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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남북 및 동서의 갈등현실과 화해의 신학-한반도 상황중심</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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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2-18 00:00 조회4,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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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및 동서의 갈등현실과 화해의 신학:
오늘의 한반도 상황을 중심으로


김 애 영 교수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여성신학)


1. 시작하는 말

tongilyondaesym-11.jpg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동서의 갈등과 대결 혹은 동서 냉전은 폴란드에서 시작해서 루마니아에 와서 일단락 된 동유럽국가들의 탈사회주의 도미노 현상(1989),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1990), 구 소련의 사망신고(1991년 말) 이후로 말해지는 1989년의 대격변을 겪으면서 냉전체제는 일단 해소되었다. 오늘의 탈냉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통일문제에서는 동서 냉전 체제의 갈등과 대결이 어떻게 지속 관철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화해의 흐름이 조성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 논문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과 그 당시 발표된 6 15 공동선언을 전후해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현실과 화해의 단초들을 요약, 분석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이 어떠한 화해의 신학을 제시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빈곤한 남반구와 부유한 북반구의 세계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20세기 말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악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얄타회담(1945년 2월)은 유럽의 분할과 함께 미국과 구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양대 진영의 형식을 인정했고 반둥회담(1955년 4월)을 통해 나머지 방대한 국가들로 하여금 "제3세계"라는 결집체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제3세계 국가들py8.15-4.jpg 이 품었던 바 독립과 발전에 대한 희망은 환상으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1980년대 말 중남미 국가들의 1인당 소득은 70년대 말 수준으로 후퇴했고 아프리카의 경우엔 1960년대 식민지 독립당시의 수준으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벗겨내면 냉전의 본질은 남북갈등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 오늘의 탈냉전 시대에 확연해지고 있다. 1970년대 초중반에 나타난 세계경제의 위기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핵심부 자본의 대응이 몰고 온 세계화 혹은 지구화 프로젝트로 인한 남북갈등은 세계적인 남북격차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부유한 북반부 내부의 남북 격차 심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 확대되어 왔다. 이 논문은 마치 국제협력 확산의 시대를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북반부의 반동, 전지구적 차원의 남북격차, 북반부 내부의 남북 격차와 긴장이 더욱 더 확대 심화되어 가는 21세기의 오늘의 상황이 오늘날 한반도 분단상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통일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전후의 한반도 상황을 중심으로 요약적으로 제시하면서 화해의 신학을 상론하고자 한다.

2.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갈등현실과 화해의 양상

py8.15-3.jpg 정해구는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구조적 흐름이 시작되었던 것으로서 1988년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을 그 기점으로 잡는다. 당시 신데땅트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는 가운데 노태우 정부는 7.7선언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8년부터 김영삼 정부의 집권이 종료되는 1997년 말까지의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흐름을 정해구는 다음과 같은 3국면으로 정리한다.

제1국면(1988년-1992년 초)은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채택(1991년 말) 국면으로서, 남한은 동구의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소련, 중국과 수교를 맺을 수 있었으며, 북한 역시 조일 수교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하였다.

제2국면(1992년 말-1994년 10월)은 북한 핵 갈등을 둘러싼 위기 국면으로서, 1992년 말 급속하게 부상한 북한의 핵 개발 의혹으로 인해 북미간 갈등이 고조된다. 1994년 6월 카터 미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한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고,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 개발 의혹이 일단 해소된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과 남한에서의 김일성 주석 조문을 둘러싼 파문이 일어나고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제3국면(1994년 10월-1997년)은 북미관계의 완만한 진전과 남북관계의 교착국면으로서,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거치면서 북미관계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그러나 오히려 남북관계는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데, 그 동안 병행적 모습을 보여주었던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분리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상유지 또는 완만한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반면에 남북관계는 여전히 교착상태를 면치 못했다.

