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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한국 그리스도교회의 반성과 과제[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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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2-18 00:00 조회3,8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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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제 논문은 2004년 2월7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통일연대 학술연구특별위원회와 범민련재미본부, 재미동포서부연합회가 공동주최하고 민족통신, 크리스천헤럴드,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통일맞이나성포럼, 내일을 여는 사람들이 공동후원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내용이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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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를 위한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반성과 과제

민 경석 (Claremont 대학원 종교학과 신학교수)

1. 종교인들의 특수과제로서 남북화해를 위한 민족의 의식개혁
2. 북한은 동포요 적이 아니다: 대결에서 화해에로
3. 민족의 구원사적 의미: 건전한 민족주의의 신학을 위하여
4. 공동선의 신학적 의미: 공동선의 정치학을 위하여
5. 남북화해를 위한 그리스도교회의 반성과 북한선교

1. 종교인들의 특수과제로서 남북화해를 위한 민족의 의식개혁

tongilyondaesym-14.jpg 남북의 통일을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다. 보다 정기적인 가족상봉에서 부터 북한동포들에 대한 식량지원, 북핵문제의 해결, 남북의 경제, 문화 교류의 확장, 평화조약 체결과 상호군축에 이르기 까지 열거할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는 종교인들이 특히 종교인들로서 남북의 화해를 위하여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와 과거에 남북의 화해를 거슬려 저지른, 반성해야할 많은 문제점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도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입장에 국한하여 몇가지 지적하고저 한다.

남북화해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거기에는 무역 확장, 공단 건설 같은 경제적 측면도 있고, 북핵문제 해결, 조미수교, 통일의 단계적 실천 같은 정치적 측면도 있고, 휴전선의 비무장화, 상호 군비촉소 같은 군사적 측면도 있고, 또 국제경기에의 공동출전, 국사연구에 있어서 상호 협력, 연에인들의 상호교환 같은 문화적 측면도 있다.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흔히 소홀히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바로 남북화해를 위한 우리의 마음의 자세, 가치관, 감성을 계발하는 것, 다시 말하여 남북화해를 위한 민족의 의식개혁 또는 의식화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의식화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하여 한가지만 지적하고저 한다. 우리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후로 부터 지금 까지 적어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채택하였고, 이 것은 30년 군사정권 하에서도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유지하려고 하였음에도 나타난다. 정권을 강도질한 독재자도 선거라는 형식을 통하여 정당성을 부여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성은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비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인 사고방식, 예를 들어 권위주의, 특권의식, 남성우월의식, 지역주의, 계급의식, 등에 지배되고 있음은 누구나 지적하고 있는 바이며, 이 것이 바로 현금의 정치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음도 또한 자명하다 하겠다. 의식개혁없는 외형적 제도만의 개혁은 실효성이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개혁의 중요성과 함께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의식개혁은 제도개혁과 달리 많은 시간, 많은 세대를 요하는 장기적 사업이라는 것이다. 의식개혁은 우리 내면의 마음, 사고방식, 가치관을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한다.

의식개혁의 중요성은 남북문제에도 해당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역사를 거슬려 올라가 보자. 우리는 남북통일의 절박성을 따지기 전에 왜 우리 민족이 분열되어 통일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분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왜 분단되었는가? 분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 점에 있어서 현금의 논의를 보면 통일에 대한 논의는 많아됴 분단의 원인에 대한 반성은 별로 많지 않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락 않이 할수 없다. 이 것은 아마도 분단의 원인은 2차 대전 후 미소에 의한 한반도 분점과 남북 단독정부의 수립이라는 대단히 자명한 사실이라는 안이한 인식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것은 모든 것을 외부적 조건으로만 설명하고 그러한 빌미를 제공한 우리 민족자체내의 분열과 책임에는 눈을 감는 단견이요 편견이 아닌가 우려된다. 이 것은 남북분단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부인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 것은 오직 남북 분단 같은 큰 사건의 배후에는 외적인 이유뿐 아니라 내적 이유도 항상 작용하였으리라는 역사적 설명의 상식을 존중하고, 그러한 내적 이유의 분석을 통하여 민족 자체의 약점과 책임을 반성하고 그러한 약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한 약점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여야 할지를 성찰함으로서 앞으로 닥아올 통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비록 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알려진 사실을 기초로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다음의 설명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분단시켰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의 민족적 책임도 모면할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책임을 따진다면, 적어도 이조 말엽으로 올라가서 어떻게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지 못하였는지 뭇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민족의 공동선을 외면하고 권력과 이익을 위한 당파싸움, 학파싸움, 가문싸움, 족벌싸움, 등에 몰두했던 선조들의 행적을 크게 탓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요소가 있었다면, 그것은 양반과 상놈, 잘사는 이와 못사는 이들로 갈라놓고 그러한 제도를 국가권력으로 유지하여 온 제도악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적 혁명을 통하여 계급타파의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20세기 초반, 한반도에도 그런 운동이 도래할 것은 시간 문제였고, 실제로 도래하였으며, 1925년에 는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기에 이르렀었다. 미소 양군의 진주가 없었더라도, 또 진주가 있기 훨씬 이전에, 한민족은 이미 분열되었고, 이 것은 해방후 거의 3년 동안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대량실업, 노동쟁의, 좌우충돌, 빈부의 투쟁, 등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 바였다. 계급차별이 심각한 현실이었던 이상, 그러한 사회는 우익 독재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의 조직적 저항을 억압하거나, 혁명을 통하여 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출현하거나, 또는 한반도에서 실제로 일어 났던 것처럼,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로 나뉘는 길 밖에는 다른 역사적 선택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현대 세계사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 분열의 정치적, 영토적 표현, 즉 민족의 분단은 당대의 미소 양대진영의 경쟁과 대결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사회정의와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빈부의 차이가 해소될수 없었을 바에야, 차라리 두 나라로 갈리는 것이, 오히려 한 나라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 보다 더 낳은 역사적 안배였다고도 볼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크게 반성하지 않을수 없다. 민족의 분단의 원인은 외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 분단의 책임에 대한 반성은 곧 우리의 민족으로서의 여러 가지 잘못에 주목하게 한다. 이조 말엽에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입 앞에서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는가?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민족이 민족앞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지은 죄악이요, 그 것은 민족적 반성과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 통일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 반성부터, 회개부터 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에 눈 멀었던 우리 민족, 우리의 선조들, 또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볼것인가? 양반과 상놈의 두 계급을 정착시키고, 잘 사는 이와 못사는 이로 민족을 분열시킨 책임과 죄는 누구에게 있는가? 이러한 원인들이 지금도 존재하는 한, 체체적으로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과연 오래 갈수 있을가? 현금의 남북의 소득 격차는 20 대 1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이대로 통일 될 경우 약 7천만 인구의 35% 인 북녘의 2천 5백만 인구가 사회의 최하층 5% 수준의 생활을 한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사회가 평화롭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불가능 하다. 가난하면서도 비교적 평등했던 삶을 살았던 북녘의 동포들이, 자본주의 밑에서의 이처럼 극심한 빈부의 갈등을 무조건 인내하리라고 생각될가? 8.15 후의 좌우충돌이 전국적 차원에서 더 처참한 형태로 번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의 반란과 저항을 막기 위한 극우익 파쇼 정권의 출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부터 어떻게 준비하여야 할가?

