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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강제연행 희생된 조선인들 영혼 추모비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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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6-11-19 16:06 조회22,401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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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왼쪽부터 김명철 박사,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 구순덕 여사(김명철박사 부인)

일본의 조선대학교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일정을 마친 이후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이 조선에서 강제연행당해 일본으로 끌려와 강제노동으로 일하면서도 돈한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여 오면서 고생한 역사의 현장중 한군데를 방문했다. 사이타마에 거주하는 김명철 박사(조선평화연구소 소장) 가족들이 특별히 초청하여 안내해 주었다. 김명철박사의 부인과 그의 장남은 우리 후손들은  강제연행 당하여 희생된 조선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하면서 요시미하게츠 비행기 제작공장과 나카지마 비행기 공장이 있는 오미야 제작소가 있는 지하군수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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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강제연행당해 희생된 조선인들 영혼 추모비 참관


[니꼬/나수=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조선대학교 창립60주년기념행사 일정을 마치고 사이타마에 거주하는 김명철 선생 가족들의 초청을 받고 기차로 갔다역전에서 부인과 아들이 승용차를 가지고 역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랐다. 15,16, 17 3일동안  가족들은 기자를 위해 이미 일정을 짜놓고 계획한 대로 안내했다  장소(1) 고구려가 망한 시기에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히타카>(고려신사) 짓고1,3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행사를 치른 곳을 안내하여 고려신사(일본말로는 고마진자) 참관하면서 우리민족의  때를 되돌아 보았고그리고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이 조선에서 강제연행당해 일본으로끌려와 강제노동으로 일하면서도 돈한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여 오면서 고생한 역사에 대해 우리 후손들은  그날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일제가 비행기를 비롯 군사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을 강제로 끌고와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돈한푼 주지않고 착취하던 장소인 <나가지마> <요시미하게츠> 찾아 보았다그리고 강제노동하다가 희생당한 조선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장소(2) 산속에 있어 그곳을 찾아 희생자들에게 꽃한다발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김명철 선생 가족들은 기자가 희생자들에게 인사를 올리자 “한을 안고  세상으로  희생자들이 최초로 재미동포가 인사를 왔다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아파하면서 눈굽을 적시는 모습들을 보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조선인 강제연행 추모비”라는 안내판도 세워 놓았다아시오 구리광산은 도찌기현 니꼬시 아시오지구에 속하고 있다.  이곳에는 “아시오 동산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원한을 잊지말자-2006 6.15 력사실습 참가자”라는 글발이 길다란 나무토막에 새겨져 있었다희생자들 명단이 나무판대기 위에 나열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이름들은 성만 조선사람들이고 이름은 일본사람 이름들로 명기되어 있었다이름까지 일제에게 빼앗겼던  시대를 반영해 주었다

 

김명철 선생과 그의 부인은 희생자들의 묘비 앞에서 참배하며 또다시 눈시울을 적신다김명철 선생은 일제가 전쟁을 치른것도  자금은 거의가 조선은행에서 빼앗은 자금이고  조선 땅에서 탈취한 광산과 금산등에서 착취하여 얻은 자금이며 수백만 톤의 조선의 양곡들을  돈이며구리숫가락젓가락까지 빼앗은 자금으로 전쟁을 치뤘다고 말한다

 

양심이 있는 일본의 기업가들은   강제노동시킨 조선노동자들에게 주지 못한 임금을 지금이라도 줘야한다고 발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힌 김명철 선생 가족들은 일본 보통사람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있다고 귀띔해 준다

 

김명철 선생은  일본이 패전하고 다시 일어선 것도 1950년부터 1953년에 일어난  조국해방전쟁 후유증 때문에 얻은 혜택으로 다시 일어설  있었다면서 그것은 조선의 피였다고 지적한다그는 이어 일본 사람들이 만든 지도에는 중국사람들 희생비는 나와 있는데 조선사람들의 희생비는 일본사람들 지도에 나타나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지배세력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그는 이어  “그래서 조선의 통일이 이룩되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제 치하에서의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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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2 세계대전  전쟁 체제에서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고 밝힌 위키백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38 4 1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5 5일부터 조선에서 이를 실시하였다일본은 또한 1939년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하여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였으며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원형식의 노동력 징발을 추진하였다.