py8.15-5.jpg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후 보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이 천명되었으나,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간 교류 협력을 위한 김대중 정부의 노력도 곧장 남북대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노력 다음으로 정해구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있어서의 새로운 변화에 주목한다. 탈냉전 이후 미국이 대북 강경정책을 추구했던 직접적인 원인은 북한 핵 의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즉 탈냉전 이후 "개입과 확장"(Engagement and Enlargement) 전략의 주요정책으로서 대량살상 무기 확산 방지에 주력하고 있던 미국은 때마침 핵 개발 의혹을 일으키고 있던 북한에 대해 강경정책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의 핵 개발을 동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그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 경제적 관계개선을 약속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체제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은 "작전계획 5027-98"이 보여주듯이, 대북 온건정책의 배후에는 대북 강경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미 공화당 중심의 대북 강경파들은 끊임없이 대북 강경정책을 요구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북한은 갑작스럽게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며 미 클린턴 정부는 대북 조정관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로 하여금 미국의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하도록 지시했으며, 제출된 페리 보고서는 북미 관계 진전의 새로운 돌파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페리 보고서에 의하면, 북미간 갈등이 대북 강경정책보다는 온건정책, 즉 협상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하였으며 중장기적으로는 북미간의 국교정상화와 이에 따른 한반도 냉전의 해체까지 상정하고 있다. 정해구는 2000년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및 6.15 공동선언은 탈냉전 이후 한반도의 냉전체제적 기반이 꾸준히 약화되는 가운데,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시행의 계기와 미 정부의 페리 보고서 채택에 따른 북미 관계상의 진전이라는 계기가 맞물리면서, 그리고 이 두 계기에 대한 북한의 적극적 호응이 이루어지면서 만들어진 결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전쟁공방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의 정해구의 서술은 미국의 소위 "불량배국가(rougue state)론"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즉, 핵을 무기로 무모한 돌출행동을 하려던 소위 "불량배 국가" 북한을 마치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북미 협상과 김 대통령의 주도로 남북정상회담의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낸 것처럼 잘못 해석될 여지를 정해구는 제공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후에 논하게 될 터인데, 북한 핵 문제와 1998년 8월의 북한 인공위성발사를 둘러싼 소동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의 주요인이 아니라 단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정해구는 간과하고 있다. 미국의 소위 "불량배 국가"라는 말은 미국이 1980년대 독재국가들을 지칭하는데 처음 사용한 이래로, 북한, 이란, 이라크 등 핵이나 미사일 개발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우려가 있다고 미국이 지목한 나라들에 붙여진 말이며,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 위협이 되면서도 합리적이지 않아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불가능한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김명섭은 미국의 저러한 "제국적 강박관념의 과민성"에 근거하고 있는 보다 실제적 기반은 소위 불량배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냉전체제에 근거하고 있는 패러다임과 그러한 패러다임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이익을 얻는 집단이라고 보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의식과 결합된 군수산업의 폐해를 분석하고 있다. 동구권의 붕괴와 북미간의 전쟁위기, 김일성 주석의 급서와 대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 식량부족과 기아와 난민 발생 등으로 인한 북한 붕괴론이 대세로 굳어지던 상황 속에서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북미간의 관계정상화 추진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북한의 대미 협상력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셀리그 해리슨은 "거만한 미국에 맞서 공정한 조건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북한의 민족주의적 정신을 높이 산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도진순은 1990년대 한반도에서 진행된 "저변의 역사"에 주목하면서 2000년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 전반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저 정상회담에 이르게 된 계기로서 "1999년 이후의 북한의 변화"와 북한의 적극적 태도로 성사된 바, 2000년 4월 8일 "남북(북남) 합의서"를 제시한다.

615dudol-5.jpg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비롯한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내걸었다해도, 1999년 말까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북측의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도진순은 1999년 이후 북한의 변화에 주목한다. 즉, 한반도에서 1999년은 반세기 전 한국전쟁에 버금가는 5년간(1993년-98년)의 전쟁위기에서 벗어나 북미관계가 화해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탈냉전 이후 90년대 한반도 정세에서 "남북기본합의서"로 대표되는 초반의 화해 분위기는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고 그후 줄곧 전쟁위기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사의 동서냉전이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한반도 분단에는 단지 냉전체제적 대립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다름아닌 북한과 미국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민족문제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도진순은 페리 보고서에 의한 북미간의 관계정상화 궤도로 진입하기 시작된 북한의 변화를 보다 더 주시한다. 즉, 북한은 강성대국론의 다음 단계로 경제발전과 대외관계 확장에 돌입하였으며, 미 중앙정보국(CIA) 테닛이 언급하듯이 북한은 1999년을 "대전환의 해"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기존의 북미협상 이외에도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재개한 것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브루나이와의 외교관계 수립 등 전방위 외교로 점차 세계정치계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으며, 남북 통일 문제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해서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하기 위한 남북당국자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였고, 이미 그 직전 베이징에서는 남북간에 비밀접촉이 시작되었다. 3월에 들어와 베이징 싱가포르 상하이 등지에서 정상(최고위급)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나, 4월 8일의 회담 합의는 김대중 대통령도 놀랄 정도로 전격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측의 적극적인 태도로 성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연유로 북측의 입장에서는 비료지원 등 경제문제와 남측의 입장에서는 총선문제가 서로 어우러진 합의결과라고 한다.

한편, 김명섭은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했던 결정적 계기를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으로 보고 있다. 한국정부가 베를린 선언을 미국 측에 알려준 방식이 통보의 차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사전협의가 아닌 이러한 한국정부의 통보적 차원의 외교적 행보에 대해 미국은 일종의 일탈행위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유럽의 상징적 도시인 베를린을 택하여, 유럽국가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북한과의 경협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의 보고서에 의한 소위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에 입각해서, 우방국을 동원하여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으나,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햇볕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가들이 북한특수라는 결실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미국의 관심사로 여겨지던 북한문제에 유럽국가들의 참여기회를 확대시켰던 것이다. 유럽국가들이 참여하고 남한이 주도하는 대북한 마샬플랜이 전개될 경우, 대북협상에 있어서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도 대미예속성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기는 하나, 어쨌든 그러한 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3.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에 나타난 갈등현실과 화해의 양상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결실로 발표된 6.15 공동선언은 1.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1항) 2.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합치점을 마련(2항), 3. 이산가족 면회와 비전향 장기수 등의 인도적 문제해결(3항) 4.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제반 분야 협력 교류의 활성화(4항) 5.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약속(5항) 5개항의 합의로 되어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에 관한 글들이 주로 저 공동선언의 1 2 5항의 통일문제에 관한 합의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해구는 남북간 현안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한 합의라는 두 부분으로 저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을 대별하여 논하는데, 나는 그의 순서를 따라 저 공동선언에 관한 분석들을 우선적으로 제시한 후에,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에 대한 남한 내의 냉전 수구세력들에 의한 시각과 평가들을 통해 갈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자 한다.

