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주체변혁론-②특징</b> :<font color=green>김 수일 지음</font> > 민족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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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주체변혁론-②특징</b> :<font color=green>김 수일 지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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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31 00:00 조회14,8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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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거주하는 김 수일님이 <주체변혁론>에 대해 연구하여 쓴 논문을 민족통신에 보내왔다. 이 논문은 이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남한이나 해외에서 진보운동을 전개하는 주체들에게 중요한 자료들이 될 것으로 보아 연속적으로 민족자료실에 올린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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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체변혁론의 특징

사회변혁론을 전개하는 주체변혁론은 크게 두 가지로 특징 지워진다. 첫째는 변혁운동의 주체 곧 변혁주체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둘째는 사회변혁론의 논의체계 전반을 인간중심의 주체철학으로 관통시키는 것이다.
첫째는 재래의 농민운동과 부르주아 변혁운동에서 나타난 특징과 변혁운동의 객관적인 물질적인 조건을 기본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맑스·레닌주의 혁명론의 특징과 제한성을 비교고찰하며 밝혀진다. 둘째는 자기의 고유한 철학적 특징으로서 첫째 특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변혁론의 완성된 체계란 변혁론체계의 철학적 기초, 변혁운동 전개의 사회역사적 관계, 변혁대상과 변혁주체, 변혁운동 전개의 전략전술 등을 종합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1. 변혁주체론의 확립

인류의 장기간에 걸친 사회역사운동 과정에는 일정기간 안정된 사회체제를 점차적으로 변화발전 시켜 가는 개조운동이 있는가 하면 사회체제를 비약적이며 질적으로 변화발전시키는 변혁운동이 진행되기도 한다. 근대 이후에 전개된 변혁운동으로 농민운동(농민봉기 또는 농민전쟁), 부르주아 변혁운동, 사회주의변혁운동, 반제반봉건민주주의변혁운동(주체변혁운동), 민족해방 민주변혁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여러 가지 사회변혁운동의 성격은 운동주체와의 관계에서 고찰하게 되면 뚜렷하게 밝혀지게 된다. 농민운동과 부르주아혁명운동은 변혁주체에 의해 주도적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객관적 물질적 조건, 다시 말하면 변화된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역사주체는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자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사회주의혁명운동론에서는 객관적 물질적 조건을 중심으로 하면서 변혁주체의 역할문제를 상정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주체변혁론은 변혁주체가 사회변혁운동의 결정적인 요인임을 간파하고 변혁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변혁론을 체계화하고 있다.


1.1 농민운동과 부르주아 혁명운동

농민운동의 역사적 성격은 봉건제사회에서 부르주아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에 세계도처에서 전개된 변혁운동이었다.
봉건제사회는 3세기와 7세기 사이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특히 유럽과 아세아에서 형성되었으며 7-8세기 기간에 확고한 사회체제로 되었다. 유럽을 1300년간 지배한 봉건체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뚜렷하게 해체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기간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우크라니아, 리투아니아, 러시아, 핀란드 등에서 수많이 발생한 농민봉기가 그 증거였다.

"정말 그러했다! 중세기가 끝날 무렵에 만연하기 시작한 화폐경제에 대한 지배층 사람들의 욕구가 뜨거워지고 농민들의 저항력이 비등점에 이르른 곳에서는 어디서나 격화되어간 계급대립은 어떤 형태로든 충돌로 나타났다."
(Karl August Wittfogel, Geschichte der buergerlichen Gesellschaft, Malik-Verl., 125쪽)

이 시기에 유럽에서 농민봉기가 얼마나 빈번했는가는 프랑스에서의 농민봉기의 통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1590-1715년 사이에 프랑스 서남부에서만 450 내지 500회 농민봉기가 있었는데 이중 60%가 1635-1660년에 있었다고 한다.(Y.M. Berce, Hisoire des croquants, Genf 1974, 690쪽).
19세기 중엽부터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들어간 우리나라, 중국일본 등에서도 수많은 소규모의 농민봉기가 발생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초에는 여러 지역을 포괄하는 큰 규모의 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오사카 농민 반란(1837),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봉기(1850-1864), 우리나라의 동학농민봉기(1894-1895)를 열거 할 수 있다.

"일본의 도꾸카와 시기인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렵까지 약 1600번의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다".
(John Whitney Hall, Das Japanische Kaisserreich, Fischer Weltgeschichte Bd.20, 1968, 199쪽.)

이 가운데 규모가 큰 농민봉기의 지도자는 대개 사제 또는 귀족출신이었다. 예를 들면 독일농민전쟁(1524-1526)의 목사 토마스 뮌처, 이탈리아의 네아펠 농민봉기 때(1647) 비시그나노, 프랑스 농민봉기(1636)의 라 모테 라 포레, 중국의 태평천국혁명의 지도자 홍수전은 기독교인이었으며, 동학농민전쟁의 동학창시자는 최 제우는 양반후예였다.
이들 농민봉기의 지도자들 중에 귀족출신인 경우는 군사적 행동에서, 사제나 종교적 지도인물인 경우는 봉기의 이념적 지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농민봉기의 직접적 계기인 과도한 세금부과와 강제노동 문제의 해결에 주된 관심을 돌렸으며, 농민봉기의 사회역사적 요인으로 되는 봉건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것은 관심 밖이었다. 때문에 농민봉기를 통해 악질적인 영주나 수탈기관을 갈아치우게 되면 성공적인 봉기로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외 때때로 나타났던 이념적인 지향은 이념적인 지향은 옛날(원시사회)의 "평등 시절" 에의 회귀였다.
농민봉기의 주체인 농민들은 자기지역 봉건특권층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에 반사적으로 저항해 나선 군집(群集)에 불과하였으며, 봉기의 지도자들은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농민봉기의 사회역사적 합법칙성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신, 왕, 황제, 영주 등의 절대자를 중심으로 파악한 시대였기 때문에 숙명론에 빠지기 쉬웠다. 그렇게 되면 사회역사발전의 객관적인 합법칙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며, 사회운동의 주체문제는 아예 상정할 수 없게 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모든 농민운동은 운동형태, 운동규모, 봉기의 계기와 지속 등이 상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농민봉기가 사회변혁운동에서 갖는 역사적 의의는 부르주아혁명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이었을 뿐 성공하지 못한 하나의 사회변혁운동이었다는 데 있다. 또한 농민봉기가 준 교훈은 특히 변혁주체의 성격과 조직화문제를 이론·실천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변혁운동은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이론가로 로드니 힐톤은 "자본주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자본, 임금노동 그리고 생산단위들을 경제적인 견해에서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이 역사자체를 만드는 것인 만큼 역사가들은 상이한 (사회)단체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자본주의발전 속도를 더디게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한다.""(Der Uebergang vom Feudalismus zum Kapitalismus, Paul Sweezy ... , Frankfurt/M., Syndikat, 1984, 210쪽)

