위와 같은 만세시위는 연변각지는 물론 통화, 류하, 집안, 홍경 등 서간도 지역의 조선인집거지구들에서도 맹렬히 일어났다.

《3.13》운동을 계기로 반일무장대오가 중국조선인집거구에서 조직되였다. 그들은 《3.13》피의 교훈에서 오직 무장반항만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생존권리를 찾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19년4월부터 중국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단체들은 모두 무기를 구입하고 무관학교를 세우며 무장대오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건립된 조선인반일무장대오중 비교적 큰것으로는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무장대회(대원400명, 보총 450자루),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대원 600명, 보총 500자루, 권총 150자루),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명록, 박영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삼원포에서 조직된 독립군비단 등이다.

이러한 반일무장대오들은 변경지구 및 조선에 건너가 부단히 일본군경들을 습격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21년 한해동안 반일부대들이 일본군과의 교전차수는 602차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들썽하게 한적도 한두번이 아닌바 그중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반일무장대오가 홍범도장군의 지휘하에 단번에 150명의 일군을 소멸하는 큰 전투로 그 승리가 국내외에 준 영향은 자못 컸다. 그리고 동년10월 하순, 화룡형 청산리, 와룡일대에서 진행된 《청산리대첩》은 그 규모와 적군을 소멸한 수를 보아 《봉오동전투》보다 훨씬 컸다.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청산리전투》는 곳곳에서 조직된 조선인반일부대들이 련합하여 경신년토벌시기 연변에 들어온 일본침략군을 족친 전투인바 이 작전에서 일본군 도합 1.400명을 섬멸하고 수많은 무기와 군용물자를 로획하였다. 그러나 봉오동 등 전투서 참패를 당한 일본침략군은 중국 군벌정부와 결탁하여 일본군이 직접 연변 등 중국조선족집거구에 출병하여 조선인반일부대들을 소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일본령사관을 습격했다는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한후 이를 구실로 자기의 침략군을 직접 중국 동북땅에 보내여 중국경내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하여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곧 력사상 이름있는 《경신년 대토벌》이다.

일본군은 제19단의 두 개 려단을 주력으로 씨비리로부터 철퇴해나오는 제11,13사단과 동북주재 관동군 그리고 조선헌병대와 총독부 경찰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부터 시작하여 주로는 동만과 남만일대의 조선인집거구에 대하여 대토벌작전을 벌렸다. 일본침략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살인, 방화, 략탈 등 갖은 야수적 만행을 다 감행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조선인마을을 포위하고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모두 집안에 가둔채 불을 질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다 총살하였다.

한 자료에 의하며 같은해 10월9일부터 30일까지 21일밖에 안되는 토벌기간에 훈춘, 왕청, 연길 등 몇 개 현에서만도 도합 3,500여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하며 소각당한 민가는 2,600여채, 학교 31개, 교회당이 7개라고 한다. 정확한 수자는 알수없어도 《토벌》기간에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동포들이 일본병사에게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조선인마을들이 잿더미로 되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난 뒤 중국 동북지방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이어 일본은 1937년 7월 7일에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을 발동하였다. 일본의 전면적인 대중국 침략전쟁과 함께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시기에 들어섰다. 9.18사변후 한동안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부저항주의, 소극적항일을 일삼던 국민당정부도 부득불 중국공산당과 합작하여 공동히 항일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주로 중국 동북지구에 집거한 조선족들은 9.18사변후 주로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여 광복이 오는 날까지 무장투쟁을 견지하였다. 특히 30년대초엽 조선인유격대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아직 공고히 되지 못한 기회를 리용하여 장백산과 대흥안령 그리고 중쏘변경 등 산악지구에 수많은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으며 어떤 근거지에서는 인민정부까지 세웠다. 이러한 조선인유격대들은 30년대중엽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이 조직되면서 이에 가담하여 중국의 다른 민족의 반일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1945년 8.15광복도 중국에 사는 우리 민족에게는 그다지 큰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광복의 기쁨과 흥분은 며칠 지속되지 못하고 중국은 또다시 국공량당의 전쟁터로 변했다. 이리하여 중국의 조선인들은 다시금 손에 총을 들고 근 4년간이나 지속된 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전쟁시기 동북3성에 조선족청년들이 참군한 수는 도합 62.942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 수자는 전 동북조선인구의5%이상을 차지한다. 그중 연변 5개 현에서 참군한 조선족의 수는 34.855명이며 원 송강성에서 참군한 수는 12.644명, 원 료동성에서 참군한 수는 8.753명, 기타 지구에서 참군한 수는 근 7.000명이라고 한다. 정규군외에 공안부대, 기간대, 무장민병 등 지방 무장조직들에 참가한 조선족의 수도 10만명이나 된다고 하니 모두들 합치면 엄청난 수가 된다.

그리고 전선지원을 하기 위해 담가대, 전선근무대, 운수대로 나간 조선족도 기지부수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원 송강성에서만해도 12.000명의 조선족 청장년들이 담가대에 나갔다가 되돌아왔으며 연변에서는 1948년 한해에만 14.000명의 조선족담가대원이 전선에 나갔다고 한다.