3-1. 6.15 공동선언에 나타난 현안문제

우선 공동선언의 3항과 4항의 현안문제에 대한 정해구의 분석에 의하면, 저 현안들은 주로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산가족문제를 다루었던 과거의 방식이 당국간 대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의 "수단적"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번의 합의는 그 실현 자체가 목적인 실질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남북은 체제와 이념을 내세워 첫 번째 현안문제인 이산가족 및 비전향 장기수문제에 대한 해결을 지연시켜 왔으나, "인도주의" 이름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북한이 그 동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제 교류 협력을 광범위하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그로 인한 체제의 동요 가능성과, 체제 경쟁의 대상인 남측으로부터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북측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남측의 대북 경제 교류 협력을 대폭 수용하는 변화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정해구를 비롯한 평양관측자들과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분석하듯이, 북측이 경제적 어려움과 외교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정상회담에 임했을 수도 있으며, 또 일부의 우려처럼 북측까지 신자유주의적 세계체계 속으로 포섭시켜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한 민족통일이 아닌 "통일"로 이끌고 말 것이라는 비판적 우려도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송두율은 균형잡힌 민족경제를 남북이 함께 건설한다는 공동선언이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처럼 보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다. 즉 경제통합이 상당한 정도로 진척된 유럽연합(EU) 안에도 민족경제단위에 기초한 재정과 통화정책이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저 공동선언이 반드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내의 경제통합의 정도가 여전히 미진할 뿐 아니라 앞으로 엔경제권과 중화경제권의 경쟁이 격화되고 이에 따른 일본주의와 중화주의가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고조되는 동북아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민족경제의 튼튼한 기반조성은 매우 시급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경제에 대해 합의한 이번 선언은 공존 공영 공리를 주장해 온 북을 위해서도 화해와 협력을 주장해 온 남을 위해서도 이는 절실한 문제제기였고 또 이를 양 정상이 문건화까지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강정구는 하버마스(Habermas)의 "체제통합"과 "사회통합" 개념을 원용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권력과 화폐의 탈언어화된 매개를 통한 도구적 통합을 의미하는 독일통일 방식의 "체제통합"적 전망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에 초점을 두며, 의사소통적으로 성취된 합의를 통한 "사회통합"적 전망에서 접근할 것을 제시한다. 통일이전부터 상호협력과 교류 및 화해를 추진해 온 독일의 경우에도 체제통합을 통한 통일의 결과가 동독의 내부식민지화로 귀착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강정구는 우리의 경우 아직도 냉전적 적대가 별로 가시지 않은 조건에서 사회통합적 접근이 더욱 절실한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안은 6.15공동선언의 3 4항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3-2. 6.15 공동선언에 나타난 통일문제

한반도 평화문제 또는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선언적 합의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예상외로 6.15 공동선언은 의미심장한 합의를 이루어냈다. 자주적 통일이라는 해결방식에 있어서 "자주"라는 용어에 대해 북측은 "반외세"의 의미로 해석하여 민족 대단결에 기초한 민족 내부의 문제로 통일문제를 접근해 왔다. 반면에 남측은 자주를 통일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과 한 미 일 동맹체제의 유지와 주변 4강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남북문제 해결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이 주한미군문제이다. 1972년 7.4 공동선언에서 천명된 "자주적 통일"원칙을 북측은 주한미군철수 문제와 직결시켜 왔으나, 6.15 공동선언에서는 주한미군문제 등 자주에 대한 분명한 해석 없이, 나아가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구체적 합의 없이, 통일문제에 대한 자주적 해결을 약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해구는 당장 타협될 수 없는 주한미군문제 등 평화문제를 일단 우회하되, 합의가 가능한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룬 결과가 아닌가 라고 보고 있다. 도진순은 6.15 공동선언의 1항을 "자주와 주한미군"이라는 표제로 다루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미 클린턴 정부의 한반도정책의 기본입장은 평화, 즉 남북 양국론에 의한 분단의 평화적 관리라는 것이다. 즉 북측과의 관계정상화 대신 남측에서 미군의 철수 불가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남북정상회담 직전 웬디 셔먼과 찰스 카트만을 서울로 파견하여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네바 합의 원칙의 견지와 한 미 일 3각 협조체제 유지 등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였고 주한미군 문제는 평양회담에서 거론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국방부 주변의 전문가들은 남북회담의 여파로 거대한 변화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해석이 주류라고 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국방부 밖에서의 논의는 더욱 활발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성격과 지위 변경론, 아시아에서의 미군 재정렬론, 주한미군의 단계적 또는 전면적 철수 불가피론 등 다양한 논의가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그 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한반도 통일의 핵심 전제조건으로 규정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 온 북측이 1980년대 후반 이래로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 4자회담에서도 북한이 주장한 의제는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주한미군 "문제"였다고 한다. 이번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중립화"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는 보도들이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이번 공동선언의 "흥미롭고도 논란이 되는", "남북간 의견 차이를 극적으로 좁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수렴가능성에 합의한 2항을 살펴보자. 북의 연방제 제안은 1960년 8.15 해방 경축대회에서 행한 보고에서 "과도적"인 "남북조선의 연방제" 실시로써 등장한 이래로, 북의 공식 통일방안은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발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수립을 위한 통일방안"이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제도, 두 정부를 골격으로 하는 연방제가 "단계적"으로도 가능하다는 신축적 의미부여는 김일성 주석이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확인하였고, 이때부터 연방제는 "일시에" 할 수도 있고 "낮은 단계"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띠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북측은 문 목사의 제의로 보다 "느슨한 연방제"를 검토한바 있다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에서 언급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바로 김일성 주석의 1991년 신년사에서 언급된 "점진적 연방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한다.

