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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미국의 세계전략변화 진단[2001.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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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12-16 00:00 조회3,7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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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진욱씨(연합뉴스 기자)는 <미국의 세계전략변화>에 대한 논문을 통해 윈-윈 전략 포기 및 원-플러스 전략 수립으로 진입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의 논문내용 전문(통일뉴스에 기고)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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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반도 정세 변동과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267매) - 강진욱

`라덴의 테러 사건들`은 미 동북아패권이 몰락하는 고비마다 발생했다!!


강진욱(연합뉴스 기자)


14150_S.jpg9월11일 뉴욕에서 납치 항공기를 이용한 세계무역센터 충돌 사건이 발생해 110층 짜리 건물 두 동이 무너져 내렸다. 미국은 곧바로 `이슬람 숙적`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하면서 사건 발생 다음날 `9월11일 사건`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사건 발생 26일 만인 10월7일 정오(미국시간) 라덴이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

미국의 패권 앞에 국제질서가 `미국 편 아니면 미국의 적`이라는 편가르기로 재편되면서 북-미 관계가 경색되고 한반도 평화 및 통일의 기운이 된서리를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실제로 10월 16일부터 2박3일간 이뤄질 예정이었던 4차 이산가족 교환방문이 무기 연기되고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6차 장관급회담이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간 회담으로는 처음으로 `결렬`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말로 `9월11일 사건`이 `돌발`함으로써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영향을 받고 한반도에 한파가 몰아닥칠 것인가? 그렇지 않다. `9월11일 사건`은 미국이 북한과 이라크를 주적으로 하는 `두 개 전장 동시 승리 전략` 즉, `윈-윈(Win-Win)전략`을 포기하고 대신 하나의 전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소위 `원-플러스(One-Plus)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9월11일 사건에 따른 한반도 정세 교착 상태는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벌인 북한과의 치열한 정치군사적 대결을 벌였고 특히 지난 세기 말 10여 년은 북-미 대결이 핵 전쟁 위기 등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대결에서 공존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미국이 한사코 빈 라덴이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테러사건들은 미국이 `20세기의 숙적` 북한과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강공책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북-미 평화 국면을 수용하는 시점, 즉 미국의 동북아패권이 추락하는 시점에 발행했다.(주1)

미국이 세기의 숙적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미국의 동북아 패권 추락을 의미한다면 일련의 대미 테러 사건들은 추락하는 미국의 패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무력행사의 빌미로 활용되고 있고 활용돼 왔다. `9월11일 사건`은 미 세계군사전략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따라서 `9월11일 사건`이 한반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거나 북한이 미국의 군사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주2)


아프간 전쟁 전후 한반도 정세

미국은 `9월11일 사건` 19일 만인 9월30일 4개년 국방전략재검토(QDR)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140만 병력 유지 ▲해외 군 배치 중심을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이동 ▲`윈-윈(Win-Win) 전략` 폐기 ▲`원-플러스(One-Plus) 전략` 채택 및 ▲미 본토 방위 등이다.

`윈-윈 전략`이란 미국이 1991년 걸프전을 벌이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개시(미국의 이북 침공)를 위한 `두 개 전쟁 동시 승리 전략`으로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2001년 현재 부통령)과 콜린 파월 합참의장(현 국무장관)이 주도한 군사검토보고서에서 처음 제기돼 2년 뒤인 93년 클린턴 행정부가 4개년 국방정책검토보고서(QDR)에서 정식 채택한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이다.

`원-플러스 전략`이란 두 개 전장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대신 한 개 전장에서 전쟁을 벌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다른 한 곳에서는 무력충돌을 피하면서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러면 미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시점에서 클린턴 정권 8년간 유지돼 온 `윈-윈 전략`이 `원-플러스 전략`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무엇일까. 그리고 미국이 포기한 한 개 전장은 어디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말은 어디서 어떻게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다는 말인가. 그 해답은 바로 `9.11사건`을 빌미로 촉발된 미국의 아프간 전쟁과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국대사의 부임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미국의 한반도 평화공존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허바드 대사가 9.11사건 발생 당일 한국에 도착하고 이와 동시에 미국이 한반도 전략의 핵심 현안인 `경수로 건설`을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은 곧 중동전략과 한반도전략을 두 개 축으로 하는 수정된 미국의 세계전략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미국은 아프간 침공을 지렛대로 하는 중동전쟁에 착수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북한과의 평화협상에 나선 것이다. (주3)

윈-윈 전략 포기 이유

그러면 미국이 두 개 지역 동시 전쟁 승리 전략을 버리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6.25전쟁이래 여러 차례 핵 공격을 감행하려다 그만둔 상대였던 북한이 재래전력 증강에 이어 탄도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 보유함으로써 미 본토에 대한 타격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은 더 이상 무력대결이 불가능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주4)

미국은 70년대 초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남북분단관리정책, 이른바 두 개 코리아 정책(Two Korea Policy)를 수립한 이후 북을 적대시했으며 88년 12월 처음으로 북경에서의 참사관급 접촉을 통해 북조선과의 정치협상을 시작했고 이후 북측의 평화공세(때로는 무력시위를 동반한)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관계개선의 길에 끌려 나온 것이다. (주5)

93년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윈-윈 전략` 수정 논의가 있었던 것은 90년대 초 세계
적인 탈냉전 추세와 함께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이 추동한 결과였고 95년 미국에서 `윈-윈 전략` 수정 논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93년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와 이 탄도미사일이 촉발한 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6)

97년 또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면 그것은 96년 이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 들어 `윈-윈 전략` 수정 논의가 공식화되고 2001년 `원-플러스(One-Plus) 전략` 수립이 본격 추진됐다면 그것은 98년 `광명성 1호` 발사로 확인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이 촉발한 것이다. (주7)

중요한 것은 북한의 무력이 정치외교적 협상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전쟁 의지를 포기하도록 만들고 결국 한반도 전쟁을 한 축으로 하는 `윈-윈 전략`을 수정하게 만든 것은 한반도 전체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정세를 안정시킴으로써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줬다는 사실이다. 즉, 북한이 `절대무기`(absolut weapon)로 일컬어지는 탄도미사일을 개발.보유하고 그 성능을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개선함으로써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력이 높아지자 미국은 부득이 한반도 전쟁 전략을 포기했고 이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평화와 안정 국면으로 안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8)