남북문제에 관한 토론을 관찰하면 한자지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수 있다. 그 것은 모든 의견들이 당장의 실천적인 문제들에, 특히 위에 말한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 국한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전의 시급한 실천적 문제들을 넘어서 민족 분열의 원인인 빈부의 극심한 차별과 계급주의를 극복코저하는 민족의 지속적 의지를 포함하는 남북화해를 위한 민족의 의식화라는 장기적 차원의 문제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남북의 문제를 상호 대립적 차원이 아닌 상호 화해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 건전한 민족의식 또는 민족주의의 배양, 민족주의의 구체화로서 자주적 시민정신, 민족적 공동선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러한 공동선을 기초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맹목적 지역주의, 계급적 빈부차별, 종교적 배타주의를 초월한는 민족적 일체감의 형성등은 지속적 남북화해의 필수조건이면서도 대단히 원시안적, 장기적 대책을 요하는 사항이며, 이러한 의식개혁, 새로운 정신문화의 창조, 이 것이 바로 종교인들이 종교인들로서 특히 유의하여야 할 과제요 사항이 아닐가 생각된다.

한국의 종교들이 민족의 화해와 일체감 조성에 항상 긍정적인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님은 역사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 점에 있어서 남북화해의 지상명령은 많은 종교의 자기반성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 분야에 있어서 종교인들의 특별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의식 개혁,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 삶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회개가 종교 특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Hans Kung신부의 말대로 종교간의 평화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북의 화해도 민족을 분열시키는 종교의 분파주의적 경향을 직시하고 그래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자기 초월과 화해의 능력을 해방시키지 않고는 대단히 어려울 것임도 또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한국 그리스도교회로서 남북화해를 위하여 해야 할 과제와 반성할 점들을 지적하여 보고저 한다. 다른 종교들도 그 나름의 입장에서 다음의 문제들을 토론하여 주었으면 한다.

2. 북한은 동포요 적이 아니다: 대결과 대립에서 화해와 타협에로

민족 의식화의 관점에서 교회가 할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헌은 신자들의 북한을 보는 시각을 대결과 대립을 넘어서 화해와 타협의 자세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것은 남북의 통일을 지향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과제일뿐 더러 지난 10여년간의 정부의 홍보와 여론의 형성과정을 통하여 이미 많은 진보를 보이고 있는 과제라고 할수 있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 남한 국민들 사이에 크게 달라 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사이에는 또 우리의 의식속에는 과거 50년동안의 무조건적 반공주의의 잔재가 남아있어, 위기가 생길 때 마다 과거의 대결위주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고, 또 이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아직도 무시못할 정도로 잔존하여 남북화해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아직 대부분 국민들의 북한시각이 결정적으로 달라다고 안심할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계속적 의식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릴 때 부터 듣고 자라난 반공주의는 대강 이풔.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다. 공산주의는 국민의 안녕도, 기본 인권도 무시하는 무자비한 제도다. 그러기에 공산주의는 항상 남침을 꿈꾸고, 겉으로는 평화를 가장하여 협상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남침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과의 협상에 응하는 것 같은 태도도 사실은 작전상의 개방이요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근본적으로 악한 제도요 타협을 모르는 획일적 사회다. 그러기에 북한을 다루는 방법은 대결 뿐이요 북한에 대한 여하한 공격도, 여하한 침략됴 정당화될수 있다. 그것은 북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공주의적 사고 뒤에는 무조건적 친미주의, 미국숭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모범으로서 미국은 항상 옳은 일만 하는 나라요, 우리 나라를 공산주의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준 은인이며,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선의 세력이다.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남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여야 한다.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곧 악을 두둔하는 것이요 북한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것은 선험적, 윤리주의적, 비현실적, 비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사고는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억압은 잊지 않으면서도 미국적 민주주의에 의한 타민족 억압, 타국가 침략, 빈곤층에 대한 억압등에는 편리하게 눈을 감는 파당적 사고요, 빈부의 차이,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국제적 경쟁속에서 그 나마 민족의 독립과 안녕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서의 북한 체제의 역사적, 상황적 필연성은 무시하고 모든 것을 비역사적 윤리주의의 입장에서 간주함으로서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사고 방식이며,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는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또 미국의 세계적 패권주의에 남한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예속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반민족주의요 반애국주의이며, 맹묵적 사대주의의 한 표현이다. 그리스도적으로 말한다면 그 것은 하느님보다 유한한 피조물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의 정치적 표현이다.

