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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96]세계적 바이올린 연주가 백고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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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08-06 13:56 조회19,3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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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뉴욕-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는 "엄혹했던 전쟁시기에 군사부문의 일꾼도 아닌 음악가를 외국유학까지 보내어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의 원대한 초석을 다져놓으려는 김일성주석의 파격적인 결단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며  조선이 낳은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가 백고산을 [연재-96]번째로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96]조선이 낳은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가 백고산(2)
 
*글:리준무(뉴욕 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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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했던 전쟁시기에 군사부문의 일꾼도 아닌 음악가를 외국유학까지 보내어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의 원대한 초석을 다져놓으려는 김일성주석의 파격적인 결단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해인 1954, 백고산은 모스크바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인민의 나라 조선은 그를 위해 국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린독주가로 활동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으로 나라사정이 무척 힘든 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세계최고의 명문인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의 연주가, 오이스락흐의 문하에서 기량을 닦고 높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김일성주석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백고산의 결심은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백고산은 극장무대에서만이 아니라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전후 복구건설로 들끓는 공장과 농촌의 작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땀 흘리는 근로자처럼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쳐나갔다. 정서적이면서도 격동적인 바이올린음악으로 근로자들이 벌려가고 있는 전후 복구건설사업을 힘있게 고무추동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나날에 백고산은 근로대중들 속에서 널리 사랑을 받은 바이올린독주곡 김길학작곡《고향길》을 비롯하여 박민혁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굴진공》, 김린욱이 작곡한《용광로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등 많은 독주곡들을 초연(첫 연주)하여 근로자들을 북돋아주었다.
백고산이 연주한 바이올린음악들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는데, 매력적인 그의 바이올린소리를 들어본 청취자들은 기쁨이 넘치고 생명력이 솟아난다고 좋아하였다. 특히 그의 바이올린소리는 감화력과 호소력이 강하여 깊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창조와 건설로 나래 쳐 가던 천리마시대의 민중들에게 합심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열에 넘치는 기백을 심어주었다.
민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공화국()은 백고산이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영예상을 받은 것과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조국의 영예를 빛낸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공훈배우칭호가 수여되었다.
백고산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김일성주석님의 사랑과 두터운 신임 속에서 근로대중들의 전후 복구건설을 고무추동 하는 공연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서양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서양악기를 조선음악의 한 부분으로 복종시킬 데대한 주석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아리랑》을 비롯하여 근로자들이 좋아하는 우리민요들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1962년 초, 음악예술을 시대와 민중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갈 데 대한 방향을 제시한 김일성주석은 현지지도의 종합공연무대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백고산의 모습을 보고 저것 좀 보라,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지고도 우리 민요를 연주하니 얼마나 좋은가하고 만족해 하였다.
연주활동에 있어서 주체를 세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강령적인 지침을 받아 안은 백고산은 주석님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핌 속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구현한 음악으로 조국과 민중들에게 이바지하였으며 바이올린과 더불어 조국의 명예를 세계에 빛내는 공인되고 관록 있는 바이올린연주가로 성장하였다.
조국의 따뜻한 배려 속에
김정일위원장은 주석님이 아끼고, 내세워 관록 있는 연주가로 키워놓은 조선의 자랑, 백고산을 바이올린으로 한 생을 빛내어가도록 이끌어준 위대한 스승이었다. 김정일위원장은 1971 6우리 식의 주체적 배합관현악을 창조하시던 역사적인 시기에 백고산을 당시의 영화음악단의 관현악단 악장으로 내세워 연주활동을 보다 새롭게 벌려나가도록 해 주었다.
백고산은 만수대예술단을 새롭게 하는 과업을 받고 품위 있는 여성기악중주단을 조직하고 이 단체의 기술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훌륭한 여성악단으로 빛을 내게 하였다. 이 악단은 3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악합주에 풀류트, 클라리넷 등의 목관악기와 호른 그리고 하프가 포함 된 실력 있는 악단으로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매력적인 악단이다.
김정일위원장은 주체예술의 우월성을 세계만방에 떨치던 때에 백고산에게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를 많이 배출하도록 하는 중요한 과업을 주고 이의 성공적인 성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세심한 지침을 주었다. 이때에 백고산은 발전된 바이올린교육자료를 많이 만들어 내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국제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되어 활약하였다.
드디어, 1976년 유고슬라비아(당시)에서 진행된 국제콩쿠르에서 백고산의 제자 김성호가 당당히 1등으로 입상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한 제자도 배출하였다. 이 무렵 김정일위원장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명품바이올린을 선물로 마련해 주었으며 1977년에는 인민배우칭호와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었다.