 

이외에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종업자고입제한령종업자이동방지령 등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1941 12 6일에는 노무조정령을 제정하였는데,[1]  법령은 일본이 필요한 노무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이에 따라 국가의 직접지배시책을 시행하여징용제도로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였다이러한 강제 동원을 위해 마을 단위까지총동원연맹을 만들었는데 조직의 조선 연맹의 총재는 조선총독이었다. 1943 당시 조선의 가구수는 487 8,901호였고  총동원연맹에 소속된 사람은 457 9,162명이었다 조직을 통해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제로 통제동원하였다.

 

1942 일제는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창설하여 한국인 강제 동원의 초석을 다졌고,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한국인에게도 확대 적용하여 강제적 징용을 실시하였다.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로 징용된 이들은 사할린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와 남양 군도(미크로네시아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중 또는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었고사할린의 징용된 조선인들은 냉전의 시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한편 전투력 약화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군인·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 2,684명이라고 하였다그렇지만  통계에는 후에 알려지게  종군 위안부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794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현재도 징용보상책임문제가 한일 양국간 현안  하나이며일본에서는 당시 일본제국 정부에서 그러한 일을 지시했다는 문서가 없음을 이유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2] 그러나 이후 보상받은 일제 징용 보상금  일부를 다른 목적으로유용해 써서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3]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보상금으로 책정됐던   229억원을 민주화 운동가들의 보상금으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3]

 

한편 위키백과는 일제의 중국인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다뤘다

1941 중국 점령 지역에서 전면적으로 중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강제노동제" 실시하였다특히 만주 지역에서는 일본 관동군에 의해 만주국을 내세워 중국인을 동원시켜 대규모 군사 시설이 건설되었고  규모는 연인원 100만명에 달했다중국인 징용자들은 일본 본토조선  동남아의 일본 침략 지역에까지 보내져 전쟁에 이용되었다일본 본토로  사람들은  4 명으로 35 기업 135 작업장에배치되었는데 이중 6800 명이 열악한 환경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

 

특히 1945 6 30 일본 아키타현 하나오까에서는 중국인 강제 노동자 1,000 명이 집단 탈출하는사건이 있었으며체포 진압 과정에서 418명이 살해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자는 김명철 선생 가족과 함께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들 비를 방문한 이후에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 최고 관광지로 알려진 니꼬와 나수의 온천장들과  (1)유다끼 폭포, (2)유즈노다끼 폭포, (3)개곤노다끼 폭포를 두루 구경하고그리고 나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이 있는 사찰을 구경했다이에야스는 조선과 우의를 다지며 지내는 것을 강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명철선생 가족과 23일의 일정을 마치고 사이타마로 돌아와 자동차의 주행거리 표식판을 보았을  우리 일행이 여행한 거리는 16백리( 666킬로메터) 가리키고 있었다김명철 선생가족과 함께  이번 여행은 기자에게는 학습여행이었고재일동포들의 삶의  부분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있는 유익한 여행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조미문제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김명철 선생(72) 조선대학교 10 졸업생인 그의 부인 구순덕 여사그리고 2남중 장남인 김성령씨(40, 와세다 정치경제학과 졸업생) 함께 잊지 못할 추억들을 아로 새기며 기자는  가족들의 덕택으로 역사기행을   있었다친가족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이하여  김명철 선생 가족 모두에게  다시 한번  지면으로나마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일본]고구려정신이 1300 이어온 고려신사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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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꼬/나수=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김명철 선생 가족들의 배려와 안내로 고구려 시대를 돌이켜 보는역사기행도   있었다. 장소는 고구려가 망한 시기에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고려신사’를 짓고 1,3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행사를 치른 곳을 안내하여 고려신사(일본말로는 고마진자) 참관하면서 우리민족의  때를 되돌아 보았다.