한편 남측 통일방안이 제시한 "국가연합"은 두 국가, 두 제도, 두 정부를 전제한 후 이들의 연합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양국론에서 출발하며 이는 현실론이라는 강점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한국론이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송두율은 국가연합에 비하여 연방제는 비록 "낮은 단계"라 할지라도 하나의 국가를 전제하기 때문에 "국가연합"보다는 보다 높은 수준의 남북간의 동질성을 전제하고 요구하고 있으며 또 정치영역의 상대적 강조가 특징적이라고 평가한다. "과도기"로서의 연방제로부터 "최종목표"로서의 연방제의 성격규정은 변했다해도 일관되게 북측은 "연방제"를 통일된 국가형태로서 제기해 왔고, 이는 오늘까지도 변함없다는 것이다. 도진순의 분석에 의하면, 공동선언의 2항에서 연합제 앞에 "국가"라는 단어가 배제되어 있으며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성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이라는 전제조건과 "통일을 지향"한다는 목표점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한국으로 나아갈 위험성을 앞뒤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국가연합으로 주장하는 것은 일방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앞으로 연방인가 연합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첫째, 상징적 수준이라도 예컨대 공동의 국호 국가 국기를 가지는 상설적인 연방기구의 탄생여부에 달려있으며, 둘째,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평화협정"이 남과 북 사이에 국가 대 국가로 체결되면 국가연합의 기초가 될 것이며, 남북이 공동으로 평화를 선언 보장하는 형식이면 연방제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체로 6.15 공동선언을 분석한 글들이 통일문제에 대한 자주적 해결에 관한 1항과 연합제와 연방제의 합치점에 관한 2항에 집중하면서 5항을 생략하거나 언급한다해도 매우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공동선언의 5항은 "이상과 같은 네 가지 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빠른 시일 안에 남북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한다"고 되어 있는데, 지난해 9월 남측은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돌려보냈으며, 이산가족 면회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성사시켰으며, 경의선과 문산-개성간 도로개설의 합의로 남쪽 기공식이 열렸으며, 제1차 국방장관회담, 제3차 장관급회담이 개최되는 등 지난해 9월 한달 동안도 셀 수 없는 당국간 회담을 비롯한 많은 교류협력이 봇물 터진 듯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남북관계는 남북 사이의 신뢰 부족, 한반도 주변정세의 뒤틀림, 특히 미국 부시정부의 출범과 이에 따른 미국의 세계전략 및 동북아 정책의 영향, 남한 내부의 냉전적 수구세력의 반발 등으로 남북간의 관계는 답보상태에 놓여 있다.

