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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조선이 무혈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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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언덕 작성일05-08-12 23:08 조회1,4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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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조선이 무혈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건들』
김정일 리더십의 현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될 대목은 그가 조미 군사대결에서 연승을 거두게 한 사실이다. 김정일은 20대 후반부터 김일성의 뜻에 따라 조미 군사대결을 직접 지휘해왔다. 다시 말해서 그는 30여년전부터 지략가, 전략가로서의 기량을 유감 없이 발휘해서 조미 군사대결에서 매번 무혈승리를 거두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라고 하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1968.1.23), EC-121정찰기 격추사건(1969.4.15), 판문점 포푸라사건(1976.8.18), 미군 헬기 격추사건(1994.12.17)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장에서 언급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에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일련의 사건들을 둘러싸서 김정일 리더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기로 한다.
푸에블로호나포사건
북조선 영해를 침범했다가 원산 앞바다에서 인민군에 의해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미 CIA가 비밀리에 작성하고 대통령 죤슨이 승인한 『핑크루트작전』(북조선과 중국, 구 소련에 대한 정찰을 목적으로 한 극비작전)을 실시하기 위해서 파견한 초고성능 무장간첩선이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이 선박이 『공해상에 있었다』느니, 『간첩행위를 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생억지를 썼다. 그리고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북조선에 대해 『보복하겠다』 하고는 베트남을 향해서 항행중이던 원자력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4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기동함대를 한반도 연해에 들이밀고 1개 비행대대까지 한국에 급파하는 한편 주한, 주일 미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레이저, 무장간첩선 배너 등을 연속 들이밀어 『원산을 폭격하겠다』, 『푸에블로호를 탈환하겠다』, 『비행장을 하나 폭파하겠다』, 심지어는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북조선을 위협했다.
세계가 숨을 죽이고 북조선을 주시하고 있을 때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푸에블로호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 최고사령관의 입장에서 한번 결심해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미국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고 석방하지 않겠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는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그들이 항복서를 낸다 해도 돌려주지 않겠다. 우리 인민군대가 나포한 미제 무장간첩선을 먼 훗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미국놈들에게서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결심에 김일성이 만족했다는 것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김일성은 그때부터 얼마후인 2월초에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는 미국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김정일은 이 경고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인민군과 노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들이 전투태세에 들어가도록 했다.
20대 청년장군 김정일의 단호하고도 강경한 자세 앞에서 미국의 대북위협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끌고 가려 했을뿐 아니라 판문점 회담장에 나와서도 북조선에 사죄할 대신 푸에블로호는 간첩선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히려 선박과 승무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김정일은 만약 미국이 사죄하지 않으면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전원 군사재판에 넘겨 처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전역사적 기간을 통해서 사죄할줄 모른다던 미국은 사건 발생후 11개월만인 1968년 12월 23일, 세계의 면전에서 북조선에 사죄문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나포시 총격전으로 사망한 1명을 제외해서 83명 전원이 나포된지 335일만에 석방이 아니라 추방의 형식으로 판문점을 거쳐 돌아가게 되었다.
푸에블로호 선체는 지금도 평양의 대동강반에 전시되어 있다.
EC-121정찰기 격추사건
바다로 기여들었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살아서 돌아갔으나 그후 넉달도 못되어 북조선 영공에 날아 들었던 EC-121 정찰기 승무원 31명은 비행기가 인민군 공군에 의해 격추되어 전원이 사망했다. 1969년 4월 15일, 북조선이 자기 영공에 침입했던 미군 정찰기를 격추한 것은 국제법상 공인된 자위권의 행사였다.
미국은 자기들의 범죄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쟁광증을 일으켰으며 그 선두에는 석달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닉슨이 서 있었다. 푸으블로호사건이 일어나자 죤슨이 무능하다고 비웃던 닉슨은 아이젠하워 정권에서 부대통령을 했던 1950년대에 6.25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수치를 만회할 기회가 도래했다고 무릎을 치며 한번 명성을 떨치리라 다짐했었다.