남북 통일의 필요성에 관하여 잠간 얘기하여 보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남북의 분열은 남북 모두의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악용되여 건전한 정치 발전을 막아 왔다. 이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주화된 지금도 국가 보안법의 그림자가 얼마나 우리의 자유를 가로 막고 있는지, 또 어떻게 악용될수 있는지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경제적으로는 한편으로는 수백억불의 필요없는 군사비 지출을 요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통일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을 불가능하게 하여 왔다. 심리적으로는 반세기의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같은 핏줄끼리 사이에 원한과 소외의 관계만을 엄청나게 조장하여 왔다.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은 6.25 이후로 너무나 자주 불러 지금도 외우고 있는 노래가 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셜 적군을 무찌르고서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지금도 흥얼 거리며 이 노래를 부르다가도 이 노래의 뜻을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노래는 북한의 형제들이 "원한이야 피에 셜 적군"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민족 분열적이고 반민족적인가? 군사적으로는 휴전선상에서 백여만명의 양쪽 젊은 이들이 최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서로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 12위 경제 대국의 업적도, 지난 반세기에 걸친 모든 건설과 발전의 자취도, 남한 시장에 투자된 모든 외국 자본도, 휴전선상의 총성이 며칠만 계속된다면 모두 사라지고 잿더미로 변할수 있는 위기속에서 살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바보들의 낙원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협속에서 그러면서도 그 것을 모르는체 하면서 살아 온 것이 지난 반세기 한국인들의 삶이었다. 게다가 천만 이산 가족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언제나 저들의 한을 풀어 줄 날이 올 것인가? 남북통일은 빨리 이뤄저야 한다.

남북 분단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민족적 대가는 너무나 크다. 지난 천여년 동안 한 나라를 이루었던 우리 민족이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또 무한 경쟁의 현대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긍지를 가지고 살아 갈수 있는 유일의 방법이다.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필수 조건은 국력을 배양하는 것이고 그 것은 곧 국력배양의 최대 장애물인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초엽의 한반도의 지상명령은 남북의 통일이요 화해임에 틀림없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서울 70km"라는 표지가 걸려있다.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가? 우리 집(Upland)에서 LA에 오는 거리보다도 더 가깝다. 그러면서도 또한 얼마나 멀고 먼 거리인가? 이 거리는 빨리 좁혀져야 한다. 통일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남북통일을 통한 민족의 국력배양의 절박성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지금 부터 한세기 전 우리민족이 처했던 이조말엽의 민족의 허약성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급속하게 근대화된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반도에 그 탐욕을 나타내기 시작한 19세기 후반기에, 조선민족은, 특히 그 지배계급은 이러한 민족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한마디로 저들은 세도정치하에서 정권유지를 위하여 당파싸움, 족벌싸움, 그리고 친일파와 친청파, 개화파와 수구파의 싸움으로 적전분열의 추태를 보였고, 따라서 저들이 민생을 위한 장기적 계획이나 국제정치상황의 변화에 대한 포괄적 분석이나 준비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수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족의 총체적 허약이었다. 얼마나 국고의 재정이 부실했으면 군인들의 월급도 일년 넘어 주지 못했고, 또 얼마나 악독하였으면 오랜만에 주는 월급을 물에 젖어 썩은 쌀과 모래를 섞어 주었으며, 또 얼마나 왕궁의 경비가 허술했으면 몇 백명의 군인들이 쳐 들어 온다고 왕비는 변장하고 도망할 정도였을가? 또 그로 말미암아 청군을 불러들여야 할 정도로 궁중의 수비가 허약했을까? 일본군이 불과 몇 개 대대병력으로 왕궁수비대를 진압하고 대궐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고 한나라의 왕비를 살해할 수 있었다면, 그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 국력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또 궁궐도 위험하여 한 나라의 국왕이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다른 나라의 공사관 지하실에서 일년동안이나 거의 포로생활겸 정사를 보았다면, 그 나라의 앞날이 어떤지는 너무도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당대의 민중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단발령을 강제로 집행하려던 것도 현명치 못했던 큰 정치적 과오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것을 집행하려던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분노한 군중들에게 때려죽임을 당하게 한 국가의 치안상황도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할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1910년의 경술합방으로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기 이전에 조선은 이미 내적으로 붕괴된 국가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붕괴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찌하여 조선 말엽의 정치지도자들은, 내적으로는 축적되어가는 대다수 민중들의 빈곤문제에 무관심했고, 외적으로는 급격히 변하는 세계사의 변증법의 합의를 읽지 못했으며, 급기야 대다수 백성들로부터 완전히 배척되고, 다가오는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 앞에서도 민족의 앞날을 외면하고, 서로 분열되고 싸우면서, 국가의 주권까지 빼앗기는 총체적 허약을 드러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과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적어도 가난한 대부분의 백성들의 삶에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착취했던 양반들의 계급주의, 역사적 변동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든 비역사적, 정체적 세계관, 국가전체의 공동선 보다는 당파와 족벌의 이익을 앞세우는 당파주의, 만민평등의 근대화의 의미에 눈이먼 폐쇄적 가부장주의, 그리고 더 깊이는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켰던 보수적 유교정치질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1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100년 전의 한국과 비교가 않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인의 뛰어난 능력과 끈질긴 노력은 한국을 세계에서 12번째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의 국제적 상황은 19세기 말엽의 한반도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점도 너무나 많다. 민족적으로 볼 때 남북의 분열, 지역의 분열, 보수와 진보의 분열, 빈부의 분열은 심각할 정도로 남아 있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한반도에서의 제국주의적 각축은 예전이나 크게 다를 것 없다. 지금도 금세기 최강의 제국주의의 군대가 반세기 동안이나 남한에 주둔하면서 전쟁시에 국군통수권 까지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의 경제도 그 제국주의의 의도에 따라 순식간에 붕괴될수 있는 근본적 허약성을 지니고 있다. 남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도 미국 대통령이 속도조절을 하라고 한마디 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대학생 불과 몇십명이 미군 훈련장에서 시위하였다고 하여 조용히 법대로 처벌하면 될 것을 청와대는 미대사관에 사과전화를 하고 국무총리는 미국 장성들을 불러 사과 만찬을 한다고 수선을 떨고 있다. 많은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독립에 관한 한 지금의 상황이 100년 전 보다 크게 개선되었다고 낙관할수 있을가?