3-3. 남한 내부의 "반통일 세력", "정상회담 흠집내기", "6.15 공동선언 죽이기"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한층 진전된 남북의 화해 협력을 이끌어낸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남한 내부에서 어떻게 평가되었으며 정쟁의 대상이 되었는가?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는 현재 진행형인가?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남한 내의 수구세력들에 의한 반민족적 반통일적 "정상회담 흠집내기", "6.15 공동선언 죽이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은 냉전의 골이 작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나라당의 시각을 보자면, 2000년 9월 4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조찬을 겸해 가진 "의원 공부모임"에서는 2001년 복원될 경의선 철도와 비슷한 시기에 개통될 문산-개성 도로가 "남침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신문기사는 논평하기를, 만약 북쪽이 문산-개성 축을 따라 남침한다면 집중포화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남북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문산-개성 축은 북진공격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육해공 전면 입체전이 벌어져 전후방이 따로 없게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 온 "안보 제일론자"들이 유독 문산-개성 축만 그토록 주목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처럼 6.15 공동선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북쪽 아닌 남쪽에서 돌출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합의문 불이행=북쪽책임"이라는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남쪽 사회의 보수 우익층이 갖고 있는 냉전적 사고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비합리적인가를 새삼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대북정책의 노선정립을 둘러싸고 혼선이 일어났다. 당 지도부가 정부의 대북정책을 놓고 외형상 "총론 찬성"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각론에서는 번번이 강한 반대 뜻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해, 내부에서 이견이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초.재선의원의 모임인 "미래연대" 공동 대표인 남경필 김부겸 의원은 14일 이회창 총재를 만나, 이총재가 2000년 9월18일 열리는 경의선 복원 기념행사에 참석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뜻은 잘 알겠으나, 당내에 다른 생각도 많은 것 같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 규탄 서명운동"을 놓고도 당내에 시각차가 크다. 일부에선 "반 김정일운동"이 정치세력화로 이어져 영남권 지지기반을 잠식할 수도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다른 쪽에선 김 전 대통령이 극우적인 태도를 표명한 만큼 한나라 당은 이를 활용해 합리적 견제세력임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명망께나 있는 이들이 호텔에서 거창하게 연 한 토론회의 마지막에 사회자로부터 마지막 문제제기를 주문받은 어느 박사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김정일 서울 방문시 그를 납치하여 유폐시킨 후 인민을 해방하고 남북통일을 하는 것"이라고 거침없이 "소신"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최근 한-미 우호학회가 연 토론회의 발제를 맡은 유명 연구소의 수석연구위원은 사뭇 진지하게 주장하기를, "남북한이 만약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혼성시킨 통일이 된 경우엔 한-미 동맹은 통일된 남북한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9월에 행한 강연에서 토론토 대학교의 씨릴 파울스 교수는 우리의 통일과 관련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타입의 이데올로기를 결합하는 일이 한국인 전체로부터 우러나온다면 분명 오늘날 전세계의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상에 유니크한 기여를 할 것이다라는 말로 강연을 끝맺었다. 파울스의 강연이 1990년에 행해진 것이긴 해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저 수석연구원의 저급한 이해는 도대체 논의의 대상이 안되지만, 저런 주장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공동선언을 정면으로 비트는 냉전세력의 발호와 그들을 대변하는 신문권력들은 지난 1년 동안 쉼 없이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나섰으며, 신문권력들은 안보를 남북 공존에 필수적인 국가보안법 폐지와 대미 자주화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연계했다는 것이다. 6 .15 공동선언 직후인 작년 6월 28일,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우리는 다단계적으로 추진하려던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같은 시기 한나라 당은 "국군포로 및 납북자 대책특위"를 구성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한다. 그러자 정부는 올해 3차 이산가족상봉에서 소수의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성과를 냈다. 이에 2월 27일 조선일보 사설은 "우리는 일부 극소수의 납북자 및 국군포로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대가로 "납북"과 "전쟁포로"에 대한 원칙과 기본입장을 포기했다. ...원칙을 포기한 나라, 기본을 실리에 양보한 나라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다시 딴지를 걸었다. 뿐만 아니라 2001년 6월25일에는 전직 국방장관, 참모총장과 같은 고위장성들이 국가보안법 개정 반대와 국군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자유민주민족회의(회장 이철승)와 같은 극우단체들도 이에 합세했다. 작년 정상회담 직후부터 월간 『조선』의 조갑제 (당시 편집장, 현 사장)는 주적론, 대한민국 군의 총사령관인 대통령이 어떻게 동맹국보다 주적인 북한의 괴수를 우선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국방전문가 김종대는 조선일보가 말하는 주적 개념이라는 것도 사실 국방부의 정책문서에는 없는 용어이며 단지 장병교육 교재에만 나와있는 표현으로서, 이것을 정치논쟁의 무대로 끌어들인 저의는 국방대비태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로지 이념논쟁만을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조갑제는 말하기를 김대중 대통령이 "미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북미"라는 표현을 썼다며 대통령의 주적관이 허물어졌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냉전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제1등 공신은 언론이다.

지난 2001년 6월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와 6개 언론사 법인 및 3개 언론사주 고발이라는 일대 사건에 대해 한 정치인은 "한성순보 창간 이후 언론계 최대의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이 국면에서 "언론사에 대한 정기적인 세무조사"일 뿐이라는 정부당국과 "정권재창출을 위한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해당언론사 및 한나라 당은 사생결단의 충돌로 치닫고 있다. 한나라 당에 의하면, "현 정권의 정권재창출 시나리오의 기둥인 김정일 답방을 이루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으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 등이 김 대통령의 노림수라는 것이다.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낸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은 "언론사 세무조사는 김정일 위원장 답방 사전정지용"이라는 문제의 발언을 처음으로 꺼내 색깔론에 불을 붙였던 장본인이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응수하기를, 탈세범 비호는 참아줄 수 있다. 그러나 세무조사를 교사한 자들의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며, 세무조사는 김정일 위원장 답방을 위해 반공 신문사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이며, 답방 후에는 북의 통일전선전술에 입각한 개헌이 이루어질 예정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 세무조사는 김정일이 사주했다는 얘기라는 식의 그 비호의 논리가 고약하다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대결은 언론개혁에 대한 보수, 엄밀히 말하면 수구 냉전세력의 항거에서 그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보수와 수구를 가르는 경계선을 고려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버릴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바로 뿌리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수구 냉전세력의 본질을 파고들면, 그 뿌리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요, 속성은 사대주의에, 민주주의 발전과 통일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수구 냉전세력은 분단과 전쟁을 획책하고 남북 적대의식을 부추겨 왔으며, 또 기층민중운동을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의 자유까지 오랫동안 빼앗아 왔다. 특히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냉전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 온 언론의 해악을 청산하지 않고는 민족의 화해를 기약할 수 없다.