닉슨의 명령에 따라 8만 2천톤급 항공모함 기티 호크를 비롯한 2척의 항공모함을 비롯해서 순양함, 구축함 등 20여척의 군함들이 한반도 해역에 급파되었고 수백기 폭격기들이 긴급출동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임자가 했던 대로 북조선에 『핵보복을 가하겠다』느니, 정찰기를 격추한 전투기가 소속된 공군기지를 『초토화하겠다』느니 하면서 악에 받쳐 날뛰었다.
김정일은 전국을 전시체제하에 두고 전군이 총바격전을 가할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군사정전위원회 마당에서 미국에 된 매를 안기고 그들의 침략적 본성을 세계앞에 폭로하도록 했다. 격추사건 사흘만인 4월 18일에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제290차회의에서 인민군측 수석위원은 미군측에 이번에 동해에서 수장된 EC-121기가 유엔군에 소속된 항공기인가, 아니면 미공군에 소속된 항공기인가고 추궁했다.
전혀 예상치 않던 질문에 미군측 수석위원은 말문이 막혔다. EC-121기가 유엔군 소속이 아니라 미공군 소속이라고 인정하면 북조선 영공에 침입한 미국의 죄가 국제법에 따라 보다 엄중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입을 열지 못해 비지땀을 흘리던 미군측 수석위원은 황급히 회의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북조선은 이 사실을 신문, 방송, 통신을 통해서 널리 보도했다. 연이어 북조선 정부성명이 발표되고 그 내용이 또한 전세계에 전해졌다. 세계는 미국의 간첩행위를 규탄했다. 미국을 두둔했다면 미군 간첩기의 출발기지를 제공했던 일본뿐이었다.
방대한 무력을 한반도 해역에 집결시켜서 당장 전쟁을 일으키기나 하듯이 기승을 부리던 미국은 사건후 10여일이 지나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결국 죤슨을 비웃던 닉슨은 그에 못지 않게 수치만 당하게 되었다.
판문점 포푸라사건
이미 다른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판문점 포푸라사건』이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북조선측 관할하에 있는 포푸라나무를 미군측이 사전통고도 없이 찍으려 했다가 이를 저지시키려던 인민군 경비병과 난투가 벌어져 미군 장교 2명이 즉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주동인물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쫓겨난 닉슨의 후임으로 미국 대통령 자리에 앉은 포드였다. 훗날 알려진데 의하면 이 사건은 같은 해 11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세계를 주목시킬만한 사건으로 이름을 떨쳐 포드의 집권 연장을 꾀하려 했던 공화당 보수파가 꾸며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포드는 선임자들에게 뒤질세라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비롯해서 순양함, 프리게이트함 등으로 구성된 기동함대와 오키나와주둔 해병대 1천 800여명을 한국에 급파했으며, 또한 F-4, F-111 전투폭격기와 B-52전략폭격기들을 출동시켰다. 그리하여 북조선에 대해서 『사죄』와 『배상』을 하고 사건에 관련된 인민군 병사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고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칠듯이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북조선에는 그같은 위협이 통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미국놈들이 소리나 크게 치지 사실은 우리와 싸우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나는 미국놈들의 발광을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정신착란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미국놈들의 발광은 어디까지나 서푼짜리 몸부림이라고 조소했다. 그의 말대로 미국은 북조선에 굽어 들었다. 그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 도끼를 비롯한 흉기를 들여오지 말며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조미 쌍방의 합의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을 비롯해서 공동경비구역내 질서변경을 위한 북조선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집권 연장을 꾀하려고 사건을 계획적으로 일으켰던 포드는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받고 대통령선거는 커녕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선거에서 패하고 말았다.
1994년 미군 헬기 격추사건
이 사건 역시 이미 언급된 대로 1994년 12월 17일에 북조선 영공을 침범한 미군 헬기가 인민군측이 쏘았던 총알에 맞아 격추된 사건이다.
