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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1]김일성주석 연고자, 서순옥-김명주 가족대담(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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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11-09 12:36 조회6,66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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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편집인 노길남 박사는 최근 10 로동당 70주년 기념행사를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센양(심양) 머무는 동안 김일성주석과 그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생전에 인연이 깊은 연고자로 널러 알려져  (서순옥 항일여성투사와 그의 남편인 (김명주 항일투사의 7남매(34유가족  막내 아들인 김진송 선생(56) 만나 대담하면서 항일투쟁시기에 활동했던 연고자들이 어떻게 김일성주석과 김정숙여사와 인연이 되었고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 보았다. 그 대담 내용을 동영상과 함께 아래에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재중동포 연고자-막내 김진송, 김진옥 그리고 어머니와 주석-1993년.jpg

재중동포 연고자-어머니 서순옥 항일투사-1992년 접견.jpg


재중동포 연고자-49명 감옥탈출.jpg

재중동포 연고자-2012년 연변인민출판사 발행.jpg

재중동포 연고자-막내 2001년 유가족들과 어머니.jpg

재중동포 연고자-막내 2001년3남4녀와 어머니.jpg

재중동포 연고자-아버지 김명주.jpg

재중동포 연고자-어머니 서순옥 항일투사.jpg

재중동포 연고자-어머니 서순옥이 2005년8월 기념메달.jpg




[기획-21]김일성주석 연고자, 

서순옥-김명주 가족대담(동영상)



[중국 센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10 로동당 70주년 기념행사를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센양(심양) 머무는 동안 김일성주석과 그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생전에 인연이 깊은 연고자로 널러 알려져 () 서순옥 항일여성투사와 그의 남편인 () 김명주 항일투사의 7남매(34) 유가족 막내 아들인 김진송 선생(56) 만나 대담하면서 항일투쟁시기에 활동했던 연고자들이 어떻게 김일성주석과 김정숙여사와 인연이 되었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 보았다.

 

김일성 주석의 생애(1912.4.15~1994.7.8) 비록 짧았지만 그의 평생 업적은  조선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에도 빛나는 업적들을 남겼다. 김주석이 창시한 주체철학과 사상은 21세기에 들어와서 유일한 진보철학이 되어 왔고,  21세기에 존재하는 진정한의미의  사회주의 혹은 진짜 사회주의는 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현실로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도  그를 잊지 않고 영원히 추억할 것이라고 한다. 주석의 생애에는 동족이 아니지만 자신의 팔을 잃으면서도 주석의 생명을 살린 러시아 사람( 소련) 있었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받쳐 주석의 안전을 옹위한 중국 사람 그분의 연고자들이 많았고, 우리민족 성원들 가운데에도 손정도 목사를 포함하여 서순옥여사 등 연고자들이 많이 있다.

 

중에 서순옥 항일여성투사와 김명주 항일투사는 남다르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숙여사가 결혼하기 전에도 인연이 되어 함께 투쟁의 길에 나섰지만 결혼식에도 참석하는 한편 결혼 이후에도 함께 생활한 연고자들 가족이기에 특별한 관계라고 있다.   

 

김일성주석과 항일여성투사인 김정숙여사의 연고자인 서순옥과 김명주 이들 부부는 어떤관계이며 항일투쟁 시기에 어떤 일들을 하였는가?

 

막내아들 김진송 선생의 증언과 함께 그가 기자에게 선물로 , ‘항일투사 김명주 탄생 10 서순옥 탄생 91 기념문집’인 “불멸의 투사”(연변인민출판사 발행 주필 김철수, 부주필 지경택)라는 485쪽짜리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요약하여 아래에 소개 한다.(민족통신이 제작한 동영상 참조)

 

