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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범 교수 특별기고:과거청산은 매카시즘 뿌리부터 뽑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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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참말로 작성일05-06-30 11:06 조회1,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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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상범 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 위원장

한상범 교수


국가폭력 피해자 증언을 통해 보는 법치의 문제      
무법 폭력정권의 과거 청산은 매카시즘의 뿌리를 뽑는 일로부터


국가폭력피해자 증언(2차)대회에 참여하고

지난(2005년) 6월 23일 10시에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과거청산을 위한 시민단체 주최로 국가폭력피해자 증언(2차)대회가 있었다. 나도 이 대회에 증인에 대한 총평을 하는 역할을 띠고 참여하였다.

증인으로선 이승만 정권시기에 ‘사법살인’으로 처형당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피해를 말한 진보당 간부가 나왔었고, 박정희 집권시기에 민청학련 사건 날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날조로 8명의 젊은이를 처형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 부인의 피 맺힌 절규를 들었다. 그리고 신군부집권기 사건인 군대내 의문사문제의 의혹증언과 의문사진상규명이란 독재 폭정의 살인사건을 조사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실무책임부서의 간부를 맡았던 이가 증언하였다.

나는 의문사진상규명이란 폭정속의 살인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에 책임자로서 3년간(2002년 4월 - 2004년 12월)을 종사한 사람이다. 그래서 독재권력의 잔인한 의혹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날의 증언 청취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다시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끼고 유가족의 상처가 그대로 방치된 채 있는 지도층의 태만과 정치의 무능을 다시 확인하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다시는 이런 무법적인 잔인무도하고 천인공노할 국가폭력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서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모독 유린하는 일이 벌어져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에게조차 가슴에 못을 박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친일 반민족 반민주부류가 저지른 죄악을 다시 확인해 교훈으로

여기서 나는 얼마나 친일파가 독재권력에 편승해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들이 일제시기부터 챙겨온 구기득권을 고수하려고 무서운 죄악을 저질러 왔는가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우리사회의 법치주의의 실종 사태를 고발하면서 문제를 제기해 본다.

지금 반민족·반민주의 세력의 뿌리는 일제시기 친일파로 거슬려 올라가서 그것이 대물림하면서 확대 재생산해 존속하고 있다. 우리가 단지 일제시기의 친일파문제만을 따로 떼어서 문제 삼을 수 없는 심각한 현대의 문제가 된 이유와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끔찍한 대량 학살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 온 이유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도 친일파 비판을 용공 좌경 빨갱이로 모는 매카시즘의 실체를 똑똑히 봐야 한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민족반역자란 원죄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박해받아 추방당한 양심적인 법조인의 운명

그들 수구 친일부류에게는 바로 그런 배경과 사정이 있기 때문에 독재권력에 대항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법조인이나 관리의 운명은 독재권력의 지배하에선 불행하고 불운의 연속이란 처지로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양심적인 법조인으로 법을 지키려던 몇 안되는 분들은 박해받고 모욕당하고 모략 중상당해서 시들어가는 운명이었다. 이 운명속에서 법을 고수하려는 이가 민주열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나마 온 것이다.

독재권력이 법을 법답게 지키려고 한 법조인을 어떻게 박해하였는가를 보자.

이승만 정권하에서 이승만에 반대한 야당간부 서민호를 살인죄로 극형으로 판결하지 않은 것으로 미움을 받아왔던 안윤출  

판사는 판사연임에서 제외되어 법원을 등졌다. 야인으로서 이승만 치하에서 그는 기피되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조봉암 사건에서 극형을 선고하지 않고 간첩죄가 아니라 무기불법소지만을 유죄로 한 유병진 판사는 ‘용공판사’ 빨갱이로 몰려 테러위협에 쫓기고, 결국 판사 연임에서 제외되어 야인으로 그 후 8년만에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박정희 지배 하에서 민주회복 운동이란 독재반대운동에 나섰던 당시 변협회장 이병린 변호사는 간통죄로 피검 투옥당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말년을 가난 속에 쓸쓸히 마쳤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데모탄압의 일환으로 학생을 체포하기 위한 영장발부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한 이범열 판사는 ‘섹스 스캔들’로 망신 당하고 결국 법복을 벗었다. 1971년 사법파동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신군부하에 대표적인 법조인 수난은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 정보부장 사건의 심리판결에서 협조를 거부한 대법원 판사들이 당한 수모와 수난 그리고 퇴진의 압력일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를 변호하던 변호사들도 신군부의 공안 정보기관으로 부터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위의 사건처럼 드러난 것 이외에도 보이지 않게 이면에서 협박과 회유, 퇴진 압력과 박해 등을 구사한 정보공작은 무수하게 자행되었다.