이날 인민군 총참모부를 통해서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인민군대에서 이번에 미제 침략자들에게 우리의 본때를 단단히 보여주었다. 인민군대에서 미제 침략군 헬기를 단방에 쏴 떨군 것은 그 어떤 원수가 우리의 영토와 영공, 영해를 침범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선언이 결코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지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며 조미회담의 막뒤에서 공화국을 반대하는 새 전쟁도발책동을 벌이고 있는 미제 침략자들에 대한 단호한 징벌이었다고 하면서 몹시 만족했다. 그후 미군 헬기를 쏴 떨군 인민군 분대장에게는 북조선의 영웅칭호가 수여되었다.
미국은 북조선측과 직접 거래를 하지 못하고 제3국을 내세우는 우회적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미군 헬기 격추사건은 조미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을 명백히 표시했다. 또한 미국측이 포로된 미군 헬기 비행사를 성탄절 이전에 놓아달라고 제의한데 대해서도 우리는 성탄절을 쇠지 않는다고 일축하고는 세계가 공동으로 쇠는 1월 1일이 임박해서야 비행사를 보내주었다. 결국 이 사건은 미국이 직접 나서서 북조선측과 교섭한 끝에야 막을 내렸다.
『총포소리 없는 전쟁』에서의 연승
1993-1994년 핵위기
1993-1994년 사이에 벌어진 조미 핵대결은 양국간의 정치, 군사, 외교적 대결의 양상을 띠고 전개된 김정일 대 클린턴의 대결이었다. 당시에 불거졌던 『북의 핵의혹』문제는 이미 1986년부터 야기된 것인데, 이를 구실로 한 미국의 대북대결정책은 클린턴이 1992년 가을의 대통령선거에서 현직의 부시를 이긴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스타워즈』계획으로 구 소련을 협박한 레간 정권은 북조선의 『핵의혹』문제를 가지고 강경책을 취하지 않았으며 걸프전에서 승리하고 다음 목표는 북조선이라고 떠들던 이전 부시 정권도 북조선을 서뿔리 자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북조선과의 대결에서 패했던 죤슨, 닉슨, 포드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후 베비붐 때 태어난 전쟁경험도 없는 클린턴은 미국의 핵지배체제 유지가 국익으로 된다고 판단하고 북조선을 굴복시켜보려 했다. 이리하여 1993년에 북조선의 『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어 불시에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벼랑끝으로 치달았다.
클린턴은 취임 한달만인 1993년 2월 2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사촉해서 대북압력을 가하도록 했던 동시에 3월에는 그때까지 중단되어 있던 팀 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재개했다. 여기에는 당시 북조선의 군사적 동맹국 소련은 이미 붕괴되고 중국도 사실상 북조선의 편을 들지 않을 것이라는 클린턴의 타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 판단에는 그가 상대방을 잘못 보았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사실 당시의 조미 핵대결에서 시종 주도권을 쥔 것은 클린턴이 아니라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은 팀 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 재개 전날인 1993년 3월 8일에 전국, 전민, 전군이 준전시상태로 넘어 갈 것을 명령하여 어느 때든지 주한미군을 포함한 해외주둔 미군부대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김정일은 당혹하는 미국에게 쉼없이 두번째 타격을 가했다. 3월 12일에 북조선정부가 핵확산방지조약(NTP)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이 탈퇴조치는 90일 이후인 6월 12일에 자동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이 이에 당황한 것은 만약 북조선이 조약에서 완전히 탈퇴하면 아직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물론 다른 가입국들까지도 북조선처럼 제 마음대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핵의 독점에 바탕한 미국의 지배체제에게 심대한 타격으로 될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조선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시키겠다』느니, 『대북제재를 가하겠다』고 떠들다가 기가 죽은 미국은 탈퇴조치를 취소할 것을 간청하는 방향에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미대결은 대화의 형태를 띠고 벌어지게 되었다.
제1단계 조미회담은 1993년 6월 2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열렸다. 회담 결과 미국측은 북조선에 대한 핵위협을 중지하고 북조선의 정치제도를 존중하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를 하게 되고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진 조미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북조선의 핵확산방지조약 탈퇴 효력이 발생되는 6월 12일을 하루 앞둔 상태어서 클린턴으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2단계 회담은 1993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김정일은 회담 벽두부터 강한 공격을 들이대어 미국을 수세에 몰아 넣고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한 다음 경수로 문제를 정치적 선에서 크게 부각시켜 제기함으로써 기구 사찰과 같은 기술실무적 문제들을 꽉 눌러버리고 회담을 목적실현에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데 대한 방침을 제시했다.