부르주아혁명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봉건제 사회에서 성장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모든 봉건제사회의 기본수탈대상인 농민계층이 -자연발생적으로 합세하여- 봉건제 사회를 타파하는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부르주아를 위한 자본주의사회 건설로 나아가게 된 전단계의 사회변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르주아혁명을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18-19세기 수행한 핵심적인 나라로 영국, 미국, 프랑스를 꼽고 있다. 이외에도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나라들에서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 수많은 자본주의적 나라들이 생겨났다. 세계역사에서 유일하게 반봉건 투쟁 없이 영국에 대한 반식민지 해방운동을 통해 부르주아혁명을 수행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부르주아혁명은 내용상으로는 부르주아혁명이었지만 봉건사회를 부르주아사회로 변혁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은 아니었다. 미국은 기원전 8000년경에 아세아로부터 건너온 에스키모와 인디언이 원주민이었으나 16-17세기에 유럽 여러 나라 이주민들이 이 원주민을 추방하고 주인이 된 것이었다. 이들 외래인들이 아직 일정한 사회체제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분할식민지로 되었다. 영국은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여 미국을 식민지로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7년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높은 국가부담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 미국을 상대로 수탈을 강화하자 죠지 워싱톤을 지도자로 하여 1776년에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독립전쟁은 1783년 베르사이유 평화회담에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되면서 종결되었다. 독립된 미국은 합중국으로 되었으며 세계에서 최초로 1787/88년에 성문화된 부르주아헌법을 가지게 되었다. 이 헌법의 골자는 몽테스퀴에의 이론에 따른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립이었으며 이것은 군주제를 척결하지 못한 영국의 부르주아혁명보다 내용상으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부르주아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미합중국은 절반지역을 차지하는 남쪽지역에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제한된 부르주아사회였다. 이 제한성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시민전쟁(1861-1865)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혁명의 특징은 혁명주체역량의 조직화문제는 말할 것 없고 주체세력이 무엇인지조차 애매모호한 조건에서 혁명이 승리한 것이다. 부르주아혁명이 수행되는 당시에는 그 주체인 부르주아계급은 조직된 정치세력은 아니었으며 부르주아 혁명과 건설의 주체가 부르주아가 아니라 "만인"인 것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들은 큰 규모의 농민봉기가 있기 전에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이에 기반해서 농촌을 경제적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부르주아지들은 상업과 고리대금업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도시의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으로 농촌을 소비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농민들을 공장노동자로 빼돌렸다. 이것은 봉건체제의 경제 사회적 지반을 잠식하는 것이었으며, 봉건통치자들은 이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착취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세계무역과 식민지로 수탈, 산업의 발전 등으로 은행가, 무역상인, 공장주인 등의 대 부르주아지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란서에서 1789년에 부르주아, 변호인, 지식인 등의 "제3 신분층"이 봉건지배층에 반대하여 궐기하자 불란서 전체 인구의 95%가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 궐기에서 부자은행가, 상업인과 지식인 등의 소수의 인물들이 지도적 역할을 맡았으며 "제3 신분층"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파리에서 봉기군중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여 전제군주인 루드비히 16세를 굴복시켰으며, 이어 8월 4일과 5일 지방에서도 군중이 봉기하여 봉건지배세력의 모든 봉건적 특권을 파기하게끔 하였다. 이러한 사회변혁운동의 성공은 부르주아라는 변혁주체의 역할이 아니라 봉건사회 전반에 침투해 들어간 부르주아들의 경제력인 "보이지 않는 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혁명 이래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가 주인이고 부르주아를 위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체제며 이념적인 추구가 무계급적인 "만인"을 위한 사회인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영국의 "권리장정", 미국의 "버지니아 권리장정과 인민주권사상", 프랑스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 등에서 그 실례를 찾게 된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루소의 자연법사상과 자유국가와 자유헌법은 모든 시민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로크와 몽테스퀴에의 "자유주의"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부르주아혁명은 이러한 사상에 의거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질서는 일반적이며 평등한 투표권, 국민에 의한 법률제정, 일반적인 교육, 실업자와 노동 불능자 보호, 계약과 영업활동의 자유, 이주의 자유, 사유재산의 보장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프랑스 부르주아혁명의 이러한 성취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전개된 부르주아변혁운동 (1830, 1848, 1871, 1918)의 전형으로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자본주의나라들의 사상적 제도적 근간으로 되고 있다.