이 시점에서 교회가 할수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있다면 그 것은 바로 대결적, 워선적, 호전적 사고 방식을 너머서서 대화와 협력을 통한 남북통일의 절박성을 주지시키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다.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시키거나 또는 전쟁이나 정권붕괴를 통한 비평화적 통일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또 50년, 100년 동안 남북의 분단과 대치상황속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참담한 일이며, 한반도에 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임에 틀림없다. 남북의 통일과 화해의 지상명령 앞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체제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인내로히 견디면서 꾸준한 대화와 가능한 한 최대의 협력을 통하여 민족통일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신자들에게 우리가 잊지 못하는 6.25의 참상도 당시의 냉전적 맥락에서 새로히 해석되어야 하고, 북한 체제를 두둔하지 않으면서도 그 체제의 현실성을 인정하여야 하며, 북한체제의 문제점들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약점도 부각시킴으로서 한 쪽만이 올은 것이 아니고 모두가 보다 나은 체제를 위하여 개혁하여아 할 점이 많음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 동포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요 적이 아니며, 우리의 조국은 남한 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임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임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과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본주의를 절대화하고 그 것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모든 제도도, 자유민주주의이던 공산주의이던,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전쟁과 폭력을 통한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회개와 반성을 통하여 양보와 대화와 협력의 길을 모색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어느 한 나라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야욕을 경계하고 단죄한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를 위한 노력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인내하고 희망할 것을 당부한다.