서순옥(1921.11.24~2009.4.18 항일투쟁시기 이름은 서순월) 김명주(1912.10.30~1969.8.17 본명은 김경만, 또 다른 이름은 한때 김경주) 결혼전부터 항일투쟁에 참여한 애국자들이었다. 서순옥은10 어린 나이에 중국 장백현의 요팡자라고 하는 산골에서 나물캐고 산나무 거둬 집안일을 돕던 시기에 항일부대 아줌마들이 어둠속에 마을에 내려와 선전물을 남기고 가곤했다. 유격대원들이 마을에 내려와 여성들을 설득시키며 포섭하는 과정에 “여성들도 힘을 합친다면 혁명에  성공할 있다”는 말에 끌렸다는 것이다. 어려 서부터 소작농 가정에서 고생해 서순옥 소녀는 죽도록 일해서 거둔 곡식은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고생만 가난한 생활이었기에 유격대원들의 설명에 귀가 솔깃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격대에 가담하게 서순옥은 1936 8월부터 부터 심부름도 하고, 밥도 지으며 지하사업을 하다가 1937 8월부터 유격부대에 지원하여 활동했다. 처음 몇년동안은 식량을 해결하는 일에 전념했다. 도시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여 있었기에 주로 산골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였다. 한두주일 굶는것은 보통이었고, 산속에서 산짐승처럼 지낸 것이 서순옥 투사의 4년동안의 간고한 생활이었다고 회고했다. 항일부대 6사단 1 소속으로 활동했다.

 

김명주를 만난 것도 1937 8 장백현 요팡자 산에 들어갔을 때라고 한다. 주로 김정숙을 포함하여 여성 서너명이 함께 있었다고 생전에 연변 방송국과의 대담에서 증언하며 주로 일들은 식량구하여 밥짓는 일과 재봉틀 일을 주로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서로들 이름을 말하지 않고 별명을 부르며 생활하였다. 유격대와 소련국경을 넘고 중국으로 오고 갈때에도 간부들은 지명과 장소를 알지만 서순옥고 같은 대원들은 몰랐다. 그것은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명주와의 결혼은 1941 소련 우라지보스토크에 체류할 때라고 한다. 당시 항일투쟁시기에는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삼가하였는데 두분의 결혼은 유격대에서 허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순옥은 김명주가 남편이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사라졌다고 가끔 오곤할 정도로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확실하게 알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간고한 투쟁과정이었다그는 해방정국을 맞아 유격대 대부분이 조국로 돌아갈때 시집식구들을 포함여 일부 친척들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여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살게 밖에 없었다.

 

조선은 해방정국을 맞았지만 기쁨은 잠시일 미국의 남한 점령으로 인하여 조국의 강토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고, 중국은 모택동세력과 장개석 국민당 세력간에 내전이 지속되어 김일성유격대는 중국의 요청에 의해 수많은 유격대원 간부들과 무기 10만정까지 지원하면서 유격대원 일부를 중국에 남겨두고  조선으로 진격한 시기에 서순옥-김명주 부부도 중국에 남게 되었다. 중국 모택동 군대가 장개석 국민당을 물리치고 승리했던 시기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가정사정 때문에 중국 땅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중 1960년대 중반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5~1976.12) 바람이 불어치자 이에 김명주는 과격모험주의자들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몰려 모진 탄압을 받다가 김일성 주석의 영향으로 위기를 벗어 났지만  탄압의 후유증으로 1969 817 중국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서순옥은 뒤늦게서야 1983 조국 조선을 방문했다.   방문에서 김일성주석을 만날 없었다. 그의 본명은 10대에 서순옥이가 아니고 서순월이었다. 그래서인지 최고지도자를 보좌하는 일꾼들에 의하여 상봉이 이뤄지지 않은 같다.  김일성주석의 연고자가 맞다는 이야기가 확인되자  드디어 1992 서순옥과  그의 막내아들 김진송, 그의 막내딸 김진옥 3명은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고 기쁨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후 1년만인 1993년에도 서순옥과 자녀들은 김일성주석과 재차 상봉시간을 가질 있었다.  

 

서순옥은 이후 중국정부에서도 2005 8 항일투쟁승리 60돌기념일을 맞아  후진타오(호금도) 주석으로부터 항일열사 기념메달을 수여받았다.  