북조선 대표단은 이 방침대로 회담에 임하여 미국으로부터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교체할데 대한 방안을 지지하고 경수로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제2단계 회담이후 한때 조미간의 긴장상태가 재발되었으나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의 평양방문(1994.6.15-18)으로 수습되어 나갔다. 그 결과 제3단계 1차 회담이 1994년 7월 8일과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사이에 제네바에서 진행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7월 8일부터 진행되어야 했던 회담이 이날 김일성의 급서로 휴회되었다가 8월 5일에 다시 열린 것 때문이었다.
회담결과 채택된 합의성명을 통해서 북조선측은 미국으로부터 경수로 제공 담보와 전력손실 보상, 그리고 조미간의 전반적 정치, 경제 관계개선 약속을 받아냈으며 특히 미국에게 자기들이 경수로를 책임지고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워 놓았다.
제3단계 2차 회담은 1994년 9월 23일부터 10월 21일까지 제네바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담은 그때까지의 조미회담을 결속짓는 회담, 다시 말해서 대화의 형태로 벌어졌던 조미대결에서 결판을 내는 마지막 대결장이 되었다.
김정일은 회담에 임하는 북조선 대표들에게 미국측으로부터 이미 8월회담에서 약속한 경수로 제공과 관련한 대통령의 서면담보를 받아 내며 경수로 완공의 시한부를 명백히 정하도록 지시한 동시에 경수로 문제를 다른 전반적 문제와의 연관속에서 전술적으로 다루어 나갈데 대한 방도까지 제시했다고 한다.
회담결과 북조선에게 있어서는 김정일의 의향이 그대로 담겨지고 미국에게 있어서는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항복서나 다름없는 내용으로 조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되었으며 여기에 또한 대북 경수로 제공과 대용 에너지 보장을 담보할 데 대한 클린턴의 담보서한도 첨부되었다. 이리하여 조미 핵대결은 김정일의 지략과 의지에 의해서 북조선의 무혈승리로 끝났다.
유산된 『작전계획 5027』
걸프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대한 무력간섭을 통해서 기고만장해진 반면에 북조선과의 핵대결에서 연속 패한 미국은 어떻게 하나 자기들의 체면을 세워보려고 1998년에 들어와 북조선에 대한 전쟁도발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 해에 한국을 방문한 클린턴은 주한미군 부대들의 동원상태와 비행대의 폭격준비상태까지 『최종점검』했을뿐 아니라 『미국은 미국민과 우방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런 능력도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자 한국의 집권 상층도 『지하시설 사찰에 응해야 한다』느니 뭐니 하면서 이에 비위를 맞추었다. 또한 일본 역시 북조선에 대해서 강경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미국의 강경보수세력은 군부를 통해서 『북조선 침공을 예견한 새로운 전쟁계획을 완성하고 있다』고 보도를 날리게 하는 동시에 이른바 『작전계획 5027』을 출판물을 통해서 공개했다.