3. 민족의 구원사적 의미: 건전한 민족주의의 신학을 위하여

한국의 그리스도교회가 민족의 통일과 화해를 현대의 지상명령으로 받아드리고 그에 맞는 의식개혁에 앞장서기 위하여는 제일 먼저 민족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할수 있다. 한국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성서와 교회 밖의 모든 것들은 구원사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곧 다른 종교 뿐 아니라 다른 민족, 다른 문화에서도 구원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아마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사회문제나 민족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다른 종교나 민족의 문화전통에 관하여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여 왔음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아니할수 없다. 민족 통일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면 그 것은 어디까지나 북한선교의 관점에서이며 민족자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 할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민족통일 문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기 위하여는 가장 시급한 것이 민족의 신학적 의미 정립, 다시 말하여 민족신학의 창출이라 할수 있다. 인류 구원사에 있어서 민족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간단히 언급한다면 민족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인간의 구원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 의존적이고 공동체적이다. 인간은 남과의 유대를 통하여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교회보다도 더 중요한 남과의 유대는 혈연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어 주는 것은 바로 구약성서이다 이스라엘 개인들의 운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떠나서 이야기 할수 없다. 하는님의 계시는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부터 에집트의 종살이에서의 해방, 모세의 율법과 시내산에서의 하느님과의 계약, 가나안 정복, 남북왕조의 분열, 예언자들의 선포, 아씨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생활, 헬레네 제국과 로마의 정복 등 민족사적 사건들과 떨어질수 없는 관계에 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민족적 경험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터득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계명을 받았으며, 스스로의 정체성과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인들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해당된다. 민족의 운명을 떠나서 개인의 운명을 말할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을 받았고, 우리의 언어와 문화도, 우리의 정치와 경제도, 다시 말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조건은 민족에 의하여 매개된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민족은 가족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종교심과 윤리가 가족을 통하여 처음으로 매개되듯이, 우리 가족의 모든 종교심이나 인생관도,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나 하느님의 모습도, 모두 민족을 통하여, 민족의 유산과 민족의 심성을 통하여 매개된다.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교 신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자리잠고 있는 민족의 종교성을 통하여 매개된 것이며, 그러기에 우리의 그리스도 신앙 속에는 유불선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인 그리스도 신자 치고 유교적 가족주의, 유교적 의리주의,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자유스런 사람이 몇이나 될가? 그것은 서양인들도 또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다인들의 신앙은 유다인들의 민족적 경혐을 통하여 매개된 것이었고 서양 그리스도신자들의 신앙은 서양문화에 의하여 매개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는님의 구원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특정한 부모로 부터 삶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의 우발적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부모와 가족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수도, 하느님을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연관성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하고, 무속에서는 숙명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민족도 우리에게는 그저 우연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원한 안배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의 표현으로서, 모종의 필연성과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의 종교신학은 곧 민족신학에로 원용할수 있다고 생각된다. 칼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고,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질상 그러한 구원은 구체적 종교에 의하여 매개될수 밖에 없는 이상, 비록 구원의 원천은 그리스도이면서도, 그 구원은 다른 종교를 통하여 매개된다고 뵤아야 한다. 같은 논리로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 존재의 필수적 구조에 속하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듯이 민족을 통하여 매개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그 내용을 명세할수는 없지만, 모든 민족의 역사는 동시에 구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민족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구원의 모범이요 원천이신 성자 또는 말씀의 씨앗을 모든 민족의 역사속에 뿌리시고 계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신자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창조주요 어버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신자 뿐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성부의 영이시오 성자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 신자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생명을 주시고, 초월의 능력을 주시며, 연대와 사랑의 은총을 주시고 계신다. 모든 민족의 역사속에서, 따라서 우리 민족의 역사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 (고린도 후서 13:14) 의 자취를 찾아내는 삼위일체적 신학적 작업은 참으로 절실하다. 민족의 역사는 신학적으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민족 공동체 위에는 인류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의도는 모든 민족이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답게, 보편적인 유대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모든 인류가 성령안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종말론적 의도이다 각 민족으로 분열된 인간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것이, 인간의 신학적 궁국 목표라고 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느 민족을 절대화하거나, 어느 민족의 민족 종교로 전락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민족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또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종속되어 억압 받을 때, 피억압민족에 대한 우선적이고 정치적인 사랑을 보이면서도, 어느 민족을 절대화하는 폐쇄적 민족주의는 동시에 철저하게 배격한다. 또 동시에 어느 특정민족들의 주도하에 많은 약소민족들의 억압과 착취를 수반하며 진행되고 있는 현대의 세계화도 또한 배격하고 단죄한다.

교회는 따라서 건전한 민족주의의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구원사적 시각에서 볼 때 민족은 가족과 교회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민족 공동체의 화해와 단합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선교적 차원을 떠나서도 교회의 삼위일체적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의식구조속에 북한 동포들을 포함한 민족 전체의 정당한 이익이 어느 맹방과의 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것임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민족의 자존심의 문제요 민죡 독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4. 공동선의 신학적 의미: 공동선의 정치학을 위하여

민족에 대한 애착과 충성은 공동선의 정치학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간단하게나마 민족울 분열시키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의 분열을 야기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오직 상호의존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오직 상호의존을 통하여 성장할수 있으며, 오직 상호의존을 통하여 어떠한 목표도 달성할수 있는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다른 인간들과의 유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 공간적으로, 지리적으로, 경험적으로, 또 이해관계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 유대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가문, "같은" 학교 동창, "같은" 고향 사람들, 같은 부류의 사람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을 만나면 더욱 반갑고, 저들과 "동일성의 체제" (system of identity)를 이뤄 유대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체제는, 때로는 못 견디게 차갑고 때로는 살벌할 정도로 적대적이며 때로는 비인간적이게 경쟁적인 사회에서, 삶의 온정과 신뢰와 안정을 우리에게 가저다 주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최소한의 동일성의 체제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삶의 고독과 소외와 실패를 느낀다. 현대 미국 사회의 고민은 이러한 동일성의 체제의 급격한 파괴에서 오는 고독과 소외와 파편화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주는 이 동일성의 체제가, 폐쇄적 자기 절대화에 빠저, 자기와 상이한 다른 모든 동일성의 체제를 차별하고, 거기에 속하는 모든 "남들"을 배척하는 "배타적 동일성의 체제"로 악화될 때, 이것은 바로 사회의 문제요, 국가의 문제요, 민족의 문제로 비화된다. 우리 민족의 고질이요 "한국병"이라고 할수 있는 가문주의, 동문주의, 지역주의, 종파주의, 계급주의, 남성주의는 모두 배타적이고 파당적인 동일성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다.

사회구조가 비교적 단순하여 집단간의 마찰의 기회가 별로 없고, 또 사회구조가 현대처럼 복잡하더라도, 공(公)과 사(私)의 구별이 분명하여 동일성의 체제의 역할이 사적인 사항에 국한된다면, 동일성의 체제가 약간의 배타성을 띤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도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의 현대적 상황은 말할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고, 삶의 기본 조건인 재물과 권력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한 집단간의 마찰의 기회는 더욱 커으며, 이러한 마찰의 기회가 증가함에 따라 공동선의 담지자로서의 국가 공권의 역할과 범위는 정비례로 증가할수 밖에 없게 되었고, 따라서 사적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공권을 독점하고 악용하려는 유혹과 압력은 막대하여 질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속에 너무나 크게 부각되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기독교의 정권 독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하에서 군부와 재벌과 영남세력의 공권 독식, 또 많은 분야에서의 서울대 출신들의 기회독점, 등 배타적 동일성 체제의 온갖 횡포를 겪어 왔으며, 한국의 지난 500 년의 역사는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 파벌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양반 귀족들에 의한 순박한 민중탄압 등의 말할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의 횡포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출봉," "용의 눈물," "여인천하," "명성황후" 등의 많은 사극들이 이것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인 치고 배타적 동일성의 횡포를 겪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집단적 배타주의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한이요 비극이며 추문이요 저주라 아니할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이 저주에서 해방될수 있을가?