 


 

https://youtu.be/G4CukmhF5Lo


 

https://youtu.be/_1OiZkhRwzU


 

고약광(高若光) 고구려 보장왕 왕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668 고구려 패망 일본 나라 시대 사이타마 정착하였다. 일본에서 왕씨(王氏) 칭하였기 때문에  왕약광(王若光)라고도 한다. 일본 이름은 고마노 쟛코우(일본어高麗 若光(こま の じゃっこう)) 불리워졌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그가 고구려의 왕족이었는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다. 일본에서는 그에게 외국 왕족의 자손을 뜻하는 고키시()() 가바네 내렸지만, 고구려 왕족으로서의 그의 출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 혹자는 마찬가지로 일본에 귀화한 고구려의 왕족 배래복덕(背奈福) 약광을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약광과 함께 정착했다는 고구려 유민들의 숫자가 1799명이나 육박했다는 기록과, 고구려 멸망 일본에 흩어져 살던 1799명의 유민들을 규합하여 고려군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기록만으로도 해당 지역에서 그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를 증명해주며, 이는 그가 고구려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고약광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 천지 5(666)으로, 보장왕이  파견한 사신단의 부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668 고구려가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패망하면서 그는 귀국할 기회를 잃었다.

 

일본 조정은 그에게 5위하의 관위를 내렸으며, 대보 3(703)에는 문무천황(文武天皇)로부터 고려왕(高麗王) 카바네를 받았다고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적고 있다. 다만 이를 끝으로 일본의 역사에서약광내지는고마노코키시라는 카바네를 칭하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서기》의현무약광 과연 《속일본기》의고려약광 동일인물인지 어떤지도 제대로 증명이 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고려(高麗)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가미노쿠니(相模郡) 오이소(大磯, 지금의 가나가와  오이소 ) 살았으며, 영귀(靈龜) 2716 무장국(武藏國) 고마군(高麗郡, 고구려 마을) 설치됐을 , 조정은 동해도(東海道) 7 구니에서 1,799명의 고구려인을 고려군에 이주시켰다.(《속일본기》)

 

그때 고려군의 군수격인 대령(大領)으로 임명된 것이 바로 고약광이었다는 것이다. 오이소를 떠나 당시 황무지였던 고려군을 개척하고 민생을 안정시킨 약광이 오이소를 떠난 뒤에도, 오이소 사람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고려사(高麗寺) 짓고 고약광의 영혼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다카쿠(高來) 신사와 일부 흔적만 남았고, 메이지 시대의 신불분리령에 따라 신도 편입됐고, 현재는 약광 대신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다가나가와  나카()  오이소 (大磯町) 고마야마(高麗山) 소재한다.

 

만년의 약광은 머리칼과 수염을 길러 고마군 사람들로부터흰수염님(白髭,백자상)’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약광은 생전에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생전에 약광은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제사지내는 신사를 세우고 거기에 다케노우치노 스쿠네(内宿禰) 제사지내며 숭배했고, 사후에는 고려군 사람들로부터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고마 신사(고구려 신사) 세워진 뒤에는 백자명신(白髭明神)으로서 신사에 모셔져 오늘날까지 제사를 받고 있다.

 

성천원(聖天院) 고려신사(高麗神社)

 

약광과 같이 망명한 고구려 승려 승락(勝樂) 성천원과 고마신사의 전신인 승락사(勝樂寺) 세우고 그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가져온 환희천(歡喜天)(또는 성천(聖天)이라고도 ) 안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광은 사후 군민(郡民)들에 의해 불법(佛法) 지키는 산신(山神)으로 추대되었으며 종손이 대대로 승락사 안에 있는 사당(산신각)에서 제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명치유신이후 신불분리령 따라 승락사가 성천원과 고려신사로 분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광을 모신 사당에 기원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인사들이 그의 사당을 찾는다고 한다.

 

약광 사후 고마 가문은 장남인 가중(家重) 이었고, 성천원은 약광의 3 성운(聖雲) 주지가 되었다. 특히 성운은 승락의 제자로써 뒷날 고마 가문이 일본 천태종(天台宗) 계열의 모토야마수험종(本山修驗宗) 승려가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한다.

 

 

니꼬와 나수의 온천장들과 산정에 위치한 아름다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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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에 위치한 쥬젱지고호수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니꼬 산골짜기에 위치한 (1)유다끼 폭포, (2)유즈노다끼 폭포, (3)게곤노 다씨 폭포들의 용태도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폭포들과 배경의 산들이 조화롭게 배합하여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호수들을 방문하는 동안 산길에는 야생원숭이들이 뛰노는 광경도 특이했다. 사이타마를 돌아오는 길에 <도꾸가와 이에야스> 무덤이 있는 웅장한 사찰도 구경했다. 일본 역사 2천년 동안 조선은 헤아릴수 없이 많은 시기에 일본의 침략을 당했지만 도꾸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들어와 2백년 동안은 -일간에 통신사(사절단) 왕래가 잦았고,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으로 회고되었다.