이 『작전계획 5027』의 내용을 보면 5단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1단계는 『억제단계』, 다시 말해서 북조선군의 행동을 억제하는 단계로서 한반도에 미군 무력을 집결시켜 북조선의 공중과 해상, 국경을 봉쇄하고 본격적인 대북제재를 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단계는 방대한 야전포병 무력과 비행대, 공중타격전으로 북조선을 무력화시킨다는 『무력화단계』이다. 3단계는 『지상공격작전단계』로서, 북조선의 동서해안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과 항공육전대 작전, 헬기 육전작전, 특공대작전을 배합한 작전적 포위를 실현하고 청천강 계선까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4단계는 『전쟁성과 확대단계』로서, 청천강 이북의 북조선 전지역까지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5단계는 『종전단계』로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 작전계획이 그저 계획이 아니다는 듯이 미군 54만 5천여명과 한국군 63만여명, 항공모함전단 5-7개, 스텔스 폭격기, F-117, E-111, B-1, B-52 등의 항공기를 비롯한 첨단장비들과 대형타격수단들을 투입하려 했다. 특히 이 작전계획이 북조선의 『선제공격』에 맞서서 상대방을 공격한다고 가상한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도로 북조선의 『핵문제』나 『인권문제』를 구실로 제재를 가하다가 그 연장선위에서 타격을 가하는 방법, 북조선의 『핵의혹 시설』들에 『외과수술식 타격』을 가하는 방법, 정세를 지속적으로 긴장시키다가 『정세 악화』를 구실로 선제타격을 가하는 방법 등으로 전면전쟁에로 넘어가게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보통이면 극비취급에 해당되는 군사작전계획을 어째서 미국이 출판물을 통해서 공개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김정일은 미국이 우리의 기를 꺾어 보려고 전쟁계획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는 것 같다. 우리 공화국을 군사적으로 압살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궤뚫어 보았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작전계획 5027』은 휴지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재빨리 선손을 써서 『작전계획 5027』의 침략적 본질을 폭로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 그것도 인민무력부 대변인 성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도수가 높게 전투작전을 직접 조직지휘하는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이름으로 발표함으로써 효력 있는 성명으로 되게 했다. 이에 따라 1998년 12월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 『우리의 무력은 미제침략군의 도전에 추호도 용서 없이 섬멸적인 타격으로 대답할 것이다』가 발표되었다.
성명은 북조선에도 자기 식의 작전계획이 있다는 것, 『외과수술식 타격』이요 『선제타격』이요 하는 것들이 결코 미국만의 선택권이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 인민군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는 이 행성에 없다는 것, 전쟁마당에서 미군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도 모두 북조선의 타격목표로 된다는 내용들이 골자로 되어 있었다.
김정일은 북조선의 기를 꺾어놓겠다던 미국의 강경책에 고압강경자세로 맞섰던 것이다. 미국은 이에 기겁해서 한국, 일본 군부의 입을 막으면서 뒷수습하기에 급급했으며 결국 그 해 12월 중순에 영국과 야합해서 이라크를 때리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고 말았다.
대북적대시정책을 완전파탄시킨 『광명성1호』
1998년 하반기에 이르러 미국은 자기들의 대북 유화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래 미국은 조미회담을 벌여놓고 경수로 제공이라는 공간을 타고 얼마간 시간을 벌면 그 사이에 북조선이 붕괴될 것이라고 타산했었다. 그러나 클린턴 정권이 힘의 정책 대신 유화정책으로 녹여 내겠다던 북조선은 붕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심단결의 위력을 떨치면서 강성대국 건설에로 큰 걸음을 내디디었다. 특히 국경절 50돌을 앞둔 8월 31일에 우주공간을 향해 높이 날아 오른 인공위성 『광명성1호』는 북조선의 위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클린턴 정권은 이 해 하반기부터 전 국방장관 윌리암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서 자기들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페리는 새로운 정책안을 클린턴에 제출하기 전에 서울, 도쿄, 베이징 등을 돌아다녔으며 마지막에는 평양에까지 찾아가서 새 정책안을 북조선의 동의를 얻은 실용성 있는 것으로 완성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정책 재검토라는 것을 하찮은 것으로 보았던 김정일은 페리가 평양을 찾아오겠다고 한데 대해서 결코 무게 있게 보지 않았다. 북조선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국은 페리의 방북을 실현해 보려고 미국 비정부단체연합 위원장을 내세워 북조선의 『뒷창문』을 열어 보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미국이 여전히 북조선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는 적대시정책과 오만성의 표시였다.
북조선이 『우회로』도 『뒷창문』도 모두 차단해버리자 미국은 할 수 없이 국무성의 한반도평화담당 전담특사 카트맨을 통해서 페리의 방북을 정식으로 신청했다. 그리고 북조선이 미국 대통령 특사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는데 동의하자 카트맨 일행이 선발대로서 평양에 파견되었다.