민족을 분열시키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모두 가문주의, 지역주의, 동문주의, 계급주의, 남성주의, 종파주의, 등 배타적 동일성의 체제의 여러 가지 표현이며, 따락서 근본적으로 민족분열의 근원은 바로 배타적 동일성의 체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타적 동일성의 체제는 독점을 위한 경쟁과 배척의 관건이되는 재물과 권력의 크기에 따라 그 폐해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재물과 권력의 생산과 분배를 공평하고 균등하게 함으로서, 동일성의 횡포의 폭과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동일성의 횡포는 상호의존을 통하여만 살아갈수 있는 인간들의 자기 정당화와 자기 절대화의 표현이며, 이것을 나는 우리 민족의, 아니 온 인류의, 원초적 죄악 또는 "원죄"라고 부르고 싶다.

이에 반하여 민주주의 사회는, 동일성의 체제를 넘어서서 혈통, 지역, 출신, 종교 등이 서로 다른 "남"들이 함께 모여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면서, 운명 공동체로서 "공동"의 앞날을 함께 결정하는 다양성의 체제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어느 특정한 가문, 혈통, 지역, 출신, 또는 종파의 회원이기에 앞서 "남"들의 모임이요 연대인 국가 공동체의 성원이며, 이 공동체의 공동이익과 앞날에 함께 책임지고 함께 결정하는 민주사회의 "시민"이다.

민주사회의 앞날은 따라서, 시민들이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인 "남"들의 모임으로서의 국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만큼이나 동일성의 체제를 초월하여, 같은 시민으로서 "남"들과의 연대의식을 느끼고, 저들과 함께 "우리"로서의 공동체 의식에 철저하느냐와, 그러한 공동체의 앞날을 함께 책임지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남"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또 특정 가문, 지역, 출신, 또는 종교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공동체의 공동이익 또는 공동선을 위주로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남"들의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주국가는 어느 특수집단의 사유재산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공공" 재산이다. 국가의 사찰권, 인가권, 세무권, 사법권, 입법권 등은 우리 모두의 "공권"(公權)이며 특수집단이 자의적으로 악용할 수 있는 사(私)적 권한이 아니다. 시민정신의 기본은, 동일성의 체제를 초월하는 "남"들의 공동체로서의 공동체의식과, 그러한 의식에 입각하여 공공이익, 공공질서, 그리고 공권을 존중하고 公과 私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아는 공공의식에 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공의식이 없을 때 국가의 공권은 私物化하고, 국가의 재산은 특수집단의 私有재산으로 전락하며, 그 반면에 집권자의 동일성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지역, 다른 종파, 다른 출신에 속하는 "남"들은 가차없이 희생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랑하는 반만년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지난 40년만을 보더라도 "남"들의 집단이며 공공재산인 국가는 특수집단(군인들), 특수지역(영남), 특수계급(재벌들), 특수종교(주로 기독교), 특수출신(경기고, 서울대) 들의 사유재산으로 전락했고, 국가의 공권은 "남"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데 얼마나 악용되어 왔던가? 국가의 공공기관인 국세청과 안기부까지 동원하여 특수정당의 선거자금을 모금한 것이 탄로난 것도 바로 어제의 일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볼때,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은 모든 폐쇄적 동일성의 체제를 때려부수고, 公共정신 또는 公共의식을 고취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선의 정치학을 투철하게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나"와 "나의 집단"에 "죽고" "남"들을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민정신의 요건으로서의 공공의식은 "나"의 욕망이나 "나"의 집단의 욕망을 떠나서, "남"들의 모임으로서의 공동체의 이익에 충실하기를 요구하며, 모든 "남"들을 차별없이 같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저들과 연대할 것을 요청한다. 정치의식은 모든 남들을 공정하게 취급하기를 요구하며, 평등의식은 나의 모든 이기심과 지배욕을 절제하고 남들을 존중하고 남들도 나와 똑같이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다원주의적 감각이나 대화문화도 나와 나의 집단의 이기적 시각을 초월하여, 나를 "비우고" "남"에게 경청하기를 배울 것을 요청한다. 시민정신은 이처럼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포기와 남에 대한 차별없는 정치적 존중과 사랑을 요구한다.