이처럼 부르주아 계급은 자기들의 이해관계가 노동계급과 농민 등 모든 계급에게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혁명이나 자본주의발전의 혜택은 민중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자본주의의 3대 이념인 "개인의 자유", "모든 시민의 평등", "모든 인간의 형제지간 우의"가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자유로, 상품소유자의 평등으로, 만인끼리의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르주아혁명과 자본주의 건설에서 그 주체의 계급성을 모호하게 한 것은 자본가계급이 자기의 적대계급인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의 계급성을 흐리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노동계급과 농민들이 부르주아지를 매장할 묘혈(墓穴)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으로 될 수 있었다.

부르주아혁명은 농민봉기와 같이 사회변혁운동이긴 하였지만 변혁이론은 준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로크, 몽테스퀴에,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 프랑스의 백과사전파에 속하는 볼테르(1694-1778), 홀바흐(1723-1789), 헬베티우스(1715-1771), 뚜르고( 1727-1781), 콘돌체(1743-1794), 영국의 아담 스미즈(1723-1790), 제레미 벤탐(1748-1832), 독일의 칸트와 헤겔 등 수많은 사회철학이론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정치, 경제, 도덕분야의 자본주의 이념을 제시한 부분적인 "혁명이론"일 뿐 사회변혁이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변혁이론은 사회역사발전의 합법칙성, 변혁운동의 주체와 대상, 전개 방도와 방법 등이 종합적으로 체계화되었을 때 변혁운동의 이론적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변혁이론은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와 이에 토대한 레닌주의에 의하여 비로소 정립되었다.


1.2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

맑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변혁론은 세계변혁론 역사상 처음으로 전반적인 체계를 갖춘 사회변혁론이라 인정되고 있다. 부르주아혁명운동과 관련된 사상이론이 변혁의 지향과 목적, 정치적 이념 등을 제시한데 한정되어 있음을 전장에서 알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맑스-레닌주의의 사회변혁론은 철학적 세계관을 확립한 다음 정치경제학에 의한 사회성격분석과 계급투쟁이론을 비롯해서 "전략전술", "당 건설과 변혁주체", "국가의 본질",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과도기 이론" 등 사회주의 혁명운동에서 요구하는 중요한 이론 실천적인 주제들을 전반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맑스·레닌주의의 사회변혁론인 사회주의혁명론의 전체계는 물질 중심의 철학적 기본원리에 기초한 철학적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회역사관인 사적 유물론(유물사관)이 관통되어 있다. 때문에 맑스·레닌주의 사회변혁론의 본질적인 특징이나 문제점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사관을 통해 사회역사발전의 합법칙성, 변혁운동의 전략전술, 변혁주체문제들을 어떻게 정립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의 관념론적인 변증법과 포이에르바흐의 형이상학적 유물론에서 과학적인 내용을 가진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 원리를 하나로 결합시켜 체계화 한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는 물질로 통일되어 있으며 물질세계는 상호작용하는 연관관계의 총체로서 변증법적인 운동법칙에 따라 부단히 변화발전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체계화 된 후 세계의 시원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이데아, 신 등의 관념적인 데서 찾는 관념론과 세계를 상호연관관계에서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 또는 고립적으로 고찰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양적 증감관계에서만 인식하려는 형이상학은 이론적으로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물질세계가 갖는 연관관계의 총체성에 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전 자연은 하나의 체계, 물체들의 총체적인 연관을 형성하고 있다. 이 때 물체들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별무리에서 …… 원자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 존재로 이해한다." (맑스·엥겔스 전집, 제20권, 자연변증법, 355쪽)라고 밝히고 있다.
이 연관관계에 대한 스탈린의 정식화는 좀더 분명하다.

"변증법은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자연을 상호 분리된, 상호 고립된, 상호 의존하지 않는 사물과 현상들의 우연한 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연관되고 상호의존하고 상호제약하는 그러한 상호연관된 통일적인 전일체로 본다." (스탈린 선집, 제3권, 297쪽)

물질세계는 엥겔스에 의하면 "내적 연관과 외적 연관", "현상과 본질", "개별과 일반", "우연과 필연", "가능성과 현실성", "원인과 결과"로 연관되어 있으며 레닌은 "동일과 차이", "대립물들의 상호이행"의 연관을 추가하고 있다.

이렇게 물질로 통일되어 있으며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는 변증법적 운동법칙, 즉 "변증법의 3대법칙"이라고 하는 "양의 질에로의 이행 및 질이 양에로의 이행법칙"(양질전화의 법칙), "대립물의 상호침투법칙"(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법칙/모순의 법칙), "부정의 부정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고 밝힌 것이 유물변증법이다.

" 자연 및 인류사회의 역사로부터 변증법의 법칙들이 도출된다. 변증법의 법칙이란 본질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3가지에 귀착된다. 양의 질에로의 이행 및 질이 양에로의 이행법칙, 대립물의 상호침투법칙(투쟁과 통일의 법칙), 부정의 부정법칙"
(맑스·엥겔스 전집, 제20권, 640쪽)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은 사회변혁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는 사회역사발전의 합법칙성과 계급투쟁, 당(주체)건설, 전략전술 문제들을 유물론, 유물변증법과 유물사관에 의거하여 일관성 있게 밝히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물질위주의 유물론적 입장을 사회역사에 적용하여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도출되고 있다.