김정일은 카트맨 일행에게 조미관계는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 해제와 적대시정책의 완전철회가 선행되어야 개선될 수 있으며, 페리가 들고 오는 제안이 북조선의 의도에 맞지 않으면 그 어떤 환영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주어 보내도록 했다.
이에 따라 카트맨 일행을 영접한 북조선 관계자는 양국관계 개선과 관련해서 쌍방이 할 일은 조미 뉴욕공동성명과 기본합의문에 다 명기되어 있다. 문제는 미국이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특사의 방문에 유리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자면 우리에게 신의를 보여주어야 하며 그러자면 미국이 우리와 약속한 식량지원부터 조속히 이행해야 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카트맨 일행이 귀국한 후 곧 미 국무장관이 『금창리시설 참관료』로서 북조선에 바치게 되어 있는 나머지 식량 40만톤을 제공하겠다고 정부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1999년 5월 25일에 겨우 평양을 찾은 페리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을 만나서 김정일에게 보내는 클린턴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런데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와의 회담에서 페리는 북조선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으로 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들의 우려가 해소되어야 국가관계의 정상화와 제재철회와 같은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는 이른바 『일괄타결안』을 들고 나왔다.
이것이 김정일에게 통할리가 만무했다. 북조선측은 조미관계를 개선하자면 미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며 조미기본합의문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미국이 자기 동맹국들과 공모해서 우리를 위협하는 조건에서 우리는 자체 방위를 위해 미사일도 개발하고 군사력도 강화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불질을 한다면 우리 군대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 본토에도 불벼락을 들씌울 것이다. 미국의 『일괄타결안』은 절대로 통하지 않으며 미국이 적대적인 대북정책을 완전히 변경시켜 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만이 관계개선의 방도로 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상대방에게 오만한 『제안』을 내려먹이려던 시도가 깨어지자 페리는 현단계에서는 조미 기본합의문을 최선을 다해서 이행하며 여러 갈래의 협상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미국 행정부에 권고하겠다고 말하고는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방북후 다섯달만인 10월에 가서야 클린턴에게 이른바 새로운 대북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페리 보고서』라고 불리우는 이 보고서의 공개된 내용을 보면 미국은 북조선의 붕괴설에 기초해서 이 나라를 대해서는 안되며 북조선의 국가체제와 제도를 공식 인정한 기초위에서 이 나라와의 대결이 아니라 관여와 화해로 북조선의 위협을 제거하고 종국적으로는 관계정상화에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초기만 해도 북조선 붕괴설을 떠들던 미국이 몇해 안가서 북조선의 체제와 제도를 인정한 기초위에서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으로 나가게 된 것, 또한 그후 사태 발전은 그들의 대북 고립압살책동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했다.
2000년 10월 9일에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북조선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인민군 차수)이 미국을 방문했다. 그를 만난 클린턴은 북조선에 가서 김정일에게 자기 의사를 직접 이야기할 것이며 북조선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국무장관을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명록의 방미 결과로 조미 적대관계 종결과 관계개선을 골자로 하는 조미 공동커뮈니케가 발표되었다.
북조선 특사의 방미에 이어 10월 23일에는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와 회담한 것을 비롯해서 그와 함께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노동당』을 관람하는 등 무려 14시간동안이나 자리를 함께 했다.
올브라이트는 훗날 자기 회고록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예상과 달리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대화 상대자이자 대단히 실용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자기가 김정일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은데 대해서 솔직히 시인했다. 북조선을 시종일관하게 적대시하고 고립․압살하려 했던 미국이 대통령 특사와 국무장관을 파견하게 된 것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파탄이자 대미대결에서의 김정일의 승리였다는 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올브라이트는 자기 회고록에서 당시 미국의 국내 사정 때문에 클린턴의 북조선방문이 실현되지 않은데 대해서 본인이 몹시 후회하고 있으며 특히는 그후 등장한 현 부시 정권에 의해서 조미관계가 또다시 긴장상태에 되돌아간데 대해서 안타까이 하면서 『만일 부시 행정부가 우리가 물려준 카드를 이용했다면 지금 상황은 보다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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