조-미 대결 관계 해소와 한반도 정세 안정도의 함수관계에 대한 이런 분석은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발표한 연례보고서가 뒷받침한다. 세계적인 국제문제 전문 연구소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IISS는 2001년 5월 16일 발표한 연례 조사보고서에서 "남북은 지난해 이룩한 평화의 모멘텀을 지속시키는데 실패했지만, 향후 전망은 과거 수년간에 비해 밝다"고 진단했다. (주9)

윈-윈(Win-Win) 전략 수정 과정 : 총괄

미국은 이미 90년대 중반 북한과의 핵 및 탄도미사일 협상을 본격화하면서 `윈-윈(Win-Win) 전략` 수정의 불가피성을 인식했고 한반도 정세가 획기적으로 변한 2000년 윈-윈 전략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 수립에 착수해야 했으며 2001년 신 부시 정부가 출범 후 6개월 동안 `원-플러스(One-Plus) 전략`을 사실상 완성했다.

9월30일 발표된 QDR은 `9월11일 사건` 이전부터 계획했던 세계군사전략 구상이며 9.11사건은 이 구상을 확정하는데 훌륭한 구실을 제공한 셈이다. `9월11일 사건`은 `윈-윈`에서 `원-플러스`로 수정된 미국의 세계전략 집행의 신호탄인 셈이며 새로운 전략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필요충분조건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10)

미국은 북한이 98년 8월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능력을 입증하자 본토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했고 38도선에 지상군을 전진배치하기보다는 장거리 폭격기와 정밀유도무기 등 첨단무기를 많이 보유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공격전략을 포기하고 본토 방어위주의 수비전략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미국은 마침내 98년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이 촉발한 `페리보고서`를 기점으로 한반도전략을 전쟁전략에서 협상전략으로 바꾸게 되고 2000년 초부터 `윈-윈 전략`에 대한 수정 논의를 공론화했다. 6.15남북공동선언에 이어 `미합중국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10.12 조-미 공동코뮈니케 등 일련의 한반도 긴장완화 프로세스로 미국의 윈-윈 전략은 사실상 무효화된다. `윈-윈 전략` 폐기 공방은 2000년 말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의 평양 방문 준비를 전후로 절정에 달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곧 이북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상징으로서 한반도 전쟁 즉, 북한과의 전쟁을 한 축으로 하는 `윈-윈 전략`이 잘못된 전략이었음을 인정하고 포기할 것임을 세계 만방에 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클린턴의 평양 방문 준비는 미국 내 윈-윈 전략 폐기 논의를 가속화하는 것이었고 결국 그가 평양 방문을 포기한 것은 그의 평양행으로 미국 세계 전략이 하루아침에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 한 미 군부 및 이해집단간 알력과 갈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지배집단 구성원들이 4년 주기로 바뀌고 이 주기에 맞춰 미국의 군사전략이 재검토되며 이 과정에서 여러 이해집단간 정치경제적(politico-economical) 이해가 상충되고 부와 권력이 재분배되는 미국의 정치구조를 감안할 때 이들 이해집단이 권력누수기에 들어간 클린턴의 평양 방문을 용인함으로써 8년간 견지했던 윈-윈 전략이 송두리째 파탄되는 것을 용인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99년말 페리보고서 이후에 가서야 본격화된 미국의 대북관계 개선이 `윈-윈 전략` 수정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클린턴의 평양행` 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고 결국 클린턴 정부가 약속한 `미 합중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곧 부시의 평양행을 위한 예약일 수밖에 없었다.

클린턴 정권 말기에 본격화된 `윈-윈 전략` 수정 논의는 2001년 부시 정부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돼 이 전략을 대체하는 `윈-플러스 전략` 수립 단계로 들어간다. 부시가 2001년 6월 6일 이북에 대해 대화 재개 의사를 선언한 것은 `윈-윈 전략` 수정 작업이 거의 마무리돼 새로운 전략이 수립된 시점이었고 이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 7월 파키스탄 등 주변국들에게 아프간 침공 준비를 통보했다. (주11)

미국 부시 정부는 상반기 6개월 동안 미 군부와 정치권 및 군산복합체 등 이해집단과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새로운 세계전략을 짰고 9월11일 참사는 이런 와중에 터진 것이다.

북-미 대결사와 미국의 세계전략 논의 변천 과정

미국이 세계적인 냉전 해체 추세에 따라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한 이후 미국의 `윈-윈 전략` 수정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1단계는 미 파워 엘리트(`군산복합세력`)가 `1기 부시행정부` 말기 구 소련 붕괴 등 세계적인 냉전 해체 추세에 부응해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던 계획에 반발하는 시기인 92-94년 기간이다. `윈-윈 전략` 확립기라고 말할 수 있다.

2단계는 93,94년 미국의 대북 핵 공격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미 파워엘리트의 대북 전략이 전쟁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회귀하는 시기이다. 95년부터 4자회담이 시작된 96년, 미국의 대북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 정립되는 97년 기간으로 `윈-윈 전략` 수정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청사진이 마련되는 때이기도 하다. (주12)

3단계는 98년 북측의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1호` 발사 이후 미 파워에리트가 `윈-윈 전략` 포기의 수순을 밟으며 대체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광명성 1호` 발사에서 99년 페리보고서가 나오기까지의 약 1년간 미 군부세력의 호전적 반발기를 거친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 전후 한반도 정세를 살펴본다.

△1991년 10월23일 제임스 슐레진저 전 미국방장관은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해 무력 사용등 강경책이 필요하다고 밝힌다.