법률제도를 이용해서 합법을 위장한 대대적인 법관 숙청작업은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 때 개헌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그간에 말을 듣지 아니한 비협조 법관을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용이란 절차에서 완전히 탈락시켰다. 그럼으로써 결국 박정권하의 군정권력은 사법부를 완전히 정복,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위와 같은 수난사를 통해서 보면 법조인도 군정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게만 말 할 순 없다. 상당수 대부분의 재조법조인(판검사)이 정권압력에 묵종과 순종으로 자기 본래 위상을 스스로 포기했다. 묵시적 인정과 방관적 묵인도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헌법수호와 준법을 책임지는 공직자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외국 법조인의 투쟁사에서 얻는 교훈

외국의 예를 보자.
흔히 17세기 영국의 법관 에드워드 코크가 국왕의 자의적 간섭에 대항하여 말하길, “국왕은 최고의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국왕일지라도 신(神)과 법아래 있습니다.”라고 해서 법을 지켰다고 찬양한다. 우리 대학의 법학강의실에서도 법의 지배(법치주의)를 가르치면서 교수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중대한 한 가지를 빼놓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코크가 당하게 된 운명은 비참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릎 꿇지 않았고 당시 영국의 법조인과 시민은 코크의 ‘법의 지배’ 판결 법리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왕의 자의적 권력을 제어하게 되는 오랜 투쟁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바로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헛된 일이다.

우리의 공직자는 일제식 권위주의에 세뇌 오염되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일제하 친일파의 출세주의의 추종자로 전락하여서 권력자가 누가 되고 무슨 짓을 하던 복종과 추종, 묵인과 순종을 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해 왔다. 바로 그러한 출세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법치주의를 교살하게 되었다. 법조인의 법수호 포기라는 무책임이 헌법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후 법조인은 독재자가 몰락한 이후에도 반성 사죄하지 않고 모른 채 버텨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모른 채 한다고 비켜갈 일도 아니다. “나는 몰랐었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 될 일도 아니다.
그리고 당시 사정으로 봐서 “어쩔 수 없지 않았는가?” 해서 동정을 받고 끝날 일도 아니다.

나라의 주요 고위 공직자는 자기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질수 없다면 일찍이 물러났어야 한다. 그리고 진작 물러나지 않았으면 나중에라도 곧바로 물러나야 한다.

박정희가 죽고 그로 인해 유신시대가 종말된 이후에 공직자로서 자기 책임을 지고 반성 사죄한 공직자가 있었느냐?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다음에 자기 자리가 어떻게 되는가 숨을 죽이고 살피는데 급급했다. 신군부가 맥을 잃고 사법개혁이란 말이 떠들썩하였을 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판검사가 있었느냐?

김영삼 집권 시기에 김덕주 대법원장이 물러났다. 그러나 자발적 반성으로 물러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공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동산 투기문제로 인한 여론의 비판으로 마지못해서 물러났다.
독재권력하의 자기 행적의 문제로 물러난 사법관료는 없다. 이처럼 사법부는 개혁이란 ‘강풍’을 그동안 교묘하게 비켜왔다.

2001년에는 판사 33명이 개혁을 요구하고 나설 지경에 이르렀다(대한매일(현:서울신문), 10월 16일 22면 참조.).
그래서 사법개혁을 한다고 해서 시끄러웠으나, 그로서 얻어낸 성과가 무엇인가?



왜 사법부나 법조제도 개혁이 안 되고 있는가?

지금도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부에 이어서 사법개혁을 한다고 개혁을 위한 기관이 발족해서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사람이 신문에서 번쩍 눈에 띤 사법개혁에 관련된 사건은 형사소송법을 인권보장 측면에서 개정하려다가 검찰측 반발로 진통을 겪은 후에 흐지부지되고 있다는 정도랄까?

법학도나 고시지망생들의 관심을 끄는 일은 ‘로 스쿨’(법과대학원)제도의 도입이 가시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보기엔 결국 법조전문직을 부유한 자산층의 자녀가 독식하는 제도가 될까봐 우선 걱정이다.

그 밖에 다른 일이 있다고 하면 1980년대 이래 끊이지 않고 있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문제의 관할 싸움이 좀 더 노골적이 되고 있는 점이다. 서로가 과거까지 들추고 있는데 그들 양쪽의 과거는 국민이 들추어야 할 사항이고 당사자는 우선 자숙하고 무엇이 국민이 원하고 국민을 위하는 방향인가를 눈치라도 봤으면 좋겠다.