"의식일반은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이 유물론 전체의 일반적 명제이다. 이 명제와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명제는 직접적이며 불가 분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레닌전집, 제14권, 쪽. 431)

이 명제에 근거해서 맑스-레닌주의 유물사관은 사회의 기본연관관계를 "사회적 존재"인 생산력 또는 토대가 "사회적 의식"인 상부구조, 생산관계를 규제한다고 해명하고 있다.
"사람은 삶을 위해서 규정적이며, 필연적인, 자기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상응한 생산관계 속에서 사회적 생산을 하게 된다. 이 생산관계의 전체는 그 사회의 경제적인 구조, (다시 말하면) 법적이며, 정치적이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에 상응하는 상부구조가 서게 되는 현실적인 토대를 형성한다. 물질적 삶의 생산방식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삶의 과정 전체를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맑스·엥겔스, 제13권, 8쪽)

사회는 사회적 존재인 생산력과 사회적 의식인 생산관계와의 모순관계로 되어 있으며 이 모순관계는 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변화발전되어 간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착취자와 지배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착취자와 피지배계급간에는 적대계급간의 투쟁이 필연적이며 이 계급투쟁은 "역사발전의 기관차"로 된다고 정립하고 있다.

"어떤 역사적 시기의 경제적 생산과 이에서 불가피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제도는 그 시대의 정치사 및 정신사의 기초를 이루며 이에 상응하여(원시공동체적 토지소유의 붕괴 이후로는) 전역사는 계급투쟁 즉 사회발전의 각이한 단계에서의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간의 투쟁,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간에 투쟁의 역사였으며 (중략)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사회역사는 원시사회를 제외하고-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간략하게 말하면 압박자와 피압박자간에는, 암암리에 진행되든 공개적인 투쟁이든, 끊임없는 투쟁이 있게 되며, 이 투쟁은 언제나 전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거나 또는 투쟁하는 쌍방이 다 같이 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맑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은 사회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이나 계급투쟁을 물질세계의 운동처럼 필연적이며 자연사적인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 특징이다. 맑스 자신이 "나의 입장은 경제적 사회구성태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데 있다" (맑스, 자본론, 서문)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사회역사발전을 자연사적으로 고찰하게 되면 이론적으로는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없게된다. 꽃나무를 심든 심지 않든 봄은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혁운동의 현실은 변혁주체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계급투쟁의 경우도 그렇다. 적대적 계급관계는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적인 현실은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회에서 적대계급간의 모순이 아무리 첨예하다 해도 계급투쟁은 그 주체인 피압박, 피착취 계급이 자기의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투쟁각오와 투쟁의욕을 발동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투쟁의식과 투쟁의욕은 피착취계급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자기 힘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주체의식이 확고할 때 나타나게 된다. 피착취계급의 주체의식은 객관적 조건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선각자나 당의 대중영도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때문에 공산당의 영도적 역할 문제가 "공산당 선언"때부터 제기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920년대 사회주의건설 때부터 당의 대중영도문제가 강조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사업작풍에 대해서 언급하게 된 것은 대중영도이론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포착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러시아적인 혁명적 전개력과 아메리카적인 실무성의 결합 여기에 당 및 국가사업에 있어서의 레닌주의의 본질이 있다. 오직 이런 결합만이 완성된 레닌적 활동가와 레닌주의적 사업작풍을 우리에게 준다."
(1921년 스탈린이 스웨르들로프 대학에서 한 강의, 레닌주의에 대하여, 스탈린 저작집, 제6권, 188쪽)

그러나, 당의 영도문제 해결방도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혁명론 전개에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현상에 부닥치고 있다.변혁운동 현실에서 요구되는 당의 영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식의 상대적 독자성", "토대에 상부구조의 능동적 역할과 반작용"한다는 명제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물질 중심의 철학원리에 기초하는 한 상부구조의 독자성 내지 반작용은 물질 경제적인 토대의 변화발전이 좌우하며 물질적인 조건이 "최후법정"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맑스·레닌주의 사회혁명론은 변혁주체문제의 중요성을 상정하였으나 물질중심의 유물사관으로는 변혁주체론을 일관성 있게 정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질 중심의 사회변혁론이 갖는 이론적 한계성을 변혁운동의 전략전술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략전술개념은 원래 "전쟁수행의 예술"로서 시원 되었는데 전략전술은 18세기에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 때 전쟁수행 과정에서 채택되고 있다. 전략전술이론은 클라우세빗쯔가 나폴레옹의 전쟁수행을 1832년에 이론화한 것이 효시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략전술론은 변혁운동의 목표, 변혁역량 편성, 변혁운동 전개방도(수단과 방법) 등을 과학적으로 수립하여 사회변혁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해 가기 위한 사회변혁론의 필수적인 요건에 속한다. 때문에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은 전략전술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돌린 것이다. 전략전술은 원래 "전쟁수행의 예술"로 시원했던 전략전술을 맑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전술로 전용하였으며, 레닌이 10월 혁명기간에 풍부화한 것을 스탈린이 종합적으로 체계화했다.
스탈린에 의하면 "전략은 혁명이 소여 단계의 토대 위에서 노동계급이 가할 주되는 타격방향을 규정하는 것이며 혁명역량을 배치할 적절한 계획을 작성하는 것이며 혁명이 소여 단계의 전기간에 걸쳐서 그 계획을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스탈린 전집, 제1권, 335쪽), 또한 "전술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의 여러 가지 형태, 그 형태들의 교체, 그 형태들의 결합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다. 전술은 소여 단계의 기초 위에서 혁명의 고조와 퇴조, 앙양과 쇠퇴에 따라 여러 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위의 책, 338쪽)

이러한 맑스·레닌주의 전략전술론도 그 이론적인 기초는 유물사관이며 객관적인 물질적인 조건을 중심에 놓고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 세계운동"의 편집자 사그라딘의 "전략전술 개요"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략과 전술을 수립할 때 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특수성,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순과 사회 여러 계급들의 상황 그리고 계급들간의 관계와 이 관계의 발전을 심오하게 분석한다."
(공산주의 세계운동, 전략전술의 개요, 사그라딘, 1973/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27쪽)

