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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 칼럼] 백고산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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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4-07-08 00:44 조회3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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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 칼럼] 백고산의 아리랑





글: 리준무 (재미 음악가)


교향악단에서도 절친하게 지냈던 음악대학 동창 이교수가 ‘자기가 크게 감동을 받은 음악이니 한번 들어보라고 하며 녹음파일 하나를 보내어 왔다. 당대에 바이올린의 귀재로 명성을 날렸던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가 백고산의 아리랑을 듣고 감동한 이야기를 그의 음악적 생애에 기초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친구가 보내준 음악 파일 ‘아리랑’은 백고산이 작곡하고 자신이 직접 연주한 귀한 자료 이였다. 악보의 표지까지도 자신이 쓴 매우 친근감이 가는 이 자료는 민족의 맺힌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안겨왔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국가의 꾸준하고 세심한 배려가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https://youtu.be/ii_CF-54eog?si=csqQ9ixeM_5KK7Zq (백고산의 아리랑)


사람들에게 세계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친 코리아의 바이올린 연주가가 누구이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정경화나 장영주가 아니겠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에는 1940년대에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천재 바이올린 연주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필자는 1990년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선생이 발기하여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조선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악가 백고산선생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오늘날 백고산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선생은 이미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에 천재적 소질과 기량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인민배우 백고산은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한 생을 살아오며 뛰어난 연주기술과 후비육성으로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재능 있는 바이올린 연주가이며 작곡가이고 교육자였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난 백고산은 3살때부터 그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신동이라고 소문이 난 선생은 20대부터는 틈틈이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선생이 바이올린음악으로 편곡한 우리 민요들은 정서적인 감성이 풍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음악창작적 재능면에서도 세계적 수준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그가 편곡하고 연주한 바이올린곡들을 들어본 국내외 전문가들은 ”누구도 그의 재능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음악가 ”라는 평가하였다.


유랑연주를 이어가던 바이올린 신동



백고산은 여섯 살 되던 해, 평양 대동강 기슭에 자리잡은 평양공회당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때 《아리랑》과 세계 명곡들을 연주했다. 6살 짜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동포들의 혼을 일깨우기에 충분하였다. 그때 신문은 “조선에 바이올린 신동이 나타났다” 고 보도하였다. 이 소문은 서울에까지 퍼져 나갔다.


1940년 10살이 되던 해 백고산은 6살난 동생과 함께 전국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유랑연주를 하고 다녔다. 이들 어린 형제는 흥행업자가 이끄는 대로 남으로는 해주, 서울, 인천, 충주, 대구, 전주, 광주, 부산까지 북으로는 순천, 함흥, 원산, 청진 등 전국각지 안 가본데 없이 떠돌아다녔다.


두 형제는 영화관이나 야외가설무대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주를 하였으며 멘델스존의 협주곡, 사라사테의《지고이넬바이젠》, 베토벤의 쏘나타와 같은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수준 높은 곡들을 주로 연주하였고 두 형제는 같이 나와서《아리랑》, 《양산도》, 《노들강변》같은 우리 민요들을 2중주로 연주하여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흥행업자들은, 백고산을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른들도 서보기가 힘들다는 당시 최고의 공연무대였던 서울의 부민관에 세웠다. 무대에 등장한 백고산은 《노들강변》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매혹시켰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너무도 감동한 청중들은 그가 연주하는 《노들강변》의 선율을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비록 어린 백고산의 연주였지만 식민치하에서 민족적 존엄과 자존심을 구기고 살아오던 서울시민에게 크나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뜻 깊은 연주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흥행업자를 따라 발 가는대로 방랑연주생활을 하던 그들 형제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하얼빈에 이르게 되였다. 그때 백고산의 나이는 13살이었다. 백고산은 어떤 사람의 소개로 러시아인 음악가부부를 만나게 되였다. 백고산형제의 연주를 들어 본 로씨야인 부부는 그들을 당시 하얼빈에서 제일 큰 극장이였던 모델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연주회의 피아노반주는 바이올린선생의 부인이 맡아주었다.



