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김일성 주석과 길림《육문중학교》- 현지방문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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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6-09-04 19:09 조회7,898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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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일행은 항일투쟁 사적지 탐방취재 일정 첫 장소를 중국 길림시로 정하고 , 그 첫 참관지를 김일성주석께서 혁명활동을 시작한 출발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 육문중학교 시절(1927년 1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길림시 송하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육문중학교를 찾았다. 김주석은 이 학교를 떠난 그 이듬해인 1930년 6월30일 장춘지역의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카륜회의에서 역사적인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한바 있었다. 그 내용이 해내외 애국운동 세력에게 크게 고무시킨바 있었다.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사람 자신들이며 조선의 운명개척도 조선 사람들 자신들이 개척하여 나가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 혁명사상은 주체사상과 주체철학의 골간이 된 것으로 분석되었다.[편집실]
[사진]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신건축물
[사진]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앞 거리를 걷는 재학생들
[사진]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교정 안에서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재학생들
[기획2]김일성주석과 길림《육문중학교》
[중국 길림=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기자는 중국서항일투쟁 사적지와 관련하여떠 올리면 길림시에위치한 《육문중학교》를 생각하지않을 수 없다. 이곳은 권총두자루 이야기와 관련하여김일성 주석이 10대 소년시절인 1925년 평양을 떠나면서조국이 독립되지 않으면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떠났다가1945년 2년만에 조국 땅을 돌아와 통일조국을 이룩하기위해 가진 노력을다 기울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미 제국주의 세력과이승만 사대매국 세력이결탁하여 5.10단선을 강행하여우리 민족분단을 고착화시켰다. 그후 김일성주석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통하여 통일조국을 쟁취하고자 남과 북 56개 제정당, 사회단체들을 망라하여 민족대단결에 의한 조국통일을 구상하였지만 미제와그 하수인들인 이승만세력에 의해 온겨레의염원인 자주적 평화통일은 마련되지 못했다.
우리 해내외동포들은 항일투쟁시기를 포함하여분단시대를 겪으면서 그리고코리아전쟁 시기 3년과 1953년 7.27정전협정, 그 이후 지금까지60여년 동안 지내온 역사를돌이켜 보면… 과연 누가 분단을 고착해온 세력이며 외세, 즉 미제국주의 세력에편승하여 기득권을 누리며자기 국민들을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하고억눌러 온 사대매국세력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알게 되었다.
우리 남녘동포들과 남녘에서 해외로이주해 간 이민자동포들은 오랜 동안 북녘의 역사와 주체사회주의를 이끌어 온 김일성주석을 위시하여 그의 혁명위업을 이어받아 주체혁명의 업적들을 쌓아 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선대 지도자들의 혁명업적을 그대로이어받아 오늘날 주체혁명의 위업을 온 세상에 떨치며 김정은시대의 문명대국을 건설해가고 있는 오늘의조선이 얼마나 위대한나라인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을 고립하고압살하기 위해 대조선적대시 정책으로 일관해온미제국주의 세력과 일본 지배세력도 그리고 미국과일본 일반 대중들도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이 나라들의 대중언론들도 제대로알지 못하고, 심지어는지식인들도 극소수 이외에는상당수가 조선을 왜곡하고오도하는 정보들에 의해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중국 땅 동북지역 사적지들을 다녀보면조선의 혁명가들이 얼마나많은 피를 흘렸는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가들이 일제와 항거하면서 얼마나 훌륭하게싸웠는가도 깨닫게 된다.
《ㅌ. ㄷ》는 타도제국주의동맹 (打倒帝國主義同盟)의 약자
김일성 소년혁명가는 이미 14세 되던 1926년 10월17일 《ㅌ. ㄷ》라는 혁명조직을 결성하여조직적으로 투쟁하는 길을 택했다. 《ㅌ. ㄷ》는타도제국주의동맹 (打倒帝國主義同盟) 을 의미한다. 이 혁명조직은 김일성 소년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직후, 만주 화전현에서 결성한 청년중심의 항일혁명 조직이다.