각곳에 참군한 조선족전사들은 대부분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 28,29,30사 그리고 연변, 목단강, 통화, 할빈 및 길림지구에서 조직된 조선족병사를 위주로 한 동북군구직속 3개 독립사단에 편입되였다. 이 부대들은 후에 모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들로 되었다. 조선족을 위주로 하여 조직된 이 부대들은 《삼하강남(三下江南), 사보림강(四保臨江)》 등 초기전역과 그뒤의 사평보위전, 길림과 장춘을 해방하는 전역, 료심전역과 평심전역에 참가했으며 백만대군이 장강을 넘어 전 중국을 해방할 때 그들은 머나먼 광서, 해남도까지 나갔다. 1946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4년간의 해방전쟁시기에 전선에서 희생된 조선족의 지휘관과 병사만 해도 도합3.550명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조선족의 어제는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피눈물나는 민족의 개척사, 수난사이며 국내외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진행한 투쟁사, 전쟁사였다.


3. 중국조선족의 오늘

1990녀도 전 중국 제3차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는 192만 597명의 조선족이 사로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9년이래 오늘까지 증가된 수를 고려하면 오늘의 중국조선족의 수는 200만명 선을 넘는다.

오늘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살고있으며 일부는 북경, 하북, 산동 등 기타 지역에 분포되여 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길림성에 118만 2천명, 료녕성에 23만명, 내몽골에 23.000명, 하북성에 6.000명이 살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조선족 생활에서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중국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주인공적 지위가 법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 이전에도 중국공산당은 줄곧 궁국경내에 살아온 조선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해왔으며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뒤 중국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의 어엿한 성원으로서 모두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었으며 헌법에 규정된 모든 공민의 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창건된 뒤 소수민족들이 집거하는 구역에서는 구역자치를 실시할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조선족도 자기들의 집거구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는 지금 조선족 자치주 1개, 자치현 1개, 자치향이 21개 있다. 자치권리의 기본내용에는 당지 민족의 특점에 의해 자치조례를 제정할수 있으며 정부기관에는 일정한 비례의 민족간부가 있어야 한다거나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모두 법적으로 규정되여있다.
더우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비록 길림성에 소속한 일정한 구역범위내의 자치구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전체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문화사업을 지도할 수 있는 기관들이 설치되여있다.

민족자치구역의 핵심적문제는 그 민족이 그곳에서 나라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가 못하는가에 있는데 나라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은 오직 자기의 민족간부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은 오직 자기의 간부를 통해 발휘될수 있으며 민족의 요구와 의견도 많이는 민족간부를 통해 반영되고 채택될수 있기 때문이다. 목전 중국에서는 구역자치를 실시하고있는 지구는 물론 산거지구에도 무릇 우리 민족이 사는 곳에는 모두 우리 민족의 간부가 그곳 정부 혹은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에서 일정한 직무를 맡고 있다. 자치구역에서는 규정에 따라 주요 행정부문의 정직(正職)은 조선족이 담임하고 또 그지구 당, 정 간부중 자치민족간부가 점하는 비례는 그 민족 총수의 비례보다 얼마간 높다.

례를 들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총인구중 조선족이 점하는 비례는 41%이지만 처급이상 간부는 54.5%를 차지한다. 산재지구에서도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있는 지역에서는 적어도 부현장, 부향장,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은 조선족이 맡고있으며 교육부문, 민족사무위원회에도 한두명의 조선족이 책임을 맡고 있다.

중국에서는 각 민족은 언어사용, 문자사용과 발전에서 평등하다고 법적인 규정을 내렸으며 민족자치구역에서는 지치민족의 언어문자가 첫째가는 관용언어문자로 규정하였다.

연변 같은 큰 조선족자치구역에서는 조선어와 문자가 관용어의 하나로 되었으며 그것을 감독, 집행하는 기구까지 설치되였다. 본 민족의 언어문자로 된 방송, 텔레비전, 신문들이 합법적으로 나라의 돈으로 꾸려지고있으며 민족학교들에서는 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첫 자리에 놓고 배우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서 출판되는 조선문 신문이 12종이며 조선문 잡지는20여종, 성급이상의 조선말 방송국이 5개, 대, 중, 소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어문을 가르치고있는 교원이 1.800명이나 된다. 이로 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기 말, 자기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조선족 중, 소학교가 1.651개가 되며 그중 중학교가 288개, 소학교가 1.363개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등 민족대학이 설치되여 매년 천여명의 조선족 고급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 최근년간 민족어 사회환경이 축소되면서 한족(중국인)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이 얼마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수는 아직 조선족 학령아동수의 15%를 초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지금 85%이상의 조선족아동은 모두 조선족학교에서 기초단계의 교육을 받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민족교육체제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마을마다 민족유치원이 있고 촌마다 민족소학교가 있으며 향과 현에는 중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다. 연변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에는 각종 민족대학이 있으며 또 민족학교 교원의 자질제고를 위해 세운 교원연수학원, 연수학교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료녕, 흑룡강, 길림 각 성에 민족사범학교를 설립했으며 각종 민족전문기술학교도 수십개나 된다. 각 성, 현마다 중국조선족이 있는 곳에는 민족교육관리부문이 있으며 통일적인 민족교과서 편집부문과 민족교육출판사가 있어 자체적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원을 양성하며 조선족교육의 발전을 보장한다.

