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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충목, “통일운동, 공동행사·교류협력 중심에서 걸림돌 제거 투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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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4-06-14 20:09 조회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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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충목, “통일운동, 공동행사·교류협력 중심에서 걸림돌 제거 투쟁으로”

민플러스 강호석 기자


6.15남측위, ‘자주통일평화연대’로 조직전환한 배경은?
조직전환 과정의 쟁점은?
6.15남측위 20년 역사와 사건
'자주통일평화연대'의 첫 사업은?
조직전환 전과 후, 통일운동은 어떻게 변하나?

2005년 출범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20년만에 가칭 ‘자주통일평화연대’(평화연대)로 조직전환을 단행한다. 출범 초기 6.15남측위 집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줄곧 공동대표로 활동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대표를 만났다. 조직전환이라는 큰 변화에도 한 대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드팀없이 운동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편집자]




조직전환을 단행하게 된 배경에 대해 물었다. 한충목 대표는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고, 제국주의의 마지막 몸부림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세계화’와 더불어 한반도는 1953년 정전체제로 회귀했다.”라고 무겁게 입을 뗐다. 그러면서 “2000년 6.15같은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결국, 급변하는 정세에 조응해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를 해산하고 ‘자주통일평화연대’로 조직전환을 결단한 것. 아울러 ‘6.15공동선언’(2000년)을 비롯해 숱한 남북합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이행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도 조직전환을 결단한 주요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조직전환 과정에 쟁점도 없지 않았다. ‘전쟁을 막고 평화 공존 체제를 구축하자’는 주장과 ‘미국을 극복하지 않으면 평화도 통일도 없다’는 견해가 부딪힌 것이다.

한 대표는 이를 이견이라고 보지 않고 정세인식 과정에 도출된 과제라고 표현했다. 그는 가칭 ‘자주통일평화연대’라는 조직 명칭 안에 그간 치열했던 논의 결과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밝혔다.

한 대표는 6.15남측위의 역사를 20년으로 보지 않았다.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4·2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6.15공동선언의 효시이라고 했다.

한 대표는 백낙청, 김상근, 이창복, 이홍정으로 이어진 6.15남측위 상임대표를 열거하며,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지역조직을 모두 갖춘 가장 권위 있는 통일운동단체가 바로 6.15남측위였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 남·북·해외 전민족의 자주·평화 역량을 하나로 모아낸 6.15의 역할은 새 조직이 반드시 계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대표는 6.15시절을 회상하면서, 비전향장기수 63명을 송환한 것, 집단체조 ‘아리랑’ 참관단 조직, 개성공단 조성과 금강산 관광, 그리고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금강산에서 대의원대회를 개최한 사실 등을 떠올렸다.

조직전환 전과 후, 통일운동은 어떻게 변화할까? 한 대표는 ‘공동행사와 교류협력 사업’ 중심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투쟁’으로 주요 활동이 변하게 된다고 밝혔다.


Q.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조직전환을 결정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됐나?

▲ 한충목 : 아무래도 윤석열 정권 등장이 하나의 배경이고, 또 미국의 일극 패권이 저물어 가는 과정에 마지막 몸부림을 치기 때문이다. 그 몸부림 때문에 지금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 중심의 한미일 전쟁동맹이 조중러를 압박하면서 한반도는 뜨거운 화약고가 된 것이 정세상 계기였다.

또 하나는 남북 공동선언이 여러 차례 발표됐지만, 사실상 선언만 됐지 하나도 실천된 것이 없었다. 북에서 남북 공동선언 역사에 대한 이런 종합적인 평가가 내려지면서 일명 ‘6.15시대’가 사실상 끝나버렸다. ‘7.4남북공동성명’(1972년), ‘6.15공동선언’(2000년), ‘10.4선언’(2007년), ‘4.27판문점선언’(2018년), ‘9.19군사합의’(2018년) 등이 사실상 무효화가 되고, 유효한 국제협약은 정전협정만 남게 됨으로써 한반도 역사의 시계는 1953년 정전체제로 회귀하고 말았다.

결국, ‘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한 ‘6.15’는 조직전환을 단행하게 되었다.

Q. 북이 6.15북측위원회를 없애니까 남측위원회도 따라 없앤 것 아니냐는 ‘종북’ 비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 한충목 : 사실은 그런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6.15가 남·북·해외 3자연대조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서 해산하면 사실상 다른 쪽은 근거 자체가 상실되니까. 북에서 해소했기 때문에 남쪽도 해소했다는 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다. 물론 사전에 협의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전쟁 일촉즉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산 논의가 또다른 불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깔끔하게 해산 통보한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Q. 20년 역사를 가진 조직을 전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조직전환 논의에서 이견과 쟁점은 무엇이었나?