북녘 언론, 《우리민족끼리》 상식에올라온 《ㅌ. ㄷ》에관한 설명란에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강령은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적형편과 계급관계, 우리 인민의 세기적염원을 정확히 반영하여조선혁명이 나아갈 길을 처음으로 명시한 주체적인혁명강령이였으며 우리 인민을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위한 참다운혁명의 길로 힘있게고무추동하는 전투적기치였다.
《ㅌ. ㄷ》는동맹원들이 로동계급의 혁명사상을 깊이 연구하고광범한 군중속에 조직을빨리 늘여나가는것을 자기의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방침으로 내세웠다.
《ㅌ. ㄷ》의결성은 조선혁명의 새로운출발을 알리는 력사적인선언으로서 이때부터 조선민족해방운동은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오염된 낡은 시대와 결별하고 자주성의원칙에 기초하여 전진하는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되였다.
《ㅌ. ㄷ》가결성됨으로써 조선혁명은 뚜렷한투쟁목표와 전략을 가지고자주적발전의 길을 걷게 되였으며 우리 인민은력사의 주체로서 자기 운명을 자신이 책임지고개척해나가게 되였다. 《ㅌ. ㄷ》의 결성은 또한 우리 나라에서 로동계급의 새형의 당, 주체형의 혁명적당창건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으로 되였다. 《ㅌ. ㄷ》가 내세운자주성의 원칙은 우리 당건설과 활동의 원칙으로되였으며 《ㅌ. ㄷ》가키워내기 시작한 새 세대 청년들은 우리 당창건의 골간으로 되였다.
2016년 5월 조선로동당 창건 70돐을 뜻깊게 맞이했던 조선로동당은 바로 《ㅌ. ㄷ》에 뿌리를 두고있다. 《ㅌ. ㄷ》는 결성이후적극적인 활동을 벌려 광범한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새 세대 혁명가로 키워냈으며 혁명의대중적지반을 닦고 전반적조선혁명을 발전시키는데서 커다란공헌을 하였다.
육문중학교도 ‘세기와 더불어’
그 나이에한창 학업에 열중하고어머니가 해 주는 야식 간식 먹으며자라나야 할 때에 그 당시의 모든 그 또래의 청소년들이 그러했듯이 김성주는배움의 운도 없었고배우고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고향 평양 창덕학교에 다니던중에 아버님 병환 소식을 듣고 무순으로돌아와야 했고, 아버지가돌아가신 후에 화성의숙에 들어갔지만 그 곳에 더 이상 있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 이상 아무것도아니었다. 그 중 가장 공부하고 싶었던곳이 육문중학교였는 데, 일본 개들은 혁명아의냄새를 맡고는 그를 감옥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렇게 육문중학교는 그의 마지막 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제도권 학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 역사의 현장이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못나왔지만 평양에는 '김일성대학' 이 있다. 마찬가지로 학교 문턱에도안 가 본 여인의 이름을 딴 '장철구상업대학' 도 있다. 이 말은 북에서배움의 기준은 남쪽의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왜 길림을 갔으며
길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회고록 <세기와더불어>에는 그가 육문중학교에 간 동기, 그리고 입학하게 된 과정, 수학 도중에생긴 일들에 관하여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있다. 즉, 제 1 권에서는 '선진사상의 탐구' 라는 제목 하에 육문 중학 시절을회고하고 있을 만큼 김일성주의 사상 노선의발상지가 여기 부터였다는 것을 암시하고있다.
그가 길림에가게 된 동기는화성의숙의 고루한 학습 내용과 소위 오늘 남녘 보수들이 그러하듯이 봉건 잔재 의식에서 한 발걸음도교육 내용이 나아가지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림' 그리고 '육문중학교' 에 대하여 김주석은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집에서 한달 가량 머무르다가 설까지 쇠고 이듬해 정월중순에 무송을떠났다. 내가 길림에도착한 것은 행인들의왕래가 번잡한 한낮 이였다. ...오랜 력사를자랑하는 대도시의 번창한풍경은 첫 순간부터조용하고 한적한 농촌지대에서만 살아온 나를 위압하는 상 싶었다."