이런 속에서 백고산의 마음속엔 기량을 더욱 연마하여 바이올린으로 민족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결심이 굳어져갔다. 그는 9살난 동생 백도산을 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러시아인 음악가에게서 본격적으로 개별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된 소식에 접한 백고산의 마음은 그리운 조국으로, 고향 평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엄혹한 정세로 백고산은 당장 귀국하고 싶은 마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할 수 없던 그는 중국의 국내혁명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어가던 1949년 4월이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조국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그는 조선인민군 협주단 독주자이자 조선인민군 관현악단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공연을 본 김일성주석의 좋은 평가가 있었고 그때부터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연주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백고산


김일성주석은 조국의 품에 안긴 백고산에게 각별한 사랑과 값 높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각가지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팔도를 떠돌며 비참하게 살았던 그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주석님은 10대의 백고산을 새로 조직된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었으며 독주가로써도 보람찬 음악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었다.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주석이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품에 안겨 각가지 혜택을 누리던 백고산은, 새 나라의 주인이 된 기쁨과 새 생활을 꽃펴가며 희열에 찬 근로대중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새 조선 건설로 들끓는 벅찬 현실을 무한한 감동 속에 직접 체험한 백고산은 음악으로 조국을 빛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음악활동을 펼쳐나갔다.



1950년 설날에 백고산은 영광스럽게도 김일성주석님 앞에서 바이올린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날 백고산은 외국의 바이올린명곡과 우리민요《양산도》를 연주하였다. 주석님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참 잘한다고 치하하면서 연주활동에서 외국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음악을 더 많이 연주해야 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바이올린이라고 하면 의례히 서양의 고전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백고산은 서양악기를 조선음악 발전에 이용해야 한다는 주석님의 뜻 깊은 가르침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새겨 안게 된 백고산은 후에 바이올린협주곡 《대를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와 독주곡 《일편단심 붉은마음 간직하렵니다》등을 작곡하였고 다수의 민요를 세계적 수준의 독주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러한 백고산의 천재성을 귀하게 여긴 김일성주석은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내세울 수 있게 기량도 높이고 많은 경험도 쌓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주었다.



세계적인 연주가의 꿈을 안고



사회주의권 문화올림픽으로 알려진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1951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됐다. 이 축전은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진영 청년들이 모여서 예술축전, 체육축전 그리고 다양한 토론회를 벌이는 행사이다. 이때 백고산도 조선의 대표로 여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는 조국이 전쟁 중이었던 만큼 북조선으로서는 대표를 이 축전에 파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백고산은 바이올린 독주부문에서 3등이라는 좋은 성과를 올려 전쟁중에 있는 조국인민들에게 무한한 고무와 기쁨을 주었다. 1953년 8월에 루마니아의 부꾸레슈띠에서 진행된 제4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시금 3등 상을 받았으며 1955년 8월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진행된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는 대망의 1등을 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크게 떨쳤다.


세계적 축전의 참가를 계기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백고산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김일성주석의 배려와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측의 요구에 의해 그의 유학은 가능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은 조선에서 온 연주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보기 위해 연주회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소련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모였다고 하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모스크바 필하모니가 반주를 맡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백고산의 바이올린 실력이 세계적 경지에 올라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 연주회에서 백고산은 무반주《아리랑 변주곡》도 연주했다. 그때 그의 연주를 들었던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의 교수이자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수석 독주자이고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오이스트락흐(David Oistrakh)도 백고산의 연주를 들었는데, 그는 “기초도 좋고 훌륭하게 배웠다” 고 칭찬하면서 누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백고산은“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제작자인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하자,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 “이런 음악가를 키운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합시다” 라고 하면서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고산은 당대 최고 바이올린 연주가인 오이스트락흐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https://youtu.be/ii_CF-54eog?si=nVjhsHN98VDsKeYg


백고산은 체계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기량을 닦아가고 있었지만 전쟁의 불길 속에 휩싸여있는 조국이 걱정이 되어 그의 마음은 한시도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는 1957년 제1차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에 참가하게 되었다. 세계적 콩쿠르에 입상한 그는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다. 나라에서는 그를 크게 환영하여 주었으며 공훈배우의 칭호를 수여하였으며 몇 년 후 예술가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영예로 알려진 인민배우칭호를 받았다.


19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주최측은 백고산의 명성과 권위를 인정하여 그를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이로써 백고산의 국제적인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세계 바이올린계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었다.



중국, 일본에서는 심사위원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조선의 음악가가 이미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는 백고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바이올린을 배우려는 외국인 학생들이 평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세계는 그의 국제적 명성과 위상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고산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종신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어 활약하였다.

https://youtu.be/ii_CF-54eog?si=csqQ9ixeM_5KK7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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