전략전술 수립의 궁극적인 의의는 과학적인 이론정립이 아니라 이 이론을 실천으로 전환하는 능력문제가 더 중요한 것으로 된다. 이 능력문제는 결국 전략전술을 구사해 가는 변혁주체의 역량문제로 귀착한다. 그러나 전략전술론을 물질 중심으로 전개하게 되면 변혁주체문제는 2차적인 위치에 두게 되며 전략전술을 도식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그 한 예로 적대계급간의 역량관계에서 변혁주체의 역량을 절대 우위역량으로 장성시키기 위해서는 통일전선체를 구성해야한다. 통일전선체는 중간세력을 쟁취하여 주체세력을 강화하면서 적대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중심의 전략전술론에서는 통일전선체 구성을 적대계급간의 계급대립을 무시한 소치로 보고 만다.

이처럼 맑스·레닌주의 사회변혁론은 사회역사운동을 운동주체 대신에 물질경제관계를 이론전개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사회역사운동은 자연운동과 달리 주체의 운동이라는 독자적인 성격을 부각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로 사회변혁론 전개에서 이론의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며, 당의 영도이론(영도의 본질, 영도원칙, 영도체계, 사업방법과 사업작풍등), 계급투쟁을 비롯한 과학적인 전략전술 수립에서 제한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제한성의 극복은 물질중심이 아니라 변혁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의 전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체변혁론은 보여주고 있다.


1.3 주체변혁론의 대두

주체변혁론은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과는 다른 사회정치적 환경과 변혁론 창시자의 "기질"이 다른 조건에서 창시되어 발전되었다.
주체변혁론이 창시된 조선은 반봉건 식민지 사회였다. 19세기 후반에는 개화(부르주아개혁)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봉건제사회는 차츰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의 외세들의 간섭과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봉건적 지배와 외세의 간섭을 반대하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을 파탄시키고 청나라(중국)의 간섭을 제압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 주변국들의 제일인자로 부상하여 20세기초에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였다. 결과 조선은 반봉건 식민지라는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민족적인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얽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민족주의진영과 공산주의이진영이 반봉건 반외세의 변혁운동을 주도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반봉건 식민지 사회성격을 가진 사회에서 전개할 과학적인 변혁이론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진영이 전개한 변혁운동의 공통적인 목표는 반식민지 민족해방이었으나 사회의 어떤 세력을 주축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따라 여러 분파로 나누어졌다. 양반계층과 지주를 비롯한 수구파, 상공인과 일부 신지식인을 비롯한 부르주아개화파, 일부 신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와 공산(사회)주의 결합파 등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진영은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민중이 주인된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시대적 흐름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는 사회이념을 창출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특정 인물 중심으로 소수의 명망가집단이 형성되는 정도였다. 이들 명망가집단들은 주체적 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주도권 다툼에 매몰되었다. 주체적 역량이 약한 조건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외세에 청원하는 방법이 가장 안일한 독립"운동"으로 되었다.

민족주의진영에서는 3.1봉기를 계기로 세워진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연해주임시정부"가 제각기 정통을 가진 정부라고 암투를 벌리다가 "상해임시정부"로 1919년 9월에 통합되기는 하였지만 내부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고 공산주의 국제당의 활동으로 1920년대에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에서도 맑스·레닌주의가 상당한 정도로 보급되어 갔다. 조선에서는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고 이듬해는 3·1항일시위 이후 제2차적인 6·10항일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을 비롯한 "공산주의진영"은 이러한 인민대중의 항일열기를 조직화할 수 없었다. 그 근거는 일제의 간악한 탄압도 탄압이려니와 보다 중요한 요인은 "초기 공산주의진영"의 교조적인 안목과 운동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초기 공산주의진영"은 부르주아사회를 배경으로 창시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을 우리나라의 반봉건 식민지사회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려고만 하였다. 우리나라는 부르주아사회처럼 주요모순이 노자간의 모순이 아니라 민족적인 모순이었으며, 사회경제적 여건도 반봉건사회였기 때문에 대다수 민중은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요구하고 있지도 안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진영"은 우리나라의 반일변혁운동을 계급투쟁이라는 안목에서만 진행하고자하니 변혁역량을 성장시키기 어려웠다. 그 당시 노동계급은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 미약한 상태였다. 코민테른의 국제공산당도 이러한 문제를 옳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진영"은 변혁주체역량을 성장시킬 방도를 찾을 대신에 개인의 권력, 공명욕에 사로잡힌 보스들을 중심으로 한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 서울파, 상해파, 일쯔크파, 북풍회 등의 파벌싸움에 휘말린 공산당은 1928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 이후 분열과 야합으로 파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은 국제당의 승인이나 받아 출세하고자 가짜 "감자 도장사건"까지 발생하고 상호암투가 심하여 반대파를 일제경찰에 밀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초기 공산주의진영"은 맑스주의의 사회주의혁명사상을 우리나라에 교조적으로 적용하여 노자간의 계급투쟁에만 매몰되다보니 변혁운동에서 무엇보다 주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고의 전환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캄캄한 조선 하늘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김일성 청년 장군의 두리에 모여든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달랐다. 이들은 어떤 준비된 고정이론에 근거해서 변혁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변혁운동의 실천속에서 변혁이론의 싹을 찾아내 키워갔다. 이것은 서재에서 정립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을 조선의 초기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의 반제변혁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과정이었다.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노동자, 농민, 인텔리 출신이었으며, 인텔리들은 맑스주의에 대해서 식견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 당시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가장 적절한 투쟁방식으로 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민중을 단합시키는 운동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혁론을 창출하고 발전시켜 나아갔다.