옛이나 지금이나 많은 인간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현대와 과거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인간의 고통이 주로 천재에 의한 것이었음에 비하여, 현대의 고통은 인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홍수, 기근, 태풍, 지진 등의 천재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특히 20세기에서의 인간의 고통은 천재 보다도 인간의 인간 착취, 특히 공권력의 사물화(私物化)와 남용에 의한 인재에 의한 것이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1,2차에 걸친 세계적 전쟁, 한국 전쟁, 월남 전쟁, 소말리아, 보스니아, 스리랑카, 르완다, 콩고, 팔레스타인, 북아일랜드, 이라크, 등지에서의 모든 전쟁, 그리고 미국에서의 인종차별, 남아공화국에서의 인종분리정책, 이러한 것은, 모두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나 실책을 초월하는 국가 공권의 남용에 의한 사회악이며 구조악이라 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도 결국은 정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공권의 악용에 의한 인간의 고통은 공권의 사물화를 막고 공권이 오직 공동선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도록 비판하고 감시하는 시민정신의 발현으로서만 방지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정신은 현대에서 그리스도적 사랑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며, 참된 시민정신을 떠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공공의식으로서의 시민정신이 통일시대에 더욱 더 절박한 것임은 자명하다. 이러한 시민정신의 함양 없이 통일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미 남녘에서 우리가 익히 겪어온 망국적 물질주의, 계급주의, 지역주의, 동문주의, 종파주의가 북녘까지 연장되는 것에 불과하고, 모든 이의 재산인 국가의 공권은 폐쇄적 동일성의 체제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그런 동일성의 체제에서 배제된 북녘 동포들의 "남"들로서의 소외감과 분노가 얼마나 클 것인가는 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족에 대한 애착과 충성은 바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철폐하는 공동선의 정치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특히 빈부의 차이와 지역의 차별은 속히 타파되어야 할 민족의 저주요 추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족 통일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계급차별과 지역주의의 타파없이 이룩된 통일은, 오히려 더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북녘에 대한 지역적 차별에 가난한 북녘 동포들에 대한 멸시가 더해을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그러한 한국사회가 과연 평화로울가? 평화를 원하면 정의를 실천하여야 하듯이, 보람있는 통일을 원하면 계급차별과 지역주의를 타파하는데 참여하여야 한다. 빈부의 차이와 지역주의에는 무관심 하면서 민족 분단의 한을 말하는 것은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2002년 월드 컵 당시처럼 한국인들이 민족의 일체감을 느낀 것은 해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체감과 애국심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며 바로 다음 해 대선 때에 다시 극성을 부린 지역주의는 그런 종류의 애국심이 실체없는 거품이었음을 들어 내주었다.

어떤 이는 남북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민족과 국가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수 있을가? 이 것은 남과 북을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만 간주하고 남북이 하나의 민족을 이룬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라는 말이요 통일에 대하여 포기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 같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에서는 마치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처럼 국가와 민죡이 몇 천년 동안 하나를 이루어 민족의 문제가 곧 국가의 문제인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분리하여 생각하라는 것은 국가를 국가의 성원인 민족을 떠나서 하나의 추상적 존재로 생각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수 있다. 이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래서는 않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어서 국가가 형식이라면 민족은 바로 그 내용이다.

또 얼마전에 민족이 더 중요한가 민중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민족과 민중은 상이한 개념이다. 민족은 혈연 공동체의 전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민중도 포함한다. 민중은 정치, 경제적 개념으로 민족의 성원중에서도 가난하고 차별받고 무력한 계급을 일컷는다. 따라서 두 개념은 적어됴 겉으로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서로 상치된다고만 ぜ測 없을 것이다. 민족이 없어지면 일제하에서 처럼 민중들의 삶은 더 궁핍하여진다. 타민족에 의하여 차별받는 것은 같은 민족에 의하여 차별받는 것 보다 더 비참하다. 경제적 차별에 종족적 차별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민족에 의하여 차별받는 것이 비록 타민족에 의하여 차별받는 것 보다 들 비참하다 하더라도 차별하는 권력층, 부유층과 같은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같은 민족에게 버림당하는 것이 타민족에 의햐여 차별당하는 것 보다 더 비참하고, 더 절망적이고, 더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지도 모른다. 조국이라고 한국에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하는 중국동포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이런면에서 볼 때 우리는 민족과 민중을 상호대립적 개념으로 보지 말고 상호 보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빈부차별과 지역주의로 서로 분열된 민족이 온전한 민족일수 없듯이 민족없는 민중도 불상한 민중임에 틀림없다 할수 있다. 하류계급으로서의 민중이 존재하는 한 혈연공동체로서의 민족의 공동체성은 깊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고, 소속할 민족이 없어진 민중 또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다. 요는 되도록 속히 빈곤과 차별이 종식되어 민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함으로서 민죡의 화해와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며, 그렇게 할 때에만 민족의 긍지도 살아나고 민중의 한도 풀릴 것이다. 민족없는 민중도, 한 많은 민중을 품고 있는 민족도 모두 불행하다.