이 무명의한 소년이 앞으로대제국 미국을 쥐락펴락할 인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가슴 설레며 길림 기차역을 빠져 나온 김성주가 받은 첫인상은길림의 물장사군 들이었다. "그날 내가 본 도시의 풍경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거리에 물장사군들이 많은 것이었다. 물의 도시로 이름나한때는 선창이라고도 불렀다는고장인데 음료수가 부족하여저렇게 물장사만 성행해가니 길림이라는 도회지의생활이 점점 각박해질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였다."
예수는 세상의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면서"너희는 무엇을보려 광야에 나갔드냐. 좋은 옷 입을 사람들 이드냐 바람에날리는 갈대더냐" 고 묻고 있다. 성주의첫 눈에 들어 온 것은 그 도시의 가장 하층 막장에 사는 물장수들의 모습들이었다. 이들이이 도시의 상표 같이 느껴지게 한 것은 그가 앞으로무엇을 할 것인가를정해주는 방향타와도 같았다. 그렇다. 성주가 여기에온 것은 저들을위한 것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하는 것 말이다.
길림거리에서 이렇게한 눈에 들어 온 물장수들의 행렬을목도한 혁명아는 이렇게자기의 호연지기를 말한다. "물 한모금에도 수판알을튕겨야한다는 도시생활의 중압감이첫 걸음부터 심신에육박해왔지만, 나는 그 중압에 저항하는 심정으로가슴을 쭉 펴고 활개를 치며 도심을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렇게 성주는호연지기와 함께 북산방향을 향해 쭉 뻗은 차루가를 따라 걷는다. 자기가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해야 겠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이있는 인간에게는 누구나온 우주가 자기의집일뿐이지 낯 선 곳이란 것이 따로 있는 법이 아니다. "길림은 처음 와 보는 생소한 고장이었으나 별로 낯이 설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와보고싶던 곳이고, 아버지의친구들이 많은 곳이어서그랬는지 모른다. 나의 수첩에는 내가 찾아가인사를 드려야할 아버지의친구들과 친지들의 주소가십여 개나 적혀있었다.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 현익철, 고원암, 박기백, 황백하와같은 사람들은 모두 길림에 있는 아버지의친구들이였으며 내가 만나보아야 할 사람들이였다." 이런 인물들은 아버지김형직 선생이 어떤 분이었고 무엇을 하다 죽었는지를 말 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남한 학자들은 김형직선생도 가짜라고 한다.
남녘에서는 어머니의치맛바람이 유명하지만 미국에선'helicopter father'가 있다. 우리말로 '잠자리 아버지'라고 나 해둘까. 기러기 엄마/아빠와비교가 된다. '잠자리아빠' 란 자식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용돈 같은 것을 날라주는아빠란 뜻이다. 그러나성주에겐 이런 아버지가이미 돌아가시고 없다.
첫 번째로찾아 간 사람의집이 오동진이였다. 차루가와상부가사이에 있는 그의 집부터 찾아갔다. "사실 그때 나의 마음은은근히 긴장되여있었다. 아버지의친구들이 모처럼 주선해준화성의숙을 중퇴한 것 때문에 오 사령이못마땅해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동진의 말 한마디는 "소문도 없이 길림에 불쑥 나타난너를 보니 너의 아버지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아버지도 숭실중학교를 그렇게 갑자기중퇴하셨더랬지.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퍽 이후에는아버지가 결심을 옳게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아무튼여섯 달 만에 의숙을 포기하고 길림으로온 그 결단성이놀랍다. 길림이 리상에맞는 고장이라면 여기서너의 우물을 파거라."
큰 인물은남의 과거를 들추어탓하지 않는 법이다. 현재 그 사람의위치와 입장에서 생각을해주는 법이다. "역시 오동진다운 활달한 사고방식이라는 고마운 생각이들었다."