△1992년 1월23일 레스 애스핀 미 하원 군사위원장(93년 출범 클린턴 정부 초대 국방장관)은 냉전후의 미 재래식 전력을, 구 소련군의 대응이 아니라 북한 등 `지역 잠재 적국`에 대한 대응 체제로 재편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다.(일본 교도(共同)통신 1992년 1월24일 워싱턴 발 보도)

△1993년 1월 클린턴은 기존의 외교정책을 탈냉전시대에 맞게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국가안보회의 실무진은 1993년 봄 『위기에 대응하는 클린턴 독트린』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검토문서(Presidential Review Document) 제13호를 작성 = 이 문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는 경우를 1급 위기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위기상황이 생길 경우 미국은 일방적으로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1993년 1월 26일 주한미군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Robert W. Riscassi)는 제17차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3월에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하고 이번 훈련에는 핵무기를 실은 최신예 전략폭격기 비(B)-1비(B)가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

△1993년 1월28일 러시아 대외정보기관인 해외정보처(구 소련 KGB 해외부문)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처장은 28일 냉전종식후 세계의 대량파괴무기 확산실태 보고를 통해 북한 지도부가 명확하게 핵무기 보유의사를 갖고 있으며 핵무기 제조능력을 향상시켰다고 발표했다고
일본의 지지(時事)통신이 모스크바발로 29일 보도한다. (주13)

△1993년 2월15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북한의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동북아 전반에 심각한 반발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14)

△1993년 2월 미 공군대장 리 버틀러(Lee Butler)는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가 북한에 전략핵무기를 조준하고 있다고 밝힌다. (주15)

△1993년 3월 9일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이 개시돼 12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미군 병력 1만9천명이 추가로 파병됐다.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이 재개되기 하루 전날인 3월 8일 북한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전신명령`을 발표하면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이틀 뒤인 3월 10일 김영남 당시 외교부장은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를 앞세워 강요하고 있는 `특별사찰`을 거부한다고 발표했으며 다시 이틀 뒤인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탈퇴를 선언한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선언은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은 기습공격이었으며, 핵 전략에 기초한 미국의 세계지배구도를 정면으로 거스르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워싱턴 타임스는 1993년 4월5일자에서 당시를 설명하며 "그것은 민주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자아도취적 환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고 보도했다. (주16)

북한은 미국의 핵 전쟁 위협에 정면으로 맞대응하면서 미국의 전쟁 계획을 무산시킨데 이어 5월29일과 30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IRBM)을 발사, 대량살상무기통제 체제를 통한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정면 도전했고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저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군사적 대응 대신 평화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17)

북한의 IRBM 발사 뒤 나흘만인 6월4일부터 일주일간 북-미는 `1단계 고위급회담`을 갖고 6월11일 정전협정 후 첫 외교문건인 `조-미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두 개 전장 동시 승리 전략인 윈-윈 전략의 한 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한 달 뒤인 7월초 북한과 `2단계 고위급회담`을 갖고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흑연감속로를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제의를 수락한다.

6.11북-미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은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 및 기타 무력 공격 위협을 하지 않고 △자주권을 존중해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평화통일을 지지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역사적인 6.11북-미공동성명으로 세계군사전략이 일시에 파탄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다시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 즉 전쟁 계획을 다시 세움으로써 한반도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94년의 상황은 93년의 재판이었다.

△미 국방장관 레스 애스핀은 6.11 북-미 공동성명 뒤 대북 핵전쟁 계획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1993년 12월 10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는 북한과 넉 달 동안 고강도전투(very high-intensity combat)를 수행하는 `작전계획 5027`을 클린턴에게 제출하였다. (워싱턴포스트 93년 12월12일자)

△1994년 3월16일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이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radiochemical laboratory)을 사찰단이 제대로 사찰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미국은 이를 구실로 조·미 고위급 회담 개최 약속을 깨고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계획한다. 이에 맞서 북한은 미국이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완전히 탈퇴하겠다고 선언한다.(유에스에이투데이(USA Today)지 93년 3월23일자)

△1994년 4월 28일 뉴욕에서 열린 조·미 실무접촉에서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nuclear safeguards agreement)을 계속 준수하고 남북 대화에 나선다면 1994년도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완전히 취소하고 3단계 조·미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겠다는 새로운 타협안을 내놓는다. 이에 대해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위기를 풀자고 제안한다.

△1994년 5월 13일 북한은 미국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영변에 있는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에서 사용한 연료봉을 꺼내기 시작한다. 이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북 제재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1994년 5월말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전 야전사령관 및 4성 장군들을 워싱턴으로 불러 북한과의 전쟁 계획을 검토한다. (서재경 <한반도, 운명에 관한 보고서> - 김영사, 1998)

△클린턴은 1994년 6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하고 6월 10일 북한이 연료봉 꺼내기 작업을 마친 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 제재 결의안이 나오자 북한은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즉각 탈퇴하고, 어떠한 사찰도 더 이상 받지 않겠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며 맞섰다.

94년 6월 미국 정가는 북한에 대한 핵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다. 부시 정권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와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워싱턴 포스트 1994년 6월 15일자 공동 기고문에서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나중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북한이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런 위기를 지나 북-미 양국은 결국 이 해 10월21일 제네바 조-미 핵 합의를 타결했고 이로써 조-미 양국은 실질적으로 군사적 대치 상태에서 벗어나 문서상으로나마 정치외교적 파트너쉽 관계를 맺게 된다.

미국은 그러나 94년 제네바 핵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북한이 붕괴되기만을 기다린다. 이 시기 미국은 북한과의 전쟁 계획을 포기하고 이른바 `북한 연착륙` 즉, 북한을 서서히 망하게 하는 관망전술(또는 시간끌기 전술)을 구사하려 한다. 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 타결 직후 미국에서 "5년 정도면 북한은 저절로 망할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주18)

93년 미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던 와중인 11월 뉴욕타임스는 `지상논쟁`을 통해 8년이 지난 2001년 미국의 대 아프간 침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한 인물의 대북제재 주장을 싣는다.

이 인물은 90년대 초 부시 정권에서 국방차관보를 지냈으며 93년 11월 현재 랜드연구소 전략문제 책임연구원인 잘메이 카릴자드이다. 99년 말 워싱턴 쿼털리지에 발표한 글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침공 및 친미 정권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2001년 `9월11일 사건`이 있기 오래 전 미국의 아프간 침공 계획을 입안했고 9.11사건 발행 4개월 전인 2001년 5월15일 미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전략보좌관으로 발탁되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또한 백악관에 들어오기 하루 전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략의 틀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랜드보고서를 발표해 미국이 아프간 침공 계획과 동시에 추진하는 필리핀과의 군사협력 및 아시아 각국의 회교 반군 제거 계획 등 남아시아 군사전략의 대강을 예시한다. 이 자가 1993년 북한 핵 제재를 강력히 주장했고 2000년과 2001년에는 더 이상 북 제재 또는 위협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대신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와 관련한 발언을 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아프간 침공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을 입안한 `전쟁기획자`의 한반도 정세 인식이 180도 달라진 것은 바로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 계획을 포기한 것임을 입증한다.