"당시 새로운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항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특히 혁명을 해야하겠다고 결심한 후에는 혁명투쟁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맑스·레닌주의의 서적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정치서적과 혁명적인 문예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나는 중학시절에 "공산당선언", "자본론", "잉여가치학설사" 등의 맑스·레닌주의 고전을 읽었습니다."
(교육과 문학, 예술은 사람들의 혁명적 세계관 확립에 공헌한다. 1970년 2월 17일)

조선은 19세기 말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과 사회 정치적인 혼란상태에 빠졌으며 이를 악용하여 침탈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되었다. 그 이후 3.1독립운동과 6.10봉기 등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항일 시위운동은 일제 근대무력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 피의 좌절만을 뼈저리게 체험할 때였다.
1930년대부터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의 성산 백두산을 근거지로 만주의 동북지방을 무대로 100만의 일제무장력을 상대하여 대담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아갔다. 이 무장투쟁은 가장 정확한 투쟁방법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되었다. 이들 항일무장대오는 다만 군사적 전투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수 없듯이 민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과제도 정력적으로 추진해 갔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며 그들이 단합만 되면 그들의 힘이 무진장하다는 진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민중과의 사업경험은 민중을 떠나게 되면 민족주의진영이나 초기공산주의진영에서처럼 말다툼이나 일삼고 파벌을 지어 권력쟁탈전만 벌이게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민중은 사회 계급적 의식은 아직 미약하며, 반식민지 민족독립문제에 관심이 더 크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반식민지 반봉건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안는 초기공산주의진영의 사회주의 혁명론은 우리 나라의 사회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교조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하였다.
위대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굳게 뭉친 항일인민군과 이와 연대하는 민중 바로 변혁주체가 튼튼하기만 하면 객관적인 조건이 아무리 불리해도 이를 극복하고 항일혁명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사상이 싹트게 된 것이다. 김일성 장군을 영도자로 한 항일인민군은 투쟁과정에서 창출한 변혁주체의 사상을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혁명투쟁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조직 동원하여야" 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1930년 6월 30일에서 7월 2일 간에 길림 동북쪽에 있는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에서 김일성 장군이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혁명의 담당자, 그 외 조선혁명의 기본임무, 무장투쟁노선, 당 창건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변혁주체의 사상은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한 투쟁에서 싹이 텄으며 그 이후 미제국주의와의 전쟁, 인민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이 확증되어 이론체계화 되었다. 북조선은 미제를 타승한 다음 급선무는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사회주의제도 수립을 전반적으로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도 북조선은 문제해결의 열쇠를 변혁주체의 강화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혁명력량의 강철같은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 인민대중의 혁명적 열의를 조직동원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 새로운 앙양"(김일성저작집, 10권, 413쪽)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북한은 1956년 정전 이후 3개년 인민경제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다음 5개년 인민경제계획(1957-1961)을 완수하여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공업농업국가로 전변되었다.

두 번에 걸친 커다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식민지반봉건사회를 짧은 기간에 사회주의사회로 전변시킨 실천활동을 통해 변혁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변혁운동의 정당성이 확증되면서 60년대에는 이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거한 주체철학이 확립되었다. 70년대에는 이 주체철학을 기초로 하여 주체의 사회역사관, 변혁운동의 지도원칙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한 주체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맑스주의나 레닌주의 그리고 김일성주의는 새로운 사회주의변혁철학을 창시하고 발전시켜 전반적인 체계를 가진 단계에 이르게 되면 후계자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다. 맑스주의는 레닌에 의해서, 레닌주의는 스탈린에 의해서, 김일성주의는 김정일 총비서에 의해서 정식화되며 공식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맑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은 학문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로 천명된 문헌은 김정일 총비서의 1974년 2월 19일의 문헌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이다.

맑스·레닌주의가 유물사관에 기초해서 객관적인 물질중심으로 사회주의혁명론을 전개할 때 일관성 없는 논리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요한 하나의 예로 유물사관에 의해 사회변혁이 자연사적이며 필연적이라면 당의 역할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레닌은 "무엇을 할것인가"에서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에서 노동계급의 선봉대로서의 당의 역할이 필수적인 요인으로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변혁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변혁론에서는 변혁주체의 일부분인 당의 역할문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되며 당의 강화발전문제가 체계 정연하게 논의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로 변혁운동의 최고 목표인 공산주의이상사회 건설방도문제이다. 맑스·레닌주의에서 상정된 공산주의 이상사회는 사유재산이 없는 무계급사회, 생산력이 고도화된 사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며, "각자에겐 각자의 요구에 따라" 노동의 결과가 분배되는 사회라는 물질적 측면과 인간의 전면적 발전이 실현 된 사회라는 인간적 사상적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중심으로 정립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혁명론은 인간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실현방도에 대한 철학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 사회주의적 물질 경제적 토대는 세워졌지만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이 그에 상응하게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개조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되었다. 주체변혁론이 주장한 것처럼 변혁주체를 우선적으로 강화시키지 않고서는 공산주의사회의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사회의 물질적 요새도 건설하기 힘들다는 것을 동구사회주의나라들의 붕괴가 증명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주체변혁론은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통해 변혁주체의 자주적 사상의식 강화와 창조적 능력의 고도화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전면적으로 발전되고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일 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물질적 수요가 원만히 보장되는 매우 풍요한 사회입니다."
(김일성저작선집, 제9권, 44쪽)

주체변혁론은 조선이라는 사회역사적 조건과 특출한 영도자 에 의해서 창출되고 발전되었지만 보편적인 사상으로 공인되고 있다. 어떤 사상 탄생의 특수한 조건은 새로운 사상이 탄생할 수 있는 특수한 조건으로 되는 것이지 그 타당성이 탄생한 그 지역에만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될 수 없는 일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혁명론이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동시 혁명론이었으나 레닌이 러시아의 특수한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새로 정립한 일국 사회주의 혁명론이 세계적 판도에서도 보편성 있는 사상으로 적용되는데서도 알 수 있다. 전일적으로 체계화된 주체사상은 주체변혁론을 일관성 있는 논리로 뒷받침 해 주고 있으며 세계적인 판도에서 생명력 있는 변혁사상으로 공인되고 있다.