총적으로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비록 이민 력사가 근 200년이나 되지만 대다수가 여전히 자기의 말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상으로나 문화, 교육 등 제반 사업에서 국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발전된 상태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강택민주석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시찰방문할 때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마땅히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4. 중국조선족의 미래

중국조선족의 미래를 구제적으로 말하면 21세기의 중국조선족은 어떻게 될것인가? 20세기에 있어서 중국의 조선족은 대부분 시간을 전쟁과 사회혁명에 보내다나니 경제생활방면에서 지금도 락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대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농촌에 거주하며 전통적인 소농경제방식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있으며 생활수준은 중국경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면 그리 낮은편은 아니라 국제수준으로 보면 퍽 낮다.

본세기 80년대부터 중국에서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뒤 중국조선족 생활에서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거하고있는 연변만 놓고보더라도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3년동안 조선족 개인상업자의 수는 72배, 자금량은 222배, 영업액은 152배가 증가되였다.

그리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진출하는 중국조선족이 증가되였으며 대외개방과 함께 한국, 일본, 미국 등 국외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증가되는 추세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북경에 사는 조선족의 수는 6천여명에 불과했는데 최근 통계에 의하면 근 3만며이 될것이라고 하며 그중 다수는 연변이나 흑룡강성, 료녕성의 조선족농촌에서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근 중국조선족의 되시인구와 농촌인구의 비례는 급격히 변화되고있으며 오라지 않아 도시인구 비례가 농촌인구비례를 초과할 전망이다.

다음 점차 동북아 경제권이 확립되고 한국, 일본, 미국 등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조선족으로 하여금 점차 선진공업민족으로 발전될 전망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두만강하류지방이 국제범위에서의 경제개발의 중심지인 하나로 되면서 연변 등 많은 조선족집거구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발전의 속도가 중국에서는 비교적 빠른 지역의 하나로 될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조선족들도 늦게나마 점차 현대화한 선진민족을 향해 발돋움을 하게 될것이며 이에 상응한 민족문화교육의 새로운 번영도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의 미래에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오늘까지 많은 경우에는 국가의 힘으로 유지되던 조선족문화교육사업이 시장경제의 도입과 함께 적지 않은 애로에 부딪치고있으며 많은 조선족문화보존의 주요담보로 되고있던 일부 민족집거구도 허물어져가고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일부 지구에서는 민족교육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집거해있던 조선족부락들이 없어지거나 조선족학생수가 급속히 감소되면서 어떤 곳에서는 부득이 조선족학교를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몇 개 학교를 합해야 하며 또 그러자면 기숙학교를 꾸려야 하는데 나라에서나 사회단체에서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발전되면서 돈만 벌면 되지 중국에서 살면서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배워서는 무엇하느냐하는 《조선말 무용론》사상이 점차 조선족들속에 만연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족학교에 들어가는 조선족학생수가 점차 늘어가는 현상이다.

다음은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습질이 한족학교학생보다 점차 낮아지고 있다. 우리말로 된 책이 중국말로 된것보다 적은데서 조선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들의 과외독서범위가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좁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는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1.000시간의 중국어 시간이 더 있으므로 학습부담이 많다.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중국어와 외국어만 배우면 되지만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민족어까지 합해 도합 세가지 어문을 배워야 한다. 조선족학교의 학습질이 낮아지면 자연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또 다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민족언어 사용환경이 점차 축소되고 민족언어에 대한 감정이 약해지며 지어는 우리 말과 글을 잊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연변같은 자치구역에는 언어환경이 넓어 어느 정도 괜찮지만 산재지구에서는 그렇지 않다. 산재지구의 일부 조선족청소년들은 조선족학교에 들어가 우리 말을 좀 배우기는 했지만 우리 말 기능이 약해 공개적인 교제장소에서 감히 말하지못하는데서 조선말사용을 아예 포기해버린다. 통계에 따르면 북경, 할빈, 심양, 장춘 같은 큰 도시에 산재하는 조선족청소년들가운데 이처럼 조선어사용을 포기해버린 학생의 비률은 조선족청소년 총수의 60%를 초과하고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나날 대부분 소수민족 도서 및 신문, 잡지의 출판은 국가의 재정지원에 의해 유지되고있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의 재정지원이 줄고 조선문독서범위가 날로 축소되면서 민족도서출판업 등 민족문자사용의 주요한 매체들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적지 않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중국에 살면서 조선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중국조선족의 미래에는 자칫하면 민족교육이 쇠락되거나 민족언어 및 문자사용 등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길수 있으리라는 것이 예견된다. 총적으로 중국조선족의 미래는 밝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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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독자란 게시판 1-9-2001에 올라온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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