미국 세계전략의 입안의 핵심 그룹인 랜드연구소 내에서도 핵심전략가로 통하는 잘메이 카릴자드가 1993년 11월8일자 뉴욕타임스에 발표한 글은 또한 대량살상무기 독점에 대한 미국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그의 당시 발언은 미국이 왜 94년 핵 합의에 서명했으며 지금은 왜 이 합의를 무시하지 못한 채 반테러연합전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북한의 요구대로 경수로 건설에 나서고 있는지를 웅변한다.

`잘.메.이. 카.릴.자.드.`의 93년 발언을 살펴본다.

"북한의 핵 게임은 오래 끌수록 그들이 핵무기 개발에 가까워지도록 만든다. 만약 그들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다면 위험은 심각하다. 남북한간 전쟁위험이 높아질 것이다.(여기서 남북간 전쟁은 곧 북-미 전쟁을 의미하며 이는 곧 미국의 대북 군사응징 또는 침공을 뜻한다. 편집자 주) 한국과 일본은 자체 핵무기개발을 고려할 것이다. 또한 북한은 이란에 미사일뿐
만 아니라 핵무기까지 수출하려 할 것이다. IAEA에 대한 북한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우리의 세계적 핵확산정책은 깨져버릴 것이다. 북한에 대해 시한을 설정할 때가 왔다. 12월1일까지 IAEA의 사찰(통상 및 특별사찰 포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유엔에 의한 경제제재를 강구할 것임을 북한에게 통보해야 한다. 효과적인 경제제재는 중국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이 문제를 미-중국간 관계의 테스트로 간주해야 한다. 對북한 경제제재와 중국의 협조문제는 다음 주 클린턴 대통령이 시애틀에서 강택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을 때 주요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이처럼 미국이 93년 6.11 조-미 공동성명과 94년 10.12 제네바 핵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접근법을 전쟁 대신 대화와 타협으로 바꿨지만 대북 적대시정책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곧 미국이 진정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의지 없이 단지 북한과의 무력 대결을 피하고 어떻게든 북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제네바합의서에 서명했음을 웅변한다. (주19)

미국은 93년과 94년 두 차례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영변 핵 발전기지 폭격 등 전쟁을 벌이려던 계획이 무위로 끝나면서 95년부터 전쟁 대신 대화와 타협을 앞세운 새로운 전략 수립에 들어간다. 이 때 정립된 것이 바로 `관여와 확장`(Engagement & Enlargement)전략이다. 미국의 이 전략을 96년 4월 16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발표한 4자회담 틀을 통해 가동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북한을 경착륙(급격한 붕괴)이 아닌 연착륙(서서히 망하게 하는)시키려 했다. (주20)

이 시기 미국 내 일각에서는 북한 붕괴 및 흡수통일에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주한미군 전진배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불거진다.

1997년 1월 7일 로널드 포글만 美공군참모총장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이날 국방담당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미국의 국방 전략가들은 국제적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2개의 주요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략 대신 `1개의 주요 전쟁과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부차적인 분쟁`으로 방위 개념을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2월 6일 윌리엄 코언 美국방장관은 `윈-윈 전략` 검토를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즈음의 주한미군 철수 등 윈-윈 전략 수정 징후는 98년 이후 본격적인 전략 수정 과정과 달리 북한 자체 붕괴에 대한 기대감 또는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몇 년만 지나면 남에 이어서 북을 점령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미국의 자만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21)

이 시기 미국은 한반도 정세를 `과도기` 또는 `전환기`(transitional period)로 인식했으며 한반도전략의 제1 목표를 `전쟁 억제`에 두고 북한을 시장경제체제로 유도(또는 유인)함으로써 `급격한 붕괴`가 아닌 `서서히 망하게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미국의 이런 한반도 정세 인식은 `북한 붕괴론` 및 `남한에 의한 흡수통합`에 대한 기대감으로 북한의 위기를 원만하게 관리하겠다는 의도 외에 남한의 경제위기 심화에 따라 한반도에서 추구할 이익실현 목표를 전쟁 또는 무력행사보다는 경제적 관리를 통한 국부유출(경제침탈이란 표현도 가능하다)에 뒀음을 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이 즈음 남한의 정권교체기에 즈음해 자신들의 한반도전략을 새로 입안했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부터 한-미 공조라는 미명하에 남한 정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북전략을 수용하도록 한 것이다. (주22)

또한 미국의 이런 과도기적 인식은 93년과 94년 연이은 핵 전쟁 시도가 더 이상 통하게 않게된데 따른 것으로 일단 외과수술식 타격(surgical strike) 즉, 침공은 불가능하며 시간을 끌면서 경제난을 악화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미국은 96년 4월 16일 한국과 공동으로 4자회담 추진을 공식 발표했고 일본과는 신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한-미-일 3국간 대북포위망을 구축하지만 이런 움직임 역시 북한에 대한 무력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온 차선책에 지나지 않았다. (주23)