 

기자는 23일동안 김명철 선생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과 함께 여행한 추억들을 포함하여 우리민족사에서 용서하지 못할 강제연행 노동자들에게 가한 잔인무도한 일제 지배세력에 대한 참을 없는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뜻깊은 여행이었다. 김명철 선생 가족 모두에게  다시한번  감사를드린다.()

  


 일본 김명철박사, '김정은 통일전략' 영어판 발행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1720

일본의 독특한 , 《국평사》의 윤벽암 애국스님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26

[일본]모두가 눈시울 적신《우리학교》수업들 참관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17

 

도꾜《조선대학교》창립60돌행사관련 흥미로운 풍경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16

 

일본《조선대학교》와 중국《연변대학교》교류협정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7803

  도꾜《조선대학교》창립60돌기념 국제학술토론회 진행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14

 

 *도꾜 방문중인 해외동포들 "가는곳 마다 감동과 감탄"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12

*일본《조선대학교》 창립60돌기념행사에20여명 해외동포들 참석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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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오사카 박금숙님의 댓글

오사카 박금숙 작성일

로길남 박사선생님,

우리 오사카에도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한번 모시고 싶습니다.

오사카
박금숙 올림

김진송님의 댓글

김진송 작성일

중국에 오신다지요?  제가 공항에 ...모시러 나가겠습니다. . . 진송

최종완님의 댓글

최종완 작성일

「트람프 쇼크」가 없는 나라

미국 대통령선거에서의 트럼프 승리를 통해 세계 각국에 충격이 달렸다고 미디어는 전했다. 조선의 미디어는 이번 선거결과에 대한 정부의 립장을 전하지 않았다

▼ 미국의 력대정권은 조선적대시정책을 답습해 왔다. 「누가 대통령이 되여도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것에 변화가 없다」는것이 지금까지의 조선정부의 립장이다. 미제의 강권과 오만의 실태를 죄다 아는 정부는 그 나라의 대통령선거의 결과에 일희일우 할것은 없다

▼ 당연히 조선국내에 「트람프 쇼크」는 발생하지 않았다. 평양의 사람들도 그 선거 결과와 향후의 정세를 랭정하게 분석하고있었다. 선거전에서의 발언이나 행동이 당선후의 언동과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Change」를 호소해 당선한 대통령이 현상유지에 만족하여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상황을 악화시키는것을 사람들은 목격했다

▼ 그러나 조선문제에 관해서는 오바마로선의 한계는 명확하고 이번에 누가 당선했다고 해도 현상유지는 선택사항이 되지 않는다. 대화, 혹은 전쟁으로 련결될수도 있는 제재와 군사적위협의 새로운 강화의 양자택일밖에 없다. 그 선택자가 트람프로 정해졌다. 과연 당선자는 파멸을 피할수 있는 영리한 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인가. 평양에서 주고 받는 정치담의는 지금, 온통 그 화제로 자자하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노박사님!
수고 참 많으셨습니다.
다시한법 분노케했습니다.

카나다 동포님의 댓글

카나다 동포 작성일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돈 한잎 안내고  일본 조선대학교 창립60주년 행사 참가한 거나 다름없고 니꼬-나수의 자연을 구경할 수 있었고, 강제연행된 우리 동포들의 슬픈 사연을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민족통신이 참으로 장한 일 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카나다 동포 김신

택사스 동포님의 댓글

택사스 동포 작성일

감사^^

노선생님 덕분에 일본구경 잘했습니다.

재일총련 조선인들의 가슴아픈 사연들이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어서 속히 통일을 이룹시다. 재일동포들을 위해 그리고 미주동포들을 위하여~

구기춘

민족님의 댓글

민족 작성일

살아있는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선생님을 몇일씩이나 안내하여 주신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산타아니타님의 댓글

산타아니타 작성일

일본에 일제 만행의 증거들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산 교육장으로 잘 보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꼭 한번 가 보고 싶네요.
김명철 박사님 가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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