5. 남북화해를 위한 그리스도교회의 반성과 북한선교

본인은 위에서 남북화해를 위한 한국종교의 특별과제로서 민족을 분열시키고 남북의 화해를 가로막는 마음의 자세와 사고방식 등의 의식개혁을 지적하고,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과제로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건설과 계급주의, 지역주의, 등 동일성의 체체를 초월하여 민족의 공동선에 충성하는 새로운 시민정신의 구현을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위의 맥락에서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반성할 점들과 북한선교의 문제를 간다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특별히 반성해야 할 점으로 이데올로기적 반공주의, 무비판적 친미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정치적 무관심을 통한 계급주의, 지역주의 등 동일성의 횡포에 동조함으로서 민족분열을 조장한 것을 들수 있다. 반세기 전의 대결적 상황에서 교회가 반공의 선두에 선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수 있다. 당시의 공산주의는 유물론적 무신론이었고, 유신론적 그리스도교회가 이에 대항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싸움에서 공산주의가 제시한 빈곤과 사회정의의 정당한 문제까지 무시하고 자본주의편에 서서 유신론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사회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을 안보의 명분으로 박해하는데 일조한것은 이념대결의 계급적 배경을 무시하고 그 많은 사회부정의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만을 절대화하는 비역사적, 비윤리적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의 소산이었고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사고방식을 참회하고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장단점을 판단하기 시작한지 오래된다. 한국 그리스도교회도 이제 무조건적 반공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모든 정치, 경제 제도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무비판적 반공주의가 또한 무비판적 친미주의 또는 숭미주의를 나은 것도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미국은--지금도 그렇지만--반공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었고 또 동시에 선교, 재정 면에서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가장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미국은 한국 그리스도교회들에게 반공 자본주의면에서 정치적인 본산일뿐 아니라 한국에 그리스도교회를 심어준 종교적 본산이기도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미국인들이었고, 한국에서의 의료, 교육, 사회사업의 대부분도 미국 교회듣의 지원을 받았으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의 대부분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미국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해방후의 빈곤과 절망속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특히 그리스도교회들이 미국에 의지하고, 미국을 동경하며, 미국을 절대화하게 된 것도 쉽게 이해할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의 많은 다른 민족둘과 함께 미국에 대한 장미 빛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의 역사는 내적으로는 많은 소수민족 억압의 역사요 외적으로는 많은 나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유," "민주주의," 때로는 "그리스도교"의 명분으로 정당화시킨 것도 미국 역사의 이데올로기임을 잊어서 않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그리스도교회들은 이러한 무비판적 반공주의와 무조건적 친미주의를 통하여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극심한 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을 안보의 이름으로 억압함으로서 반민주 독재정권울 비호하였으며, 민족적으로는 북녘의 동포들을 악마화하고 적으로 만듦으로서, 민족을 갈라놓는데 크게 앞장서 왔었다. 8.15 이후의 교회의 무비판적 반공주의는 참으로 하나의 크나큰 추문이요 잊지 못 할 오점이라 아니할수 없다. 한국의 교회들은 개신교이건 천주교이건 이 점에 있어서 깊이 회심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또 한국의 그리스도교회들은 그 신학에 있어서 극심한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그리고 교파주의 사로잡혀 타종교, 심지어는 타교파에 대하여도 극도로 배타적이고 전투적이다. 같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면서도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는 말 못할 증오와 편견이 존재하고, 같은 교파사이에도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보이고 있으며,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회들의 태도는 저들을 악마의 소산으로 보는 호전성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들은 가는 곳 마다 분열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배타주의가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의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크게 일조한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 그리스도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는 참으로 민족의 크나 큰 수치요 추문이요 오점이며 반듯이 극복되어야 할 전 그리스도교회적 과제요 도전임에 틀림없다. 교회들은 개인과 개교회와 교파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추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모든 분열과 배척의 장벽을 허물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 나아가 전인류의 화홰와 일치에 공헌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실천을 떠나서 그리스도 교회들의 구원은 있을수 없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구원에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남에게 전하기 전에 교회들은 스스로 구원의 징표를 보여야 한다.

또 한국 그리스도 교회들의 고질적 성속 이원론은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억압적 한국 정치의 요인이었던 여러 형태의 동일성의 횡포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에 편승하여 억압을 조장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권력 독점,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적 정책에 대한 침묵, 영호남 차별에 대한 야합,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분단을 고착화는 반시대적 반공주의에의 편승 등은 그 두드러진 예라고 할수 있다. 그리스도교회로서 인류의 보편사랑에 반대되는 동일성의 횡포를 적극적으로 물리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횡포에 종교적 분파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을 첨가치켜 민족의 해방보다는 민족의 분열과 억압에 기여한 바가 많았음을 기억히고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북녘선교문제에 관하여 논의하여 보기로 하자. 많은 신자들의 생각으로는 어쩌면 이 것이 교회와 통일문제를 다룰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제목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제목을 일부러 마지막에 집어 넣었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교회가 통일 시대에 할 일은, 위에 말한 의식개혁을 실천함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통일이 된 후에도, 올바른 신학의 기초위에서 시민정신을 촉진시키고 사회정의를 실천함으로서, 민족분열의 여러 가지 요인을 제거하고 통일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시대에 적절한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넓고 또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선교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반도에서 화해와 일치, 해방과 구원을 위하여 이미 역사하고 계시는 하느님 자신의 선교활동에 응답하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며,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는, 좁은 의미에서의 선교사업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선포하고 그 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이요 방법이다.

상황으로 볼 때, 남한의 교회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이야기이지만, 교회중심주의, 성직자들의 권위주의, 기복주의, 물량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분열주의, 집단적 자기도취, 사회로 부터의 유리, 그리고 여러 가지 추문과 부패로 말미아마 크게 썩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북녘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은, 남한 교회의 분열과 부패를 북녘에서도 재생산함으로서, 민족의 분열과 사회의 부패를 더 심화시키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가 아닐가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

방법으로 보더라도 이제는 말로만, 형식으로만 선교할 때는 지났다고 생각된다. 값싼 말은 이미 신빙성을 잃었고, 오히려 위선자라는 비판만 거세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에 대한 "말"보다도 예수님 말씀의 "실천"이 더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다. 게다가 진정한 선교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전제로 한다. 상대방을 위압하고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자아내고 상대방을 경멸하는 식의 선교는 진정한 선교가 될 수 없다. 서울의 전철에서 하듯이, 또 때로는 LA의 가두에서도 하듯이, 소리 소리 지르면서 지옥행으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식의 선교는 상대를 모욕하는 것이요, 오히려 상대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증오하게끔 만든다. 이런 선교는 선교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통일후 20년간 모든 좁은 의미의 선교사업은 정지하고, 그 동안은 북녘 동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회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직업교육, 등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중점을 둘 것을 모든 교파들에 제안한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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