 

김명주(1912.10.30~1969.8.17) 비록  항일투쟁을 위해  목숨걸고 싸워온 애국자였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  반혁명분자로 낙인받아  어처구니 없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재중조선인 역사학자인 김철수에 의하면 혁명렬사 김명주는 항일투쟁의 간고한 나날에 혁명에 참가하여 연길감옥의 캄캄한 철창속에서, 동북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영용히  혁명에 바쳤으며 10 내란(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피비린 바람속에서 ‘4인무리 박해를 받아 억울하게 숨진 우수한 공산당원이었다 것이다.

 

그는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의 가난한 농민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세린하에 이주하여 살다가 동북사로 옮겨 살게 되었다.  18살이 되던 1929 동네에 야학이 시작되면서 착취란 무엇이며 지주와 자본가는 무엇때문에 잘살고 노동자와 농민은 무엇때문에 못사는가 하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1930년초에 소선대에 참가하여 밀정들을 경계하고, 통신연락을 하며, 선전삐라를 살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이들을 착취하는 지주들과  자본가들을 족치는 일에도 가담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소선대의 대장이 석유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때문에 지주의 집에  방화사건이 것의 주범으로 몰려  연길현 공안국으로 연행되어 재판연기로 2년동안 구치생활을 하다가 1932년에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살아야 했다. 길림성 4감옥에 갇혔다.

 

감옥내 동지들과 탈출, 파옥투쟁을 구상했다. 첫번은 실패했으나 두번째는 17명의 결사대원들을 꾸려  역사적인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 되어 중국내  옥중탈출  성공역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항일유격대를 찿아 나섰다.  항일연군 등에서 활동하다가 6사단 7 4 1패에서 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싸움터 마다 용감무쌍하게 싸워 상급표창도 받았다.  김일성 장군이 지휘하는 보천보 전투에서도 모범적인 전사로 투쟁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과 소련의 하바롭스키를 넘나들면서 투쟁과 투쟁의 연속적인 생활로 24시간을 지새며 항일투쟁의 앞장에서, 때로는 후방에서 활약했다.

 

1945 8월초에 김명주는 가족 5명과 훈춘현 마적달 부근에파견되었다. 소련홍군과 항일연군과 마지막 투쟁을하기도 했다. 드디어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을선언하였다. 그는 기쁨에넘쳤지만 중국공산당의 막바지투쟁에 참여하는 임무를맡아 활약했다.

 

 1946 1 연길현 삼도만의 토비들을숙청하는 싸움에 참가했고, 장개석군과 마지막단계의 싸움판에뛰어 들어 중국 사회주의 혁명승리의 업적에기여하기도 했다. 1946 1947 장개석의 국민당 군을 퇴진시키는 지휘관으로 활약하며용맹을 떨친 군관으로평가 받았다. 그러나1948 건강이 약해지면서 후방근무로 배치받다가 1950 2월부터 연변전원공서 기업과과장으로 임명받아 일해 오다가 연변조선족 자치주가창립되자 자치주 민정처처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9 중국공산당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야기된 이른바문화대혁명으로 반혁명분자로 취급받아이해 817 향년57세로 운명했다. 하지만중국 당국은 그의 업적으로 재평가하여 지난 1982 혁명열사확인증 사후에수여했다.

 

기자와 중국 심양에서 대담한 김일성주석 연고자 가족의막내 아들 김진송선생은 부보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눈시울을적시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영도자들은 동지적 의리를 중요시 여긴다고 다시 한번 반추했다.  김진송선생은 대담을 마치면서 시간이 짧아 아쉬워하며 기자와 다음에 다시 만나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로 약속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대담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Rga2gte4vdM




*이번 방북취재 보도자료와 동영상들 모두를 보려면 아래로 들어가세요!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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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너무나도 안타까운 항일 빨치산투사의 유가족이네요? ㅡㅡ;;;;;;

단풍소리님의 댓글

단풍소리 작성일

북한 지도자 김일성주석님 대단하신 분이군요.
난 오랜동안 가짜라고만 들어와서 긴가민가했었는데...
진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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