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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라면 두렵지않다 -이석기의원구속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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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중의 소리 작성일13-09-06 00:14 조회2,2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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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두려움에 의해 지탱되는 국가보안법 체제 (민중의소리 9.5)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새누리당이 과반수에 달하는 의석을 갖고 있고, 민주당 내 보수적 성향의 의원들이 상당하다는 걸 감안하면 가결이라는 결과는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러나 무려 289명의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본회의를 앞두고 진보당을 제외한 야당들이 모두 찬성 ‘당론’을 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비록 형법상의 ‘내란 음모’를 인용하긴 하였으나 분단을 배경으로 하고, ‘종북 척결’을 자기 논리로 한다는 점에서는 이번 사건은 국가보안법 사건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국가보안법은 생각을 처벌하는 유일한 법인데 이번 사건에서 국정원이 내세운 핵심적 근거도 전부 ‘말’이었다. 내란 음모의 적용에는 회의를 표하는 진지한 법률가들도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본단다. 동서남북 어디에서 봐도 결국 국가보안법 사건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보안법이 과거의 위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왔다. 2000년의 남북공동선언 이후 수백만이 북한을 다녀왔다. (물론 언론은 이석기 의원의 금강산 관광을 ‘2차례 방북’이라고 불렀고, 그곳에서 북한의 특수 요원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참으로 국가보안법 스타일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2004년엔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이 정치적으로는 사문(死文)이 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모두의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만약 당신이 진보당의 당원이었다면 단언컨대 지난 일주일간 주변의 ‘우려’와 ‘걱정’을 들었을 것이다. 당신이 삼성의 직원이라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이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기소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친구들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나? 당신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정치인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걱정을 자아낸 적이 있었나? 당신의 고향이 ‘지존파’ 멤버의 고향과 같다는 이유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적이 있었나? 다른 어떤 ‘범죄’에서도 발생하지 않는 ‘아우라’가 국가보안법에는 있다. 저들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은 국가보안법을 국가보안법일 수 있게 만든다.

사실 이 두려움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처럼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과거처럼 막걸리 한 잔 먹고 정부를 욕하고 북한 체제를 호평하는 것으로는 잡혀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 게 좀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가보다. 민주당은 작년의 야권연대가 이석기 의원의 국회 입성을 도왔다는 새누리당의 공세가 번져 나갈까봐 전전긍긍이었다. (김영주 의원과 현영희 의원을 직접 공천한 – 단순히 도운 수준도 아니고 -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공세에 대해 아주 의연했다. 이것도 국가보안법만의 효과다.) 정의당의 국회의원들이 놀랍게도 찬성한 데는 짐작하건데 ‘찬성하지 않으면 너도 종북’이라고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가진 게 좀 있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국가보안법은 꽤 효과가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지식인들은 이번 사건에서 하나의 전제를 붙인다. 자신은 진보당을 지지하지 않고, 이석기 의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다.) 지식인들이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을 비판할 때 자신이 그 당의 당원이 아니며, 그 당의 정책이나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미리 밝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렇게 말 머리를 붙인다.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갑남을녀들도 꽤나 그렇다. 어찌되었건 페이스북은 남들이 보는 곳이고, 또 증거가 남는 곳이니 그럴 것이다. 물론 그들 모두가 이 두려움을 명징하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얽히기 싫다’는 수준의 자기방어라고 느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자기방어는 국가보안법 사건 이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체제를 부수자면 당연히 이 거추장스러운 두려움부터 이겨내야 한다. 일부러라도 ‘나는 진보당을 지지하지 않고...’ 류의 전제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하나 유의할 것이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이다. 지켜야 할 기득권이 없어도, 또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럴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너 두렵냐?’고 묻는 것은 올바르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나도 두렵다’고 말하고 손을 잡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악몽을 꿨다. 그 때 어머니 품보다 더 좋은 처방이 있었던가.
 — 함께 하기에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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