4.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이후의 한반도와 미국

2001년 3월 북한이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5차 장관급회담 불참을 통고하고, 당국간 대화가 끊긴 이래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서울에서의 2차 남북정상회담 일정 자체도 가시화되지 못하는 것은, 남북관계가 근본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 특히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른 동북아 정책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강만길은 "남북정상회담이 남긴 과제"라는 논문에서, 20세기 후반기 한반도 분단이 동아시아 전체의 분단이었으나 미 소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동아시아에서 남한 미국 일본 공조체제와 여기에 대응하여 북한 중국 러시아 공조체제가 재구성될 때,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저러한 두 공조체제의 대립에 대하여 우려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도진순은 이러한 형식적 균형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매우 비균형적 실체의 문제를 파헤친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또는 미중의 균형적인 대립에서 비롯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압도적인 규정력 아래 놓여 있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반도 안팎의 탈냉전의 전환기에 들어서서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규정력은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남한 정부의 한반도 안전보장정책은 국제공조를 통한 평화체제의 수립으로 요약된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에서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며, 다시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6자회담으로 동북아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의 성원이 될 러시아와 일본의 비중이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더군다나 4자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의 위치는 더욱 더 비균형적이라는 사실이다. 남한에 미군 3만 7천여명이 주둔해 있고 북한과 미국은 정전협정상의 "휴전중인 적대국" 상태라는 점에서, 또한 남북 양측에 대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행사에 비해 중국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미래의 강대국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한 미국 일본을 한 축으로 하는 "남방 삼각관계"와 북한 중국 러시아를 또 한축으로 하는 "북방 삼각관계"는 강만길이 생각하듯이, 두 체제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매우 비균형적인 갈등상황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일별해 봄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엄청난 규정력의 문제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북미관계는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 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의 워싱턴-평양교차 방문을 계기로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는 듯 보였다. 뿐만 아니라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북한 방문 예정으로 한국전쟁이래 5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정상화"로 진입하는 일정이 잡혀갔다. 그러나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클린턴의 역사적 평양방문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이후 일단락 되었던 "북한 과거 핵 활동 검증문제"가 다시 최대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북미 갈등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부시 정부의 이러한 대북정책에 대해 강정구는 표현하기를, "일방적 양보불가론", "엄격한 상호주의론", "철저한 검증론", "평화선언 불가론", "재래식 무기감축 북한먼저론", "북한 빌미 MD추진론" 등의 기조를 띤 막무가내식 강경정책과 일방주의로 요약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막가파 식" 정책기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으로 이루어질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간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한반도 평화선언까지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초 워싱턴에서의 한미정상회담 직후에 포기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수모를 겪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ational Missile Defence, NMD) 계획에 반대하는 뜻을 담은 러시아와의 공동성명에 서명한 이래 남한 정부관리들은 NMD 구상을 지지한다는 남한 입장을 미국 쪽에 확신시키느라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2월 부시와 만나 NMD 구상에 대한 찬성의 뜻을 밝힌 대가로 유럽 신속대응군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는 달리 김대통령은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하고 미국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러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에 대해 민족적 자괴감에 빠질 정도로 김대통령은 미국에 찾아가서 미국의 차가운 거부반응에 맞닥뜨려 그동안 줄곧 거론해 온 남북한 "평화선언"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러시아와의 공동성명에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 유지 강화 부분을 포함시킨데 대해서는 사죄와 다름없는 유감표명을 했다는 것이 많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유감스럽게도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문제로 지적해 왔던 바를 부시정부가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고 이를 반기면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면, 반면에 정부와 여당은 기존의 긴장완화 정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부시정부의 대북정책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재미 언론인 김민웅은 한나라당과 정부 여당 모두 부시정부의 대북정책이 지향하고 있는 본질을 오판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한나라당의 논리는 민족 분열적 대결을 강화함으로써 냉전체제의 "반동적 복구"를 꾀하는 동시에, 대미종속의 심화를 스스로 요구하는 시대착오적 반민족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2000년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서 벌어진 갈등현실과 화해의 조짐들을 상론하였다. 더욱이 50여년 이상 지속된 남북의 대결과 갈등은 "화해와 협력"이라는 말을 언제든 부질없게 만들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취약한 구조적 한계와 제한 속에 있는 남북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들의 각축을 극복하고 다시는 지난 냉전시대의 갈등과 분단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통한 동북아와 세계 평화 구축의 길로 진입하도록 이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남북 통일성취시대를 굳히는 작업이 요구된다. 특히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 규정력을 넘어서 어떻게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며 한미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조정하면서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로 나아갈 것인가, 이를 위한 그리스도교와 신학이 무엇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5.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화해 신학의 모색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사가이며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R. 류터는 지난 50여년 간의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 시기의 지배와 억압 구조 속에서 진행된 미 소 양 강대국의 군국주의의 폐해가 결정적으로 생태살해 집단살해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며,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의 탈냉전 탈이념의 시대를 맞아 미국이 이를 생태학적으로 존속가능한, 평화시기의 경제 정치 체제에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 보다는 미국 주도의 소위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표방하면서 전면적 헤게모니 강화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정성배에 의하면, 동구권이 해체되고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됐을 때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으로서는 세 가지 전략적 선택이 가능했다고 한다. 첫째는 다자주의와 평화회복을 지향하는 세계시스템의 공동운영을 위해 국가 간의 협조를 우선하는 정책이며, 둘째로는 19세기에 영국이 채택한 고전적 세력균형 정책이며, 셋째는 "수위전략"을 통한 단극체제의 영구화가 그것이다. 현재 부시 정부는 일방적으로 세 번째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국제질서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부시 정부의 수위전략이란 미국의 패권주의를 클린턴 때보다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사일 방어(MD) 체제 개발을 통한 군사력의 질적 비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한편, 도널드 럼스펠트 미국 국방장관은 "점점 취약해지는 미국"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주로 중국을 겨냥해서 쓰는 말이지만 중국은 경제와 사회를 안정시키려면 적어도 20년은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누가 미국에 군사적 도전을 할 수 있겠는가? 