그날 오후 오동진은 성주를 삼풍잔(삼풍려관)에 데리고가서 독립운동자들에게 인사시키였다. 그 독립운동자들속에 김시우가소개신을 써주면서 만나라고하던 김사헌도 있고, 정의부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는장철호도 있었다. 이 여관주인은 손정도목사의 동향인이였다. 그는 평안남도 증산에서살다가 손목사의 권유로길림에 들어와 삼풍려관을 운영하였다. 삼풍려관에서 일본령사관까지의 거리가 100미터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자들의 본산지가 삼풍려관인 데도 일본 영사관은 지척에 있었다. 이를 두고 "등잔밑이어둡다." 고 한다. 그런데 삼풍려관에서 애국자들이 붙잡혀가는 불상사는한 번도 일어나지않았다.
나중에 유격활동을 할 때에 김주석은 '일로천행'이란 전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적들이 빤히 보는 대로를 보무당당히 걸어 돌파하는 전법이다. 이것도아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근거한소박한 전법이 아닌가생각해 본다.
누가 육문중학교를 소개했나?
성주를 육문중학교에 소개한 장본인은김사헌이다. "김사헌은 김시우의소개신을 보고나서 나에게자기가 잘 알고 있는 김강이란 조선사람이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교원을하는데 그 학교에들어가는것이 어떤 가고 물었다. 시내에 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인데 길림에서는 그중 경향성이 좋다는 것이였다. 길림육문중학교가 경향성이좋은 학교라는것은 사회계에널리 알려져있었다." 교장은리광한인데 부임된 지 얼마 안된다고 하였다. "교장을 네번이나 갈아치운것만 보아도 육문중학교가 정의와 법도를얼마나 중시하는 학원인가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육문중학교의 이 혁신적인교풍이 나의 마음을끌어당기였다."
김사헌은 다음날성주를 육문중학교의 김강선생한테 소개해주었다. "나는 그의 안내로 리광한교장을 만났다. 리광한은중국민족주의좌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주은래총리의 중학시절동창이었고 어려서부터 주총리의영향을 받은 량심적인지식인이였다. 내가 주총리와리광한교장의 연고관계를 알게 된것은 수십년의 세월이지난 뒤였다. 언젠가나는 우리 나라를방문한 주은래총리를 만나 청년시절을 회고하면서 나에게많은 도움을 준 중국 사람들에 대하여이야기하다가 리광한 교장의이름을 들었다. 주총리는그 말을 듣자 여간만 반가워하지 않으면서자기가 천진에서 남개 대학부속 중학교에 다닐 때 그와 같이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육문중학교에서 그의 포부는?
리광한교장은 그날 성주에게 학교를 졸업하면장차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내가 나라를 찾는 일에 한몸 바치고싶다고 서슴없이 대답했더니 그는 아주 좋은 포부라고 긍정해주었다. 흉금을 터친 담화의덕이라고 할지 리광한교장은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나의 요구도 쾌히 들어주었다."
리광한 교장의도움은 지대했다.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 나는 이 선생한테서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내가 혁명사업 때문에자주 결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었으며 군벌당국에 매수된반동교원들이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모저모로 보호해주었다. 군벌이나영사관경찰들이 나를 붙잡으러올 때면 미리 련락하여 울타리 밖으로빼돌리기도 하였다. 교장이량심적인 지식인이다보니 그 밑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발을 붙이고일 할 수 있었다."
육문중학교시절 누가 성주를 도왔나?
성주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고 돌아오자오동진부부는 성주에게 학교를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들어가지 말고 자기네집에서 다니라고 하였다. "사실 그때 내 처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일이였다. 나는 어머니의뒤받침으로 공부를 해야 하였는데 우리 어머니는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는겨울이나 여름이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한 달에 3원정 도씩 나에게보내주었다. 그 돈으로월사금과 공책값, 교과서값을 대고나면 신 한 켤레 사신기가힘든 형편이였다."
성주에게 아버지는고인이 되었고, 어머니는삯빨래 삯바느질로 보내주는학자금이 전부였다. "이런 처지에서 나는 아버지친구들의 권고와 호의를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길림에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집에 있으면서 학교에다니었고 그가 체포된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 현묵관네집에도 몇달 그리고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의사령을 하던 리웅의집에도 얼마간 가있었다."
육문중학시절 무엇을 하였나?