▲ 한충목 : 조직전환 논의에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전쟁을 막고 한반도에서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견해와 ‘미국을 극복하지 않으면 평화도 통일도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초기에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 이런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일시적 평화는 몰라도 영구적인 평화는 없다는 현실 인식 상의 차이 때문에 논란이 야기됐다. 하지만, 이것을 이견의 대립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평화실현을 위한 과제의 우선 순위의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조직 명칭에 6.15를 사용하자는 의견과 평화를 중심으로 작명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논의를 거듭한 결과 자주, 통일, 평화를 모두 아우르는 ‘자주통일평화연대’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약칭은 ‘평화연대’로 결정했다. 조직 명칭을 통해 단결의 기운을 모아낸 것이다.

Q. ‘6.15공동위원회’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고, 무엇을 계승해야 할까요?

▲ 한충목 :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있었기에 6.15시대가 가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와 통일을 주장하다가 사형 선고까지 받은 철학이 있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6.15공동선언이 탄생하기까지 문익환 목사의 예언자적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6.15공동선언의 효시가 되었다. ‘4.2성명’을 보면 6.15선언 내용이 다 담겨 있다. 문익환 목사도 방북 이후 바로 구속됐다. 이처럼 6.15시대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숱한 투쟁의 역사가 집약돼 있다. 우리는 이런 투쟁의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도 수많은 탄압이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필코 탄압을 뚫고, 자주·통일·평화의 새세상을 개척해야 한다.

Q. 6.15남측위원회의 지난 20년 역사에서 가장 특기할 공적은 무엇인가?

▲ 한충목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시 행정부 때 6.15시대를 개척했다는 사실이다. 북을 ‘악의 축’으로 몰아 대북 적대정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개성공단을 열고, 금강산 관광을 개시했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음에도 비전향 장기수 63분을 북에 보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을 그 당시 우리가 해냈다. 그런 기적같은 일이 가능했던 건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실천 의지가 없었다. 그랬으니, 이미 존재한 개성공단도, 금강산 관광도 재개조차 못한 것이다.




Q. 6.15의 지난 활동 과정에 기억에 남는 사건 또는 에피소드 3가지를 꼽는다면?

▲ 한충목 : 2005년 방북했을 때, 북측 실무 책임자가 갑자기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을 참관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왔다. 규모도 1회 300명씩 5000명. 무엇보다 첫 공연이 7일 후. 제안을 받고 함께 방북했던 분들과 협의를 했는데, 흔쾌하게 결심. 결국 일주일만에 300명을 조직해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이렇게 성사된 ‘아리랑’ 참관은 한 달 사이 5000명이 평양을 방문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비전향 장기수와 범민련 선생님 40여 명의 방북을 추진할 때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다, 보수 언론에서 방북하면 안돌아 온다는 여론을 퍼트리고 있었다. 방북 추진을 위해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설득 끝에 ‘반드시 돌아온다’, ‘정치적 행위는 일절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달고 방북을 성사시켰다. 평양과 묘향산 등을 방문한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흘린 기쁨의 눈물을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2007년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우익반공 단체가 금강산 출입국이 있는 고성에서 금강산 관광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대의원대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1700여 농민이 성사시킨 금강산 대의원대회 덕분에 금강산 관광이 계속될 수 있었고, 관광객 연인원 2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렇게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그때는 기세 좋게 해냈다. 기적같은 일을 이뤄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6월 15일 조직전환을 선포한 후 맨 먼저 전개할 사업은 무엇인가?

▲ 한충목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89년 방북 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겠다. 문 목사님은 “남과 북은 선언을 통해서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이제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주체역량을 강력히 구축하고 대중적인 운동으로 통일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라면서 ‘통일맞이 운동’을 제안하셨다. ‘맞이’라는 게 곧 실천을 의미한다. 8천만 민족이 통일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통일맞이 운동을 펼쳐야 한다. 지난 25년 동안 집행위원장과 대표로 활동하면서 얻은 교훈도 모든 운동은 주체를 얼마나 강화하느냐가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이다. 당장 급박한 과제는 전쟁을 막는 것이다. 반전평화 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것부터 시작해 ‘평화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Q. 조직전환 전과 후, 통일운동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 한충목 : 지금까지 6.15남측위원회는 민족공동행사와 교류협력 사업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남북관계 개선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행사보다는 투쟁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백낙청, 김상근, 이창복, 이홍정으로 이어진 6.15남측위 상임대표의 면면에서 6.15의 권위를 읽을 수 있다. 6.15는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지역조직을 모두 갖추고, 남·북·해외 전민족의 긍지 높은 조직이었다. 이제 6.15를 계승한 ‘평화연대’가 투쟁을 통해 자주·평화 역량을 하나로 모아낼 것이다.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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