이런 점에서 1997년 4월29일 발표된 미 국방보고서는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과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온 군사전략 현상 유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 국방부는 국방보고서는 "북한과 지역 강국들의 장기적 위협에 대비해 아시아-태평양지역 미군의 전진배치체제를 계속 유지해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또 기존 핵 강국(중국, 러시아 등 - 인용자) 외에 미국에 대해 미사일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하와이와 알래스카 일부를 사정권으로 하는 `대포동 2호`를 개발한 북한을 지목하고 "대포동 2호가 5년 내에 실전배치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며 "앞으로 15년 내에는 미국이 북한 외에 다른 나라로부터 탄도미사일 공격위협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시아 주둔 미군의 전진배치를 강조한 것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능력에 대한 평가절한 것은 북한의 미 본토 타격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98년 8월31일 `광명성 1호` 발사 이후 시작된 `윈-윈 전략` 검토 과정과 2001년 9월30일 발표된 4개년 국방정책검토(QDR)에서 전진배치 전략 수정과 본토 방위를 강조한 사실에 비춰보면 97년 한반도 정세 인식의 오류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1998년 8월31일 광명성 1호 발사는 이런 북 붕괴 시나리오 등 미국의 정세 인식을 환멸로 뒤바꾼 일대 사변이었다. (주24) 동북아 주둔 미군의 전진배치 전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의 `변형태`라고 할 수 있는 `관여와 확장 전략` 즉, 북한을 급격히 붕괴시키기보다는 서서히 변질시키는 대북포용전략조차 사실상 통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99년 9월 페리보고서가 클린턴 정부에 대해 북한을 붕괴시킬 수도 없고 변질시킬 수도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에 나서라고 권고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인식의 반영이었다. (주25) 93년 5월29일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이 미 `윈-윈 전략`을 뒤흔들었다면 98년 8월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능력 과시는 윈-윈 전략을 뿌리째 뽑아 놓은 셈이었다.

미국 군사전략의 최고실무자인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이 `윈-윈 전략` 수정의 뜻을 공공연히 밝히기 시작한 것도 98년 8월말 이북의 `광명성 1호` 발사 이후이다. 98년 당시 미 합참의장 헨리 셸턴은 `광명성 1호` 발사 뒤 한 달 만인 9월30일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미군은 추락하고 있으며 전투태세도 약화되고 있다"며 국방비 지출을 늘려줄 것을 호소했고 99년 10월26일에는 "2개 전쟁 동시 수행능력 약화"를 거듭 선언한다.

`광명성 1호`를 계기로 형성된 조-미 평화협상 국면에 따라 남북관계에도 돌파구가 마련된다. 찰스 카트먼 미 4자회담 대사는 1999년 2월26일(현지시간) 미국을 방문중이던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과의 조찬 회동에서 "올해 안에 남북관계에 새로운 돌파구(Breakthrough)가 열릴 것으로 낙관한다"고 말했다.(99년 2월28일자 한국일보)

미국의 윈-윈 전략의 한 축을 무너뜨리면서 미국의 동북아 패권질서를 파탄시키는 일대 사변이 일어나기 약 20일전인 1998년 8월7일 아프리카 대륙의 미 대사관 두 곳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1993년 2월26일 발생한 세계무역센터(WTC. 2001년 `9월11일 사건`과 동일 장소) 폭발사고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을 앞둔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주26)

(페리보고서 이후 미국의 한반도 및 중동전략 변화)

페리보고서에 따라 미국이 대북 고립압살 대신 대북 평화공존 노선을 택하며 이북과 협상을 본격화한 99년 말 이후 2000년의 한반도 정세 변화는 미국의 `윈-윈 전략` 수정을 가속화시켰다. 특히 남북이 정상회담을 위한 밀사회담과 특사회담을 거쳐 4.8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도달한 뒤 `윈-윈 전략` 포기를 전망하는 보고서가 잇따라 발표되고 6.15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 절정에 달한다.

남북이 밀사회담을 거쳐 남북정상회담개최에 합의한지 열 하루만인 2000년 4월19일 미 민주-공화 국가안보자문위원회는 "국제분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2개 전쟁 동시수행 전략인 `윈-윈전략`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부적절한 것이라고 밝힌다. (주27)

미 국방부도 이 즈음 `아시아 2025`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미군은 한반도 통일 후 한국과 일본에서 점차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르며 이 경우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핵무기 보유를 비롯한 독자적인 군비증강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는, 미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하는 파워엘리트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주28)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개최된 직후 미국 언론의 반응은 한 층 더 솔직해진다. 미 USA투데이는 정상회담 마지막날인 6월15일 ▲주한미군 철수와 ▲윈-윈전략 폐기를 동시에 언급했다. (주29)

6월19일자 영국 인디펜던트지도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이 신문은 "남북한 정상이 만나 공통점을 찾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이로 인해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가 흔들리게 됐다"고 논평했다. (주30)

2000년 6월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곧이어 조-미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면서 10월12일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차수)의 백악관방문과 10.12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된다. 6.25전쟁의 완전 종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조-미 평화협정을 시사한 이 공동코뮈니케는 이북 침공 작전을 한 축으로 하는 `윈-윈 전략`이 무용지물이 됨을 천명한 것이었다. (주31)

2001년 `윈-플러스` 수립 과정과 `9월11일 사건` : 아프가니스탄 전쟁과의 연관성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출범 직후 미군을 일대 쇄신하기 위한 전면적인 조사에 들어갔고 국방장관 도널드 럼즈펠드는 올 2월6일 닉슨 정부 시절부터 미 군사전략을 입안해 온 앤드류 마셜(79)을 자문관으로 임명해 미군의 규모와 전략 및 무기체계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시작한다.(워싱턴 포스트가 2001년 2월9일)

마셜은 1949년 랜드연구소에 핵전략가로 입문한 마셜 보좌관은 73년 문관으로 펜타곤에 발을 들여놓은 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부터 미 군사전략을 입안해 온 인물로 특히 미 공군의 차세대 주력 기종인 F22 전투기의 유용성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육군의 대형 탱크와 해군의 항공모함은 점차 `21세기의 기병대`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주한-주일미군의 전진배치 전략이 전환될 것임을 예고했다.