일본군경들에게 쫓겨 다니는 조선 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길림에많이 모여들어 "동북 3성에서 배일의 책원지는길림" 이라 할 정도였다. 새것을 지향하고진리를 찾아 모대기는청년학생들도 이 성시로찾아왔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성주에게길림은 형형색색의 사상조류가 집결된 곳이라고할 수 있었다. "내가 길림에 왔을 때 ≪ㅌ.ㄷ≫의몇몇 성원들은 화전에서약속한대로 이 도시에와서 문광중학교를 비롯한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붙이고있었다. 그들은 내가 길림에 나타나났다는 소문을듣기 바쁘게 오동진사령의 집으로 뛰어왔다. 돈이 귀하고 마실 물이 귀하고 땔 것이 귀하지만 책이 많아서 좋다. 나는 책이 많으면 배고픈고생과도 타협할 수 있다고 롱을 하였다. 그것은 나의 진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길림이 성주에게 준 혜택은 그가 상월선생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던 원치 않던 도산 안창호를간접적으로나마 조우했다는 사건도큰 사건 가운데하나이다. 그리고 그가 생후 처음으로 옥살이를한 곳도 길림이었다.
결론
김상일 교수는“회고록을중심으로 김일성과 육문중학교 그리고 그 주변을 엮어 놓아 보았다. 여기에 일관성이있는지 없는지 한국 학계는 답해야 한다. 그리고 조중동은 역사를더 이상 왜곡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번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2010년 8월26일 육문중학교 방문)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은 여행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언급했다.
*홍영순 노병(80)과 김명희 선생(71)과의 대화
육문중학교 구교 건물을 참관하며 김일성주석의 중학시절 발자취들과 혁명조직을 묶어 세우는 노정들과 그 역사들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기자는 룡악산식당(조선사람이 경영)에 홍영순 여사와김명희 선생이 마련한점식식사를 나누며 정다운대화를 주고 받았다. 홍 여사는 어릴때부터 남자성격처럼 괄괄했고씩씩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말한다고 설명하면서 1949년 11월27일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가 전쟁시기에 다리에부상을 입고 중국군에복무하던 남편 김재권선생을 따라 중국에나와 치료를 받다가산것이 중국에 사는 조선동포가 되었다고 한다. 남편은 문화혁명시기인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홍영순여사는 중국에 살면서중국 노인들이 김일성주석을 가리켜 ‘템빙장(천출명장)’이라고 격찬할때 당연지사라고 생각하며 기분이흐뭇했었지만 요즘에 와서 중국노인들이 이러저러한 시사이야기를 하면서 김정은위원장(존원수)은 하늘이 내려준 장군(템빙장)이라고 존경의 말을 할때 느끼는 소감은한층 더 기분이좋았다고 설명한다. 중국 노인들은 세상이치에 밝아 이들이 말하는 것은 중국 대중들에게 설득력을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들 노인들은 그만큼박식하고 현재를 올바로진단하면서 미래를 바로 전망할수 있는 능력을가진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김명희선생은 왕청소학교, 왕청중학교 나왔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조선사람을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중국사람들에게 구박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의 부친은 조선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감옥에끌려갔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께서 혁명활동을 시작한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사직지를자주 찾아가 돌보기도하고 외부에서 손님들이오면 안내하기도 한다면서이 사업이 아주 의의깊다고 말했다. 이러한소감은 홍영순 노병도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특히 김일성주석이 혁명활동을 시작한길림에 살면서 육문중학교에 자주 갈 수 있어 기쁘다면서 지난 2010년 8월26일 김정일 장군(국방위원장)이 이곳 육문중학교를 다녀간 이후 이곳이 중국 안팎에널리 소개되었다고 상기시켜주었다.
조선은 육문중학교를 '고 김일성 주석이중국 혁명가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인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으며, 김 위원장도 여러 차례 이 곳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직접 찾은 것은 2010년 8월26일이었다.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010년 9월8일 기사를 통해 육문중학교를 '조중친선의 상징'이라고평가하면서 자세히 소개했다.(이 보도 자료는또 남녘의 인터네트언론 ‘민중의 소리’ 정지영기자가 2010년 9월8일 로동신문을 인용보도)
김일성 주석이 1927년 1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 공부하면서 "혁명활동을 벌이시었으며 조중친선의 연대기 위에 빛나는 장을 아로새기신 뜻깊은 곳"이라면서 김 주석이과거 "길림육문중학교는 유지들이운영하는 사립학교였지만 길림시에서 제일 괜찮은학교였다"고 했던 말을 인용했다.