현재 세계 100여개 나라에 1,000여개의 주체사상연구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으 며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최근 수년(1998-2003년 초)사이에도 90여개의 주체사 상연구조직이 새로 결성되었다 한다.

주체변혁론의 중심축인 "변혁주체"는 사람위주의 주체철학에 의해 과학적으로 안 받침 되고 있다.


2. 인간위주의 주체철학

모든 과학은 그가 어떤 근본원리에 토대하고 있는가 따라서 전반적 이론체계의 성격과 그 이론의 과학성이 좌우되고 있다. 주체철학은 철저하게 사람(인간)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원리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체철학은 사람을 철학적 사고의 중심에 둔 만큼 그 근거로써 사람의 본질적 속성을 밝히고 있으며, 나아가서 주체의 지위와 역할을 축으로하여 사회역사운동의 본질을 고찰하고 있다.


2.1 인간위주의 철학적 근본원리

주체철학은 사람의 운명개척을 철학적 사고의 중심에 두고 이것을 철학의 근본사명이라 밝히고 있다. 철학의 근본사명에 맞게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계와 사람의 관계"로 설정하고 "사람을 위주"로 하는 철학의 근본원리를 도출하고 있다. 종래 관념론철학은 정신·사유·의식을, 유물론철학은 자연·존재·물질 등을 위주로 하여 세계관을 전개하였다면 주체철학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을 위주로 하고 있다. 목적의 면에서 볼 때 종래 철학은 세계의 시원을 해명하며 그 운동의 합법칙성을 인식하는 것을 주되는 과제로 설정했다면, 주체철학은 사람의 운명개척을 철학의 근본사명으로 삼았다.

"주체사상은 사람위주의 철학입니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사람을 철학적 고찰의 중심에 놓으며 사람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일성저작선집, 제8권, 472쪽)

사람의 운명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어떤 노정을 밟아 가며,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어떤 생활을 영위해 가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운명개척이란 사람의 생사존망과 발전의 길을 올바로 열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운명을 올바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운명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가를 우선적으로 밝히기 위해 사유하게 된다. 주체철학은 그 결정적인 요인을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 또는 관념적인 절대존재에서가 아니라 운명개척의 주체인 사람에서 찾고 있다.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위세계변화의 합법칙성을 옳게 인식해야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인식행위의 의의는 인식주체의 운명개척에 유익하게 작용할 때만 나타나게 된다. 그러자면 인식하고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힐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철학을 비롯해서 근대·현대의 대부분 철학에서는 인간의 운명개척의 주체문제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필연의 법칙이나 관념적인 절대자에게 순종하는 숙명론이 사회사상의 지배적인 조류로 되고 만다.
비로소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변증법을 통해 "인간해방", "무계급사회 건설" 등 인간의 운명개척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이론과 실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운명개척의 주체문제를 세계관적인 차원에서 정립하지 못하여 혁명주체의 주도적인 역할보다는 객관적인 물질적인 조건에 주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맑스주의가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로 정립하는 한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로 된다. 변혁주체문제는 의식의 문제로 되며, 의식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되면 관념론적인 비과학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레닌주의에서는 재래철학조류의 신비주의적, 숙명론적 운명론을 비판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인간의 운명문제 자체에 그 어떤 관념론적 성격이 있는 것으로 생갓하고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여 버렸다."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모스크바, 1958년 판. 13쪽)

엥겔스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계철학사에서 최초로 철학의 고유한 문제로 제기하고 "사유와 존재" 또는 "정신과 자연"으로 정립하였다. 그러나 존재라는 개념은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관념상의 형상도 포괄 할 수 있어 불확실하며, 사유라는 개념은 모든 관념상의 현상(감성, 지각)을 포괄할 수 없다는 애매성 때문에 "물질과 의식"으로 재정립하게 되었다.

주체철학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사람의 운명개척이라는 사명에 맞게 "세계와 사람의 관계문제"로 새롭게 정립하고 사람위주의 철학적 근본원리를 밝히고 있다.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정립하는 것은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가 가장 본질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된다. 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단순한 물질세계인 자연만 존재하였지만 사람이 출현한 이후는 사회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었다. 사람은 사회를 매개로 하여 자연과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자연과 사회의 변화발전은 사람의 역할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사람의 운명개척을 철학의 근본사명으로 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로 정립하는 것이 과학적인 것으로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의 근본사명에 맞게 인간의 운명개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 위주의 철학적 근본원리를 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학의 근본원리는 철학적 세계관 수립의 사상이론과 방법론정립, 철학의 전체체계와 내용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초원리로 된다. 지금까지의 철학사상에서 오직 주체사상만이 철학의 근본원리를 과학적으로 정립하여 인간의 운명개척이라는 철학의 근본사명과 근본문제를 비롯한 철학의 기초원리를 완결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은 세계관, 인간관, 사회역사관, 영도관 등의 문제를 사람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체계화할 수 있게 되었다.