신 부시 행정부는 또 출범에 즈음해 `정권 교체 2001`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지역의 안정 지원 ▲패권국가 등장 방어 ▲미 군사력 남아시아 이동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군사전략 개편을 모색하기도 했다.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의 책임아래 50여명의 초당적인 안보 및 방위전문가들이 참여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 이 정권교체 보고서는 특히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WMD(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억제하는데 외교적인 성과가 있을 경우 주한미군의 병력 수와 위상 문제를 한국과 긴밀히 협의한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주32)

미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2001년 3월21일 미 군사력 재편방안과 관련한 종합보고 초안을 마련,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미국이 국제분쟁 대응방식으로 채택한 2개 전쟁 동시 수행전략인 윈-윈전략을 폐기하고 미 군사력을 냉전시대의 유럽 중점배치에서 이제는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주33)

럼즈펠드가 부시에게 새 군사전략을 보고한 시점은 또한 미국의 대한반도전략을 재검토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는 미국의 대 한반도전략이 세계 군사전략의 중요한 축임을 입증한다. 이 때 한반도정책 검토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토머스 허바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이며 허바드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북정책검토반에는 백악관, 국방부의 한반도 담당 외교안보팀도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주34)

2001년 4월에는 윈-윈 전략을 수정하는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군비 배정을 둘러싼 이해다툼이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주35)

이 신문은 "이런 전략 변화가 군의 역할과 국방예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군사전략 수행에 따를 치열한 이해다툼을 예견한다. (주36)

5월 들어 미국은 윈-윈 전략 폐기를 기정사실화 한다. 미국 이 때 새로운 `적 개념`(concept of enemy)을 `테러리즘`(terrorism)으로 규정하고 본토방위를 강조하는 쪽으로 기운다. 미국은 윈-윈 전략 폐기를 기정사실화하는 동시에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의 입을 통해 대한반도전략의 대강이 수립됐음을 공식 발표한다. (주37)

5월7일 워싱턴 포스트(WP)지도 미 국방부의 `윈-위 전략` 공식 폐기 방침을 보도한다. 이 신문은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9일쯤 부시 대통령을 만나 미국 군사전략상 10년만의 중대변화를 포함하는 새 전략안을 보고하고 최종 재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주38)

5월9일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부시의 친서를 전달한데 이어 한승수 외교통상부장관을 면담한 뒤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이때 "미국은 가까운 장래에(in the near future) 미사일이나 다른 문제를 놓고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39)

5월8일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은 변화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위협을 평가하고 장래 인간에 의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실무대책팀을 이끌 것이라고 밝힌다. 체니 부통령은 이날 CNN방송과 가진 회견에서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위협은 더 이상 재래식 군사공격이 아니라 ▲국내의 테러행위와 해외의 테러단체 또는 ▲미국에 대해 대량파괴무기를 사용하는 국가나 ▲휴대용 핵 및 생화학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40)

국내테러문제에 대한 미 정부 핵심자들의 언급은 이후 점차 노골화되고 9월11일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테러로부터의 위협` 발언이 계속된다. 미국은 최소한 테러를 예상했거나 또는 상정했다.

미 상원은 또 체니가 `테러대책반 운영`을 발표한 이날부터 세출위원회, 군사위원회 및 정보위원회 합동으로 폴 오닐 재무, 콜린 파월 국무 및 노먼 미네타 교통장관 등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테러대책 청문회`를 시작했다.

이날 첫 증언에 나선 오닐 재무장관은 "재무부는 국경과 지도자, 그리고 금융기관의 수호자로서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 예방 업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기술이 크게 진보하고 국제화가 급격히 이뤄짐에 따라 테러에 대응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또 파월 국무장관은 "테러는 세계화의 어두운 일면이지만 미국은 결코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만일 미국이 테러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일 경우 테러분자들이 모종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5월15일에는 미국의 신 세계전략의 대강을 담은 보고서가 발표된다. 하루 전날인 14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일원으로 들어간 잘마이 카릴자드 전 랜드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작성한 <미국과 아시아>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9월11일 사건 이후 전개된 미국의 중동전쟁과 필리핀과의 군사협력 강화 및 필리핀 반군에 대한 공격 등을 미리 예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카릴자드는 앞서 밝혔듯이 93년 북 핵 문제가 한반도 핵심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력히 요구했던 사람으로 이미 2000년 말 워싱턴 쿼털리(Washington Quaterly)지에 아프간 탈레반 전복 및 친미정권 수립을 위한 중동전쟁 청사진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이 자가 이미 9월11일 사건 발생 4개월 전, 10월7일 아프간 침공작전 개시 5개월 전에 미 군사력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41)

보고서의 핵심은 ▲남중국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미 해.공군력이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미국 령 괌을 아시아의 `중추기지`로 활용 ▲일본 남단 류큐(琉球)제도에 새롭게 군사력을 배치하고 장기적으로는 베트남에도 군사력을 배치 ▲미 군사력의 초점을 필리핀과 대만으로 맞추어야 한다는 것 ▲한국. 일본과의 전통적인 군사 유대관계는 계속 유지 ▲공군의 장거리 전투기편대 확충방안 ▲4만7천여 주일미군 중 절반이 넘는 2만6천여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오키나와(沖繩) 기지의 축소 검토 등이었다. (주42)

이 보고서는 `통일한국의 방향`에 관해 분석, "통일한국은 안보환경의 대변혁에 따라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인지, 남북한을 합친 군사력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특히 북한의 탄도탄미사일과 핵무기관련 프로그램을 그대로 보유할 것인지, 또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한 것인지 등에 대해 근본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고서에 따르면 안보환경 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일부 병력 철수가 필요하게 된다면 주한미군 육군병력의 일부 철수가 첫 번째 선택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의 한반도 배치 목적과 병력구조를 설명하면서 이 병력이 그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다.

또 보고서는 주한 미 공군의 경우, 통일한국이나 이에 버금가는 남북한 화해가 이뤄진 뒤에도 현재의 주한 미 공군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안보환경 변화로 도저히 병력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이 오게 되면 최소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2개의 주요 공군 작전기지(MOB) 가운데 1개 작전기지를 지역 내 다른 곳, 아마도 괌기지로 이동 배치하는 등 여러가지 다각적인 방안을 고려할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보고서는 이어 "서울과 평양간 전쟁 위협이 물러간다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과 공군 병력 규모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질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완전한 통일이 아니더라도 남북한이 그들을 상호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을 정도로 화해가 진전되거나 북한의 경제가 붕괴해 결국 남한에 전혀 위협세력이 되지 않을 경우에도 거의 같은 상황에, 같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주43)

5월말 경에는 미 군사전략 재검토 과정에서 빚어지는 각 이해집단간의 알력에 관한 보도가 잇따른다. (주44)