이렇게 김정일위원장의 사랑과 믿음 속에 백고산은 환갑이 훨씬 지나도록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특설학부 바이올린교수로 활약하면서 재능있는 후비들을 독주가로 육성하는데 정력을 쏟아 부었다.
언제인가 나의 스승이신 안용구교수와 함께 백고산의 영재교육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안교수님으로 말하면 미국의 저명한 음악학교인 피바디음악대학에서 수십년간 후진을 양성하던 이름있는 바이올린 교수이고 60년대에는 이남을 주름잡던 최고 연주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날 어린 백고산이 높은기량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는데, 오늘은 그의 학생들이 수준도 높고 세련된 연주를 한다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백고산은 아무리 어려운 곡도 입으로 가르치지 않고 꼭 연주시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이렇게 효과적인 교육방법으로 실기교육에서 이제까지 해 본적이 없었던 새롭고 특출한 성과를 내왔다. 교수들과 제자들은 이런 백고산을 무척 존경하였다. 동료들과는 진지한 교육자적자세를 유지하고 제자들에게는 개성과 장점을 충분히 살려나가는 과학적인 분석과 연주시범으로 백고산은 바이올린교수로써의 명성도 대단하였다.
조국의 사랑 속에 영생을 누리는 행복한음악가
원래 백고산은 고지식하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섬세하고 낭만적이었으며 의리가 깊은 음악가이기도 하였다. 백고산의 이런 성격에 호감을 갖고 있던 김정일위원장은 대 바르고 때묻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인 그를 더없이 좋아한다고 하였다. 김위원장은 자주 백고산을 만나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보람된 삶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백고산은 위대한 위원장님의 은정 깊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1997 11 26일 강의도중에 쓰러져 순직하였다.
백고산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지들을 한없이 아끼는 위원장님의 사랑 속에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다. 현지지도의 길에서 백고산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김정일위원장은 애석함을 금치 못하며 백고산동무는 어려서 부모 곁을 떠나 유랑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으나, 그가 조국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을 찾았고 재능도 꽃피웠다고 뜨겁게 추억하였다.
김정일위원장은 일군들에게 그의 장례와 부고를 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그의 시신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는 뜨거운 배려를 해주었다.
민족수난의 모진 세월동안 가난 때문에 수모도 많이 받고 눈물도 많이 흘렸던 백고산은 주석님과 위원장님의 지극한 배려 속에서 참다운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았으며, 온 나라가 다 알고 온 세상이 공인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연주가로 성장하여 값 높은 생을 향유할 수 있었다.
50여년의 세월을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당을 받들고 조국의 영예를 떨치며 주체음악발전에 기여하여 온 인민배우 백고산은 오늘 조국과 인민이 뜨겁게 추억하는 애국열사들과 나란히 영생하고 있다.
위인들의 품에서 행복을 누린 백고산
바이올린연주가 백고산의 일생을 되돌아 보면서, 그는 누구보다 나라와 영도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행복한 음악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이남에 있었더라면 음악가로써의 그의 재능과 일생이 이북에서처럼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이남에서 음악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으로 있는 백해제가 백고산의 친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가 서울에서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도 여느 이산가족들과 같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혼자서 짐작했을 뿐이었다.
비록 백해제는 악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소심하여서 그런지 그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음악계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백해제는 성격이 조용하고 사귀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술로 세월을 보내며 우울하게 지냈다고 하였다. 백해제는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외로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백고산이 인민군협주단 성원으로 서울에 내려와 부민관 무대에 다시 섰을 때 백고산은우리 형 지금 무슨 곡()을 하고 있어요?”라고 물어봤다는데, 자신에 넘친 백고산의 이 말 한마디는 음악가들 사이에 두고두고 화제거리로 남아 있었다.
국가의 배려로 세계적인 위치에서 명성을 날리며 독주가이자 교육자이며 심사위원으로 인민의 사랑을 받았던 동생 백고산과 누구도 거들떠봐주지 않는 말년을 밤일(술집에서 돈벌이를 위해 하는 연주)까지 하며 처량하게 마친 형 백해제의 일생을 보며 나는 나름대로의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되었다.
백고산의 바이올린음악을 사랑하던 근로대중들은, 당의 품에서 자라며 닦아온 재능으로, 조국과 인민을 위해 보람찬 일을 하다 순직한 백고산을 오늘도 감회 깊이 추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이름있는 예술가로, 애국자로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한 사회주의조선의 우월한 교육제도와 이 제도를 창안하여 만민에게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당과 영도자의 위대함에 다함 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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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고산의 바이올린 연주곡 감상-아래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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