미국은 있지도 않은 위협을 있다고 하면서, 미국내에서는 안보국가를 회생시키고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국제적으로는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데, 이런 "공포정치"는 역설적이게도 다극시대의 도래를 촉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01년 3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에서 행한 연설에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우리가 세계에 제시할 이념에 맞설 이념은 없다"며 미국식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이의 실현을 위해 "힘"으로 외교를 펼쳐나갈 것을 밝혔다고 한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주간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미국의 기후변화협약 교토 의정서 거부, 러시아와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 파기 의사, 북한과의 제네바 협정 파기 언급 등을 사례로 지적하면서 이를 "대칭적 일방주의"(parallel unilateralism)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여러 나라가 관계된 국제적 협정을 준수할 용의는 있으나, 이는 단지 미국의 이해나 이익에 맞을 때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미국은 일방적인 적대정책을 위주로 기존의 긴장완화 정책을 전면적으로 역전시키는 쪽으로 명분과 논리를 축적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들에게 당면한 과제는 북한을 빌미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근거로 어떻게든 국가미사일방어망(NMD) 계획을 추진하고, 다극화전략을 지향하는 중-러 연합전선을 압도하면서 미국을 일극체제로 하는 패권질서를 강화 유지하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부시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에는 기본적으로 군산복합체의 기득권을 옹호하면서, 침체국면에 빠져들고 있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전쟁경제를 가동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탈냉전 이후 인류는 세계대전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그런 "집단 황홀경"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엘빈 토플러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출발점에서의 생존전략"이라는 부제가 달린 『전쟁과 반전쟁』이라는 책에서, 그는 경제적 경쟁이 방아쇠를 당긴다면서 오늘의 지구촌의 경제전쟁은 전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서곡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세계에 제시할 이념에 맞설 이념은 없다"라는 오만한 콜린 파월의 주장도 미국의 막강한 힘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점점 취약해지는 미국"이라는 도널드 럼스펠트의 엄살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미셸 보(Michel Beaud)는 오늘의 변화를 근본적이고 급속한 변화들, 새로운 압도적 변화들의 가속화 단계이며, 다양하면서도 상호연동된 변이들로 파악하면서 세계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으며 이것을 "세계의 격변"이라고 칭한다. 그는 다가오는 시대를 "수위전략"을 통한 단극체제의 영구화 추구라는 미국의 염원과는 달리, 패권부재의 시대로 전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은 북반구의 자기 영토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기껏해야 쿠바나 이라크 같은 국가들의 빈곤상태를 조장하며, 북반부의 경쟁국에 대해서는 위협과 달러화의 가치변동이라는 수단을 동원할 수 있지만, 빈곤, 환경파괴, 금융체계의 붕괴위험, 지역적 동요와 혼란, 마약 마피아 부패확산 등 세계의 주요문제들에 직면해서는 생각이 없거나 속수무책 혹은 무능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현재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지만 결국 다극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데서 오는 초조함이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한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관철될 경우 결국 러시아와 중국, 일본, 더 나아가 세계 전체의 군비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어쨌든 미셸 보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면, 현 세계는 욕구가 항구적으로 갱신 팽창되는 체계로 이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이상적 기초와 그러나 동시에 불만족과 빈곤이 항구적으로 반복되는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확장에서 세계의 총체적 위기를 찾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전후한 한반도의 갈등현실을 조명함으로써 모든 갈등의 원인은 인간의 욕심, 소유욕, 점유, 지배, 의심과 불신, 불의한 소유관계, 정치 사회적 패권다툼으로 인한 것으로서, 오늘의 갈등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인류공동체 뿐만 아니라 생태계와 우주에 이르기까지 극에 달한 총체적 양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해 왔다. 총체적 사회 관계의 파괴, 인간과 생태계와의 관계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심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복종의 결과라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으며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K. 바르트는 말하기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축소하자면, 화해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깨어진 계약의 성취를 말하는데, 계약의 성취란 인간이 죄와 타락으로 계약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화해의 종말론적 성격을 갖는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관계와 인간 대 인간 관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서의 계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고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시며 이것이 화해의 전제라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로워지며,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 앞에서 인간에 대해여 화해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화해된 자는 봉사에로 놓여지는데, 이렇게 새롭게 세워진 주체는 화해된 인간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그러한 관계회복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신적 계약과 구원의 약속으로 제시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세상 안에서의 예수의 화해하는 사역이라는 바울의 중심주제로 제시되었다. 엡2:14-16, 롬5:10-11, 11:15, 고후5:18-20, 골1:20-22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선포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분리된 장벽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평화를 수립하는 화해의 사역이 교회 교역의 우선적인 과제로 제시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지배와 착취라는 세상 죽음의 세력에 맞서서 생명애호의 상호성(biophilic mutuality)에 기초한 온 피조세계를 이루도록 촉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엄청난 사명을 지닌 교회가 초기부터 소외와 배제라는 죽임의 관계를 조성하고 있었으니, 그 양상은 고린도 전서11:17 이하에 잘 드러나 있다. 고린도 교회는 한 자리에 모이면서도 주의 영광의 만찬을 먹을 수 없었는데, 그들은 각자 음식을 먹으므로 부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져와 그들끼리만 먹어 치움으로써 늦게 참석하는 가난한 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음식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못하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만찬의 성례전적 측면, 즉 교회란 힘있는 자들과 지식있는 자들 끼리만 모이는 유유상종의 집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음을 의미한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눅4:18), 교회를 유유상종의 모임으로 만든 자들에 의해 교회의 공동체성은 파괴되었다고 바울은 질책하고 있다. 거의 온 인류를 한꺼번에 집어삼킬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괴물에 맞서는 일, 즉 불의의 사슬을 끊으려는 노력 없이 하나님의 창조와 화해의 공동체성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만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변혁을 위해 일하고 또 희망할 때에 비로소 관계성과 연대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슐라이어마허의 일신론적 사귐과는 구별되는 삼위일체적 사귐의 개념에 기초한 바 "통일성 안에 있는 다양성" 즉 공동체화(Vergemeinschaftung)를 제시한다. 사귐이라는 것이 동일한 자들, 비슷한 자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동일한 자들끼리 서로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축자적 의미에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귐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몰트만은 사랑이란 위장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말한다. 사귐의 한 본질적 형식이 "식탁의 사귐"이니,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발을 같은 식탁 아래로 뻗고 있는 한 가족의 식구들처럼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공동체의 식탁의 사귐뿐만 아니라 인간과 생태계와의 관계를 완전히 뒤엎어 놓은 것이 오늘의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결과가 아닌가!

