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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6·25전쟁 75주년, 진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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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5-06-25 10:40 조회4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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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5주년, 진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25년 6월 25일 | 로스앤젤레스  김범 선생



2025년 6월 25일, 우리는 코리아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다고 하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코리아반도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전선은 단지 총성이 멈춘 선일 뿐, 평화를 보장하는 선이 아니다.

분단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고 있다.

그 전쟁은 왜 시작되었는가? 누가 전쟁을 원했고, 무엇을 위해 싸우게 되었는가?

그리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전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50년 6월 25일 오전, 코리아반도에서 전면전이 개시되었다.


그에 앞서 6월 17일, 미국의 덜레스 특사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을 받고 서울을 방문했다. 그의 발언과 행보는 전쟁 준비의 마지막 수순이었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미국은 이미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직후 코리아 남부에 군정을 실시하며 개입을 시작했다. 이른바 ‘해방자’로 포장된 미군은, 친일과 반민주 세력을 등용하며 자주적인 민중세력의 싹을 짓밟았다.


민중봉기, 무장투쟁, 유격활동이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고, 이는 외세점령에 맞선 민족해방의 전초전이 되고 있었다.


“기습 남침”이라는 통설은 과연 진실인가?


오늘날 통용되는 “북의 기습 남침”이라는 서술은,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통해 신중하게 재검토되고 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코리아전쟁의 기원』에서 이 전쟁이 돌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1945년 미군의 남부 점령과 군정 통치에서 비롯된 장기적인 구조적 갈등의 산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미국 국방부 문서와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6월 25일 당시에도 미군과 한국군은 전황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 국지적 충돌이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포격은 북측이 아니라 남측이 먼저 개시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전쟁의 도화선은 어디서 붙었는가?


전쟁은 북의 일방적 ‘남침’이 아니라, 6월 23일 밤과 24일 새벽 사이 남측의 군사도발로 촉발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옹진지구 은파산에서 남측 17연대가 먼저 포격을 시작했고, 두락산과 해주 등 북측 영토에 대한 침투도 이어졌다. 이에 조선인민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개성과 해주 등지에서 반격에 나섰고, 그것이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이승만의 연설 구호는 남측이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는 해석도 있다.


미국은 개입자인가, 조정자인가?


1949년 설치된 미군사고문단(USMAGIK)은 한국군을 사실상 지휘하는 조직이었다. 한국군 내부에는 합동참모조직도 존재하지 않았고, 작전계획 역시 미군 장교가 주도했다. 전쟁 발발 직후에도 미군은 일부 지역을 의도적으로 비운 채 전황을 방치하거나 확대시켰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코리아반도의 전체를 영향권에 두려 했고, 나아가 중국과 소련까지 위협하는 전략적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맥아더가 말했듯, “조선을 장악하면 유라시아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 야심이 명백히 존재했다.


코리아전쟁은 민족 해방전쟁의 서막이었다


코리아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점령에 맞선 민족 해방의 전쟁이었다. 이북 조선의 인민과 군대는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전쟁의 책임은 미국과 그 방조세력에게 있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남북 간의 충돌이 아니라, 외세가 개입한 복합적 정치군사 분쟁이었다.


전쟁의 파괴는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전쟁은 전장 밖의 삶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평양에는 인구보다 많은 폭탄이 떨어졌고, 전국 78개 도시가 사라졌으며,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비단 폭탄만이 아니었다.

세균무기와 화학무기가 사용되었고,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 방화, 고문 등의 만행도 이어졌다. 이러한 행위는 단지 군사적 수단이 아니라, 민족 전체를 굴복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파괴였다.


항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핵 위협 속에서도, 조선은 굴복하지 않았다. 트루먼,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수십 개의 원자탄 투하 시나리오가 실제로 논의되었지만 그 어떤 압박도 자주적인 항의를 꺾지는 못했다.


그 항전은 단지 국토 방어가 아니라, 한 민족이 외세에 맞서 자주와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평화는 아직 오고 있지 않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총성은 멈췄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주한미군은 여전히 남측에 주둔하고 있으며, 군사훈련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38선은 비극의 분단선이 되었고, 민족의 정신과 의식마저 양분시키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2025년, 6·25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의 역사이다. 그 전쟁은 오늘날 분단을 낳았고,

그 진실은 여전히 왜곡되거나 외면되고 있다.

누가 전쟁을 먼저 준비하고 있었는가?

누가 평화를 깼고, 누가 자주를 지키려 했는가?

우리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역사는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코리아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진실을 바로 보지 않으면 평화는 위협받고, 자주와 정의는 다시 침탈당할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밝혀야 한다.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는, 아직도 오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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