일본 제국주의 패망이후 일본이나 한국에서 똑같이 구시대 잔재 청산에서 법조계와 사법제도는 개혁을 교묘하게 비켜갔다. 특히 인적 청산을 보면 일본과 우리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일제시기의 법조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여 왔다.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은 구시대의 법률이 그대로 통하고 그 일부를 보수하는데 그쳤다. 형사소송에서 악명 높은 예심제를 폐지하고 영미식 인신보호영장제도를 도입하고, 소송절차에 당사자주의를 보강하고, 한편 자백의 강요나 고문의 금지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구습이 하루 아침에 청산되지 않는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는 여전히 철갑을 두른 듯 건재하다.

유병진 판사가 옷을 벗고서 <<재판관의 고민>>이란 책을 내어서 자기 양심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나 주목한 사람도 소수이다. 특히 법조계에서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서민대중이 자기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유병진 판사를 기억할 만한 사정도 아니었다.

그러니 법치주의를  세우는 투쟁이 어디에서 벌어질 것인가? 오랜 시기를 두고 법률에 의한 피해자는 국가폭력 피해자와 함께 계속 늘어났다. 그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아 우리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50년대의 국민보도연맹의 집단학살극을 거치고 1960년대 쿠데타 권력의 날조 정치재판을 거쳐서 1970년대 유신폭정의 인혁당 피고의 집단처형사건을 겪은 뒤, 1980년의 광주의 피바다를 헤집고 나와야 했다. 이런 시련과 고난의 투쟁을 거쳐서 우리는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개혁이란 법률 바로세우기와 민주회복의 투쟁

개혁은 엄청난 진통과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이 고비를 겪어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개혁의 대상인 법조인에게만 맡기거나 기대할 처지는 못 되게 되었다. 그 시기는 이미 지났다. 판사들 속에서의 몸부림이나, 재야의 민변 같은 단체의 꾸준한 문제제기가 있다.

그러나 결국 국민의 몫이 되었다. 결국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해야만 한다. 개혁의 대상격인 법조인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우리들의 일이다.

외국의 예를 봐도 사법개혁은 국민이나 시민단체와 국민대표기관 등 이 힘을 모아서 추진하였을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사법제도 문제를 전문기술적인 문제로 법조인이나 관료에게 맡기거나 당국의 처분에 맡긴 경우에는 백이면 백 모두 졸작으로 실패작이었다.

구시대의 잔재를 뿌리 뽑는 일은 관료들이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료는 구시대적 관행과 유습을 벗어나기도 힘겨운 사정이다. 구시대의 관료는 법률을 통치의 수단과 도구로서 지배수법이고 기술로서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법인식과 민주적 법철학이 없이 관료가 갑자기 민주화가 될 순 없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법조인은 그 시대에 최고권력자의 심부름꾼이었지, 국민의 공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구시대의 관료 티를 못 벗은 법조인은 국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서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이 된다고 할 적엔 거부하는 말을 큰소리로 못하지만, 눈살을 자기도 모르게 찌푸리고 가슴이 덜컹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지금 상태의 법치주의의 실상은 ‘사이비(似而非)’ = ‘가짜의 형식만이 있는 법치주의’이다. ‘쭉정이’ 법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료의 법률에 의한 일방적 명령이다. 지금 법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부류는 빽과 연줄이 있거나 부자만이 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빽이나 연줄이 없고 돈도 없는 사람은 아직도 항상 법률에 의한 피해자가 될 처지에 있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 증언을 들어보면서 어떻게 하면 법치가 실제로 세워지게 하는가 하는 점을 법학교수로서 다시금 고민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일을 볼 때에 어느 유족대표는 나에게 말하길, “위원장님, 법학교육을 얼마나 잘못시켰기에 관리들이 이 모양입니까? 교수나 지식인부터 문제가 있습니다”고 했다. 나는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에 대한 심판을 달게 받고 어떻게 하면 법이 바로서는 세상이 되는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 투쟁해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국민이 주인으로서 참여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이건 개개인으로서건 모든 수단과 방법 및 통로를 통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글을 쓴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최종길 교수 살해 사건과 비전향장기수 옥사 사건의 의문사 인정 등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 과거청산에 기여한 분입니다. 쓴 책으로는 <사상을 벌주는 나라>, <인권-민중의 자유와 권리->, <한자숭배 나라 망친다>,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 <금서, 세상을 바꾼 책>, <일제잔재 청산의 법이론>,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참말로 200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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