주체철학의 근본원리가 사람을 중심으로 또는 사람을 위주로 한다고 할 때 "중심"과 "위주"는 방법론적인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자연과 사회 등 사람의 운명개척을 위한 대상과 여러 요인 중에서 운명개척의 주체인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심" 개념은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세계의 변화발전에서 사람의 결정적인 역할을 뜻한다.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의 지위에 있으므로 자기 운명 에 대하여서도 주인으로 되며 또 사람은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역할을 하므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도 결 정적 역할을 합니다." (김일성 저작선집, 제8권, 473쪽)

주체철학의 이러한 인간중심론은 "인간중심주의" 철학이나 "유아론" 같은 철학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철학의 인간개념은 인간을 사회 역사적 관계와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있으며,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고 있는 객관적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인간 중심 개념은 인간이 세계의 유일한 근원적 존재라거나 인간을 위해서만 세계가 존재하고 세계가 발생한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는 중세기 지구 중심론적 사고와 상통한다.

이것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둘 중 어느 것을 절대화하는 중심의 의미와도 다르며, 맑스주의에서 처럼 물질을 중심으로 하되 의식의 "상대적 독자성" 내지 "의식의 반작용"이라는 "변증법적인 관계결합"과도 전혀 다른 것이다.

주체철학이 밝힌 "주인"과 "결정적 역할"이라는 개념도 자기의 독특한 내용으로 정립되고 있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 사회, 및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일상생활에서 주인이라는 개념은 소유관계에서 임자라든가, 신분관계에서 상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손님의 반대되는 말로, 사회활동에서는 무엇을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일상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주체철학에서 주인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표현하는 철학적 용어로 구사되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일성저작선집, 제8권, 472쪽)

사람은 자연에서 주인의 지위에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에는 순응법칙만이 작용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이 목적의식적으로 다른 존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지배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연을 다 지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냐, 아니면 다른 동식물처럼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냐 하는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 된다.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통제 조절하여 생활수단과 생활여건을 만들어 내면서 생존하고 발전해 가고 있다.
사람은 사회에서도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사회관계를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은 이미 확정된 사회적 관계속에서 테어나지만 여기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적 관계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변혁개조 해가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사회의 주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사회의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느냐와는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사회제도와 사람이 개별적인 사람들의 사상의식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운명의 주인이기도 하다.
사람운명의 주인은 어떤 신비한 존재도 아니며 초자연적인 힘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운명을 책임지며 좌우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자기운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거나 저절로 주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은 아무리 불리한 자연환경과 사회 역사적 조건, 인간적 조건에서도 자기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주인답게 대처해 가는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 세계와의 관계에서 사람의 역할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세계에서 오직 사람만이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변하는 의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개조와 인간의 생사운명 개척에서 인간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무기물과 동식물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기도하지만 이들은 다만 자연법칙에 순응 할 뿐 의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이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이것을 자기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변화 개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연을 개조하여 사람이 보다 살기 좋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가며, 낡은 사회관계는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람은 이러한 능동적인 역할을 계속 확대강화 해 왔으며 그에 따라 사람의 운명개척을 더욱 높은 단계로 향상시키고 있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자연과 사회의 변화발전과 인간의 운명개척에 작용하는 중요한 요인들 예를 들면 자연이 주는 환경적 여건과 노동의 대상물들 그리고 사회제도와 사회 역사적 산물인 물질 기술적 수단들 가운데 사람의 역할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환경적 조건을 유리하게 조성하며 이용하는 것이나, 사회발전 법칙을 인식하고 사회관계변혁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여 사회제도를 개조변화 발전시키며, 기술적 수단들을 만들어 내고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도 사람의 역할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사람의 역할과 직접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사람의 역할에 의하여서만 사람의 운명개척에 유리하게 변화발전 될 수 있는 대상물일 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를 주관적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마치 사람이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법칙까지도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없앨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의 역할에 의해서만 세계의 변화발전이 일어나며 모든 사물현상이 빠짐 없이 개조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잘 못된 것이다. 자연과 사회는 사람의 의사와 독립되어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이 있으며 사람은 이 법칙을 인식하여 세계의 변화발전을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의 역할이 높아감에 따라 세계개조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더욱 심화되며, "필연의 영역"을 "자유의 영역"으로 확장 해 가는 것이 인류역사의 본질적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체철학의 철학원리에서 사람의 지위와 역할은 유기적인 연관관계에 있다.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는 세계의 변화발전에서의 인간의 역할에 의해 담보되며, 인간의 역할은 그가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지위에 의하여 규정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존재의 지위를 반영 한 것이며,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 된 존재의 역할을 반영한 것이다.

사람의 지위와 역할문제로 정립된 주체철학의 철학적 근본원리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밝힘으로써 그 과학성이 확보되고 있다.


1.2 인간의 본질적 속성

주체철학은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 파악에서 맑스·레닌주의 철학을 비롯한 재래 철학의 비과학성을 극복하고 있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사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결정적인 역할문제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주체철학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인간의 존재양식과 인간의 능력을 분리하지 않고 결합해서 고찰하고 있으며, 인간의 능력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통일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람의 존재양식은 일반 생물학적 존재와는 달리 주동적으로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생활하며 목적 의식적으로 활동하는 "사회적인 존재"이다.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 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만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자기의 목적을 실현해 나갑니다."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0쪽)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존재는 이 세계에서 오직 사람 뿐임을 확인하고 있다.

"주체철학의 원리에서는 세계에서 사회적 존재는 오직 사람뿐입니다." (김정일,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철학이다, 13-14쪽)

재래 철학에서도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 견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개별적 인간의 존재양식만을 떼어서 사회적 존재라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조건인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하면 "…사람의 본질은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질은 실지로는 사회적 제관계의 앙상불(총체)이다." (맑스/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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