워싱턴 포스트는 부시의 해군사관학교 연설이 예정돼 있는 5월25일자에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과 미군 합동참모본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이번 주 국방부내 비밀 회의실에서 국방개혁을 둘러싼 역할문제를 놓고 언쟁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주45)

부시가 이날 미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당초 예상과는 달리 미국의 신 국방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도 워싱턴포스트 보도와 마찬가지로 군사전략 변경에 따른 이해집단간의 갈등이채 해소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시는 이날 연설에서 ▲아시아 중시 ▲2개 전쟁 동시승리(윈-윈) 전략 변경 ▲육군병력 감축 ▲F-22, 크루세이더 등 무기체계 사업 취소 등 `신 국방정책` (Defence Review)의 주요 내용을 언급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단지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미사일방어(MD) 구축 필요성과 정보 분야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세`만을 강조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는 5월25일자에서 럼즈펠드 장관과 합참수뇌부가 향후 6주 동안 새 국방전략을 짜내기 위해 집중적으로 협의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5월 하순부터 6월말까지 미 군부와 행정부 사이에 군사비 증감 및 배분을 둘러싼 본격적인 절충이 이뤄졌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6월20일자 워싱턴 타임스 보도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주46)

9월11일 참사 약 3개월 전인 6월20일 워싱턴타임스는 미 국방부가 두 적성국과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 승리로 이끈다는 이른바 `윈-윈(win-win) 전략`의 폐기를 결정했으며 부시가 전날 국방부를 방문, 럼즈펠드 장관과 만나 9월 작성예정인 4개년 국방정책검토(QDR) 보고서에 관해 협의했다고 보도, 새 군사전략이 완료단계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주47)

이에 앞서 워싱턴포스트 6월13일자에서 `국제합동대응군` 편성이 추진중임을 보도했으며 이는 이 때 이미 미국은 전쟁 준비에 들어갔음을 시사한다. 이 구상은 8월 초순 `아시아 다국적군`이란 이름으로 구체화된다. 미국의 대 아시아 중시 전략이 아시아 약소국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전 계획으로 구체화됨을 의미한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6월22일 상원 군사위원회 증언에서 `윈-윈 전략` 폐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늦여름이나 초가을까지는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새로운 전략과 군 조직에 관한 권고안을 제출할 것... 북한, 이라크 등 이른바 `불량 국가`의 미사일 개발은 물론 저소음 잠수함에서 사이버 전쟁, 핵과 생화학 무기를 동원하는 테러에 이르는 21세기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할 방어 수단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주48)

7월 들어 `윈-플러스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이 때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공격 계획을 구체적으로 집행하기 시작한 때이다.(아프간 공격 계획에 대해서는 후술) 또한 이때 미 군부와 행정부는 새 국방전략 수립 논쟁의 핵심인 군사력감축을 백지화하고 재래병력도 늘리고 첨단무력도 증강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9.11사건` 이 터지고 아프간에 대한 `전쟁`이 선포된 직후인 9월30일 발표된 QDR 내용도 이와 같다.

뉴욕타임스는 7월12일 29쪽 분량의 국방부 문건을 인용, "미국은 2개의 대규모 전쟁을 동시에 수행,승리로 이끄는 기존의 `윈-윈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1개의 대규모 전쟁에서의 `결정적 승리` ▲미 본토 방어 ▲침략국 적대행위 ▲제한된 기간의 국지전 참가 등 4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내용의 새 전략을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 국방부는 최근 장기간의 협상 끝에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최종 군사전략안을 마련, 럼즈펠드 장관과 각 군 사령관 등 군 수뇌부의 승인을 받았다.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를 겨냥해 93년이래 유지해온 `윈-윈 전략`을 포기했다. 새 군사전략은 그러나 군이 지금보다 많은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만큼 대폭적인 병력증강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민간부문과 군 지도부는 새 군사전략안이 예산부족으로 백지화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타협의 승리이다"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특히 미국이 본토방어 개념을 처음으로 4개의 지침에 포함시킨 것은 부시 행정부가 현재 추진중인 미사일 방어계획을 주로 염두에 둔 것이라고 분석하고 미군이 국내에서 핵.생화학 무기에 의한 테러공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주49)

7월말까지 미국 언론들에는 미군병력 규모를 놓고 민간지도부와 이들의 지시를 받고있는 군부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주 실린다. 뉴욕타임스는 7월30일 "국방부내의 이견은 미래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첨단무기 개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의 미군 병력규모를 줄이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민간지도부와 이들의 지시를 받아 현장에서 집행하는 군 지휘관의 이견은 세계관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주50)

미 국방부 전략팀은 남녀군인을 합해 140만에 달하는 미군 병력을 장래 더 증강해야 한다고 시사, 국방부가 재검토작업에 들어갔다고 미 언론들이 18일 보도한다.(연합뉴스 7월19일자)미 언론의 이런 보도는 미국이 이미 `윈-플러스 전략`을 완성했지만 군 병력 감축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대신 군 병력 증강을 위한 `대책` 마련에 착수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국방부가 최근 마련한 새 전략안에 따르면, 미군은 기존의 `윈-윈 전략`을 폐기하는 대신 ▲1개의 대규모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 ▲미국 본토 방어 ▲제한된 기간의 국지전 참가 ▲주요 지역에서 적대국 침략 저지 등 4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윈-윈 전략`을 폐기할 경우 미군 병력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국방부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 달리 군병력 증강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부랴부랴 재검토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럼즈펠드와 미 합동참모 본부는 해외 주둔 미군 병력을 감축하기 위해 최근 채택했던 새 국방전략 수정 계획을 다시 변경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7월24일 워싱턴 포스트 보도를 통해서였다. : "미국 국방부는 2개의 대규모 전쟁을 동시에 수행, 모두 승리로 이끄는 기존의 `윈-윈 전략`을 폐기하면 미군 병력을 축소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새 국방전략을 채택했으나 새 전략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군 병력이 오히려 증강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 국방전략에 대한 재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다."

"새 전략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군 병력이 오히려 증강돼야 한다"는 논리는 `전쟁 개시`에 대한 결론이 도출됐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규모 전쟁을 통해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면서 국방예산을 증액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된 셈이다.