동서냉전의 종결과 함께 물질적 풍요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외에는 그 어떤 이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소위 "역사의 종언"과 함께 사회,정치적 혁명이란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쾌락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또한 우리의 삶을 강하게 규정해 왔던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의 정체성마저 지구화의 물결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차원의 격변기를 맞아 송두율은 다음과 같이 남북한에게 주문하고 있다. 즉, 남한은 지구화 혹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IMF 관리체제로 인한 엄청난 경제 사회적 위기를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 냉전기에 전개된 세계자본주의 구조재편에 참여함으로써 30여년 만에 신흥공업국의 선두주자들 중의 하나로 OECD에 가입하게 된 남한의 경험과 동서 냉전기에도 사회주의 대국인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또 미국의 막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체"를 지키려한 북한의 노력을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민족국가야말로 지구화된 시장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전체주의적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주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통일신학은 화해의 신학이라고 일컬어질 수도 있다. 고후 5:18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해했고 우리에게 화해의 사역을 주었다는 것이다.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분단세력을 돌파해 나가야 할 통일세력의 신학적 거점은 바로 화해자 그리스도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화해의 사역을 위한 신적위탁이 주어졌다는 데 있다. 아직도 잔존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반공 반북 적대의식은 그리스도와 그의 화해의 사역에 위배된다. 통일신학은 화해의 사역을 위한 신학으로서 비록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다 해도 한국교회는 종래의 반공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사상 혹은 주체사상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신학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요인들을 이끌어 내는 화해의 작업을 시급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화해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반공노선을 청산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반공은 분단의 주역 미국에 의존해서 남북의 갈등을 조장해 왔으며, 그럼으로써 민족사회에 대한 화해의 사역과 봉사의 신적인 직분을 상실해 온 것이다. 한국교회의 반공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북한돕기 운동에 있어서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으며 화해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반공을 넘어서서 민족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는 방법으로서 주체사상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화해는 궁극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적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자유와 의, 은혜와 용서,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는 평등한 인류사회 공동체 실현을 위하여 교회와 사회가 역사적 과정에서 공역하도록 요청한다. 한국교회의 당면한 화해의 사역과 봉사의 핵심과제는 통일이다. 화해와 통일은 정의롭고 평등한 새민족사회 창출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함축하고 있다. 통일된 새민족국가와 새민족사회 창출은 신자유주의적 지구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동북아의 새로운 정의로운 질서와 더불어 새세계 질서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적 화해의 신학은 역사적인 화해와 통일의 공역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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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주석달기는 복사가 안되어 빠져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발표자(skay25@yahoo.co.kr)에 의뢰하여 참조하기 바랍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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