신문은 또 "길림육문중학교는 위대한 수령님의혁명활동연고지의 하나인중국 길림성 길림시에있으며 시내중심에서 좀 떨어진 송화강반에 자리잡고있다"고 설명한 후 이 학교에는 김 주석이 공부하던 옛 건물과 새로 지어진학교건물, 기숙사와 강당 등이 들어서 있다고보도했다.
신문은 "'ㄷ'자형으로 된 단층건물의 옛 교사는주체6(1917)년에 길림시의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라면서 "앞에는 송화강이흐르고 뒤에는 북산이솟아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있는 학교는 설립될당시 산천이 아름다운곳에서 수재가 많이 나온다는 뜻을 담아 길림육문중학교로 명명됐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길림시가 일제에 강점됐던 1935년 "이 학교의진보적교원들과 학생들이 반동군벌들과 그 앞잡이인반동교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는 이유로 하여 강제로 해체"되는 역사적 시련을 겪었으나 "새 중국이 창건된후 중국당과 정부는교육사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면서 학교의 옛 교사에 길림제22중학교를설립"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1964년 2월 김 주석과의 인연을기념하기 위해 "길림육문중학교의 명칭을 원래대로회복"하는가 하면 김 주석을 기념하는여러 시설들이 갖추었다고 한다. 교실에는육문중학교 시절 김 주석의 초상화와 동상이있고 당시의 책걸상이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신문은김 주석이 육문중학교 시절 "공청을비롯한 반제청년동맹을 확대"해 나갔고 동맹휴학이나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등 항일 운동에 나섰으며 "길림시의여러 교정과 북산에서비밀리에 진보적서적들을 탐독하고널리 보급"하는 활동을 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신문은이 학교에 세워진김 주석의 동상에는 "중국의 노세대 혁명가들과 어깨겯고 싸우시면서 마련하신 불멸의조중친선을 변함없이 빛내여나가려는 중국당과 정부의굳은 의지와 각계층군중의 뜨거운 지성이깃들어있다"고 말했다.
또 중국당과정부가 1953년 설치해 60여년의 역사를 지닌 '김일성동지독서기념실'이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3개의 방으로된 기념실'도 꾸려져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신문은 지난 달 김 위원장이 방문(2010년 8월26일)해 "'오랜 역사와 전통을가지고있는 육문중학교가 훌륭한일군들을 더 많이 키우기 바란다'는 친필"을 남겼다고소개하면서 이를 통해 이 학교가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더 큰 의미를지니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주석께서 육문중학교 생활(1927년 1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하고 난 그 이듬해인 1930년 6월30일 장춘지역의 교외에자리잡고 있는 카륜회의에서 역사적인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여 그 내용이해내외 애국운동 세력에크게 고무시킨바 있었다.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사람자신들이며 조선의 운명개척도 조선 사람들자신들이 개척하여 나가야한다는 사상으로 이 혁명사상은 주체사상과 주체철학의 골간이 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민족통신 취재진은이날 김일성 주석의역사적인 혁명활동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는 길림 육문중학교를 참관하고 홍영순선생과 김명희 선생과함께 조선식당 ‘룡악산’에 차려 놓은 오찬자리에 초청 받아 갔다. 이들이 민족통신취재진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다음에 계속~)
[기획1]중국 땅서 항일투쟁 전개한 발자취 탐방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110
댓글목록
KimChaek님의 댓글
KimChaek 작성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린 시절 공산주의를 학습하시고 여러 훌륭한 동지들을 얻으셨으며 일찌기 청년학생운동을 시작하신 육문중학교 !
상월선생과 이한광 교장선생.
육문중학교는 조선혁명의 모태가 되었다.
유럽학생님의 댓글
유럽학생 작성일
육문중학 만세!
청년학생 만세!
진짜진보 만세!
자주강국 만세!
민족통신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