8월 들어서도 병력 감축을 둘러싼 논란과 군비 삭감 및 재배정을 둘러싼 이해집단간의 알력과 이 알력을 해소하기 위한 모종의 군사작전에 대한 언급이 잦아진다.

9월11일 사건을 약 한 달 앞둔 8월8일에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펜타곤에서 국방전략 재검토에 관한 기자회견을 가졌고 월포위츠 국방부장관은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부분 중 하나인 병력문제를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은 "럼즈펠드 장관이 오는 9월30일 이전에 4년마다 의회에 제출하는 국방검토(QDR) 보고서를 통해 최종 병력 감축안을 밝힐 예정이지만 병력감축에 대한 의회 의원들과 동맹국들의 반발이 심해 현재의 안이 그대로 의회에 제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럼즈펠드 장관이 병력규모를 현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더 늘려야 한다는 내용의 또다른 보고서도 제출 받았다"고 전한다. (주51)

부시 정부내 매파의 대표주자이자 `미국 근본주의` 또는 `미국 지상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통하는 국방부 부장관 월포위츠는 8월8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 전쟁 동시수행보다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소규모 분쟁에 대한 대처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이럴 경우 무장병력이 전면 개편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 말은 곧 `윈-윈 전략`이 지향했던 두 개 전장 가운데 하나인 한반도 전쟁을 포기하면서 다른 하나인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아시아지역에서 소규모 국지전을 수행할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춘다는 말로 `9.11일 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중동전쟁과 이후 11월말 현재 준비단계에 있는 아시아 약소국들 내 회교 반군 세력을 상대로 한 국지전을 정확히 설명한다.

럼즈펠드는 8월17일 "우리가 두 개의 대규모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서 윈-윈 전략 대신 한 전쟁에서 `우리 방식대로` 싸워 이기는 새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며 "하나의 대규모 전쟁에서 "우리 방식대로" 이긴다는 것은 미국이 적국 수도에 진입해 점령하는 상황을 포함해 전쟁에 철저하게 임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지난 91년 걸프전 당시에는 "미군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까지 쳐들어가지는 않았다"면서 새 전략이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우리 방식대로 싸워 이기는 새 전략`이나 `적국의 수도에 진입해 점령하는 상황` `전쟁에 철저하게 임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것` 등 럼즈펠드의 말은 `9월11일 사건` 직후 부시와 럼즈펠드가 말한 `21세기의 새로운 전쟁` `선전포고도 없고 항복문서 조인식도 없는 전쟁` 등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91년 걸프전에 대한 언급은 이라크에 대한 또 한 차례의 침공작전이 준비되고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52)

럼즈펠드는 8월22일 기자회견에서 "낙후된 군 장비를 현대화하고 미래기술에 투자할 수 있게 할 새로운 군사전략을 오는 10월까지 제시할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 또 자신과 군사령관들은 이즈음 내년 국방예산 증액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고 공언했다. 그는 "앞으로 2-3개월이면 우리가 지난 4-5개월간 작업했던 대부분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날 것"이라며 "고요한 효과를 거둘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8월말 미 국방부는 이미 한 달 전 사실상 완료한 `윈-플러스 전략`을 바탕으로 9월말까지 완료키로 돼 있는 국방전략재검토(QDR)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이때 다시 한 번 병력 감축과 예산 배정 등을 둘러싼 군산복합체와 민간, 기업과 정부, 지역구 의원들간의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워싱턴 포스트는, 9.11사건 발생 약 보름전 전인 8월27일자에서 "국방부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 승리하는 윈-윈 전략에서 후퇴해 한 곳의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도발을 뿌리치는 수준에 머무는 `1.5개 전쟁 수행` 전략에 근접하고 있다"며 "윈-윈전략 후퇴는 결국 노-워(no-war) 전략으로 전락할 지 모른다"고 지적, 새 전략 수립에 따른 불만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폭로했다. (주53)

8월말부터 9월초 사이 미국은 `윈-윈 전략`을 `윈-플러스 전략`으로 대체하고 이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됐다는 뉘앙스가 언론을 통해 풍겨 나오고 이 즈음부터 윈-윈 전략 포기에 따른 군부 세력 등 이해집단의 갈등에 관한 뉴스가 사라진다.

뉴욕타임스가 9월11일 사건 발생 닷새 전인 9월6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야전사령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 달 비밀리에 컴퓨터를 이용한 워 게임인 `포지티브 매치`를 실시한 결과, "한 개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다른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을 확인했으며 이로써 미군의 전쟁준비태세에 대한 우려가 해소됐다"고 평가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주54)

이 신문은 또한 군사전략과 예산을 둘러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국방부 내 일부 관리간의 논쟁도 해소, 국방부가 단합된 모습으로 의회와 백악관을 상대로 국방예산 증액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바로 전날인 5일 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민주당) 은 미 국방부가 내놓은 미사일방어계획(MD) 추진비 83억 달러를 포함한 3,29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2002년 국방예산안에 반대, MD예산 중 13억 달러를 삭감했었다. 이때 칼 레빈 군사위원장은 "미사일 방어계획과 관련한 예산이 올해보다 무려 57%나 늘어난 것은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회의 이런 강경한 분위기 속에서 럼즈펠드 팀이 국방예산 증액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은 심각한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조성되거나 대규모 전쟁에 나서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럼즈펠드는 6일 기자회견에서 재정적자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상태에서 당초 약속대로 사회보장비를 깍지 않고 국방비를 대폭 증액시킬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즉답을 회피했다는 언론 보도 역시 미 국방부가 국방비 증액을 위해 언론에 공개할 수 없는 모종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9월11일 사건` 발생 이전 아프간을 시초로 한 장기 중동전쟁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미 상원은 5일 삭감한 13억 달러를 9.11사건 열흘만인 21일 되살림으로써 부시 정부는 당초 요구했던 미사일방어계획 관련 예산 83억 달러 전액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상원은 또 같은 날 총 3,430억 달러의 국방예산 수정안을 통과시킨다. 사상 최대 규모였던 당초 국방예산안 3,290억 달러보다도 140억 달러나 더 많은 액수였다. 윈-윈 전략 포기 및 원-플러스 전략 수립에 따른 군비 지출 문제는 이렇게 해소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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